하마비(下馬碑)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고려 인종 때 처음 세워졌다는 설이다, 하지만 문헌의 근거가 없다. 두번째로 문헌에서 확인되는 가장 빠른 시기는 조선 태종 13년(1413년)때로 『태종실록太宗實錄』 25권, 태종 13년 1월 21일 이다.
"立標木于宗廟及闕門洞口。 禮曹啓:
闕門洞口, 宜倣華制立標木, 題其面曰: "大小官吏過此者, 皆下馬, 入此者, 不得由中道行。 至闕門外, 一品以下距十步, 三品以下距二十步, 七品以下距三十步下馬。" 宗廟洞口, 亦立標題其面曰: "大小官吏過此者, 皆下馬。"
從之。
표목(標木)을 종묘(宗廟)·궐문(闕門)의 동구(洞口)에 세웠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궐문 동구에 마땅히 중국 제도를 모방하여 표목을 세우고, 그 전면에 쓰기를, ‘대소 관리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이곳에 들어온 자는 가운데 길로 다니지 못한다. 궐문 밖에 이르면, 1품 이하는 10보(步) 거리에서, 3품이하는 20보 거리에서,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을 내리라.’ 하고, 종묘 동구에도 표목을 세우시고 그 전면에 쓰기를, ‘대소 관리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하마비의 한편이나 뒤쪽을 보면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서 대소관(大小官)이라 함은 당하관인 종3품 이하의 관원을 뜻한다. 또한 원(員)이란 당상관을 말한다. 우리가 옛 각판 등에서 볼 수 있는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하마비는 대개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한다. 돌의 위를 둥그렇게 조형을 해 길게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하마비의 모습이다. 하지만 특별하게 만든 하마비도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하마비를 만든 곳도 있고, 돌에다가 하마비라고 각자를 해놓은 것들도 있다. 하마비 앞에서는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야 했다.
하지만 전주 경기전(태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앞에 있는 하마비는 일반적인 것들과 조금 다르다.
하마비의 표석에는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적혀 있다. 즉 이곳에 이르거든 누구나 다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을 일절 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 하마비는 불교의 유물이 아니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은 고려시대 방대하게 늘어난 사찰의 재산과 승려들의 권력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고려시대 인구수는 정확하게 추정 할 수 없었으나 400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조선 세종32년(1450년)에 신뢰할만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데, 호가 70만호에 남성 인구가 210만명이라고 기록 되어있다. 하여 여자를 포함하여 대략 350만~400만명 정도 추산하였고, 양성지의 눌재집 병사육책에는 세조 7년(1461년)에 호 70만에 구가 400만이었다고 되어있다. 실제 누락된 인구까지 포함하면 500~700만명 정도 추산된다.
고려 후기 조선 초 기록 상으로 대략 추산하여도 인구수가 400만명 정도된다. 그 중에 당시 승려가 1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날 불교 승려수는 1만명 정도에 비하여 승려수가 고려시대 승려수가 10배나 된다. 고려시대 승려들은 실제 노비까지 두고 하사 받은 어마한 재산에 소작농을 두기까지 하였으며, 왕실과 결탁하여 정치까지 참여함으로서 당시 유생들의 눈에 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여 고려가 멸망되자 당장 시작된 탄압 대상이 불교였다. 그런 불교 사찰 앞에 하마비를 세운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사찰 앞에 생긴 하마비(下馬碑)는 어떻게 생겼을까 의문이 생긴다. 이는 조선시대 불교 탑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사찰에서 벌인 횡포는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유람 할 때 승려들을 불러 경마잡이를 시키기도 하였고, 사찰에서 기생을 끼고 노는 일도 다반사였으며, 사찰을 헐어(한옥은 짜맞추는 공법으로 되어 있음) 자기네 집 사랑채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다 능침사찰(왕릉을 관리하는 사찰)인 정인사(正因寺)와 고려말 조선초 최대사찰인 회암사(會巖寺)에서 유생들이 기물을 부수고 사찰의 보물을 훔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만만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불교의 막강한 후원자였던 조선의 측천무후라고 할 문정왕후의 귀에 까지 이 소식이 들어가자 선교 양종의 수사찰(首寺刹)이었던 봉은사와 봉선사에는 아예 유생의 출입을 금지해 버렸다. 난동을 부린 주모자 역시 투옥시켰다. 이에 유생들의 반방도 거셌고 문정왕후를 보좌하던 보우대사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라갔다. 이 상소문에 문정왕후를 더욱 불같은 화를 내었고, 격노한 왕후는 전국 큰 사찰 입구에 다수의 하마비를 세우도록 명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찰에 하마비가 세워지는데 현재 남아 있는 사찰 하마비는 양산 통도사, 양주 봉선사, 부산 범어사, 보은 법주사, 순천 선암사와 송광사, 대구 파계사, 남해 용문사 등이 있다.
우리가 자주 듣는 하마평(下馬評)이라는 말도 이 하마비에서 유래 되었다. 궁궐의 하마비 앞에는 궁으로 들어간 양반들의 말과 함께 경마잡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이들은 양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기 때문에 듣는 소리도 많아서 주인을 기다리면서 떠드는 과정에서 정보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것이 하마비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서 하마평(下馬評)이 되었다.
첫댓글 고려 말에 사찰에 너무 많은 토지가 모여 과도의 사찰답이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였다며,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졂은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조선 말에 권문세가나 양반가에 너무 많은 토지가 집중되고, 농민은 살기가 어려워지자, 민란이 일어나고,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역사 속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도 그런 낌새가 보이면 막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파계사의 하마비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얼마나 계실까요. 관심을 두지 않으면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방대해지면 망하게 됩니다. 파계사는 영조의 탄생과 관련된 사찰이고, 순천 선암사는 순조 탄생과 관련이 있다보니
왕실의 보호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