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서울시 은평구 진관사(津寬寺)
20여 년 전, 일엽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충남 예산에 있는 수덕사(修德寺)에 갔었다. 수덕사는 일엽스님이 수도했던 곳으로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로 세간에 유명해진 사찰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수덕사가 당연히 비구니사찰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종무소에 물어보니 수덕사의 부속암자인 견성암(見性庵)이 비구니 참선도량인데 일엽스님이 기거했던 곳이라 사람들이 수덕사를 비구니사찰로 잘못 알고 있다며, 서울에서는 성북구 보문동의 보문사(普門寺), 은평구 진관동의 진관사(津寬寺), 종로구 구기동의 승가사(僧伽寺)가 대표적인 비구니사찰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어느 종교든 성직자가 되는 길은 세속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녹록지 않다. 비구니(比丘尼)란 범어 비크슈니(bhiksuni)를 음역한 말로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여자 승려를 가리킨다. 그런데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6개월의 행자 생활을 거친 다음 수계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 사미니가 된 뒤 승가대학에서 승려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런데 행자의 하루 일과를 보더라도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에 취침해야 하고, 몸가짐을 항상 단정하게 해야 하는 등 규칙적이고도 고된 수행 생활을 해야 한다.
며칠 전,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진관사를 찾았다. 진관사(津寬寺)는 신라 진덕여왕 때 처음 지었다는 유래담이 전하기는 하지만 이 사찰이 대대적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초기였다. 고려 초 이곳에는 진관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대규모 사찰로 중창된 계기는 고려 왕실의 대량원군 왕순(王詢)이 승려가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왕순은 강요에 의해 승려가 되었지만 사촌지간인 개령군(뒤에 목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돼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왕순은 신혈사로 출가한 뒤 연금 상태에서 자객들에게 쫓기는 등 그야말로 처절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주지인 진관이 위험을 무릅쓰고 보호한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왕순이 당시 중추원부사였던 채충순(蔡忠順)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간악한 무리가 사람을 보내 저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신은 독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해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죽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리 절박하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
왕순이 신혈사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 고려왕실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후사가 없던 목종이 병석에 눕자 세간에는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리고 이를 눈치챈 목종은 그동안 경원했던 왕순을 후계자로 삼아 왕씨 사직을 다른 성씨에 넘기지 않으려 했다. 이에 당시 궁궐 수비를 맡았던 도순검사 강조(康兆)가 정변을 일으켜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를 귀양 보낸다. 그리고 방종했던 목종을 시해한 뒤 왕순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고려 8대 임금인 헌종이다.
왕순은 가장 어려울 때 자신을 보살펴 준 신혈사 주지 진관(津寬)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래서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보잘것없던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절의 이름 또한 진관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붙이면서 지금과 같은 대찰이 되었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의 목숨을 구한 은혜로운 곳으로 인식되어 고려 왕조 내내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선종은 진관사에 직접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베풀기도 했고, 숙종과 예종도 진관사에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했다.
진관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6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수륙대재(水陸大齋) 때문이다. ‘수륙재’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물과 뭍에서 떠돌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법요를 열고 음식을 공양하는 불교의식이다. 조선 초기 문신 권근이 지은 <津寬寺水陸社造成記(진관사수륙재조성기)>에 따르면 태조가 진관사에 수륙사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태종도 아들 성녕대군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제교서를 내렸다. 그리고 수륙재 비용을 위한 전답을 하사하면서 해마다 1, 2월에 수륙재를 봉행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세종 때에는 세종이 선왕인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륙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종교적 의식을 봉행하는 사찰로 정례화시켰다. 그 밖에도 세종은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짓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이 학업에 몰두하도록 했다. 독서당을 건립한 후 진관사에서 신진학사들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진관사는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자주 찾는 명실상부한 대찰이 되었다. 현재 진관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9월에 정례적으로 수륙대재(국가무형문화재126호)를 거행하고 있다.
태조가 수륙사를 설치한 까닭은 조선을 건국할 때 죽어간 고려왕족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적으로는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을 겸하고 있었다. 이로써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가 개설되면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 뒤 진관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대찰의 규모를 갖췄으나 6.25 전쟁 때 독성전, 나한전, 칠성각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됐다. 그러나 그 후 대웅전을 비롯 명부전, 나한전, 일주문, 홍제루 등을 신축했으며, 현재 비구니 수도도량이 되었다.
진관사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몇 걸음 걷지 않아 ‘三角山津寬寺(삼각산진관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누구든 이곳부터는 사찰 경내가 시작되니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이겠다. 일주문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계곡을 가로지른 돌다리 극락교(極樂橋)가 나타나고,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일주문 형태의 해탈문(解脫門)이 나타난다. 이곳부터 본격적인 진관사 경내라 할 수 있다. 해탈문을 지나 비탈길을 올라가면 왼쪽으로 두 개의 부도와 함께 커다란 바위에 새긴 아미타불이 사람들을 맞는다.
진관사의 절집은 모여 있는 형태로 보아 크게 대웅전이 있는 곳, 향적당이 있는 곳, 그리고 함월당이 있는 곳,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가운데 대웅전이 있는 곳이 진관사의 주요 당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길에서 머리 숙여 홍제루 누각 밑을 빠져나가면 바로 앞에 대웅전이 우뚝 버티고 있고, 그 오른쪽에 명부전이 처마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대웅전 앞마당 왼쪽으로는 나가원과 동정각이, 오른쪽으로는 적묵당과 나한전이 미음(ㅁ)자 형태로 모여 있다. 그리고 나한전 뒤편 깊숙한 곳에 독성전과 칠성각이 오밀조밀 붙어 있다.
2009년 5월 진관사의 칠성각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 중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함께 신대한,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경고문 등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진기한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됐다. 태극기는 일장기의 적색 부분에 태극문양을 그린 뒤 청색을 덧칠하고, 네 귀퉁이에 검은 색으로4괘(四卦)를 그려 넣은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불교계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백초월 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칠성각 불단 뒤에 꼭꼭 숨겨둔 태극기와 더불어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초월스님의 항일행적도 세상에 드러났다.
초월스님의 독립운동은 임시정부 및 만주 독립군을 배경으로 전개된 군자금 모금과 비밀회보인 <革新公報(혁신공보)> 발간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스님은 대중법회를 통해 융통한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젊은 불교 신자들을 해외에 독립투사로 보내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스님은 안타깝게도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6월, 66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낡고 빛바랜 태극기에서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스님의 결기가 느껴졌다. 진관사 태극기는 2021년 10월 25일 대한민국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첫댓글 진관사
이글을 읽으면서
영화관에서영화를보는 착각에 빠져버렸읍니다
세세한 글과
그역사들의 이야기
몇분이나 이나라에 역사학자가 계신지가 궁굼합니다
잘보았읍니다
내가 총각때 진관사근처에 친구가 살고 있었읍니다
어럽게 살던시절이니 모두가 그렇듯이 그친구도 집근처에 가면
저기보이는 진관사라는 비석이 보이곤 했읍니다
변두리라서 버스도 없으니 걸어서 그산길을 다닌 기억이있읍니다
그친구는 지금도잘지내고있읍니다
법정도 잘아는친구입니다
그런세월이 흐르고나니
진관사라는 이름이낯이 설지는 않아요
똑똑한 우리 친구 이래서 존경하는친구중에 한사람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