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엔 친한 형이 4월 총선에 출마한다고 바로 집 옆 5.18재단에서 출판기념회를 했다.
난 가지 못했다. 집사람이 '밤일'(?)을 하니까 대신 애를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가고 싶었지만 난 또 안가니깐 나름 혼자서 당위성이 짜맞춰졌다. 사람은 원래 그런가 보다. 누구누가 왔을까? 내내 칭얼대는 아이를 어르다, 돌아온 집사람에게 물어보니,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이창동, 시인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인 황지우, 영화사 싸이더스의 차승재, 전북대의 빵잽이이자 소설가고 문익환목사 추모사업과 대북문화협력 일을 하는 정도상, 시인이자 전 작가회의 사무총장이었던 김형수, 전화통화로 만사를 해결하는 민예총의 마당발 김용태, 문화예술위원회 사무총장을 했던 강형철 시인 등등 서울 문화판, 나름 국중에 한가락씩 하는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왔다고 했다. 광주 판의 어지간한 인물들도 그럭저럭 모였을 거다.
허걱, 표 줄 사람은 광주에 주민등록을 둔 광주 사람들인데, 서울서 잘나가는 치들이 와서 설레발을 떨면... 어쩌면 광주 사람들은, 깐에 얼어죽을 자존심은 있어서 오히려 역효과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다. 광주는 본래 그런 곳이다. 학교 때부터 우리는 '아방타방'이니 '학비'니 '야비'니 하는 유인물을 보며 이른바 정세분석(?)을 하도 많이 해봐서 시쳇말로 '민도가 높다'고 말한다. 학교 때 유인물을 쓰려면 으레 정세 몇줄은 단골메뉴였다. 해서 서울에서 잘 나간다고 광주 와서 설치면, 촌놈들은 꼬라지, 역정을 내기 쉽상이다. 하긴... 전라도 총선이야 공천이 본선이나 다름 없으니까, 공천 따러 바람 잡는 거겠지... 책도 전문출판사에서 선거용치고는 뽀대나게 뽑아냈다.
내 처지를 생각해본다. ... 세금 축내는 회사 일에 젊은날을 다 보냈다. 그런데도 우리 '공장'은 오리무중이다. 변실장 같은 청아대 높은 사람이 누굴 꽂으라고 전화 한통 하면 찍소리 못하고 꽂아야 하는 곳이다. 하긴 세금 받아먹는 놈들이 청아대 정책실장 말씀은... 그것은 그대로 법이다. 치평동 아저씨의 한마디면 좌고우면이다. 하긴. '까라면 까야지', 안깐다면... 그놈도 병신이다. 나는? 그러건 말건 고개 쳐박고 시키는 일이나 하고 월급이나 타먹는, 그래서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걸로 소일하는 인생이다.
예술이고 문화고 '순수'를 가장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가장 정치적인 곳이 이 판이다. 삼성에 이건희가 가장 잘나갈 때 마누라 이름으로 한해에 몇백억씩 그림 사 대고, 김용철이 내부고발 같은 또라이짓을 하면(그이도 광주 출신이다) 또 가장 먼저 위축되는 곳이 문화판이다. 하긴, 쌀독에서 인심 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배아지가 따땃해야 그림도 생각나고 공연도 생각나는 건 인지상정이다. 우리나라 미술판 영향력 1인자가 삼성가 안방의 홍씨 마님이다. 서울미대를 나와 '모노크롬'이라는 이상야릇, 알 듯 모를 듯, 야리꼬리 한 그림을 최고로 치는 그와 그 패거리들의 안목은, 한국이라는 우물만 벗어나면 얼마나 웃기는 짬봉인지... (*발, 드림, 박수근 그림이 진짜라고?)
그 형이 잘됐으면 좋겠다. 꽁보리밥을 먹으며 대낮골로 뗄나무를 하러다녔던 깡촌에서 광주로 숫제 '유학'을 나와 살아보니, 세상 참 어지간히도 불공평하다는 말을 뼈에 사무치도록 실감했다. 도회지에서 펜대 굴리는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뉴욕으로 파리로 유학을 갔다 온 이즈음 젊은 축들을 보노라면, 나락 공판을 봐야 고등학교 등록금을 내고, 농협에서 학자금융자를 받아야만 했던, 그 몇푼 되지도 않는 돈 몇푼을 벌어보려고 학교 때부터 돈만 된다면, 온갖 시시껄렁한 잡글을 무지야게도 써왔던 나는, 그들이 서울에서 뉴욕으로 갈 때 산골에서 광주로 유학을 온 거나 다름 없다는 생각도 해본다. 빌게이츠가 그랬다지?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이 불공평한 세상을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그래서... 혹여라도 그 형이 잘 된다면... 그 형 신조가 의리 빼면 시체니깐... 뭐 내가 얻어먹을 거도 별로 없지만... 돈 없고 빽 없는, 그래서 서러운 가슴이라고 생각하는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 정도는 닦아주는, 그런 언덕 하나쯤일지도... 괜히 허파에 바람든 소리다.
참여정부 시절에 (벌써 인수위는 실무집행중인 거 같다) 같이 학교 다니던 광주의 386들 청아대로 국회로, 무슨무슨 기관으로 많이들 갔었다. 그런데... 나는 이 이들이 숫제 나라를 망해, 씹어 잡솨 부렀다고 생각한다. '운동' 안했어도 DJ 때는 광주에서 뭔 말을 하면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곤 했었다. 하다 못해 오래 전엔, 가는 곳마다 당연직 감빵장인 주먹세계의 태촌이성도 동생이 우리 패거리여서 감빵 뒷도 봐주고 그랬다. 그런데, 이놈의 노정권 '설건달'들은 다들 지 낯짝들만 잘났지, 시골동네 민원 하나를 성건지게 들어주질 않았다. 나 보기엔 모든 걸 지들 앞가림, 자리와 연관시켰다. 그라다 망한 것이다. 나는 '옳은 말을 그렇게도 싸가지 없게 하는' 유시민과 환갑이 넘게 나이 든 경철청장이 점심밥상에서 자리를 양보했더니 두 말 않고 거기에 앉더라는 내 나이 또래의 거... 강원도의 힘이라는 '왼팔'과, 쌍판에 복쪼가리라고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볼레도 이쁜 구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는 충청도의 '책사'... 그이들이 제일 밉다.
(나는 이제 혹여 시간이 나면 총선 전까지나 광주의 386들이 어떻게 광주를 말아먹고 나라를 거덜내는 데 동조했는지 찬찬히 곱씹어볼까 한다. 90년대 후반, '모래시계'가 방영되던 무렵부터 학외에 구축되기 시작하던 386들의 거점은 지금에 와서 초심을 잃고 완전히 권력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자리이동을 해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것은 가속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 폐혜가 너무 심각하다. 동네 완장도 완장인데, 시민단체에 또아리를 튼 이놈의 패거리들은 하는 꼴이 꼭 6.25때 팔 부러져 쇠갈고리팔을 낀 상이군인을 닮았다. 한사람 앞에 헛껍데기일망정 완장 서너개씩은 보통이다... 최소한 광주에서의 이들은 뼈를 깍는 자성과, 몰매와, 하방과, 새출발을 해야 한다. 이 미꾸라지들 때문에, 안그러면 미래가 없다. 정치, 문화, 시민단체 등등에 진출한 386들의 행태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이 존재하지 않는 광주, 좋은 게 좋은, 만수산 드렁칡이 그렁그렁 얽혀 있는 '끼리끼리' 몇놈들만 '서로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그런 광주의 이른바, 이른바 '삼빨육'들은 정말 이제 * 잡고 반성 많이 해야 한다.)
예전에 DJ 정부의 심부름꾼들은 더러 광주에 오면 나 같이 별 볼 일 없는 시다바리들도 간간이 술자리에 나오라고 해서 딴엔 제법 체면을 세워주며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었는데, 같이 학교 다녔다는 이놈의 노정권 '설방방이들'은 서울만 갔다 하면, 다들 지들이 전문가 뺨치는 전문가고, 너무 잘 나서 대대손손 무슨 큰 벼슬이나 할 놈들처럼, 정권 바뀌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질 그 시덥잖은 완장 하나 얻어차고 내려와선 거들먹거리긴,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촌뜨기는 아예 거들떠를 안봤다. 꼴에 나도 자존심 빼면 시체라, 굶어 죽으면 죽었지 먼저 전화 해서 만나자는 소리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광화문 술집에서 그들끼리 어울려 광주 판을 안주 삼는다고 했다. 주말에 집에 왔다간 월요일 새벽엔 한꾼에 모테 KTX를 타고 가곤 한다는 얘기 들었다. 가는 길에 또 광주 걱정 퍽이나 했을 것이다. 지 밥그릇들만 옹골차게 부등켜안은 몇놈들만의 철저한 '몬도가네'였다.
뭐, 이 시간에 잠 안자고 이짓거리 해봐야 맹택없는 거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미친 척이다. 혹시 그 형이 공천장 받으면, 난 여기저기 전화통을 돌려볼 참이다. 그래봐야 뭐, 내게 튀길 때난 국물이야 있으리오만, 그래도... 9시 뉴스에서 당선자의 째진 눈을 보면, 지방신문마다 매일 빠지지 않는 광식이 동생의 얼굴을 보면, 나는 다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더러운...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정치'다.
해서 난 얼마 전 촌에서 소 키우며 군의원을 하는 친구에게 '정치야말로 종합예술이다. 늬가 바로 예술가'라고 했다. 그는 한우 를 자그만치 백마리나 키우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사료를 주고 냄새 풀풀 나는 소 똥을 말끔하게 치운 다음에 몸을 씻고 네꼬타이를 단정하니 매고 아침밥을 먹고 군청으로 간다고 했다. 그러면 공뭔들은 그제서야 땡돌이 방위병들처럼 9시에 딱 맞춰서 출근하더라고 했다. 실제 그의 예술관은 나와도 통하는 게 있었다. 오래 전 우리가 결혼하던 무렵, 방림동에 사는 후배여자에게 장가를 드는 친구의 함을 나갔던 날 밤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들 빈털털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날은 오랫만에 우리가 큰 돈(함값)을 만지는 날이었다. 게다가 저녁을 근사하게 얻어먹고, 신부의 친구들이 따라주는 술도 모두 얼굴이 불콰하게 마시고, 집을 나왔다. 우리는 무리지어 전대병원 쪽으로 걸어나왔는데, 도중에 그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빼꼼하게 곧추세운 양손을 허리춤에 치켜올리고 허리를 빙빙 돌렸다. 얼굴은 곤드레 만드레, 눈은 게슴츠레 한 상태였다. "야, 우리 예술 하러 갈까?'" 우리는 모두 무슨 뜻인 줄 몰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곧장 그의 말이 이어졌다. "촌놈들... 이런 밤탱이 같은 새끼들 같으니라고... 나이토 클럽에 가자고야" 박장대소. 그길로 우리는 남광주 시장에 있던, 지금은 문을 닫았을 곰팡이냄새와 화장품냄새와, 암튼 '꼬질꼬질'하기 그지 없는,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온 아줌마들이나 드나드는 지하로 들어가서 '물'을 맑게 해줬다. 어쩌면 그날 우리는 술값을 낼 게 아니라, 되레 팁을 받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잠 안오는 낙서다.
첫댓글 겨울비가 포근하게 내리는날 양촌리커피를 만나게 마시면서,이글을 맛있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