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년 오늘 밤 청와대 근처에서 밤의 정적을 깨고 몇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다 .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 정보 부장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
1961 년 육군 소장의 계급으로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뒤 1972 년 유신 헌법 개헌으로 장기 집권의 토대를 구축한 박정희 대통령이 예순 두 살을 일기로 파란 만장한 삶을 마감한 것이다 .
이날 오후 삽교천 방조제 준공 행사에 참석한 뒤 서울로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와 차지철 경호 실장 , 김계원 비서실장 등 측근들과 연회에 참석 중이었다 .
연회 도중 부마 사태 등 최근의 시국 상황을 놓고 차지 철과 심한 언쟁을 벌인 김재규는 밖으로 나와 미리 준비해 놓은 권총을 가지고 들어가 차지 철을 사살했다 .
이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
박 대통령은 곧 바로 국군 수도 통합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머리와 가슴 등에 치명상을 입고 절명했다 .
김재규의 총격을 신호로 중앙 정보 부원들은 M16 소총으로 옆방에 있던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을 사살했다 .
육군 과학 수사 연구소 감식 팀이 촬영한 현장 사진은 당시의 상황을 말없이 보여주고있다 .
김재규는 다음 날 새벽 군수 사 기관에 체포됐다 .
궁정동에 울린 총성은 박정희 장기 집권 18 년이 막을 내리게 만들면서 유신 체제를 붕괴 시켰지만 12.12 쿠데타에 따른 전두환 신군 부 세력의 등장과 다음해 이어진 5.18 는 광주 는 민주 항쟁 등 또 다른 격동의 한국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1961. 5. 16
쿠테타 거사후 3 일째 되는날 ,
처음으로 서울 시청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좌측은 박종규 소령 , 우측은 차지 철 대위
이들은 훗날 경호 실장 직을 이어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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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년 5 월 22 일 쿠테타 본부에서 거사 6 일후 ,
쿠테타의 성공 가능성이 보이던 때심신의 피로 누적으로 다소 초췌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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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후 박정희 육군 대장 탄생 [ 1961. 11. 04 ]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는 사람은 윤보 선 대통령과 송요찬 내각 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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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하야 발표 . ( 1962년 3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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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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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유세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 , 육영수 여사 부부 [ 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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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장의 모습
근혜 양의 운동회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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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과 이후락 , 점심 식사라도하고 나온듯 여유로운 모습
김종필 , 김형욱 , 김용태 , 민간인으로 유일하게 5.16 에 가담한 김용태
박정희 대통령은 사석에서 그에게 ' 두목 ' 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사석에서는 별명을 호칭하며 친근감을 표했다 .
1974 년 8 월 15 일 이 참극 직전의 광복절 행사장에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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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말기 민방공 훈련을 지휘하는 경호 실장 차지철 ( 가운데 )
경호실 작전 차 장보 자리를 이어받는 노태우 ( 좌측 ) 전두환 ( 우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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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 ( 77.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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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선산 성묘 ( 77.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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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성묘 ( 7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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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 ( 79.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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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 행렬 모습
육군 사관 학교 졸업식 때의 전두환 생도 ( 앉은이 ) 교복을 입은 단발 머리 여학생이 이순자 ,
육사 11 기 앨범에 실린 전두환 생도 ,
공수 여단 시절 부인 이순자 여사에께 사격을지도하는 전두환 준장
군인 가족의 안보 의식 고취를위한 행사 때의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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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미국에서 유격 교육 과정을 밟을 때의 전두환 대위 , 사진에 40 피트 상공을 나르는 용사 년
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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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 상임 위원장에 취임한 전두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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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여행을 다녀온 직후 집앞에서 , 육군 대위 였든 전두환은 이화 여대 2 학년을 중퇴한
이순 자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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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년 육사 11 기 졸업 앨범에서 , 왼쪽부터 김 복동 , 이동남 , 전두환 , 이영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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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생도 시절 노태우 생도와 전두환 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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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당시 백마 부대 연대장 전두환 대령과 부대를 순찰 중이신 김종필 국무 총리
초대 중정 부장 김종필 국무 총리와 마지막 중정 부장 서리를 역임하게 될 전두환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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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유격 교육 과정을 마치고 공수 교육 고등 과정을 밟을 때의 전두환 대위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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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제 1 여단장이 정병 주 특전 사령관 ( 팔짱 ) 과 함께 참모로부터 작전 상황을보고 받고있다 공수 .
전두환 제 1 공수 여단장의 낙하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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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주 사령관 휘하 지휘관 접견 ; 74 년 12 월
전두환 1 공수 여단장과 노태우 9 공수 여단장이 배석해있다 .
정병주는 가 12.12 당시 휘하의 3 공수 여단 부하들에게 체포되는 불운을 맞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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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장 전역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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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안 사령관 김재규 (金 载 圭) 중장 ]
1926 년 3 월 은 6 일 이 경북 선산 군 구미면 출생박정희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김재규는
( 박정희가 문경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 제자 )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교사 생활 ( 김천 중고교 교사 ) 을 접고
육군 사관 학교에 입교하는데 박정희와는 9 살의 나이차가 있지만육사 2 기 동기생이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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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 참모장 우국 일 준장의 합참 2 국 전출 기념 사진 [ 1979.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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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의 일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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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화 대통령이 전두환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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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온다 음에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 의지 조를 알고 일이 어려워진 다음에야 사나이
마음을 알수있다는 뜻 , 으로 백담사에서 하산한 직후 안현태 전 경호실장에께준
겄으로 당시의 심정을 솔직히 표현하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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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가을 연희동 사저에서 감을 따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큰 며느리 정도경씨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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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김재규 (金 载 圭) 전중 앙 정보 부장 .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은 무엇 이었을까 .
정권 안보의 핵심 책임자로 , 자신과 동향이고 육사 동기생이며 정치적 운명을 함께해온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의 가슴에 총탄을 쏘았던 사형수 김재규에게는 과연 어떤 할 말이 있었 을까 합니다.
" 신동아 "는 김재규가 사형 집행되기 하루 전인 80 년 5 월 23 일 자신이 수감돼 있던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 측에 남긴 육성 유언 녹취록 전문을 입수했다는 .
당시 교도소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재규는 유언을 한 5 월 23 일에 자신의 사형 집행이 바로 다음날로 다가와 있음을 알고 있었다 .
사형 집행 일은 교도소 관리 규 정상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 교도소 핵심 관계자들도 하루 전날에야 겨우 사형 집행 계획을 통보 받았을 정도다 .
그런데 김재규는 이날 유학성 은 (兪 学 圣) 씨 등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이러저러한 "" 를하다가 갑자기 『 지금 녹음기를 갖고 있지 않느냐 』 고 교도소 관계자에게 물었다 을 품평회 . 당시 교도소 관계자들이 주요 재소자 관리를 위해 비밀리에 녹음기를 품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당황한 교도소 관계자가 무의식적으로 품속에 있던 녹음기를 만졌으나 김재규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이었다 .
『 오늘 얘기는이 세상에서 내가 남기는 마지막 말이 될 것 같군 . 잘 녹음 했다가 역사에 전해주면 고맙 겠소 』
김재규는 이날 『 내일이 토요일이어서 ( 사형 ) 집행이 그 다음 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 』 이라면서 다음날 오전 자신이 사형될 것임을 정확히 예측했다는 것이다 . 김재규는 특히 74 년 박정희 전대 통령의 부인 육영수 (陸 英 修) 여사를 저격했던 문세광 (文 世 光) 의 기소 날짜에서부터 사형 집행 일까지 일일이 기억하면서 자신의 집행 일을 계산 해냈다는 것 .
『 목숨 구걸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했다 』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내다본 김재규는 사형 당하기 이틀 전인 5 월 22 일 모친과 부인 등 가족들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면회를했다 .
김재규는 이날 부인 김영희씨 등에게 불경 이 ( 금강경 ) 내용을 인용 , "" (应 无所住 而 生 其 心 마음을 비운다는 뜻 ) 이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고한다 이생 기심 을 응무소주 .
부하들 걱정과 함께 그 가족들을 잘 돌봐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 가족들은 이날 면회 시간이 끝나고 그가 뒤돌아서 들어간 교도소 문을 향해 10 소리없는 합장을 올리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여분간 합니다.
관계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김재규는 교도소 수감 이후 첫 면회를 온 모친이 『 국부 (国父) 를 죽인자가 살기를 원하 느냐 . 마음을 닦아라 』 고 말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 김재규는 이어 교도소 측이 제공한 모포를 깔고 모친을 앉힌 뒤 3 차례 손등을 땅쪽으로하여 큰 절을 올렸다 .
불교도였던 모친은 품속에 준비해온 염주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 한때 교도소 측은이 염주가 혹시 있을지 모를 자살기도에 이용될 것을 우려 , 압수하려했다 . 그러나 그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이 염주를 손에 쥐고 있었다 .
마지막 날인 5 월 24 일 새벽 4 시쯤 . 교도소 측은 달걀과 사과 커피를 특별 메뉴로 제공했으나 김재규는 손도 대지 않았다 .
대신 쇠침대에서 뛰어 내리면서 교도소 관계자들에게 손으로 권총 모양과 포승 모양을 지어 보이 더니 『 어느 쪽이냐 』 고 물었다 .
교도소 측이 아무 답변을하지 않자 그는 『 안개 피우지 마라 . 사나이가가는 길은 알고 가야 할 것 아니냐 』 고 말하고는 5 분간 냉수 마찰을 한 뒤 새옷으로 갈아 입고 길을 따라 나섰다 . 식사를하지 않고 냉수 마찰을 한 것은 이승에 남기고 갈 마지막 흔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 이었을까 .
철통 같은 호송 속에 서울 구치소로 호송된 김재규는 오전 6 교도소 당국이 법정에 나가는 수감자들을 보내고 자신을 반대편 대기실로 격리 시키자 이미 허공에 혼을 날려 보낸 듯 멍한 표정이었다고한다 시쯤 합니다. 그러나 그가 형집행 직전 비굴한 자세를 보이기도했다는 일각의 소문에 대해 당시 관계자들은 『 사실과 전혀 다르다 』 고 증언했다 . 한 관계자는 『 김재규는 전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한 태도였다 』 고 말했다 . 그는 형집행 직전 『 남길 말이 있으면하라 』 는 검사의 말에 아무런 말도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 였다고한다 . 훗날 전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전날 이미 자신의 유언을 마친 상태 였기 때문이다 .
오전 7 시부터 시작된 사형 집행 절차는 채 30 분이 못 돼 끝났다 . 부하 4 명도 1 시간 간격으로 잇따라 처형됐다 . 다음은 23 일 이루어진 김재규의 옥중 유언 전문이다 .
유신 이후 4 차례 혁명 구상
김재규 :오늘이 5 월 23 일 , 이른 아침 이군요 .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길 말을 남기고 갈 수있는 최후의 날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내 소회에있는 이야기를하고자합니다 .
나는 금번 1 심 2 심 3 심 , 즉 보통 군법회의 고등 군법회의 대법원 재판까지 3 심까지를 거칠 예정이었는데 난 또 한차례의 재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그것은 뭐냐하면 , 제 4 심인데 , 제 4 심은 바로 하늘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 이것은 변호사도 필요없고 판사도 필요 없어요 .
사람이하는 재판은 오판이있을 수 있지만 하늘이하는 재판은 절대 오판이있을 수 없습니다 . 나에게는 그러한 재판만이 남아있을 따름입니다 .
그런데 내가 여기서 명확히 얘기할 수있는 것은 하늘의 심판인 제 4 심에서 나는 이미 이겼다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 내가 목격했던 민주 혁명은 완전히 성공을했다 , 그렇게해서 자유 민주주의가이 나라에 회복이되고 그것이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서로들 이렇게 확신을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을합니다 . 이미 자유 민주주의의 물결은 세차게 흐르기 시작해서이 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고있다 , 이것은 천하 공지의 사실입니다 .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는 세력이있어서 순조롭게 민주 회복이 돼나가지 못하고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것은 시간 문 제일 뿐이며 천하의 대세는 사람이 막을 수있는 것이 아닙니다 .
나는 여기서 이런 비유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 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던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 겠느냐 . 오늘날 우리나라의 민주 회복에있어서도 나의 희생없이이 나라의 민주 회복이라고하는 것은 "은 " 보장되었다 을 확실히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을 고 .
그것은 왜냐하면 자유 민주주의의 고마움을 애절하게 느끼는 부류의 국민들도 있고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부류도 , ( 자유 민주주의가 ) 필요하지만 ( 그 필요성을 )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부류도 없지 않다 ,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죽음 , 즉 나의 희생이라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느냐하면 ,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동시에 자유 민주주의가 절대 필요하고 자유 민주주의는 절대 회복 돼야 하겠구나하는 것을 전체 국민이 아주 확실히 깨닫게되고 또 그것을 확실히 자기 몸에다가 , 목에 , 자기 가슴 에다가 못박고 생각할 수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요번에 나의 희생이라고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기위한 민주주의 나무의 거름이다 , 이렇게 생각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이 시간이 된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또 보람으로 생각하고 매우 즐겁습니다 . 나의 심정을 바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바로 나의 뜻을 짐작할 수 있으 리라고 생각합니다 . ( 중략 )
그리고 내가 명확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그것은 내가 집권 욕을 가지고 10.26 혁명을했다 , 이러한 얘기를하는 사람들이 일부있다는 것입니다 . 특히 조사를 담당했던 분들 이라든가 혹은 재판을 담당했던 분들 , 또 일부 유신 체제의 중요한 위치에 밀착되어 있었던 사람들 , 이런 사람들이 결국 이런 이야기를하고있는 것으로 압니다 .
그런데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만 ( 내가 ) 집권 욕이있는 사람이라면 전직 대통령을 희생시키는 일을하면서 그 국가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있을 수없는 일입니다 .
다시 말해 그 집권이라는 문제는 내가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 특히 나는 10.26 혁명을 사실은 1973 년 10 월 , 즉 10 월유신이 반포되고 헌법이 반포된 직후에 그 헌법을보고 그때부터 안 되겠다 ,
이 유신 체제는 독재 체제인데 이것을 깨야 되겠다고 이미 발상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그 이후에 나는 네 차례에 걸쳐서 여러 번이 혁명을 구상 했었고 , 또 이런 물리적인 혁명에 의한 방법이 아닌 , 그야말로 박대 통령 스스로가 이것을 시정할 수있는 방법으로하기 위해 수백번 건의를했습니다 . 여러 가지 방법으로 . 그러나 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 그래서 마지막에 나는 부득이 내 목숨 하나를 바치고 그렇게해서이 나라에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되겠다 ,
이렇게 생각을했던 것입니다 . 따라서 나는 추호도 집권 욕을 가지고 , 집권을하기 위해서 나의 가장 가까웠던 대통령을 희생시켜 가면서 ( 시해를 ) 했던 것이 아닙니다 .
그런 생각은 나의 진의를 그대로 파악하지 못한 인간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
내가 백 번 죽어가도 , 내가 집권을하기 위해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혁명을했다는 것은 , 내가 하늘에 맹세하고 말하 건대 ,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
박대 통령 설득했으나 소용 없었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것이 당시 수사 당국의 시각처럼 집권을 염두에두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냐하는 것은 아직도 많은 논란을 남기고있다 .
김재규의 구체적인 거사 동기와 관련해서는 당시에도 " 우발적 확대설 "" 내란 음모설 "" 미 (美)는 CIA에 사주설 " 등이 분분했다 를 . 보안사 주도로 합동 수사 본부에 의해 진행된 39 일 동안의 수사 과정에서나 79 년 12 월 4 일 첫 재판이 시작된 이래 이듬해 5 월 20 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될 때까지 초고속으로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도이 점은 명쾌 하게 규명되지 못했다 .
김재규는 이런 논란을 염두에 둔 듯 "는 민주주의 회복을위한 순수한 동기 를 "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유언에 적극 강조하고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자유 .
여기서 김의 주장대로 과연 10.26 이 " 민주 회복 혁명 " 으로 규정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있을있다 . 이는 유신 체제의 성격을 반민주적 정권으로 규정하더라도 마찬가지다 .
민주 혁명으로서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주권자인 국민의 주권 회복을위한 정치적 절차 , 가령 선거 라든가 , 그것이 불가 능할 때는 최소한 대중 운동을 통한 국민 의사 결집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것이 정치학의 일반적 견해다 . 그런데 김재규는 가장 극단적 형태의 폭력 , 즉 개인적 살해 행위를 통해 정권 책임자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
김재규는이 점에 관해 79 년 12 월 18 일 군사 재판의 비공개 최후 진술 ( " 신동아 " 96 년 10 월호 보도 ) 에서 『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 고 말했다 .
『 이 나라 전체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이 혁명을 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유신 체제는 국민을위한 체제가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종신 대통령 자리를 보장하기위한 체제가되어 버렸던 것이다 . 이 유신 체제를두고 정부와 국민간에 벌어질 공방전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게 돼있다 』
일체의 정치적 의사 결집이 봉쇄된 공포 정치 하에서 결국 자유 민주주의 회복과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
이와 같은 그는 관점에서 자신의 10.26 행위를 당시 유일하게 가능했던 가 "" 회복 혁명 을 민주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을 으로 . 그러나 유언에서 자신이 행한 가 "" 이 어디 까지나 불완전한 시작에 불과하며 국민들이이를 지키고 진전시키려는 노력을 다하지 않을 때는 더 큰 불행이 올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고있다 혁명 .
"( 신군 부가 ) 사심 못 버리면 불행 온다 "
김재규 :아무쪼록 모든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고마움 , 민주주의의 귀중함 , 또 민주주의라고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지켜 야지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 해주셔야합니다 .
또 우리가 민주주의를 등한히하면 꼭 민주주의는 우리 몸으로부터 멀어 진다고하는 것 , 그런 경우에는 또다시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를 우리 국민들이 이해를 해주셔야됩니다 . 나는 국민들에게 이것을 간곡하게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
그리고 지금이 대세가 어떤 일부 세력에 의해 가로막힌다는 것 , 이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 국민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
이분 ( 국민 ) 들이 빨리 눈을 떠서 감정을 초월하고 정말로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을해서 자기들이 어떻게해야 되겠는가 , 어떤 길이 정도이고 이 어떤 길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바른 길인가하는 것을 빨리 깨달 아서 국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빨리 바로 잡아 줘야합니다 . 만일 이것이 흔들리게되면 정치적으로 혼란이 오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모든 발전이 저해가되고 , 또 국민의 마음은 결국 하나가되지 못하고 나아가 어떤 불행한 결과를 자아낼는지 누구도 예측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자유 민주 회복을위한 우리의 대혁명을 가로막는 이러한 세력들에 대해 진심으로 , 마지막 진심으로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 그것은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개인의 감정을 초월하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욱 튼튼한 국기 (国 基) 를 위해 어떻게해야 되겠는가하는 것을 똑바로 파악을하고 판단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
나는 이렇게 안되기를 희망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희생이 후에 또다른 희생으로 파생 될지 모릅니다 . 그러한 불행이 제발 없어지기를 나는 진실로 바랍니다 .
소위 민주 회복을하고 난 이후이 나라의 민주 회복이 무엇 때문에 이리 늦어 졌 느냐 , 또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병들었 느냐 , 우리 국민들은 민주 회복이 되고난 후에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심판하려 할 것입니다 . 그러니 그때 그렇게되지 않기를 나는 바라 마지 않습니다.
자랑스러운 부하들 선처 해달라
김재규가 10.26 이후 발생한 12.12 및 5.18 로 이어지는 신군 부의 움직임과 가 , 이로 말미암은 장래의 "" 들을 옥중에서 파악하고 예견했다는 점은 퍽 흥미롭다 을 사태 불행한 . 김재규는 자신이 유신 체제를 타파하는 민주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했지만이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국민 일반의 노력과 연결되지 못함으로써 신군 부가 권력을 장악 해 들어가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있다 .
그는이 이 점을 " 나의 희생에서 파생될 또다른 희생 " 으로 표현했다 를 . 그러면서도 그는 신군부 세력에 『 민주 회복 이후 국민들이 여러 문제들을 심판하려 할 것 』 이라면서 『 대세를 가로막지 말라 』 고 경고하고있다 . 그가 이 이 말을 남긴 뒤 15 년 남짓 만에 실제 12.12 , 5.18 의 주역들은 " 민주 헌정을 파괴한 쿠데타 세력 " 으로 단죄됐다 가 .
김재규는 유언 후반부에 향후 닥쳐올 정치적 혼란과 "는 민주주의의 겨울 " 을 염려하면서이를 막기위한 나름의 처방을 제시한 뒤 ,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선처를 당부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있다 .
김재규 : 그 다음에 내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 이 사회가 현재 매우 혼미한 상태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혼란이 오게 마련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계획했던 혁명에있어서도 3 개월 내지 5 개월 이내에 완전히 민주 회복을 끝마쳐야한다는 것입니다 .
그렇게해서 새로운 정권이 , 민주 정권이 서서 완전히 국가에 대한 모든 대권을 장악 해가지고 책임을지고 우리나라 정치 문제를 다뤄 나가야됩니다 .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지금은 ( 거사 후 ) 7 개월이 곧 넘어갑니 다만 , 아직까지도 그런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
그래서 원컨대 빨리 민주 회복을해서 현재 사회적으로 혼란한 이런 문제를 빨리 극복해야합니다 .
우선 정치적으로 안정이 돼야만 경제적으로 안정이됩니다 . 그리고 특히 우리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기업도 살리고 사용자들도 근로자들도 ( 다같이 ) 복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양쪽으로 보장을해야합니다 . 지금 내가 알기에는 큰 기업들이 자꾸 도산이 된다든지 혹은 중소 기업들이 몰락이 된다든지 또 영세한 근로자들이 박봉에 허덕여가지고 결국은 난동을 부린다든지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꾸 생기고 있습니다 . 국가가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 이 결과를 신중하게 생각해주어야 되리라고 봅니다 .
그 다음에 나는 내 동지들 , 나를 포함해서 7 명이 됩니다만 , 이 동지들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 나와 이념을 같이하고이 혁명에 가담을했던 나의 동지들입니다 .
이 동지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 심지어 김태훈이라고하는 동지 한 사람은 와전 옥쇄 (瓦全 玉碎) 다 , 기왓장으로 온전한 것보다는 옥이 돼서 그야말로 분쇄 되겠다고합니다 . 얼마나 숭고한 이야기입니까 . 이러한 이야기를 한 동지들이 참 귀중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나의 부하들입니다 .
사실 부하들에 대한 김재규의 애정은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
김재규는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먼저 형이 확정됐던 박흥주 (朴 兴 柱 육사 17 기 ) 대령이 80 년 3 월 6 일 전격적으로 총살형에 처해진 사실을 육감으로 알게됐다 . 당시 교도소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재규는 박대 령이 사형 집행되던 날 밤 그의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 박대 령이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손을 내밀어 김재규가이를 잡으려고 급히 손을 뻗었으나 아래로 떨어져 버리는 꿈 이었다는 것 .
김재규는 다음날 교도소 관계자들에게 박흥 주가 죽은 것 아니 냐고 물었으나 교도소 측은 박의 사형 집행에 관해 일체 함구했다 .
자부와 확신 안고 간다
김재규 : 그런데 요번에이 재판의 결과가 나왔습 니다만 , 참고적으로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
뭐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 다만 , 일본에 과거 5.26 사태니 2.26 사태니하는 사건들이 있었 습니다만 . 그때 그 사람들은 장교들만 책임을 지웠지 하사관과 병 (兵) 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잘하고 잘못하고하는 문제를 초월해서 군대라고하는 조직이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그 역경에서 전쟁을 수행할 적에 부하들이 명령을 선택적으로 받아서 수행한다고하면 , 만일 이러한 기풍이 있다고하면 군대는 존립 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바꿔 말해서 부하라고하는 것은 , 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있는 이런 관계가 아니면 , 군대의 명령 계통이라는 것은 존립할 수가없는 것입니다 . 만일 상관이 명령을했을 때에 이것이 정당한 명령인가 아닌가 판단을해서 정당할 적에만 내가 이행을한다 , 이렇게 생각을 해봅시다 .
전쟁에서 만일 어떠한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고합시다 . 적을보고 총을 쏘라고했는데 내가 가지고있는 신앙의 정신에 입각을하면 나는 총을 쏠 수가 없다고해서 거절했다고합시다 .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
이것은 조그마한 비유에 불과 합니다만 , 명령이라고하는 것은 절대권을 가진 것이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안 받아들여지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따라서 나는 요번에이 혁명을 결행하기 위해 내 부하 6 명에 대해 강력한 명령을했습니다 .
이 사람들은 나의 명령을 100 % 그대로 받았습니다 . 그렇게해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 해가지고 아주 완전히 자기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 나는 이것은 참으로 본받을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
그러나 적어도 재판 과정에 있어서는이 문제에 대해 명령을 한 나와 명령을 받아 가지고 이행한이 사람들의 관계는 충분히 정상 참작이 돼 판결이 됐어야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
그리고 오늘이 금요일 입니다만 , 내 영감으로 마음에 잡히는 것은 내일 토요일 , 내일이 오전 밖에 일이 없으니까 내일 오전 중에 나의 형을 집행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내 영감으로 잡히는 것입니다 .
나는 누구의 염려없이 아주 유쾌하고 명예스럽게 ,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자부와 , 내가 이렇게 감으로써 자유 민주주의는 확실히 보장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즐겁게갑니다 .
아무쪼록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발전과 10.26 민주 회복 혁명 , 이 정신이 영원히 빛날 것을 저는 믿고 또 빌면서갑니다 . 국민 여러분 ,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