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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 여신상
우리의 선조들은 무슨 신을 믿었고 어떤 종교를 가졌을까요?
구약성경의 창세기만 있고 우리 나라만의 창세기는 없을까요?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면서 말입니다.
아래의 여신상은 불교 이전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홍산유적에서 발굴된 것이다.
그 창세기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바로 부도지에 있습니다.
우리의 고대사 혹은 우리 것이라면 부조건 부정(?)하시는 분들이 계서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요즘도 발굴되고 있는 명백한 유적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홍산문화(紅山文化 B.C.4500~B.C.3000년경)유적지에서 나온 여신상은 분명 종교적인 유적입니다.
그리스의 아테나 신전과 비교가 될까요?
아니 그보다 몇천년 더 이전의 여신상입니다.
서양문명의 뿌리인 수메르문명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필적하는, 20세기 동북아 최대의 발굴 사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홍산문화(紅山文化 BC.4500~B.C.3000년경)로 신석기, 청동기 문화 발굴이다.
1908년 처음 홍산(紅山) 일대 유적과 유물을 발견한 이는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이고
이어 1919년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리쌍도 이 일대에서 신석기시대 유적 여러곳을 찾아냈습니다.
1935년 일본인들이 동아시아 고족조사단을 만들어 홍상일대를 본격 발굴하면서 여기서 출토된 것들을 통틀어 '홍산후 유적'이라 명명했습니다.
적봉시 홍산구에 있는 홍산.
이 산은 철을 비롯한 광물질이 많아 붉은색을 띤다.
광물질이 많은 산이 있었기에 이곳에서는 황하 문명보다 먼저 청동기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홍산(紅山)구에는 붉은빛이 도는 바위산이 있는데, 몽골인들은 이 산을 ‘올랑하드’로 불러왔다 올랑하드는 ‘붉은 바위’란 뜻이다.
이 지역으로 들어온 중국인들은 ‘올랑하드’를 한자로 음차해 적지 않고 그 뜻을 따라
‘홍산(紅山)’으로 적었다.
그 결과 ‘올랑하드’는 사라지고 홍산과 같은 뜻을 가진 적봉(赤峰)이 이곳의 지명이 되고
홍산은 적봉시의 구(區) 이름이 되었다.
적봉시는 그 면적이 한국에 육박하는 9만㎢로 중국에서는 가장 큰 자급시 가운데 하나다.
이곳을 조사한 것은 한참 뒤인 1980년대이다
도처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대부분의 요서지역과 달리 홍산문화의 꽃인 ‘우하량牛河梁’ 지역은 은 바람이 거의 없어 안온한 땅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곳에 최근 발굴된 신석기 문명‘우하량 홍산문화유지’가 있다.
그 곳의 안내판에는“홍산문화는 서기전 3500년을 전후한 시기 서요하 유역과 대릉하 유역 그리고 연산과 발해만 사이에 살았던 종족들이 꽃피운 신석기 문화이다. 홍산문화의 후기 유적이 이곳에서 발굴된 우하량 유적이다. 이 지역에서는 여신전, 제단, 돌무덤등이 출토되었으며 .......이곳은 홍산문화를 구성한 모든 지역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꼭짓점 지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지역이자 홍산문화를 구성한 종족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는 곳으로 기능했다,.. 이는 홍산문화가 이미 고대국가 단계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적혀 있다.
홍산문화의 꽃은 ‘우하량牛河梁’ 유적인데 이곳에서 거대 적석총과 여신묘가 나왔다.
여신묘(무덤이 아니라 여신의 사당)에서는 홍산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이 일대(적석총과 여신묘가 발굴된 우하량 제2지점 지역)는 홍산문화 당시 성소였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터가 나왔다.
이 지역에서 반경 수십㎞ 이내에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주거지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성소로 본다.
여신묘는 십자형으로 돼 있는데, 주실에서 여신상이 나왔다.
가장 큰 여신은 인간 실물의 3배가량 된다.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임에도 복원된 여신상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눈은 둥근 청옥을 정교하게 갈아 넣었다.
이 여신묘에서 곰 아래턱뼈와 곰의 머리, 발톱으로 추정되는 진흙 조소상 파편이 함께 나왔다.
여신상은 눈에 둥근 옥이 박혀 있어 연대 측정이 가능했다.
학계에선 그 연대를 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 정도로 본다.
그런데 여신 옆에서 진흙으로 실물 크기로 빚은 곰 형상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5천 년이 지났으니까 다 부숴져서 발 부분과 채색된 아래턱만 남아 있다.
이게 발굴이 되면서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이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민족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하량에서는 ‘돌무덤(塚), 신전(廟), 제단(壇)’이 동시에 발굴되었다.
이는 다른 신석기 문화에서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하량의 16개 유적지 가운데 13곳은 적석총(돌무지무덤) 유적지이다.
적석총은 삼국시대 때까지 계속 나타나는 무덤 형식으로 황하문명권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
충적층지대인 황하유역은 흙으로 만든 토광묘를 지었고,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요서지역은 주로 돌무덤을 지었다.
흥미로운 것은 돌로 쌓은 무덤인 적석총이 조사됐고, 거기서 옥으로 만든 돼지 형상의 용, 즉 옥저룡(玉猪龍)이 발굴됐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돼지 형상이라고 봤던 중국 학자들이 요즘은 옥웅룡(玉熊龍)이라고 본다.
곰이라는 말이다.
동북공정을 주도한 학자 중 한사람인 궈다순(郭大順·곽대순)의 최근 논문과 책에는 거의가 곰으로 설명돼 있다.
원(圓)·방(方)·각(角) 천부삼인(天符三印)이 홍산유적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다른 위치이냐 아니면 하느님과 같은 위치냐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삼위일체 논란입니다.
우리의 전통에는 이런 논란이 없습니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관계를 기독교적으로 풀어 볼까요?
환인은 하느님이과 환웅은 그의 아들인데 예수 같은 존재 아닐까요?
환웅의 아들이 환인이니 예수와 비슷한 설정입니다^^
환인은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고 인간 세상에 내려보냅니다.
여기서 천부인 3개아 무엇이냐에 대한 해석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청동거울과 청동 방울 그리고 청동검이라고도 하는데 그것보다는 천지인 사상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상으로 나타낸 기호가 바로 원(圓)·방(方)·각(角)으로 이것을 천지인(天地人) 천부삼인(天符三印)이라고 봅니다.
원방각에는 원은 동그래미인데 하늘을 의미하고 방은 네모인데 땅 그리고 각은 각은 삼각형인데 인간을 뜻합니다.
이걸 한눈에 알아 볼수 있는 그림으로 넣고 후손들에게 남겨 준 놀이가 바로 윷놀이이고 그 말판입니다.
한번 보세요.
바깥은 큰 원 그리고 안의 네모 그리고 4개의 삼각형 모양이 하나의 그림 속에 다 녹아 들어 있습니다.
조상님들이 애들적부터 잊어버리지 말라고 윷판을 갖다 그려놓은 겁니다.
이 원방각이 바로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출토가 된 겁니다^^
홍산문화의 핵심지라 할 수 있는 우하량에서 BCE 3500년까지 올라가는 대형 제단(祭壇), 여신묘(女神廟), 돌을 쌓아 무덤의 묘실을 만든 적석총(積石塚)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우하량 20여개 지점 중 총길이가 160m이고 남북 50m에 이르는 제2지점에서는 3층으로 이루어진 원형(圓形) 제단과 방형(方形) 돌무덤이 발굴됐는데, 제단과 무덤 모두 돌로 쌓아올려 만든 적석총으로 원형과 방형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3층으로 이루어진 원형 제단은 중국 북경의 천단(天壇)에 있는 원구단(圓丘壇) 형태와 같은 구조로, 중국학자들은 이 제단을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원형이자 명. 청 시대 때 중국 황제들이 하늘에 천제를 지내던 북경 천단(天壇)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각 층의 둘레를 따라 늘여 세워진 원통형 토기 또한 이 원형 건축물이 제단이었음을 말해준다. 요령성 조양시 의 덕보박물관 왕동리王冬力 관장은 이 독특한 토기에 대해 “토기의 위쪽에 덮개가 없고 아래쪽에 바닥이 없는 것은 천지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사장은 제단의 주변에 원통형 토기를 둘러 세워 하늘과 통하는 소통로를 만들었다” 라고 해석한다.
천원지방 구조는 배달 시대 이후 고조선 때 지은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 명나라 때 지은 북경의 환구단, 조선 말기에 고종 황제가 세운 원구단 등 제천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5,500년 전 우하량 제단은 동북아 제천단의 원형이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천제 문화는 원형을 홍산문화에서 볼 수 있다.
십자가 모양의 홍산 여신전(女神殿)
제가 관심을 가지고 본 유적 중에 하나가 우하량 홍산 문화유지(牛河梁紅山文化遺地)의 십자가 모양의 대형 여신전(女神殿)입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테네 신전처럼 여신전(女神殿)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신묘(女神廟)라는 표현하게 되면 ‘묘‘자는 종묘(宗廟)의 ‘묘‘자와 같아 우리가 추석이나 명절에 하는 "성묘"로 혼동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 홍산문화 유적지의 이곳은 아테네 신전같은 신(神)을 모시는 곳입니다.
농경사회에서 모시는여러 가지 신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신은 인간의 탄생과 안녕과 풍요를 주재하는 ‘대모지신(大地母神)’으로 농산물이 자라는 대지를 주재하는 여신입니다.
여신은 고대 사회에서 생육을 상징할 뿐 아니라 대지를 상징하고 풍년을 상징하기 때문에 지모신이야말로 가장 큰 생명력을 가진 신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고, 아버지를 하늘에 비유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지모신에게 제사지냄으로써 만물이 소생하고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었습니다.
홍산유적지의 여신전은 흙에 파묻혀 있는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발굴 당시 여신상은 남북으로 25m, 동서로 2~9m인 ‘가운데 중(中)’자 모양의, 반(半)지하 깊이로 땅을 판 ‘움’ 속에 있습니다. 반 지하 깊이의 가운데에는 주실(主室)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한 개씩의 측실(側室), 북쪽에 한 개의 방이 있고 남쪽에 3개의 방과 별도의 방이 하나 더 있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발굴하기 전의 형태로 다시 흙을 덮어놓았기에, 보이는 것은 평범한 황토흙 언덕이고 능원시 인민정부는 이 여신전을 보호하기 위해 파이프 기둥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씌워놓았습니다.
제가 눈여겨 본 것은 여신전 안의 내용물도 내용물이지만 십자가 형태의 신전입니다. 즉 십자가 모양이 기원전 3500년의 신전 모양에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 성공회 대성당의 모습도 하늘에서 보면 십자가 형태입니다.
우하량 유적지에는 ‘돌무덤(塚총), 신전(神殿), 제단(壇단)’이 동시에 발굴되었는데 이렇게 세종류가 한 장소에 있는 것은 다른 신석기 문화에서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모습입니다.
천부삼인(天符三印)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많습니다.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형상으로 나타낸 기호로눈 원(圓)·방(方)·각(角) 즉 천지인(天地人)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원방각이 평면이 아니라 입체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원(圓)이라는 것이 평면의 동그래미 원이 아니고 입체원이고 방(方)이란 것도 평면 사각이 아니고 입체 사각이니까, 육면체이며 각(角)도 입체각으로 사면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바로 가운데 초점 중 중심접을 잡는 것입니다.
또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윷놀이 말판에서 외관의 둥근 원과 그 중심을 볼 때 그 중심을 연결한 2개의 직선이 바로 십자가 표시입니다.
이 십자가 모양의 신전에서 여신을 모시고 수행을 하거나 제사를 올렸습니다.
특히 여신전의 여신은 실제 여자의 모습을 진흙으로 만들었고 신전에 모셔진 여신은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여신상에서 떨어져 나온 진흙 조각편을 분류한 결과, 3명의 여신으로 크기도 사람과 같은 크기, 2배, 3배로 서로 달랐습니다.
홍산문화 관련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옥구슬 눈동자의 여신은 사람 크기 여신상 일부였던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고대국가는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으나 홍산문화 유적지를 보면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대국가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평상시에는 신을 모시고 유사시에는 방어 공간으로 사용하는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었다.
그리스 문화는 청동기 시절에 꽃핀 것이라 아크로폴리스에 자유자재로 대리석을 다듬어 거대한 신전을 세웠다. 그러나 홍산 문화는 신석기 시대의 문화인지라 흙과 돌로 그들의 건축물을 지어야 했다.
여신상은 단전 자리에 두 손을 맞잡은 반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 두상이 여신상이라는 것은, 유방이 있는 나신상과 결합할 수 있었기에 내려진 판단이라고 한다. 우하량의 여신전에서는 여신상뿐만 아니라 옥돌을 갈아서 만든 공예품도 발굴되었다. 이러한 옥 공예품을 중국학자들은 ‘옥기(玉器)’로 표현하는데, 옥기는 우하량뿐만 아니라 홍산 문화가 펼쳐진 전 요서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돼지용(龍) 모양의 옥기’라는 뜻으로 ‘옥저룡(玉猪龍)’으로 명명된 것도 있었다. 용은 실존하지 않는 동물이다.
용도 없는데 과연 돼지용이 있었을까?
돼지용은 이 유물을 발굴한 중국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중국학자들은 요서 지역의 유적을 발굴하면서 이곳에서 중국 최초의 용이 발견되었다는 이상한 가설을 내세웠다. 이곳에서 대량 출토된 옥기에 새겨진 짐승 문양을 보고 “용을 새긴 것”이라고 했는데, 새긴 것이 용 같지 않으면 “돼지용을 새겼다”는 식으로 빠져나갔다.
3이란 숫자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여러 유물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삼신사상(三神思想)을 표현한 것으로 나라도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유물에서도 예를 들어 세 개의 원이 나란히 연결된 삼련벽(三聯璧)이나 우하량 유적지의 3단으로 된 원형제단은 홍산인들이 3을 신성한 수로 여겼음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바로 옛 우리 조상들의 삼신할매라는다 가위,바위,보의 놀이에서 그리고 뭐든지 3세번은 해야 한다는 3수(三數)사상과 통하는 것입니다.
삼신(三神)사상 내지 삼신문화의 흔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하나의 신이 조화신(造化神), 교화신(敎化神), 치화신(治化神)의 삼신으로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이론과 비교됩니다^^
그리고 남자 신이 아니라 여신인 것도 특징입니다.
고고학자들은 대개 여신 신앙이 BC 7천년 경 신석기 시대 공동체들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구석기 후기의 그라베트 오리냐크 문화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여자들의 상은 무려 기원전 2만5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베누스 상이라 불리는 이 작은 여성상들은 돌과 뼈와 진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대개 남성는 태양으로 여성은 달로 비유가 됩니다.
여성의 달걸이도 28일 주기로 달의 주기와 일치하기도 하구요.
달과 관련된 문화유산은 상당히 많은데 달의 생멸주기와 관련된 문화유산으로 이미 구석기 시대에도 나타납니다.
여성의 자궁을 통해 아이를 낳고 또 초승달이 보름달로 커졌다 작아지는 모양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에서 창조의 원리를 생각해 내고 구석기인들이 생각해낸 태모신(太母神)이라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합니다.
태모신을 달과 연관지어 생각했음은 '로셀의 여신'(기원전 2만2000~1만8000년)으로 알 수 있다. 이 조각상은 프랑스 남부 도르도뉴(Dordogne)에 있는 로셀의 바위 은신처에서 발굴된 것이다. 조각상을 자세히 보면, 태모신은 오른손에 달을 상징하는 들소의 뿔을 들고 있는데, 거기에는 달이 차오르는 13일을 나타내는 13개의 금이 그어져 있다. 달은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 13일간 조금씩 커진다. 또한 왼손으로는 부풀어 오른 자신의 아랫배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달이 차오르는 국면과 여성 자궁의 다산 간에 밀접한 관계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달이 여성의 출산과 관련된 월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이미 구석기인들이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아래는 여신전(女神殿) 발굴 당시 보고서 내용입니다.
이곳은 우하량의 중심 줄기인 북산 정상부에 해당된다.
여신묘는 평면형태가 “중(中)”자형인 반지하(半地穴式) 형식으로 전·후실과 측실로 구성된 다실건축물과 별도의 단실로 구성되었다.
북쪽의 다실건축물은 주실이 되며, 남쪽의 단실은 부속구조물로써 양쪽 사이의 간격은 2.05m이다.
주실은 남북 길이 18.4m, 동서 잔존 최대 너비 6.9m정도이다.
전체 구조는 비교적 복잡한 편인데 중심의 주실을 기준으로 동·서 측실, 북실과 남측의 삼실(三室)이 연접되었고 다시 약간의 간격을 두고 남쪽의 단실이 존재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남쪽의 단실건축물은 길이 6m, 최대너비 2.65m 정도로 전체 규모는 남북 25m, 동서 2~9m, 면적은 75㎡이다.
다실건축물에서는 실제 사람 크기의 두 배 정도 되는 인물소상의 어깨, 팔, 손, 다리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실의 서측에서는 실제 사람크기에 해당하는 여신의 머리가 출토되었고 중앙에서는 실제 사람 크기의 3배에 해당되는 코와 귀 등이 확인되었다.
곰이면 곰이지 곰용이라는 억지 부리는 중국
1984년 10월 31일 오전.
우량하 제1지점은 사각거리는 꽃삽 소리와 함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주실(主室)의 서편에서 한덩어리의 진흙덩어리가 떨어졌고 사람의 두상이 윤곽을 드러냈다. 흙을 살살 지워내니 둥그런 이마가 노출되었다.
5500년 가까이 긴 잠에 빠져 있던 여신(女神)이 깨어나고 있었다.
여신묘에 대한 중국측의 발굴보고서에는 두상의 잔존 상태가 자세히 묘사돼 있다. 두상 높이 22.5㎝, 폭(귀에서 귀) 23.5㎝, 미간의 넓이 3㎝, 코 길이 4.5㎝, 귀의 길이 7.5㎝, 입 4.5㎝…. 얼굴은 선홍색을 띠고 입술엔 붉은 칠(朱漆)이 남아 있고, 머리 뒤쪽 부분은 평평하여 벽에 걸어 놓기에 좋은 형태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눈꼬리는 위로 올라갔으며 눈썹은 선명하지 않다. 그런데 코는 접착이 약했던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제법 큰 눈에는 옥구슬을 눈동자로 박아 놓았다.
주변에 흩어진 가슴과 궁둥이 팔 다리 등을 조합하니 영락없는 여인의 자태였다. 중국 학계는 '몽골 인종'으로 결론지었다. 1차 복원된 얼굴은 중국인 같기도 하고, 근대 한국인의 얼굴 같기도 했다.
유적지의 진흙 조각편을 끼워맞추어 보니, 여신은 모두 3명이었다.
이중 한명은 사람 크기의 3배, 한명은 두배, 한명은 등신대로 조사됐다.
중국 학자들은 이를 주신(主神)과 군신(群神)의 관계로 보고, 당시 모계사회에 계급이 존재했을 것으로 해석했다.
뉴허량에서는 이처럼 단(壇 천제단)·신전(神殿)·총(塚 돌무덤), 즉 돌무덤과 제단, 신전 등이 3위 일체로 드러나 완벽한 신석기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제단과 신전 주변에는 주거지가 나타나지 않아 신성 영역임이 확인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여기서 곰뼈와 곰발 같은 진흙 조소상과 곰 형태의 각종 옥기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국내 학자들이 이를 '웅녀의 환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연 억측일까?
환국(桓國 기원전 6,000년전, 고조선 이전 국가)의 유물이 출토 됨으로서 지금까지 주장했던 중국 역사학자의 중화사상(中華思想)논리에 급격한 제동이 걸렸다. 제단(祭壇)과 돌무덤인 적석총(赤石?) 및 돌로 만든 관인 석관묘(石槨廟)는 중국 동북지방과 만주일대 및 한반도에서만 발견 되는 형태로서 부장품 또한 실로 놀라운 문명으로 중국이 기겁할 만도 하다.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과 허리띠(요대) 등에는 구부러진 모양의 옥(玉)인 곡옥(曲玉)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곡옥은 백제와 가야, 일본의 왕릉에서 출토된 왕관에도 많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성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홍산유적지에도 많은 옥기(玉器)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 귀고리 장식품인 옥결(玉? )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 유물인 강원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옥결이 이와 모양이 똑같습니다.
또한 한반도 남쪽 여수 안도리에서도 6천년전 옥귀걸이도 똑같은 양식이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박물관에도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의 옥결이 똑같고 심지어 이런 옥결은 일본에서도 구주 지방과 관서 지방에서 곡옥이 출토되었습니다. 같은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유적이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말하길 ‘옥은 돌 중에서도 아름다운 것(石之美者)’을 가르킨다고 했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이르기를 ‘타산지석가이위착(他山之石可以爲錯)’이라고 하였다. ‘옥은 다른 돌로 갈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예부터 옥을 완성하는 과정을 인간의 성장 과정에 비유했고, 그 완성된 옥을 군자(君子)의 다섯 가지 덕목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옥은 장식으로 예술적 가치 이외에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매장함으로써 영생을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발해 연안 사람(동이족)들은 주로 돌무덤에 시신과 함께 옥을 매장한다.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옥은 중국 요녕성 부신시(阜新市) 사해(沙海) 유적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옥결(玉?)이다. 일종의 귀고리다. 이와 같은 유물은 발해연안을 위시하여 중국의 동남 연안 지구 그리고 연해주와 일본에도 분포되고 있다. 발해연안에서 출토된 옥결이 가장 이른 시기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文岩里) 유적에서 신석기시대의 옥결 한 쌍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경북 청도군 사촌리(沙村里) 유적에서 청동기시대의 옥결 1점이 반파된 상태로 출토된 바 있다.
홍산문화의 옥장식인 곡옥(曲玉)이 대릉하 유역에서 서남향하여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에서 크게 유행했다.
발해 연안 인류(동이족)들은 옥을 가짐으로써 영생불멸한다는 생각과 옥을 예제화함으로써 당시 고대사회의 어떤 신분상의 등급과 권력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옥귀걸이의 모양을 두고 중국 학자들이 갈팡질팡(?)합니다.
우선 중국인들은 꼬리가 길면 무조건 일단 용(龍)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꼬리가 긴 동물로 가장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뱀인데 뱀이라고 하면 웬지 체면이 안 서나 봅니다^^
그래서 우하량에서 발굴된 옥 귀걸이 옥결(玉?)의 장식이 구부러져서 길게 된 모양이라 우선 용(龍)이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 모양이 아무리 봐도 신령(?)스러운 용의 머리는 아니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돼지 형상입니다.
옥(玉)으로 만든 돼지 형상의 용, 즉 옥저룡(玉猪龍)이라 발표한 것입니다.
저(猪)는 "돼지 저"의 한자입니다.
처음에 돼지 형상이라고 봤던 중국 학자들이 요즘은 아무리 봐도 돼지라고 하기엔 그랬는지 이젠 곰 즉 옥웅룡(玉熊龍)이라고 합니다.
옥저룡(玉猪龍) 즉 돼지용은 이 유물을 발굴한 중국학자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홍산지역의 유적을 발굴하면서 이곳에서 중국 최초의 용이 발견되었다는 이상한 가설을 내세웠고 이곳에서 대량 출토된 옥기에 새겨진 짐승 문양을 보고 “용을 새긴 것”이라고 했는데, 새긴 것이 용 같지 않으면 “돼지용을 새겼다”는 식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고구려 역사도 중국 역사에 일부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을 주도한 학자 중 한사람인 궈다순(郭大順·곽대순)의 최근 논문과 책에도 거의가 곰으로 설명돼 있을 정도이면 곰이 확실하겠지요.
한때 중국의 상징인 용은 뱀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요즘은 악어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주장이 요즘은 우세합니다.
6000년 전 날씨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기는 하지만 홍산지역에 악어가 살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악어를 용(龍)의 원형으로 본다면, 악어를 본 적도 없는 홍산인들이 용(龍)을 새겼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등장한 것이 돼지를 새겼다는 주장이었을 것입니다.
동부 시베리아와 몽골 지역에 분포하며 알타이계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을 가리켜 ‘퉁구스족’이라고 하는데, 퉁구스족은 일찍이 돼지를 기른 종족으로 꼽힌다. 돼지는 전세계에서 여러 종족이 길렀지만, 인류학과 고고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동시베리아에 있는 종족이 가장 먼저 돼지를 기른 것으로 알려져, 이 지역에 사는 종족을 퉁구스족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우하량 일대의 신석기인들도 돼지를 길렀다.
지금 사람들은 돼지를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신석기인들에게 돼지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중국학자들은 악어가 없는 지역에서 홍산 문화인들이 용을 새긴 옥기를 제작했다고 주장하다 반론이 일자 돼지용을 새긴 것이라며 ‘옥저용(玉猪龍)’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선사 시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에 선사 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이를 찾아낸 사람이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용이면 용이고, 돼지면 돼지여야지 돼지용(玉猪龍)은 있을 수 없다.
곰이라고 쉽게 인정하기 싫으니까 또 꺼낸 이야기기 뱃 속의 아이인 "태아(胎兒)"를 새긴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하량 유지 제16지점의 무덤에서는 또 다른 인골과 함께 사람 모습을 새긴 것이 분명한 옥기가 나왔다.
중국학자들은 무당을 새긴 것으로 보고 이 옥기를 ‘옥무인(玉誣人)’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새를 새긴 것이 분명한 옥기도 나왔는데 중국학자들은 봉황을 새긴 것으로 판단하고 ‘옥봉(玉鳳)’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옥기에 새겨진 문양은 봉황보다는 삼족오(三足烏)에 가깝다.
옥무인(玉誣人)과 옥봉(玉鳳)을 중국학자들은 홍산 문화는 용과 함께 봉황을 등장시킨 최초의 문명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옥무인과 옥봉은 누가 봐도 사람과 새를 새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용은 아니다 보니 최근 다른 주장이 등장했다.
요즘 학자들은 홍산 지역에서 발굴된 굽은 옥기는 어머니 뱃 속에 있는 태아(胎兒)를 본뜬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홍산 문화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모계(母系)사회였다.
유아의 생존율이 낮아 인구 증가를 위해 다산(多産)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므로 추측(?)으로 굽은 옥이 사람과 짐승의 태아를 새긴 것이라 주장할 수 있지만 왠지 억지스럽다.
뱃 속의 태아를 조각해서 귀걸이에 달고다니다니^^
우하량의 여신전에서는 곰의 턱뼈가 발견되었다.
또한 ‘곰의 발’ 모양을 한 토기도 발견되었다.
신석기인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심정으로 그곳에 죽은 곰뼈를 던져 넣었을 리는 없다. 신성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에 먹다 남는 곰뼈를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곰토템은 지역이나 시기적으로 단군신화의 웅녀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곰들은 자연스럽게 곰 토템을 끌어내고, 우리의 단군신화 속의 웅녀(熊女)를 오버랩시킨다.
"곰이 나오고 여자가 나온다, 단군신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신화적인 얘기가 고고학적 조사로 이렇게 완벽하게 뒷받침되는 사례는 드물죠."(복기대 교수)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소나무)을 쓴 한국항공대 우실하(교양학과) 교수는 이런 정황을 아예 웅녀족과 결합시킨다.
"홍산문화 주도 세력은 곰 토템 민족이며, 그들이 바로 우리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족의 선조일 걸로 봅니다. 입증 자료들이 바로 이 곳의 곰 유물들이고요."
이런 주장이 성립할 경우, 홍산문화는 중화문명의 서광이 아니라 오히려 환웅족, 웅녀족을 포함한 동이족의 문화 원형을 얘기하는 곳이 된다. 뉴허량을 끼고 있는 대릉하(大凌河) 유역이 단군조선의 근거지라는 학계 일각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 자료가 빈약하고 고고학적 자료에 대해 한·중 학계가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어 논란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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