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진逼眞
오 은
시를 몽당연필이라고 해 보자
아까워서 쓰지 못하겠지
키높이 구두를 신기는 것처럼
볼펜대에 끼울 수도 있겠지
그러곤
속삭이듯 말할 것이다
귀여워
귀여움에 사로잡혀 시는 중단된다
시를 컵이라고 해 보자
유리컵, 머그잔, 포도주잔, 비커, 성배聖杯, 텀블러……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시는 승부가 아니다
계량컵처럼 정확해질 수 있을까
시가 헤아리는 건 수량이나 무게가 아니다
물이 담긴 종이컵은
순식간에 흐물흐물해지고
손아귀가 억세서
물이 사방으로 튈지도 모른다
소용없음의 흔적이 바닥에 흥건하다
마침내 기지개를 켜는 시
기지개를 켰으니
내친김에 시를 운동화라고 해 보자
운동할 때보다
운동하지 않을 때 더 많이 신는
닳고 벗겨지고 더러워지고
아무리 빨아도
새 신이 되지는 않는다
한 번 쓴 시를 다시 쓸 때
한숨 섞인 입김이 쏟아지는 것처럼
시를 적바림이라고 해 보자
간단함은 손쉽게 잊히고
나중은 오지 않는다
나중이 되기 전에
시를 모사模寫라고 해 보자
묘사보다 치밀해지자
모자 속 보아 뱀
보아 뱀 속 코끼리처럼
시선은 이미 왜곡되어 있다
본뜨기 전에 본보기가 있어야 하듯
월간 《현대시》 2024년 1월호
오은|1982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 『없음의 대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