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 / 최미숙
“하기 싫으면 집으로 가! 나도 더 이상은 못 하겠다. 보자 보자 하니 해도 너무하네. 얼른 가!”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래도 꿈쩍도 하지 않고 책에다 낙서만 한다. “가라고, 하기 싫다며?”,“싫어!” 4학년 아이의 대답이다. 계속 달래고 달래다 결국 내가 폭발해 버렸다. 화를 삭이려고 가방을 싸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빈방에 아이 혼자만 두고 갈 수 없어 담당 복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하필 출장 중이다. 푸른 하늘을 보며 심호흡 한번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작년에도 중단한 전력(前歷)이 있다고 했다.
아이는 여전히 낙서만 하고 있다. 옆에 앉아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다. 먼저 화낸 까닭을 설명하고 사과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많이 하면 힘드니 10분씩이라도 하자고 달랬다. 지금까지도 1, 2학년 학생에 비하면 공부 시간이 짧았다. 아이는 주 양육자(시설 엄마)가 그날 있었던 일을 알고 꾸중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다. 복지사 선생님에게 말하지 말라고 문자 보냈다고 했더니 확인까지 한다. 그런 아이를 보고 있자니 안됐고 마음이 아팠다. 아이를 안아 다독이고는 데리고 나와 집으로 보냈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애잔하다. 앞으로 이 복잡하고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를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1주일에 이틀, 오후 세 시간씩 시설(순천 에스오에스 어린이 마을)에 사는 아이 세 명(1, 2, 4학년 여학생)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퇴직하고 시작한 일이다. 지난 3월 14일 시작해 5월 23일 20회기를 끝으로 1주일간 쉬고 6월 3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마지막 한 시간을 못 참고 큰소리를 냈다. 아이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상처 준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작년까지 학교에서 계속하던 일이라 쉽게 생각했다. 겨우 이름만 그리던 아이가 글을 읽고 쓰는 등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며 보람과 자부심도 느꼈다. 그래서 그동안 했던 대로 가르치면 되겠거니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의 심리 상태다. 경계선 지능인 데다 잦은 가정 폭력으로 다섯 살 때 경찰이 데리고 왔다고 들었다. 불안 증세가 심해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라 했다. 현재 에이디에이치디(ADHD) 약을 먹고 있으며 상담도 계속 받는다고 한다. 또 짐작이지만 아이끼리의 위계 문제도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매사가 불만이고 무기력하며 도무지 공부할 마음이 없다. “하기 싫다”라는 말을 수시로 한다. 공부하다 언제 책상에 엎드려 두 팔을 모으고 얼굴을 가릴지 조마조마하다. 기분이 어떤지 눈치 봐가며 조금만 하자고 달래 겨우겨우 이어 왔는데 그날은 글자 몇 개 읽더니 책에 낙서만 한다. 그것도 연필에 힘까지 주며 사방으로 쫙쫙 긋고는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는다. 분노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더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화를 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스스로가 부족한 것투성이면서 어설픈 전문가 흉내를 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아이마다 수준과 성향이 다른데 일반화해 가르치려 한 것은 아닌지 반성했다.
그나마 나머지 두 아이 때문에 위안이 됐다. 1학년 학생은 더디기는 하지만 이제 이중 모음 들어갔고, 2학년은 음절의 끝소리 규칙이 끝나고 음운 변동을 공부한다. 둘 다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해 처음보다 많이 나아졌다. 1학년 아이는 자주 안으며 내 볼에 뽀뽀를 해 대고, 2학년 친구는 어느 날은 사탕 하나, 또 다른 날은 조그마한 곰돌이 연필깎이와 사랑한다는 말과 하트 표시를 한 종이쪽지를 선물이라며 건넨다. 핀 두 개를 내밀며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며 기다린다. 내 귀에 대고 비밀이라며 작은 소리로 집 앞에서 찾은 네잎클로버에게 친엄마와 살게 해 달라고 빌었다는 아이의 말이 짠하면서도 사랑스럽다. 이런 아이를 어찌 보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보려 한다. 아이들 처지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과 마음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6월 3일부터는 그림책을 한 권씩 읽어 주려고 한다. 그나마 책이라도 가까이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