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체코를 방문한 朴槿惠 대통령이 총리의 안내를 받으면서 프라하의 名所인 카를 다리를 건너다가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나 인사하는 장면이 참 좋았다. 대통령을 향하여 아줌마들이 '건강하세요'라고 격려하였다. 2003년에 썼던 체코 기행문을 소개하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
月刊朝鮮 여행단은 오전 8시에 뉘른베르크를 출발하여 프라하로 향했습니다. 한 2시간 달리니 국경 검문소가 나왔습니다. 독일에서 체코로 들어가는 트럭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운전기사 톤다氏가 우리 일행 40명의 여권을 모아 체코 입국 관리소에 건네 주었습니다. 수속에 40분이 걸렸습니다. 프랑스-독일 국경 사이엔 아예 검문소가 없습니다. 다른 EU(유럽연합) 국가의 국경통과는 여권 검사 없이 이루어집니다. 체코는 1999년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으나 EU에는 내년에 가입할 예정입니다. 따라서 유로貨를 쓰지 않고 「크로나」라는 自國 화폐를 씁니다. 국경 출입국 관리소 내 환전소에서 바꾸니 1유로가 30크로나였습니다.
체코로 들어가 프라하로 달리는데 프랑스 농촌과 비슷한 풍요한 농촌 풍경이 전개되었습니다. 잘 뻗은 고속도로, 정비된 농토, 관리된 山林 등 정리정돈이 잘된 나라의 山河였습니다.
필센 맥주
우리는 중간에 「필센」이란 도시에 들러 점심을 먹었습니다. 필센은 현대 맥주 제조법을 발명한 도시입니다. 필센 맥주는 최고급 맥주입니다. 그 맛의 상큼함, 적당히 쓴맛, 깊은 느낌은 저 같은 反주류파에게도 부드럽게 다가왔습니다. 필센은 13세기에 건설된 도시인데, 聖 바톨로뮤 성당 광장은 한때 유럽에서 가장 넓었다고 합니다. 1295년에 건축이 시작된 이 고딕 성당의 첨탑은 높이가 102.6m로서 체코에서 최고입니다. 광장은 200m×150m쯤 되어 보였는데 광장을 둘러싼 건물群은 르네상스, 바로크 등 여러 형식의 경연장 같았습니다.
우리는 용케도 큰 식당을 하나 찾아내 점심을 시켜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필센 생맥주가 무척 맛있었습니다. 유럽의 고급식당은 단체 손님을 잘 받지 않습니다. 4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구하는 것이 「코스 디자이너」 愼鏞碩씨의 고민거리였습니다.
필센은 공업도시입니다. 1859년에 설립된 스코다 기계공장은 무기와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집중공습을 받았습니다. 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스코다 자동차는 공산주의 시절 동구권의 총아였습니다. 필센의 역사를 보면 15세기 종교개혁가 후스의 운명과 연결됩니다. 필센市는 후스에 동조했습니다. 이 도시는 세상의 종말이 올 때 구원받을 다섯 도시 중 하나로 일컬어졌습니다. 후스가 화형당한 뒤 그의 신봉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필센市는 그들과 맞서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신교도들이 1618년 프라하에서 신성로마제국과 로마교황을 상대로 봉기하자 필센은 신교도 군대에 점령당했습니다. 2년 뒤 신교도 군대는 구교도 군대에 대패했고 그 뒤 300년간 독립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1648년에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체코의 지배권을 공인받은 이후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지방은 신교에서 다시 구교화됩니다. 이런 역사의 격변을 지켜본 聖 바토로뮤 성당은 오늘도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프라하로 가는 車中에서는 건축학을 전공한 한 여행단원의 건축강의가 이어졌습니다.
『건축의 역사는 내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건물은 외관보다 내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서양의 교회는 神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조각이 많고 조각은 거의 성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모르면 서양 건축 특히 고딕 건축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서울에서 세계에 내놓을 만한 건물이 하나 있다면 宗廟(종묘)이다. 위엄 있고 소박한 모습이 자랑스럽다』
프라하 카를 다리 위에서
우리 여행단이 체코의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9월24일 오후 4시 무렵이었습니다. 프라하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예약해 놓은 음악회를 보기 위해 이동했습니다. 꼬불꼬불 좁은 프라하 거리를 관광객 틈에 섞여 몇 번 돌아나가자 오래된 건물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이 건물은 클레멘티눔이라는 수도원이었습니다. 예배당이 연주홀이었고 간이 의자가 300개 정도 놓여 있었습니다. 연주시간인 오후 5시가 되자 기타, 플루트, 첼로, 오보에로 구성된 4중주 악단이 나와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연주곡은 모차르트, 드보르작, 비발디, 스메타나 등의 곡목이었습니다. 드보르작이 작곡한 「신세계」 교향곡의 라르고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프라하에서 들으니 두 음악가의 애국심이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음악도 역사적 현장감이란 게 있는 모양입니다.
저녁을 먹은 뒤 밤늦게 일행 네 사람과 함께 舊市街 광장과 카를 다리를 걸어 보았습니다. 이 광장과 다리는 프라하城과 함께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구경거리입니다. 독일 젊은이들을 필두로 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들뜬 기분으로 밤거리를 쏘다니고 있었습니다. 다리와 광장의 조명은 환상적이었습니다. 광장 근처에 있는 고딕 성당의 첨탑 부분이 창공에 솟아올라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청동색으로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선죽교가 있다』
이 광장에는 종교개혁가 후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1372년 후스는 보헤미아(체코의 지역 이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났습니다. 그는 프라하의 카를 대학에 들어가 공부했고, 신학대학 학장도 지냈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영국의 종교개혁 신학자 존 위클리프였습니다.
당시 부패한 천주교는 보헤미아 지방 토지의 반을 차지하고는 농부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배층에 대한 반감이 종교개혁 사상과 맞물려 후스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체코 왕을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당대의 두 권력집단인 정권과 교회를 다 敵으로 돌린 것입니다. 1415년 종교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火刑에 처해졌습니다.
舊市街 광장의 후스 동상은 1915년 화형 500년이 되는 해에 만들어졌습니다. 후스가 처형된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신교도 군대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200년 뒤인 17세기 초 30년전쟁의 불씨가 되어 이 지역을 戰亂으로 몰아넣습니다.
카를 다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가 1400년에 완공한 길이 500m, 높이 50m, 너비 20m의 돌다리입니다. 舊시가 쪽 다리는 높이 40m 가량의 탑이 서 있고 다리 난간을 따라서는 30여 개의 조각상이 서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블타바江(독일어로는 몰다우江)은 한강의 반 정도 폭을 가진 강인데 프라하의 한가운데를 흐릅니다.
이 강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아름답기도 하고 견고하기도 합니다. 만든 지 550년간은 사람, 마차뿐 아니라 자동차까지 통과시켰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차량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밤중에 이 다리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언덕 위의 프라하城과 舊市街 광장의 성당 첨탑이 은은한 조명 속에서 오막살이처럼 경건한 불빛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연인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기 매우 힘들 것입니다. 다리 위에선 집시로 보이는 걸인 여자가 큰 셰퍼드犬을 끌어 안고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하여 동전을 던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작년 여름에 블타바강에 큰 홍수가 나서 카를 다리가 유실될 뻔했다고 합니다. 시내의 침수로 지난 연말까지 지하철이 운행되지 못했습니다. 프라하에는 카를 4세 大帝가 만든 다리, 학교, 城 등이 무척 많습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프라하를 수도로 정하고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한 모양입니다. 다리 입구에 놓인 그의 동상은 세종대왕처럼 아주 인자스러운 임금님 모습입니다.
잘 만든 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의뿐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훌륭한 관광자원으로서 후손들에게 돈벌이를 시켜 주는가 하면, 시민들의 놀이터이고 거리 악사들의 무대일 수 있다는 것을 카를 다리가 모범으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이처럼 힘이 셉니다. 우리 여행단의 한 사람이 『이 다리가 만들어지던 때가 朝鮮개국 무렵인데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체코에 카를 다리가 있다면 우리에겐 선죽교가 있다』
『어설프게 권력에 도전하면 이렇게 맞아 죽는다』
프라하에는 600년 된 건물들이 많습니다. 카를 4세 때가 이 도시의 전성기인데 그때부터 600년간 戰火에 휩쓸리지 않았으므로 이 도시는 여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하나하나 추가해 가면서 진주 같은 모습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프라하에 오면 슬라브 냄새보다는 독일 냄새가 더 많이 납니다. 체코 민족의 피에는 폴란드나 러시아와는 달리 슬라브 민족과 독일 민족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양쪽의 좋은 점을 다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슬라브 민족의 양순함, 憂愁, 예술성, 독일 민족의 근면과 성실과 치밀함이 융화된 것이 체코의 민족성, 예술성, 그리고 역사의 성격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술과 공업과 맥주로 유명한 체코의 국가적 성격을 만든 것이 아닐까요. 블타바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800년에 걸쳐 건설된 城은 길이 570m, 너비 128m입니다. 그 안에 성당과 대통령궁 등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城門이 대단합니다. 城門 위에 큰 석조상이 두 개 있는데, 칼과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고 찔러 죽이는 모습입니다. 우리 여행단의 안내인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체코를 지배하면서 너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만든 조각이다』고 설명했습니다.
여행단의 일원이 『그렇다고 저런 식으로 피지배 민족을 자극해서야 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조각상은 1767~1770년에 만들어진 그리스 신화 타이탄像입니다. 맞아 죽고 찔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두 청년인데, 그 손동작이 끝까지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에게 저항하는 모습입니다. 이 조각상을 본 체코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해서 분노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을 것 같습니다.
우리 여행단의 일원은 '金泳三 前 대통령이 여기에 와서 저 조각상을 보았으면 민주화에 역행한다고 중앙청처럼 당장 때려부수라고 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조각상이 주는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권력자에게 어설프게 대들다가는 맞아 죽는다」는 뜻.
이 조각상 밑에서 不動자세로 서 있는 두 군인의 옷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분청색깔의 군복인데, 이 옷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체코 출신의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이 감독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렸습니다. 이 영화는 비엔나가 배경이지만 프라하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하벨 대통령은 이 영화의 의상담당자를 불러 대통령궁 성문지기 군인들을 포함한 전체 군인들의 정복을 새로 디자인해 달고 했다는 것입니다. 분청색 군복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존재했던 체코공화국의 군복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날(9월25일) 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한 해에 프라하를 찾는 관광객은 6000만~1억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입국 관광객의 열 배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인근 독일지역 관광객들이 와서 하루 만에 돌아가곤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지금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프라하임은 확실합니다. 인구 120만 명의 도시가 관광객 半, 시민 半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으면 소매치기도 많은 법, 종일 여권이 든 호주머니를 감싸고 다녀야 했습니다.
30년전쟁의 발화점
城 안에는 옛 王宮이 있습니다. 이 건물 안에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파견한 총독이 근무했던 총독부 방이 있습니다. 1618년 5월28일 新敎로 개종한 체코의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보낸 관리들과 그 비서들을 이 방의 창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들은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만, 이 사건은 그 뒤 중앙유럽을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으로 몰아간 「30년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프라하이지만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의 하나가 여기서 發火된 것입니다.
체코는 1938년 뮌헨 협정의 희생물이 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한 원인으로 제공됩니다. 1968년에는 공산정권下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가 소련군의 개입으로 침묵했지만 1989년 11월 「우단 혁명(Velvet Revolution)」을 통해서 공산독재를 무혈로 끝장냅니다. 체코 사람들이 보여 준 최근의 행태는 「현명」과 「신중」과 「교양」이란 말로 상징됩니다. 실력과 분수에 넘는 행동을 자제하다가 결정적 시기가 오면 결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역사를 확실하게 전환시키는 힘은, 저의 추측입니다만, 과거의 시행착오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30년 전쟁은 체코 사람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결말이 났습니다. 구교도 세력이 이 지역에선 이겼기 때문입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다시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그들은 신교도들을 再구교화하는 정책을 폅니다. 체코 사람들은 30년전쟁을 통해서 현명함을 체득했고, 그것은 1989년 11월 공산정권 타도 때 가장 극적으로 발휘되었던 것입니다.
1989년 11월17일 공산당 지배下의 체코 정부는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구타했습니다.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바츨라프 광장에서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한때는 70만 명의 시위대가 이 광장을 메웠습니다. 1989년 11월24일 이 광장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국립박물관 발코니에 알렉산더 두브체크(1968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공산당 서기장)와 바클레브 하벨(뒤에 대통령)이 나타나 공산당 정권 타도를 선언했습니다. 공산정권은 즉시 정부를 인계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오전에 우리는 민주화의 현장인 바츨라프 광장을 거닐었습니다. 지금은 철거된 우리 중앙청과 거의 같은 크기의 국립미술관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 국립박물관의 위치가 옛 중앙청을 개조해서 쓰던 중앙박물관과 비슷했습니다. 다시 한 번 중앙청을 부수어 역사를 파괴한 정치인들의 無知에 흥분하는 목소리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지도층은 체코 사람들과는 달리 역사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형식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아주 위험한 경향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교훈을 살리지 못하고 그 뒤 40년 사이에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습니다. 피할 수 있었던 것을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인 전쟁이지요.
6ㆍ25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인명을 잃고도 지금 한국은 그 전쟁을 초래했던 金正日 세력에 속고 국내 좌익세력의 발호를 허용하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 여행객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당하고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
프라하 관광은 대부분 도보로 이루어 집니다. 차도와 인도 할 것 없이 시내 대부분의 도로는 작은 직사각형 돌조각을 박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편한 신발을 신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어리숙한 척하는 체코인
프라하에서 마지막 날, 저녁식사는 프라하의 분위기가 넘치는 곳에서 했습니다. 「콜코보나」라는 술집 겸 음식점이었는데 우리의 허름한 맥주집 같은 곳이었지만 명소라고 합니다. 공산주의 시절 체코의 지식인과 反체제 인사들이 이 술집을 드나 들며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이 집의 오리 요리가 아주 일품이었지만 그것이 나오기 전에 나오는 음식이 너무 많아 거의 손도 대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생맥주 한 잔이 1유로(1300원). 독일권에선 와인이 맥주에 밀리고 있었습니다.
9월26일, 우리 여행단은 프라하의 메리오트 호텔에서 駐체코공화국 李浚熙 한국 대사를 모시고 강연을 들었습니다. 체코에 대한 단편적 지식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 주는 것 같은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는 쉽고 간략한 법입니다.
李대사는 체코의 역사를 잘 해설해 주었는데, 그 핵심은 체코인들이 일찍부터 독일, 오스트리아와 소통하면서 서구와 일체가 되어 움직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독일-오스트리아의 게르만 문화권과 함께 발전해 왔기 때문에 슬라브的 후진성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체코인들의 특징을 李대사는 「교양있고, 진지하고, 겸손하며, 잘 훈련ㆍ교육된 점」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체코 사람들은 현명하고 똑똑한데도 어리숙한 척하기도 하면서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어 간다고 했습니다. 무식하면서도 똑똑한 척하고, 실력이 없으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지도층에 너무나 많은 한국의 사정과 퍽 다릅니다.
체코는 현재 1인당 GNP가 약 7000달러, 구매력은 1인당 1만4000달러 수준으로 한국을 바짝 좇아 오고 있습니다. 문화와 역사의 축적에서 우러나는 체코의 저력이 아주 단시간에 공산치하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서구로의 복귀를 성공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
'아마데우스'의 감독
밀로스 포르만이란 감독의 이름을 몰라도 '아마데우스'(1984년), '뻐꾸기 둥지 위를 날다'(1975년)라는 영화는 알 것이다. 영화사에 남을 만한 名作의 감독인 포르만은 체코 사람이다. 체코 사람들은 인구에 비하여 예술, 문학, 스포츠, 과학 부문에서 위대한 천재들을 유달리 많이 배출했다.
밀로스 포르만은 공산 체코 시절부터 영화를 만들다가 1968년 민주화 운동이 소련군 탱크에 의해서 압살되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5년에 만든 잭 니콜슨 주연의 '뻐꾸기 둥지 위를 날다'는 다섯 개의 오스카상을 받았다. 정신병동이 무대이다.
1984년의 '아마데우스'는 여덟 개의 오스카상을 받았다. 울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생애를 경쟁자인 안토니오 살리에르의 눈을 통해서 그린 壯重한 영화이다. 살리에르는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이 보통인 사람이다. 그는 천재 모차르트를 질투하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뒤 정신병에 걸려 말년을 수용소에서 보낸다. 여기서 만난 신부에게 털어놓는 회고담 형식의 영화이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대사는 영화가 끝나갈 무렵 정신병자 살리에르가 미소를 띠면서 하는 말이다.
'나는 보통사람들의 챔피언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모차르트와 포르만 같은 천재를 만나 열등감을 느끼는 많은 보통사람들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다. 살리에르에게 동정이 가는 것은 그가 바로 보통사람들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화면은 온통 청동색이다. 모차르트가 활동했던 18세기말의 비엔나 거리를 담은 화면인데 실제 촬영은 프라하에서 이뤄졌다. 그 이유에 대해서 포르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라하는 보석과 같은 도시이지요. 카메라를 360도로 돌려도 현대의 흔적이 보이지 않거든요'
프라하는 15세기에 칼4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어 이 도시를 수도로 삼은 이후 근 600년간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쌓여가면서 만들어진 도시이다. 비엔나보다도 옛날 건물들이 더 집중되어 있다. 아마데우스를 찍기 위하여 세트를 많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아마데우스 영화에 나오는 골목과 다리와 성당건물을 프라하에 가면 현실에서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영화속의 도시처럼 아름다운 프라하이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완성하여 初演했다는 인연이 있다.
2년 전 두번째로 尙美會 여행단과 함께 프라하에 들런 나는 작은 교회에서 열린 관광객용 조촐한 연주회를 구경했다. 체코 출신 드볼작의 교향악 '신세계'에 등장하는 '라르고'와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등을 현장에서 들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
프라하 紀行-회색의 知性
조갑제
*이 글은 필자가 1996년에 월간조선에 연재했던 '몽골벨트를 가다' 중에서 뽑은 것이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매년 평균 약 1억의 관광객이 이 도시를 찾는다고 한다. 상당수가 독일·오스트리아 등 이웃 유럽국가에서 육로로 들어와 스치고 가는 관광객이라 숫자만큼은 관광수입이 많지가 않다. 프라하는 지난 6백년간 한번도 전화(戰禍)를 당하지 않은 도시다. 이 도시에서는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도(古都) 속에서 현대가 눈치를 보면서 겨우 한구석에 붙어 있는 꼴이다.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는 감독 미로쉬 포르만이 체코 사람인 이유도 있겠지만 비엔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도 프라하에서 촬영되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가 초연(初演)된 극장도 아직 있고 그때처럼 지금도 공연중이다. 프라하가 이렇게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체코 사람들의 비겁함(?) 때문이다.
그들은 위기에 처하면 아예 항복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생존과 보존의 방도를 찾았다. 1938년 히틀러가 뮌헨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농락함으로써 체코의 독일인 거주지 슈테트란트를 점령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히틀러는 슈테트란트만 먹은 게 아니라 내친 김에 체코까지를 점령하여 보호령으로 삼고 슬로바키아는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이래도 체코에서는 조직적인 저항이 없었다.
1945년 소련군이 동쪽에서 접근해오자 프라하 시민들이 봉기하였다. 프라하 시민들은 독일군과 협상하여 도시를 보존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철수를 보장해주는 대신에 독일군은 도시를 파괴하지 않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버린 체코에서는 공산당이 그렇게 악독하게 굴지 않았다고 한다. 1968년 체코 공산당이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자 소련은 군대를 보내 이를 저지했다. 프라하의 봄은 소련군의 무력개입으로 「겨울」이 돼 버렸다. 이때도 소련군 탱크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시위대는 조용히 사라졌다. 1956년 헝가리 사람들이 소련 탱크를 상대로 영웅적인 反共투쟁을 펼쳤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989년의 공산정부 붕괴도 11월의 反共시위 1주일 후 공산정부가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아무 유혈사태 없이 조용히 이루어졌다. 1992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갈라설 때도 그 복잡한 이혼 수속을 조용히 품위 있게 마쳤다. 이혼이 너무 조용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직도 체코슬로바키아가 존재하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무혈 민주화 혁명을 velvet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우단처럼 부드러운 혁명이란 뜻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한 것을 velvet divorce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이 무혈혁명의 지도자는 희곡작가 하벨이었다. 그는 4년간 감옥생활을 한 인권운동가였다. 온건한 하벨 아래서 체코가 혁명과 分國의 과정을 무리없이 치른 것이다)
교양의 한 기준을 심각한 것을 조용히 처리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면 체코 사람들은 참으로 지성인들이다. 프라하 舊시가의 중심을 이루는 광장에는 종교개혁가 후스가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하는 동상이 있다. 체코 지식인 사회에서는 『후스냐 갈릴레오냐』하는 말이 있다. 후스처럼 지조를 지키면서 용감하게 죽을 것인가, 갈릴레오처럼 종교재판에선 항복을 하고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면서 자신의 일을 계속하여 후세를 기약할 것인가. 살아남아 인류의 공영에 이바지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갈릴레오의 삶과 같은 것이 바로 프라하의 회색 지성이며 파란 많았던 역사에서 터득한 기술인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리
프라하 교외에는 대우가 인수한 아비아(AVIA)라는 체코 자동차 공장이 있다. 이 공장은 1920년에 이미 비행기를 만들었던 곳이다. 金日成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서명한 방명록도 남아 있다. 이런 공장은 한국인이 맡아 돌려야 생산성이 살아난다는 것이 동구에서 실증되고 있다. 한국인이 가진 비교우위는 기술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고 교양은 더더구나 아니다. 거대한 기업조직을 장악하여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줄 아는 생산관리 기술이 바로 오늘날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는 분야인 것이다. 생산관리 기술의 요체는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어떻게 다루고 부리느냐 하는 인간 경영술이다.
몽골인들이 어디를 가나 뛰어나게 잘했던 일이 바로 이런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였다. 해외에 나간 한국인이 현지 노동력을 장악하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군대식 규율로 질서를 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솔선수범이다. 솔선수범이란 것은 결국 자기 희생이다. 한국인 간부들의 이런 자세가 현지인들을 인간적으로 감동시킬 때 비로소 공장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어딜 가나 공통점이었다.
몽골族처럼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꼼짝 못하게 끌고가는 노하우를 오래 쌓은 사람들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전장에서의 무자비성과 통치시의 관용과 개방으로 타민족을 다루어갔다. 그런 경험은 전쟁과 식민통치를 통해 얻은 것이었다. 한국인이 어떻게 이런 거대 조직의 경영술을 체득했느냐 하는 것은 경영학자들의 논쟁 거리이기도 하다. 기자는 큰 전쟁을 치러본 경험과 군대생활의 경험, 그리고 몽골族으로서 타고난 천성이 결합된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국 사람들의 심리에 대하여 미국의 저명한 동양학자 루시안 파이는 「아시아의 권력과 정치」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죽은 친척과 친지들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죄의식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위험에 처해서도 「나만은 무사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변하고 어떤 모험도 감수하려는 공격적 태도를 갖게 한다. 한국의 공무원들과 민간인들 모두는 항상 자신들은 예외적으로 운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운명지워진 인간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전쟁 체험은 그들에게 어려운 과업은 어떻게 조직적으로 대처하면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의무, 희생, 책임감에 기초한 군사문화의 효율성에 길들여진 가운데 한국인들은 살아남은 인간답게 무엇이든지 과감하게 생각하고 거창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하도록 鼓舞(고무)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