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은 여행작가의 서울이야기-성동구 ②] 청계천 복원의 대역사
일요서울 2023.02.10
청계천 복원 필요성이 제기된 시기는 1990년대 초다. 그 이전까지 우리 사회의 관심사는 개발과 발전 그리고 도약이었다. ‘성장이 복음’인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청계천은 성장 패러다임의 상징이었다. 판자촌을 쓸어버린 뒤 만들어진 청계로와 청계고가도로는 압축성장의 모범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울 역사 복원을 주장하는 역사학자, 하천 살리기를 역설하는 환경론자, 도시미관을 강조하는 건축학자의 의견은 무시됐다.
청계고가도로가 들어선뒤 청계천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1990년대 청계촌 복원, 성장 패러다임의 상징이 되다!
- 일제시대, ‘청계천 암거화 계획’ 경성 위생 문제 해결 명목
서울역사 복원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준 하나의 기사가 있다. 2002년 2월 25일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지하 청계천을 둘러본 기자의 증언이었다.
「지하 청계천의 모습은 지난 40여 년간 암흑의 세계에 머물면서,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의 이중 구조물을 이고 산 거대한 콘크리트관 그 자체였다. <중략> 대대적인 복개 공사를 통해 자신을 암흑세계에 가둬버린 것에 앙갚음이라도 하듯 역한 냄새를 토해내며 이방인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청계천은 역시 하천이다. 청계천은 흐르고 있었다.」
어둠의 터널 속에서도 생명을 지탱하는 장엄한 생태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생명을 발견한 이는 기자만이 아니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한나라당)는 “복개된 곳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 빛이 드나든 모양이다. 그곳에서 똥참외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우리 민족 생활변천사 상징, 청계천 박물관
청계천박물관, 청계천 물길을 형상화한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계천 복개 구간을 돌아보는 행사는 당시 이명박 후보의 기획이었다. ‘자연을 복원하고 생명의 숨결을 살리는 대역사’이라는 명분을 만들고 여론을 환기하기 위한 언론플레이였다. 그러면 어떻냐. 그것이 청계천 복원의 출발임은 부정할 수 없는데.
판잣집 테마촌에서 청계천로를 건너편 청계천박물관이 있다. 두물다리 오른편이다. 긴 유리 형태의 관 모양 그리고 고가 형태의 디자인을 하고 있다. 복원공사 이전과 이후의 청계천을 형상화한 듯하다. 외부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 경사로로 연결된 전시를 보면서 1층까지 내려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길처럼 역사를 따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청계천박물관은 조선이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이래 우리 민족의 생활 변천사임을 잘 보여준다. 특히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청계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다.
청계천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다. ‘열린 하천’이었다. 박물관은 조선시대 청계천의 역사를 ‘개천시대’(제1존)이라는 이름으로 꾸몄다. 태종은 집권 초 도성을 가로지르는 하천 치수 작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개거도감 설치하고 하천의 축대를 쌓았다. 광통교와 혜정교를 놓았다. 이 공사 이후부터 청계천은 개천으로 불렸다.
세종은 1441년 마전교 부근에 수표를 설치했다. 수표는 하천의 수위 변화를 측량하는 기구다. 영조는 1760년 대대적인 개천 준설 작업을 벌인다. 이를 ‘경진준천(庚辰濬川)’이라 한다. 하천에서 판 흙을 오관수문 옆에 쌓았다. 쌓인 흙이 마치 산처럼 높았다. 그래서 이를 가산(假山) 혹은 조산(造山)이라고 했다.
청계천박물관 내부와 각종 전시물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리고 개천의 폭을 넓혔다. 물길도 직선으로 폈다. 이때 현재의 청계천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경진준천이 얼마나 큰 공사인지 알 수 있는 근거가 있다. 당시 한양 인구는 대략 16만 명이었다. 이 공사에 동원된 인부(연인원)는 무려 20만 명이었다. 준설공사에 그친 게 아니다.
제방 붕괴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버드나무다. 버드나무가 무성해진 뒤 개천은 상춘객의 놀이터가 됐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상춘객을 상대로 개천 천변의 버드나무 가지로 가재도구를 만들어 파는 직업(‘고리백정’)이 생겨날 정도였다. 영조는 스스로 잘한 정책 세 가지를 꼽았다. 탕평책 실시, 균역법 실행과 함께 준천이 그것이었다.
청계천 ‘도시의 암종’으로 불리어진 까닭
일제강점기때 청계천 암거화 계획을 담은 대경성계획.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제2존은 ‘청계천, 청계로’다. 청계천 물길이 복개되어 도로가 되는 과정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일제가 1936년 조선총독부를 남산에서 경복궁으로 이전한 뒤 ‘대경성계획’을 수립한다. 한양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으로 이름이 바뀐다. 개천도 청계천으로 개명됐다. 이 계획 속에 청계천 복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명 ‘청계천 암거화 계획’이었다. 경성의 환경과 위생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이었다.
당시 청계천은 ‘도시의 암종’으로 일컬어졌다. 제방도로는 ‘살인도로’로 불렸다. 도시 인구 증가와 산업화 생활양식의 변화로 인해 청계천의 수질은 급속히 나빠진 탓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속셈은 경성의 환경개선에 있지 않다. 침략전쟁 준비의 일환이었다. ‘도시의 암종’을 완전히 도려내겠다는 일본의 구상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의 전선이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만 일부 복개됐다. 복개 공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1958년이다. 2.7km 전 구간이 복개되고 그 위에 5.7km의 청계고가도로가 놓였다. 이렇게 청계천은 우리 눈에 사라졌다.
1960~70년대 청계천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진자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서울이 바뀌기 위해서는 도심이 바뀌어야 했다. 당시 청계천은 서울의 수치였다. 이런 얘기는 ‘청계천, 청계로’에 전시된 사진 자료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진작가(홍순태, 김한용, 한영수, 노무라 모토유키)가 찍은 청계천과 판잣집 사진은 충격적이다. 청계천이 아니라 ‘탁계천(濁溪川)’이었다. 토사와 오수, 오물이 흐르고 있다.
판잣집의 반은 지상에 반은 수중에 있다. 판잣집 아낙은 더러운 물에서 빨래하고 판자촌 아이는 물놀이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청계천을 덮는 게 서울 발전을 위해서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판잣집은 헐렸다. 청계고가도로 옆으로 신식 상가가 들어섰다. 불 꺼지지 않는 상가가 됐다. 산업화의 전진기지가 됐다.
동물 177종,식물 375종 수많은 생명 공존 개천
시대가 달라졌다. 도로를 하천으로 돌려놓은 사업이 진행됐다.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른다. 똥참외 싹만이 아니다. 시든 수초가 무성하게 수변을 메우고 있다. 물속에는 민물고기가 추운 줄도 모르고 떼 지어 놀고 있다.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동물 177종, 식물 375종 생존) 청계천에는 생태학교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청계천변에서 길고 느린 겨울을 즐기고 있다. 청계천박물관에서 복원된 청계천을 보는 것 역시 청계천을 걷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다. 박물관 2층에는 스크린을 통해 복원된 아름다운 청계천을 볼 수 있다.
청계천 박물관에 전시된 모조 수표. (사진=김경은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