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7일 주일 오전 예배
사도행전 설교
성경낭독 : 사 2:1-5; 마 24:36-44
본문 : 행 14:19-28
제목 : “교회는 무엇을 통해서 서게 되는가?”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27편 1,2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49편 1,2,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69편 10,11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48편 1,2,3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교회는 무엇을 통해서 서게 되는가?
J. H. 지우엣(Jowett)이라는 박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산토끼가 피를 흘리며 눈 위로 지나간 자취를 본 적이 있다. 유럽을 지나간 바울의 자취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 19절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버린” 사건을 읽습니다. 저도 어릴 때 머리에 돌을 맞아 본 기억이 있고, 제가 돌을 던져서 제 동생이 머리에 맞아 본 적도 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아이들이 다들 험하게 놀았고, 그래서 그런 경험이 있는 것이지만, 그리 험하게 놀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돌멩이를 던지는 일은 극도로 조심하는 일이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맞게 되면 크게 다친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유대인의 형벌, 곧 돌로 쳐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굉장히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돌을 맞으면서 스데반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실제로 스데반처럼 “죽었다”고 생각했겠죠. 성밖에 갖다 버릴 정도였으니 정신을 잃은 상태였을 것이고, 어쩌면 잠시 동안 숨이 끊어졌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버려졌다가 정신을 차려서 다시 성으로 들어갑니다.
워낙 요즘은 사람들이 ‘신파’에 식상한 시대이기 때문에 슬픔을 담백하게 표현할 때 훨씬 더 슬플 때가 많은데, 여기 기술을 보면 마치 그런 생각이 듭니다. 20절을 보면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 이렇게만 쓰고 있습니다. 참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한 기술이지요. 헬라어로 보면 더 심하게 느껴집니다.
분사로 “제자들이 에워싸고 있던 때에”라고 씁니다.
: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면 죽어서 내버려진 바울에게로 몰려간 직후인 것으로 보입니다.아마도 시간이 오래 흘렀다면 장사를 지내려 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냥 동사 두 개가 달랑 나옵니다.
“그는 일어났다”
“그는 들어갔다, 성에”
정말 한없이 단촐하고 담백한 표현입니다. 감정이 이입될 아무것도 없어 보일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기 도리어 얼마나 더 커다란 감정이입이 됩니까? 바울이 이렇게 행동하는 일이 얼마나 더 놀라운 것이 됩니까?
여기에 이어지는 말씀 또한 놀랍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정말로 단촐하게 쓰고 있을 뿐입니다. “다음 날에 갔다,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루스드라에서 더베까지는 96km 정도의 거리입니다. 어떤 주석에는 150km라고 되어 있는 데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로 어제 돌을 맞고 죽었다고 버려졌던 사람이, 오늘 96km를 걸어서 갈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일이 오늘 나에게 일어난다면 그게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런 일일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제 등산을 다녀와서 오늘 근육통이 조금만 있어도 오래 걷는 것이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오랜만에 축구를 하거나 수영을 다녀와서 하루 온종일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어제 죽었다고 했을 정도였던 사람이 오늘 96km를 걸어서 갈 수 있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의 이러한 초인적 행동들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이런 상상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바울의 여정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제가 설교의 제일 처음에 인용했던 말처럼, 참으로 유럽 대륙에의 복음의 전파는 ‘바울의 피로 얼룩진’ 여정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의 이 복음 전파의 내용들이 살아 숨 쉴 수 있게 되려면, 지나치게 생략하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시다. 참으로 유럽 대륙에의 복음의 전파는 ‘바울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여정을 살펴보면서, 또 이 여정 중 바울이 당부한 말과 한 행동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어떻게 세우시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교회는 무엇을 통해서 서게 되는가?”입니다.
첫째, 주께서 주신 바에 매달림
1. 선교사들의 행동
첫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나바와 바울이 이 박해 후에 한 행동들입니다.
20절 말미와 21절 말씀은 바울이 돌로 침을 당한 데서 벌떡 일어난 다음에 즉시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더베로 갔다”는 것과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즉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라고 한 것에 주목해 보도록 합시다. 이 문구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신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가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헬라어로 이 주님의 지상명령을 보면, 주동사는 “제자를 삼으라”입니다. 긴 문장이지만 크게 구분해서 말해보자면, “제자를 삼으라”라는 본동사 밑에 “세례를 주다”와 “가르치다”가 분사형으로 위치해있는 구조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은 “제자를 삼을 것”인데, 그 제자를 삼는 방식이 무언가 하면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그리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21절 말씀은 이 주님의 명령을 얼핏 떠오르게 합니다.
사도행전 14장 21절 말씀은 비슷한 방식으로 두 개의 분사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분사가 “복음을 전하다”와 “제자 삼다”입니다. 바로 이런 점, 분사로 이 활동이 정리되는 문장 형식이라는 점과, 그 분사의 내용이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말씀의 내용은 ‘주님의 대위임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바나바와 바울은 핍박의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과 “제자를 삼는”일을 통해서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맡기셨던 일, 다르게 말하자면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내려주실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해서 하실 것이라고 언질을 주셨던 바로 그 일을, 여기 멀리 이방 땅에서 묵묵히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신 그것을 매진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21절 말씀을 읽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켜지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바나바와 바울이 이역만리 먼 땅에서 ‘바로 우리 주님께서 주셨던 명령을 준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켜주는 감흥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주신 그것에 매진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끔 TV나 인터넷에서, 강아지가 버린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장면을 보시게 되면 마음속에 어떤 단어가 떠오르십니까? 주인이 죽었는데 7년, 10년 동안 계속해서 그 주인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는 개들의 이야기를 미디어에서 접하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충성’입니다.
우리는 바나바와 바울의 이 모습을 보면서 ‘충성’을 떠올립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워진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썩 괜찮은 방식을 끊임없이 도입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주님께서 기도에서도 가르치셨던 것처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곧 원형은 우리가 창출할 수 없고, 참된 지혜는 오직 삼위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교회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선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나의 대단한 열심’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일깨워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주께서 승천하신 직후, 또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이 주님을 대신하여 이 땅의 교회를 다스리기 시작한 직후, 초대교회의 행동의 지침은, ‘언제나 주께서 주셨던 명령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면서, 교회가 첨단화되었다고 하면서, 항상 무언가 세련되고 색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네 본성’이 선호하고 좋아하는 면들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워져야 할 궁극적인 방향은 언제든지 ‘다시금 주님의 명령으로 돌아가는 일’, ‘다시금 주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하는 일’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맙시다. 어떤 것들이 우리를 동요하게 만들더라도, 언제나 다시 처음으로, 기초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던 것,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것, 그것을 교회 안에 이루는 일에 우리의 모든 힘을 쏟도록 합시다.
우리가 바나바와 바울의 행동, 또 그것을 묘사한 21절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의 중요한 첫째 방법은 ‘주께서 주신 바에 매달림’입니다.
둘째, 교회는 항상 고난 위에 건설되었다
: 핍박과 교회 성장의 불가분리의 관계, 그리고 고난의 본질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22절을 함께 읽어보도록 합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고난
22절의 앞부분 말씀은 우리가 첫째 주제에서 살폈던 내용과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더베에서는 21절의 “복음을 전하다”와 “제자 삼다”라는 두 분사로 그 사역이 요약되었는데, 이제 왔던 경로를 역으로 거슬러 가면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면서의 그들의 사역은 22절에 다시 두 개의 분사로 요약됩니다. 22절에서 사용된 두 분사는 “굳게 하다”와 “권하다”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했던 그 도시들을 다시 둘러보면서(복음을 전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가 첫째 주제에서 살폈던 활동을 지속합니다. 곧 “굳게 하다”와 “권하다” 역시 2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이미 전한 복음’, ‘이방인 교회가 처음으로 받아서 세워지게 된 바로 그 복음’, 그것에 서 있을 수 있도록 그들을 든든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덧붙여 22절 말미를 보면 한 가지 주제가 더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22절 말씀은 앞의 두 분사, “굳게 하다”와 “권하다”로 말씀한 후에, 영어로 치자면 and에 해당하는 접속사를 쓰고(우리말에서는 “또”라고 번역함)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나바와 바울이 새롭게 세워지는 이 교회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하여 준 두 번째의 교훈은 ‘교회는 고난받아야 한다’는 주제입니다.
왜 갓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에게 고난을 말했을까?
왜 사도들은 교회가 세워져야 하는 시점에 ‘고난’을 말했을까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바나바와 바울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의 교회 성도들에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 가정과 사업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기게 될 겁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이 이방 도시들에는 아마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이제 처음 나오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면 온갖 종류의 재앙들이 들이닥칠 것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예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계속 생길거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우리가 전도할 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이런 게 있습니다. 교회를 갓 다니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처음 맞이하는 명절에 친지들이 모였을 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더니 사업이 불일 듯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까요?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났는데 “만성적인 질병에 시달렸는데 예배 때 기도하면서 씻은 듯이 나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기독교 신앙에 이로운 것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전도할 때 어떻습니까?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 마음에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만나는 이웃들에게 “교회 다니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교회 다니면 아이들이 착해지고 가정에 평화가 찾아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왜 굳이 ‘고난’을 말할까요? 왜 바나바와 바울은 이제 갓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굳이 이야기해야 했습니까?
고난(뜰립시스)
먼저 “환난”이라고 번역한 것부터 수정을 좀 합시다.
우리는 22절을 읽을 때 “환난”이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약간 ‘재난’이나 ‘재앙’이라는 뉘앙스로 읽게 됩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상당히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 골 1:24
가장 중요한 말씀으로 골로새서 1장 24절을 생각해 봅시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뜰립시스)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자기가 받는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지요. 일차적으로 여기에는 사도께서 받는 육체적인 여러 고난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확장임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여기에는 사도께서 받는 육체적인 여러 고난들이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이라는 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곧 고난을 통해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도는 고난을 받는데, 그 고난은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이며, 나아가 목적을 말하자면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받게 되는 고난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골로새서 말씀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 되는 데 있어서 고난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 되는 데 고난이 필수불가결한 것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되시는 데에 고난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은 ‘재난’이나 ‘재앙’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은 ‘환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교회 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예를 들면 태풍이 불었는데 교회 옥상의 십자가 탑이 넘어지면서 옆의 분식집을 때려서 수리비로 2천만원을 물어주게 생겼다......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서가 말씀하는 ‘고난’의 중요한 점은 고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따라서 고난은 교회의 본질적 특성, 핵심적 특성이라는 사실입니다.
2) 요 16:33
한 본문만 더 이야기해 봅시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뜰립시스)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제가 생각하기에,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환난”(역시 뜰립시스) 또한 ‘재난’이나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런 뉘앙스로 읽힙니다.
“예수 믿어도, 살아가다 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나잖아?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줄게”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단히 잘못 읽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이 말씀에서 언급되고 있는 ‘환난’, 즉 ‘고난’은 ‘살아가다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리 저리 인생길에서 치이게 되는 여러 가지 삶의 어려움들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의 핵심 요지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무엇’을 설명하는데 있지 않고, ‘신자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는 말의 의미는 “너희는 신자이기 때문에 세상에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즉 주님의 이 말씀에서도 역시 ‘고난’은 신자의, 교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핵심적 개념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고난’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여러분! 여기에서 “왜 굳이 선교사들은 이제 갓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저렇게 초를 치는 이야기를 할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고난’을 이야기할까요? 사도행전적 교회들이 ‘건강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는 언제나 복음으로 건강하다면 “고난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의 교회가 건강했기 때문에 심지어는 이제 갓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닥칠테니 마음을 굳게 먹어!”라고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왜 ‘고난’을 말하기 어려워할까요? 우리가 건강하지 않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교회의 본질인데, 그것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말씀에서처럼, 요한복음의 주님의 말씀에서처럼,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난’을 본질로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난은 이야기하기 좋아하지 아니하고 오직 ‘좋은 것’, 심지어 ‘땅에서의 좋은 것’만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교회야말로 루터 선생님이 비판했던, ‘십자가 신학’의 저 반대편에 있는 ‘영광의 신학’만을 좇는 교회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면 왜 그런가요? 왜 고난이 교회의 본질입니까?
이것은 매우 광범위한 주제이지만 아주 단순화시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는 일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빌립보서 말씀은 ‘성육신’과 ‘십자가에 죽으심’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데, 두 사건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를 비어”, 곧 ‘낮아지심’ 혹은 ‘낮추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는 결코,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 사랑의 유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사랑들도 사실은 다 조건적입니다. 연인 사이, 부부 사이의 사랑도, 심지어는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가지는 사랑도, 사실은 다 조건적입니다. 세상에서 “사랑은 조건적이야!”라고 말하면, “아닌 것도 많은데?”라는 소리를 듣겠지요.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조건적’이라는 말은 ‘돈 때문에 사랑한다’거나, ‘무언가 얻을 것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반드시 ‘조건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마음속에 일어나는 충족감이라도 있어야 사랑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뿌듯하기라도 해야 사랑을 합니다. 심지어 “내가 사랑을 위하여 이토록 희생을 했다”라고 하는 자기만족이라도 있어야 사랑을 합니다. 이런 것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건 없는 사랑이란 인간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얻는 것이 뭐가 있나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함으로써 마음에 뿌듯함을 얻으십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한 만족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께, ‘사람인 우리를 사랑하여 더 좋은 감정으로 나아진다’라는 개념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소위 ‘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이 땅에는 유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 그것이 수단이 되어서 무언가에 도달하게 되는, 그러니까 감정이 좋아지거나 행복해지거나 만족하게 되는, 그런 목적이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여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없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께는 ‘사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위하여 사랑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요일 4:16) 때문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주십니다. 수여하십니다. 왜요? 주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시나요?”라는 질문은, 결국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그 본연에 있어, 그 성품에 있어, 희생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빌립보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나요? ‘수여’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주심’이 하나님의 성품이시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주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그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성육신입니까? 왜 십자가인가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원하십니다.
주는 것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타인을 위하여 나를 주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요, 그리스도인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이시기 때문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우리는 그 본성을 나눠가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골로새서에서 “내 고난이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며, “내 이 고난이 바로 그분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의 의미입니다.
교회는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얻기 때문에’ 고난 받지 않습니다.
교회에게 ‘고난’은 ‘본질’입니다.
내가 다른 누군가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통하여 “나는 그러면 무엇을 얻게 되지?”라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내가 너를 위하여 이만큼 양보했는데, 너는 왜 나에게 그러지 않니?”라고 반문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을 통하여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네 교리에서 기독교가 ‘공로의 종교’가 아닌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거저 주십니다. 은혜에 반응하는 것은 내편에서 감사로 하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목적으로 자신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갓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에게 “고난”을 말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건강한 복음의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친히 활동하던 때가 아닙니까! 그들에게는 거짓 복음을 전하는 방송 설교자들이 없었습니다! 처음 예수 믿고, 처음 교회 나올 때부터 ‘순전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각오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22절)
교회는 무엇을 통하여 세워집니까? 고난 받는 것 위에 세워집니다. 교회는 어떤 성도들을 통하여 세워집니까? 고난을 즐거워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세워집니다.
이것이 둘째 주제입니다.
셋째, 교회를 서게 하는 직분자
끝으로 바나바와 바울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를, 23절을 통해 알아봅시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셋째 주제는 “교회는 직분자들을 통하여 세워진다”입니다.
여기 사도행전에서도 그렇지만, 대표적으로 디도서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현대에는 ‘자유’나 ‘인권’, 또 ‘평등’과 같은 이미지가 사람들의 마음에 크게 어필하면서, ‘회중 교회적 정서’가 환영받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풍조는 사실은 ‘장로교회’라고 명패를 달고 있는 교회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그러니까 소속은 장로교회지만 정서적으로는 회중교회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회중교회적 정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민주주의’입니다. 회중이 주인이라는 마인드지요. “국민이 주권을 갖고 있다”라는 식으로 “교인이 결국 교회의 주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그 어떤 곳에서도 교회의 주인이 ‘회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항상’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면 왜 ‘직분자’를 말합니까? 직분자는 ‘권력자’가 아닌가요? 우리가 참으로 회중을 통한 민주적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권력을 가진 직분자들을 견제하고 몰아내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구약 시대 때부터 가장 이상적인 통치 체제를 ‘왕정’으로 둡니다. 신명기 17장은 이스라엘이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을 때 그들 가운데 ‘왕’이 있을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명기적 왕은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네 형제 중에 한 사람”(신 17:15)이라는 것입니다. 곧 신명기적 왕은 다스리나, 군림하지 않습니다. 형제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입니까? 단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왕정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그것을 신약 시대에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냈을까요?
1)
복음서를 잘 읽어보시면,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일들, 특별히 교회를 맡기시는 일들을 결코 ‘회중 전체’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16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6)
예수님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주셨나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하실 때, 회중 모두에게 이 사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2)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똑같은 말씀을 18장에서 사도들 모두에게 주심으로써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 것이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직분자들의 대표로’ 천국 열쇠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교황’으로 여기는 로마교회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3)
우리가 앞에서 살폈던 ‘대위임령’, 곧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는 누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8장 말씀은 이 말씀을 받은 이들이 ‘회중 전체’가 아님을 확실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제자들만 보았고, 주님의 대위임령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회중이 아닙니다. 만약 회중 모두에게 이 명령이 해당된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를 일반 성도들이 어떻게 이행할 것입니까? 세례는 성도들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의 중요한 방식은 “장로들을 세우는 것을 통하여”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도행전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다스릴 사람들인 장로를 세우는 일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비록 사도는 1세기가 지나면서 모두 사라졌지만, 그 사도의 뒤를 이은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는 유지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는데, 누구를 통해서 그리 하십니까? 장로들을 통해서 그리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장로들을 사용하고 계시다”라고 해야 합니다.
정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