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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립과 히브리 해머라는 별명이 붙은 앨버트 레너드 로젠(1924년 2월 29일~2015년 3월 13일)은 1
940년대와 1950년대 10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미국 야구 3루수 겸 오른손 강타자였다.
로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에서 4년간 복무한 뒤
아메리칸리그(AL)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10년간(19471956년) 선수 생활을 모두 소화했다.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내며 5년 연속 100점 이상을 몰아친 그는 4차례 올스타였고
홈런에서 두 번, 타율에서 두 번 선두를 달렸고 AL MVP였다.
로젠은 1044경기에서 홈런 192개, 타점 717개로 통산 타율 0.285를 기록했다.
그는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올스타전에 선발되었다. 로젠은 1955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모델에 출연했다.
로젠은 야구 은퇴 후 20년 동안 주식중개인으로 활동한 데 이어
1970년대 말 뉴욕 양키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자이언츠 등을 사장, 최고경영자(CEO), 총감독으로 다양하게 활약하며
최고의 프런트 임원으로 경기에 복귀했다. 여전히 선수처럼 생각했던 GM으로,
그는 전직 MVP로 선정되었고, 또한 야구 올해의 임원상을 받았다
[초기]
로젠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르탄부르크에서 루이스와 로즈(네 레빈) 로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곧 가족을 떠났고 로젠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가 18개월이었을 때 가족을 플로리다 마이애미로 옮겼다.
로젠은 어렸을 때 천식을 앓았고, 이로 인해 그의 가족은 더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자라면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두 명의 야구선수는 루게릭과 행크 그린버그였다.
그는 리버사이드 초등학교, 아다 메리트 중학교, 마이애미 고등학교 등을 1년간 다녔고,
그 후 플로리다 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플로리다 육군사관학교를 다니며 복싱 장학금을 받았다.
플로리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로젠은 플로리다 게인스빌에 있는 플로리다 대학에 입학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마이너리그 야구를 하기 위해 한 학기를 마치고 대학을 떠났다.
로젠은 1942년 입대한 뒤 4년간 미국 해군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에서 싸우며 프로야구의 경력을 지연시켰다.
그는 그 섬을 향한 치열한 전투에서 오키나와에 처음 상륙할 때 급습선을 항해했다.
1946년 중위로 해군을 떠나 새롭게 떠오르는 야구 인생으로 돌아왔다.
[마이너리그 경력]
로젠은 1946년 피츠필드 일렉트릭스에서 뛰었고, 그 곳에서 처음에는 백업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타율 0.323에 그친 반면 캐나다-아메리칸리그를 홈런(16개)과 타점(86개)에서 선두에 나서자
아이돌 행크 그린버그의 별명 허브류 해머 를 받았다.로젠은 1947년 텍사스 리그의 오클라호마시티 인디언스에서 뛰었고
리그 역사상 가장 훌륭한 개인 시즌을 보냈다. 평균 타수(349개), 안타(186개), 복식(47개), 엑스트라베이스(83개),
타점(141개), 총구(330개), 장타율(619개), 출루율(437개)에서 모두 선두를 달렸다. 그는 텍사스 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로젠은 1948년 뉴욕 양키스 캔자스시티 블루스 농팀에서 뛰었다. 그는 구원투수 찰리 웬슬로프를 양키스에서 인디언스로 보낸
계약의 일환으로 팀의 미국 협회 시즌 동안 블루스에 임대되었다.로젠은 블루스와의 플레이로 미국협회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
로젠은 23세의 나이로 1947년 메이저리그에 첫 출전했다. 로젠은 1948년 캔자스시티 블루스와 마이너리그에서
1년 중 대부분을 뛴 뒤 9월 인디언스에 입단했다. 인디언스가 월드시리즈 명단에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한 뒤
시즌 중 5경기만 뛰었는데도 정규 3루수 켄 켈트너에 뒤진 채 1948년 월드시리즈에 출전했다.
1950년 켈트너가 트레이드됐을 때 로젠은 인디언스의 3루수를 넘겨받아 37개의 홈런으로 아메리칸리그를 이끌며
역대 아메리칸리그 신인선수들보다 더 많은 홈런을 쳤다.1987년 마크 맥과이어가 추월할 때까지 AL 신인 기록으로 우뚝 섰다.
그는 6월 4경기 연속 홈을 밟으며 2011년 제이슨 키프니스까지 인디언스의 신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위업.
로젠은 15.0타수당 리그 최고 홈런 평균을 기록했고 HBP(10개)에서도 선두를 달렸다.
타율 0.287에 116점을 기록했고 볼넷 100개에 장타율 0.543개로 리그 5위를 차지했다.
그의 100개의 볼넷은 2014년까지 오른손 타자의 팀 신기록으로 남았다.
2017년 아론 심판까지 최소 100개의 볼넷을 기록한 가장 최근의 AL 신인으로도 남았다.
홈런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리그 MVP 투표에서 17위를 차지했다.
1951년 로젠은 경기에서도 리그를 이끌었고 타점(102개), 추가루타(55개), 볼넷(85개)에서 리그 5위에 머물렀다.
그는 타율 0.265로 24홈런을 쳤다. 로젠은 2006년 트래비스 해프너가 5개를 칠 때까지 깨지지 않았던
팀 시즌 기록인 4개의 그랜드슬램을 터뜨렸다.
로젠은 1952년 105타점과 297개의 총구로 아메리칸리그를 이끌었다. 이어 득점(101개)과 장타율(524개)에서 3위,
안타(171개)와 복식(32개)에서 5위, 홈런(28개)에서 6위, 타율(.302개)에서 7위였다.
그는 로키 콜라비토가 1959년 6월 10일 홈런 4개로 메이저리그 단일경기 최다 홈런 3개 기록을 1경기 만에 갈아 치웠다.
로젠은 아메리칸리그 MVP 투표에서 10위에 올랐다.
1953년 로젠은 홈런(43개)과 타율(145개), 득점(115개), 장타율(613개), 총구(367개)에서 아메리칸리그를 이끌었다.
OBP에서도 2위, 안타(201개)에서 3위를 차지하며 도루 공동 8위에 올랐다. 20경기 연속 안타도 쳤다.
방어적으로 그는 리그 3루수(3.32개)에서 모두 최고의 레인지율을 보이며 어시스트(338개)와 더블플레이(38개)에서 선두를 달렸다.
그의 타점 총점은 2017년까지 인도인 3루수로는 여전히 가장 많고 한 시즌에 인도인 중 4위다.
그는 시즌 마지막 날 타율 0.336을 기록했고, 타율 3관왕을 놓쳤다.
그는 아메리칸리그 최우수선수(MVP)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는데,
원작인 Hebrew Hammer 이후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빌 제임스의 새로운 역사적인 야구 경기에서 로젠의 1953년 시즌은 3루수들에 의해 가장 위대한 것으로 불린다.
로젠의 패스로 볼 때 포지션 플레이어 에 의해 종합 164위 최고 48위에 올라 있다.
1954년 그는 0.300을 기록하며 희생플라이로 리그를 이끌었고 11개로 SLG에서 4위, 홈런(24개), 타점(102개),
OBP(44개)에서 5위를 차지했다. 손가락 부러짐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전에서도 연속 홈런을 터뜨려
경기 최우수선수(MVP)를 얻었다.이 경기에서 그의 5타점은 5년 전 테드 윌리엄스가 세운 2011시즌에도 버금가는 기록과 맞췄다.
명예의 전당 매니저인 케이시 스텐겔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 젊은 친구, 저 친구는 구기 선수야.
그는 매번 너에게 작품을 줄 것이다. 모든 히트곡들을 가져오면, 현장의 하드 태그를 얻게 된다. 저 친구는 정말 경쟁자야,
넌 네 달콤한 저주 인생을 걸겠지."클리블랜드는 페넌트에서는 이겼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졌다.
로젠의 5년 연속 100타점 이상의 타점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는 1955년 그의 4만 2,500달러 (오늘 35,700달러)의 월급을 37,500달러로 삭감했다.
1955년 로젠은 홈런, 볼넷, 파리 희생 등으로 리그 톱10에 진입했다.
1956년까지 허리 문제와 다리 부상이 로젠을 따라잡았고 그는 시즌이 끝날 때 32세에 은퇴했다.
[증권중개 업자]
로젠은 1956년에 은퇴한 후 주식중개인이 되었고, 그 후 22년간 그가 추구한 직업이다.
[야구 임원]
1978년에는 양키스 회장/대표(1978-79), 그 후 아스트로스(1980-85), 당시 자이언츠의 사장 겸 총지배인이 되었다.
그의 작전은 1985년 샌프란시스코를 마지막 순위에서 1987년 NL 웨스트 타이틀, 1989년 NL 페넌트까지 끌어올려
내셔널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여전히 선수처럼 생각하는 GM으로 평가받는 그는
역대 유일한 최우수선수(MVP)에 오르며 최고 경영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9년 당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감독이었던 스펙 리처드슨과 함께
밀러 라이트를 위한 베이스볼 임원들 이라는 텔레비전 광고에 전설적인 멋진 맛, 덜 채우기 광고 캠페인의 하나로 출연했다.
그 아이디어는 두 명의 메이저리그 고위 야구 임원들이 공식적이고 답답한 회원 전용 클럽에서 큰 거래를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몇 명의 아이들처럼 야구 카드를 교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이 많은 야구 카드를 닦은 나무 테이블 위에 던지기 때문이다. 그 광고는 1979년 여름 동안
그리고 그 해 7게임인 해적-오리올스 월드 시리즈 의 매 경기마다 크게 운영되었다.
이 광고는 광고대행사인 맥캔-에릭슨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기획사 작가 피터 호프만이 구상하고 썼다. 이 영화는 밥 지랄디가 감독을 맡았다.
[개인 생활]
로젠의 19년 부인인 전 테레사 앤 블럼버그는 1971년 5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몇 년 후 두 번째 부인 리타와 재혼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고, 의붓딸과 의붓딸이 있다. 로젠은 2001년과 2002년에 총감독의 특별보좌관으로
양키스와 접촉하는 등 야구팀을 위해 가끔 자문을 했다.
그는 더스틴 호프만, 유대인, 야구: 아메리칸 러브스토리가 내레이션한 2010년 영화에 출연했다.
로젠은 2015년 3월 13일 캘리포니아 란초 미라지에서 사망했다
[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7-1956년)
[커리어 하이라이트 및 시상]
4번의 올스타(1952-1955)
월드시리즈 챔피언 (1948년)
AL MVP (1953년)
2번의 AL 홈런 왕(1950, 1953)
2번의 AL 타점 왕(1952-1953)
클리블랜드 인디언 명예의 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