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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 향기 스크랩 "순장" 대가야 고령의 고분군 1
月谷(신종기) 추천 0 조회 302 07.12.01 10:1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순장"(殉葬) 대가야 고령의 고분군  1


                                                            -  지산동 고분군 , 44호(순장) -

 

순장은 죽은 주인공 하나를 위하여 여러명의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들을 강제로 죽여서 동시에 곽을 달리하여 주인공을 중앙에 두고 전후좌우로 배치하여 매장하는 방법이다 .

이것은 계세사상( 繼 世 思 想 )에 그 연유를 두는데

즉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처럼 영혼의 삶이 지속된다는........

                                                            - 지산동 고분군 , 44호 (발굴 사진) -

 

순장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신분 계층이 뚜렷하고 가부장적인 고대사회에서 성행하였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어왔고 그리하여 현재의 삶이 끝나면 곧 내세의 삶으로 들어간다고 의심하지 않았으며 , 따라서 죽음에 대한 생각과 처리절차는 이와 같은 내세관과 연관되어 행동한다 .

사후에도 현재의 생활과 똑 같이 물질생활을 계속하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한 모든 물품을 가지고 가는 형태로 순장이 나타난다 .

순장은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 인간으로 일말의 망설임은 있었을 것이나 사후에도 현세의 생활이 계속된다는 사상이 강했기 때문에 저항 없이 운명을 받아 들였을 것이다

초기 고구려지역과 중국등 외국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계급이 발생되고 분화된 이후부터 종교적 사상이 뿌리 내리는 사이에 행하여 진 것이다 .

순장과 비슷한 것으로는 순사(殉死) 가 있는데 고구려의 동천왕 이 죽은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은덕을 기려 따라서 죽으려 하자 그의 아들 중천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말렸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우리의 그 많은 열녀들이 낭군 뒤를 따라 나서지 않았든가 상을 치룬 뒤에.....

 

                                                        - 지산동 고분군 , 44호 (순장 평면도) -

 

우리나라의 순장제도에 대하여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부여(夫餘)의 순장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도 신라의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시킨 기록이 있음에 순장 사실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

가야의 경우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러 지역의 고분에서 많은 순장 사례가 확인되고 있어 순장이 보편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 졌음을 짐작케 한다 .

특히 다곽 순장묘는 현재까지의 예로 대가야의 중심지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만 분포되어 있으며 44호가 최대이며 다음으로는 45호이다 발굴된 것 중에서.......

                                                            - 지산동 고분군 , 45호 (순장형태 1) -


지산동의 44호분에는 한 봉토분 내에 32기의 순장곽 가운데 18기의 순장곽 내에는 확인된 22구의(추측으로 36구 이상) 순장자의 유골이 발견되어 국내는 물론 국외에도 흔치 않는 사례로 남아있다 .

봉토 지름이 27m 정도이고 높이가 6m 정도로써 내부구조는 중앙의 주 돌방(石 槨) 1기와 남측서측의 부 돌방 2기를 둘러싸듯이 방사형과 원추형으로 배치된 32기의 순장 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

순장자 중에는 왕을 보위하는 무사(경호실장) 저승까지 따라가 왕을 지키고자 자원 했을 것이고 1호로 또 순장자 중의 부녀는(?) 딸을 가슴에 안고 누워 있었으니

충직하게 따르던 비서실장 이였을까........?

사후 가족의 영화를 약속받은 권세가 이였을까....?

그 여아는 자신의 딸 이였을까......?

왕의 시종으로 여자와 남자들 농경생활이 영위 되어야 했으므로 일반 백성이 따라 갔을 것이다 , 자연히 그들이 평소에 사용하였든 식기라든가 생활용품들 장신구류를 착용하고서........

몇몇의 돌방에는 토기등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의 용도로 활용 하였고 휴대 음식으로는 평소에 취식하든 육류로 닭고기 , 생선으로 대구 등 바닷고기 , 과일로는 복숭아 살구 , 해조류로는 소라 고동 다슬기 등 다양하게 매장 하였다

외국의 사례에서 비춰볼 때 순장자들의 절명은 아마도 독극물에 의한 방법을 선택 하였을 것이다 , 어떠한 심정 이였을까......

                                                            - 지산동 고분군 , 45호 (순장형태 2) -

 

순장은 대개 최상위의 수장층의 분묘라고 생각되는 대형분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당시 왕을 비롯한 지배층들은 순장자의 숫자와 고분의 규모를 통하여 권력을 과시 하기도 했던 것이며 강력한 왕권유지 수단의 방법으로도 이용 되지 않았나 생각도 할 수 있다 .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므로 사람대신 사람모양 또는 동물모양 토기를 넣으므로 순장제도가 없어지게 되는데 4국 “고구려 . 신라 . 백제 . 가야” 중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폐쇄적인 관계로 인하여 외국 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이는 경로가 마땅치 않아서 생긴 일일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선진종교를 받아들인 3국과의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또 금관가야마저 무너진 가장 작은 소국으로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로 왕권강화를 위한 기회로 활용 하였다면 이래저래 사회발전의 저해요소로 작용하여 오래지 않아 신라와 합병하는 계기도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당시의 아주 특이한 매장방법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 한다면 불행일까.~~~~~~~~? 다행일까.~~~~~~~~?

죽음은 같이 하였으나 유감스러웠고 관향이 고령인 前 박 통님과 차 실장님

아직도 삶을 같이하고 있을 前 전 통님과 장 실장님이 여기서 생각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일다...............

                                                                     - 지산동 고분군 ,45호 (순장) -

 

* 참고 글-대 가야의 역사와 문화 *


                                                                                          -  月  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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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2.01 22:58

    첫댓글 서글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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