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베코로 가는 일은 급하게 결정했습니다.
보통 독일의 만년필이라고 한다면 업계의 선두주자인 몽블랑이나 스쿨펜의 라미, 이런 업체들이 떠오르고는 합니다. 실제로 유명 업체들의 시장 비중은 상당해서 독일 내에서도 쉽게 그런 이름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 문구점들로 발길을 돌리니 풍경이 사뭇 달랐습니다. 문구점 곳곳에는 카베코의 장식들이 있었고, 각양각색의 스포츠 펜들이 굉장히 많이 진열되고 있었습니다. 타 업체의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카베코가 대화의 화두로 떠오른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지금 독일에서 가장 격동적으로 움직이는 회사는 카베코였습니다.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카베코는 하이델베르크에 있던 회사였습니다. 오늘날 Peter Bock과 만년필 박물관이 위치한 Handschuhsheim에 공장이 위치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의 오른쪽 산 너머가 그 구역입니다.
하이델베르크는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지만 굉장히 많은 만년필 회사들이 있는 곳입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하이델베르크 성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라미의 본사가 위치하고 북쪽에는 옛 카베코의 공장과 닙 제조업체 Bock이 있습니다. 거기서 더 북쪽으로 향하면 옛 Osmia가 나옵니다.
만년필 박물관 정도를 제외하면 이곳에 카베코의 흔적은 옅은 편이지만 다행히 문구점 한 곳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구시가지, 라미 스토어 부근에 위치한 Letter & Co.는 카베코 문구점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점포의 반 정도는 카베코로 진열되고 장식되고 있었습니다.
주인 분은 '지금 공장은 뉘른베르크에 있지만 닙은 여전히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드니 카베코는 여전히 이곳의 특산품'이라고 이야기하시며 회사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히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매장 벽면에는 작년에 에보나이트 재질로 나온 140주년 한정판과, 크리스마스 시즌 때 성황리에 판매되었던 아트 스포츠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카베코 스포츠에 딱 맞게 만들어진 이곳만의 가죽 파우치도 있었고, 카베코는 아니지만 베를린의 소규모 노트 제작 업체와 협력해 만든 하이델베르크 한정 노트도 멋있었습니다.
Kaweco, Osmia, Lamy 모두 먼 옛날에 격동의 역사를 써내렸던 업체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작은 도시에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 답이 나오지 않을 고민을 하면서 하이델베르크를 떠나갔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 있던 먼 옛날의 카베코는 경영 위기로 문을 닫았고, 언젠가 어느 뉘른베르크의 기업이 브랜드 사용권을 인수해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공장도 뉘른베르크로 옮겨왔습니다. 뉘른베르크 시절의 초창기에는 피스톤필러에 금촉이 달린 고급 만년필도 생산하고는 했는데 이제는 대부분 저가형의 만년필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닙도 특별히 주문하지 않는다면 모두 스틸닙 사양입니다.
뉘른베르크 근교에 위치한 카베코의 공장 직영 샵은 수요일에만 운영되기에, 뉘른베르크 중앙역에 내리기 바쁘게 환승해서 Langwasser로 향했습니다. 역에서 근교의 풍경을 조금 걷다 보면 카베코의 본사가 나타납니다.
가게에 들어설 때에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 위치한 버튼을 눌러야만 문이 자동으로 열립니다. 만년필을 쓸 정도로 옛날 사람이라서인지 이런 첨단 근대 문물에는 익숙치 않습니다.
카베코 스토어에는 다량의 빈티지 만년필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진열장에 있는 만년필들의 얼추 절반은 옛날 카베코의 흔적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카베코가 자사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지만 그 구체적인 성과들을 실제로 확인하니 뿌듯했습니다.
별도로 할인이 있거나 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카베코의 만년필을 시필해볼 수 있고, 카베코의 최신 상품을 가장 먼저 만나볼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제품을 만나볼 수도 있고, 매장의 테이블에는 카베코와 관련된 많은 스탬프들을 찍어갈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카베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굳이 시간을 내서라도 와봄직한 곳입니다.
잠시나마 둘러볼 수 있던 카베코의 공정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하자면, 제가 기전공학쪽 지식은 얕은 편임에도 생산 방식을 극도록 효율화시켰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용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제품 자체의 원가 절감의 요소는 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독일에서 생산하면서도, 접근 가능한 가격대이면서 양질의 만년필을 대량으로 시장에 유통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카베코는 회사의 오랜 전통을 기반으로 꽤 괜찮고 예쁜 만년필을 만들려 하는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여기에 일반적으로 접근 가능한 가격대에, 전국 문구점에 카베코의 장식(광고용 금속판, 펜레스트, 초대형 스포츠 만년필 등)을 배포하는 적극적인 영업 홍보까지 더하여서 지금 내수시장에서의 카베코의 위치가 정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반대로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서는 그들의 전통을 제대로 체감하기 힘들고, 가격에 항공운송료와 관세, 유통 이윤 따위가 붙으면서 체감가는 독일보다 높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동양권에서조차 카베코가 나름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의 만년필이 그 자체로도 꽤 예쁘고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리 저리 생각하면서 구경하다가 매장에서는 스포츠 한 자루를 사왔습니다. 그 사이에 지역 주민으로 보이는 몇몇 분들도 '만년필을 보고싶다'며 가게에 오셨습니다. 역시 잘 팔리나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댓글 문구점이 너무 예쁩니다.
사진과 글 잘 봤습니다. :-)
한국 분들도 관광지로 많이 찾는 곳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하이델베르크 뉘른베르크 모두 가본 곳 인데.. 본사가 있었는지도 몰랐네요..
세상은 아는 것 만큼 보이는 군요 ㅎㅎ
잘 봤습니다..
의외로 소개드린 문구점과 본사 모두 관광지 부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뉘른베르크 본사의 경우 나치 전당대회장-체펠린 비행장의 옆 동네에 있어서, 오가기에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같이 묶어서 다녀오기 좋을것 같았습니다.
카베코를 주력으로 입문해서 글에 쏙 빠져들었어요. 하이델베르크 가게 되면 언젠가 꼭 들려보고 싶네요
옛날의 카베코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점은 아쉬웠지만 저 문구점 한 곳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인 도시였습니다. 특히 하이델베르크에 여행으로 가시는 것이라면 관광지도 다니기 편한 곳이라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덕분에 독일의 오래된 만년필 공장을 견학하는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카베코 넘나 매력있는 펜이에요. 덕분에 잘 봤습니다.
한국에서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른 펜이었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독일 여행기는 계속되는군요ㅎ 카베코에 이런 역사가 있었군요ㅎㅎ
옛 고향의 도시에 기억해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그가 독일에서 대학의 도시라 불릴 만큼 학생이 많아 예로부터 만년필 메이커가 많았다고 하더군요.
제가 하이델베르그 대학교 맞은 편에 라미 플래그십 매장에서 라미 2000을 사면서 점원에게 들은 내용입니다.
저도 라미, 오스미아의 고향인지는 알았지만 카베코도 그러한지는 몰랐네요.
그 때를 풍미한 분들이 모두 작고하시고, 이제는 그런 전승만이 남았다는 것이 아쉽게 다가옵니다.
카웨코가 하이델베르히에서 닙을 생산한다니 놀랍네요!
저 매점창문은 HD어디인가요?거리이름 좀 알려주실래요? 2년 남짓 공부하면서 엄청나게 곳곳을 stöbern 했는데요. 못 본 것같기도 하고 본 듯 하기도 하고 가물가물 하네요.
좋은 안내문 감사합니다. 인문지식소양증가에 도움됐어요.
Hauptstrasse와 멀지 않은 골목길에 있어서 매장 이름으로 지도에서 찾아보시는게 정확할것 같습니다.
계속님의 문구점(회사) 답사기 언제봐도 엄청납니다. 이번 글은 유난히 사진이 선명한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사진을 아직 운에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