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버카스텔은 뭐랄까, 살짝 디즈니같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온갖 이야기들로 가득한 디즈니랜드, 아이들이 그곳의 디즈니 성을 보러 가고 싶어하듯이 저도 연필의 이야기로 가득한 파버카스텔, 그곳의 파버카스텔 성을 보러 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아쉽게도 파버카스텔이 본사에 테마파크를 운영하고 있지는 않지만 연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이야기를 듣는 일도 재미난 일이니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놀이동산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https://youtu.be/MWboQneVOAc?feature=shared
파버카스텔의 이야기는 몇년 전에 그 일부나마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Ottilie von Faber-Castell이라는 제목과 같이 6대 경영자의 아내인 오틸리에 폰 파버카스텔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로타르 폰 파버의 '(손녀가 결혼하더라도) 파버라는 이름은 남아야 한다'는 유훈도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Lothar von Faber: You are a Faber. And you will give this name to your heirs some day. The fidei of the yard is permitted. I have seen how the young men are dancing around you. They all will will promise you the stars. But I advice you: Don't let the love blind you. It will weak you. Get married but remain independent. And love the men only as much as they deserve it.
Ottilie von Faber-Castell: But how am I suppose to find the right one when my feeling can't be my advisor?
Lothar von Faber: You are very wealthy now. You'll have a big responsibility soon. The man on your side must be more than just a loving beautyspirit. He has to protect you and our name. In front of all the doubters who will stand tomorrow at my grave.
영화로 만들기 위해 각색된 부분이 많이 있겠지마는, 당시 파버 가문의 상황이나 오틸리에라는 인물상에 대해서는 역사를 매우 잘 반영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어로 만들어져서 저는 영어 자막도 찾지 못하고 얼추얼추 눈치껏 알아들으며 보았는데 어쨌든 파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보아야 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보고나서 옆에 있던 카스텔 연필을 돌아보고 나니까 살짝 오묘해지는 감상이었습니다.
영문 자막 예고편은 아래 링크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만, 사실상 전체 내용을 포괄하고 있어서 관람 전 시청을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https://worldscreenings.com/screening/ottilie-von-faber-castell/
위의 영화 사진에서 간판에 나와있듯이 파버카스텔의 본사는 Stein bei Nurnberg, 즉 뉘른베르크 부근에 있는 슈타인이라는 도시에 위치합니다. 뉘른베르크의 전철역에서 나와서 버스로 갈아타서 조금만 이동하면 바로 슈타인입니다. 슈타인은 (마치 한국 동해안의 구도심처럼) 오래되면서 낮은 건물들이 길을 따라서 쭉 배치되어 있습니다. 시골이라기에는 대규모 쇼핑 센터가 위치해 있고, 도시라기에는 고층 건물도 없어서 그 사이의 애매한 규모라고 이야기하는게 적절할것 같습니다. 파버카스텔은 이 고장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버스가 슬슬 슈타인에 진입하면 가장 먼저 왼쪽으로 파버 가문의 성이 보입니다. 그리고 뒤이어서 사무동과 공장 등.. 그 구역을 지나가는 내내 길의 양옆으로 파버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파버를 지나서 시내에 있는 마틴 루터 교회 부근에서 내리면 곧바로 동상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도대체 누구실까 고민하면서 동상의 뒷편으로 가서 글씨를 읽어보니 조금 익숙한 글씨가 보였습니다. "LOTHAR", "FABER". 바로 파버카스텔의 4대 경영자인 로타르 폰 파버의 동상입니다. 그의 미국 출장 등의 행적을 반영한 것인지 가벼운 차림에 한쪽에는 가방을 놓고 있는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슈타인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파버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파버카스텔에 대한 투어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성에서의 식사'까지 포함해서 5가지 투어 가이드를 운영하고 있고, 일부는 뉘른베르크 시에서 운영하는 관광 패스를 이용해서도 참여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3가지를 선택하였습니다. 몇몇 주요 코스의 경우 사진 촬영이 불가합니다.
https://www.faber-castell.com/corporate/faber-castell-experience
우선 연필을 만드는 공정에 들어갑니다. 여기서는 흑연 심이 어떻게 나무에 싸여서 연필로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페인트 공정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장 공정은 악취는 물론, 건강에 매우 유해한 경우가 많지만 파버의 도장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물론 직원들 개인의 선택에 따라서 착용할 수도 있습니다) 안전했습니다. 그립 부분에 점점이가 찍힌 그립 2001 연필 또한 페인트로 점들을 구현했다고 하는데, 파버는 흑연 뿐만 아니라 페인트나 물감 등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상당히 발전한 곳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파버카스텔 가문의 성을 관람하게 됩니다. 원래 파버 가문의 신분을 굳이 구분하자면 부르주아 계층에 해당하겠으나 4대 경영자 시기에 남작 작위를 수여받아 귀족이 됩니다. 결정적으로 오틸리에 폰 파버 대에 이르러서 유서깊은 귀족 가문인 카스텔 백작 가문과의 혼인으로 가문을 합치면서 전통적인 귀족 사회에 온전히 편입하게 됩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파버카스텔의 성은 바로 그 역사의 흔적입니다. 파버카스텔의 성에는 2차대전 당시 징발당한 뒤로 그 가문이 거주하지는 않지만, 선대 회장인 고 안톤 볼프강 폰 파버 카스텔이 성을 다시 사들인 이후로 꾸준히 유지보수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파버카스텔 회사나 가문의 중요한 행사는 이곳 성에서 개최된다고 하네요.성의 내부는 굉장히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곳곳에 파버의 역사에 대한 설명과 전시물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Johann과 Eberhard, 그리고 Osmia에 대한 내용도 한켠씩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Alte Mine 박물관입니다. 이곳은 연필을 만드는데 핵심적인 흑연 심이 만들어지는 곳으로, 강변에 위치해 있어서 심 제작에 필수적인 물을 구하는데에 최적화되었습니다. 선대 회장은 이곳을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곳으로 조성하고자 하였고, 지금은 항시 개방되는 곳은 아니지만 연필 심에 대한 훌륭한 전시물로 가득한 박물관으로 조성되어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흑연심이 과거와 현재에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투어가 끝나면 소소한 기념품을 하나 증정합니다. 물론 연필입니다.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색의 퍼펙트 펜슬 2(플라스틱의 저가형 버전)였습니다. 또한 직영 매장도 운영하고 있어서 이곳에서는 파버의 필기구는 물론, 친척 카스텔 가문의 가업인 와인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끼니를 거른 채 온 종일의 투어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제 경우는 한 직원 분이 끝까지 안내해주셨습니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투어를 함께해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수가 많으면 곤란했지만 다행히 준비해간 선물로 정확히 맞아 떨어져서 국산 동아연필과 국산 노트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별 것 아님에도 굉장히 많이 좋아해주셔서 감사했고, 두 분께 온 종일 함께 해주셔서 감사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연필이라는 취미는 Henry Petroski의 Pencil(작년 6월에 작고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책은 서해문집에서 번역해 판매 중에 있습니다.)에 기반한다고 보아도 무방할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대략 좋은 나무를 쓴다거나, 좋은 산지의 흑연을 쓴다거나 하는 먼 옛날에 연필 회사들의 마케팅을 추적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오래된 연필들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지만 옛날의 책이니 만큼 오늘날의 이야기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연필은 어떨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인터넷이나 유튜브, 그나마 구할 수 있는 책 몇 권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에, 직접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2016년 작고하신 선대 회장 안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의 업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기계식 계산기(계산자) 등 사양에 들어선 기존의 사업을 정리하고, 문구 사업을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와(파버카스텔 및 에버하드 파버 브랜드) 고가 시장을 목표로 하는 브랜드(그라프 폰 파버카스텔), 그리고 일반 파버카스텔의 브랜드(파버카스텔 및 카스텔)로 삼원화하였습니다. 슈타인 본사를 정비하며 조금 더 방문자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였고, 성을 되사들여서 그곳을 파버의 상징이자 아카이브의 장소로서 복원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아시아 지역 공장 투자와 브라질 요한파버 사업장의 확장 등 일일히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남겨두셨습니다.
그런 일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러면서도 그야말로 그림책 속에나 있다고 여겼던 장소에 직접 와보니 단순히 연필을 노트에 써보는것 만으로도, 그 일대의 식당에 들어서는 사소한 순간들조차 많이 행복했습니다. 언젠가 마인츠의 구텐베르크 박물관에 갔을 때에도 비슷한 감정이었습니다. 좋다는 연필 몇 자루 손에 들고 쓰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어릴 때 놀이동산에 가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디즈니랜드에 다시 가고 싶다고 조르는 아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풍문의 이야기로, 문화연필의 박덕신 전 사장은 유럽 유학 때에 독일의 연필들을 직접 지켜본 다음 귀국하여서 오늘날 널리 쓰이는 더존 연필을 개발하고, 여기에 겸해서 전주 공장에 연필 성을 한 채 지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동화 속 연필 왕국같은 느낌이라서 좋아하던 곳이었는데 뉘른베르크에 다녀온 지금의 시점에서 이곳에 다시 가보면 또 감회가 새로울것 같습니다.
세상은 아무래도 아직 너무 넓습니다.
첫댓글 연필에 진심이었던 분의 꿈이 저렇게 현실에 실현이 되니 그저 멋지기만 합니다ㅎㅎ
말씀대로 회사의 전성기를 불러오고 중흥시켰던 선대 경영자들의 꿈들이 지금의 파버카스텔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만약 거기에 한계나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이 지금의 공동 경영자들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가보고 싶은 곳 리스트 하나가 늘었네요.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투어 없이 성이랑 마을 한 바퀴만 산책해도 좋을 곳이었습니다.
멋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구경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필기구 여행기 너무 좋습니다~~~ 긴 여행에 짐도 많을 텐데 한국 연필과 노트도 챙겨가셨군요!
그대로 현지의 연필과 노트로 바꿔 넣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