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세고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새고
男兒二十 未平國
남자로 태어낳아 20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부를소냐 ?
남이 장군(1441~1468)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조선의 불세출 영웅이다.
남이의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남재, 증조부는 영의정부사에 추증된 남경문이다.
조부는 남휘, 조모는 태종 이방원의 딸 정선공주이며, 아버지는 남빈이다.
세조와는 6촌 간이며 예종과는 7촌 간이 된다.
남이의 장인은 권람으로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최측근 3인방이다.
남이의 본가와 처가는 당대 최고의 가문 중 하나였다.보통 사람보다 지혜와 재능,
용맹함이 뛰어나 어려운 일을 해내는 등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을 말할 때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라 말한다.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27세에 조선의 국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에 올라 28년의 짧은 삶을 살다간
남이(南怡) 장군을 불세출의 영웅으로 부르기도 한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남이는
1818년(순조 18)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복권된다
남이의 예견된 단명
의령 남씨 남이(宜寧南氏 南怡1441-68)는 이미 단명(短命)을 예언받았다.
세조(世祖)의 정난공신(靖難功臣)이며 좌의정(左議政)이던 안동 권씨 권람(安東權氏
權擥1416-65)이 넷째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청혼을 했다.
남이는 태종의 넷째딸 정선공주(貞善公主1404-24)의 손자로 왕족으로 문벌이 높았다.
권람은 유명한 점쟁이에게 남이의 운명점을 치게 했는데 젊어서 죽을 것이라는 굉장히
불길한 점괘가 나왔다. 권람은 딸의 점도 보았더니 수명은 짧고 자식도 없을 테니
남이를 사위로 삼아도 무방하다고 했다.
결국 예를 치렀으며 점괘는 들어맞아 남이는 28세에 후사도 없이 죽었고
수년 전에 그의 아내도 먼저 죽었던 것이다.
남이는 과연 역적질을 했나
남달리 승부욕과 명예욕이 강했던 남이(南怡)는 세조(世祖)에게
최연소 병조판서(兵曹判書)라는 직을 받은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했는데
꿈도 펴보지 못한 채 보름 후 세조가 죽고 그 아들 예종(睿宗)이 즉위하면서
판서직에서 해임되자 불만이 대단했다.
간신 유자광((柳子光1439-1521)의 밀고였기에 무고(誣告)라는 얘기도 있고
실행에 착수한 증거는 없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령군(1416-99)의 옹립(擁立)을 구상한 것은 맞는 듯하다.
예종 원년 10월 24일 잡혀 사흘 만에 처형되었는데 그가 도움을 청한 대신 중
한명회(韓明澮) 등 아무도 변호하지 않았던 걸 보면 인심도 잃었던 것 같다.
남이와 남이섬
남이(南怡)섬은 1944년 청평(淸平)댐 건설로 인해 생긴
초승달 모양의 섬으로 친일 인물 민영휘(閔泳徽)의 손자이며 을유문화사의 설립자
민병도(閔丙燾1916-2006)가 1965년에 구입해 40년을 가꾸었다.
남이 장군(南怡1441-68)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그의 묘가
화성군 비봉면(飛鳳面)에 분명히 있으니 남이섬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그가 무예를 닦았다는 축량산(祝靈山 886m)이 인근에 있고 남이와 관련된
전설이 있어 그 곳에 남이의 추모비를 세웠기에 섬 이름이 남이섬이 된 것이다.
2001년 9월 시각디자이너 강우현(1953- )이 대표로 취임해 남이섬을 문화 예술
공간으로 가꾸고 `나미나라공화국`을 선언해 현재까지 대통령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