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II. 교회 속의 샤머니즘의 현 주소 III. 샤머니즘을 넘어서 어디로? IV. 변화의 주도자와 참여자 V. 위기의 변화 상황 VI. 하나 됨: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VII.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으로 VIII. 결론 |
1.1.9.
I. 서 론
한국 교회는 주변의 여러 가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할 것이다. 원래 복음이 전파된 토양이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회가 설립된 이후로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한 교회 속의 샤머니즘 문화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한국 교회가 당면한 탈문화화 과제 중의 하나이다. 본 논문은 한국 교회 속에 들어온 샤머니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개 교회 상황을 중심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한국 샤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II. 교회 속의 샤머니즘의 현 주소
한국 교회 속에 샤머니즘적인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행해졌다. 샤머니즘 문화 가운데는 긍정적인 요소들도 있다. 무조건 샤머니즘 문화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대할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성경적 진리에 위배되는 문화적 요소에 대해서는 그것을 성경적 관점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에 주어진 과제이다.
한국 교회 속에서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샤머니즘의 가치관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머리되신 주님께서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곳이 교회이다. 그런데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다 보면 주님의 뜻보다 개개인의 영적 은사와 그 활용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지게 될 수 있다. 은사를 어떻게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은사를 드러냄으로 인해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은사를 추구하고 그 받은 은사를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주님의 뜻에 대한 순종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인기 내지는 유익을 추구하게 될 때 전체 공동체는 이익보다 해를 더 크게 받게 된다. 교회 내의 다른 지체들도 존중하고 사랑하고 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만을 드러내다 보면 공동체의 하나 됨이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미래 지향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자라나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과거의 영적 체험의 경험을 회고하며 그러한 영적 경험을 추구하는 가운데 영적 성장과 윤리적 실천면에서 발전하지 못할 수 있다. 이 경우 충분한 양육이 주어지지 아니할 때 온갖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또한 특별한 영적 은사를 소유하는 데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고 그 은사를 소유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사람을 구분함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특권의식이 형성되기도 한다.
몇몇 카리스마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룹이 나뉘어지는 가운데 교회가 여러 가지 파로 나뉘어지게 되고 교회의 하나 됨이 손상된다. 성숙하지 못한 지도자들 간에 불화와 반목, 시기, 경쟁으로 인하여 주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이 가로막히게 되고 공동체는 혼돈 가운데 처하게 된다. 타인을 인정하고 높여주지 못하고 서로 경쟁상대로 여기는 가운데 교회의 하나 됨이 사라지게 되고 교회 속에서 경쟁, 시기, 불화, 반목이 쌓여지게 된다. 장로, 권사, 집사와 같은 평신도 지도자들 사이에서 각자의 의견을 영감으로, 조명으로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전체적인 방향 내지는 전체를 보는 시각이 결핍되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특히 새로운 목회자가 부임하는 경우에 그 목회자에 대한 권위가 쉽게 인정되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목회자가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III. 샤머니즘을 넘어서 어디로?
샤머니즘적인 요소들 가운데 긍정적인 면을 잘 활용하고 부정적인 관점들을 극복해 나아갈 때 하나님 나라의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울 수 있다. 주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는 가운데 은사를 제대로 활용해 나갈 때 몸의 하나됨이 있고 주님께 영광이 돌아가며 몸의 지체들이 함께 혜택을 누리며 각자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 진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본인도 기쁨과 보람을 만끽하고 다른 지체들도 혜택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지체들 간에 상호 윈-윈하는 아름다운 공생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 보낼 때 두고 계신 뜻이 있다. 그 뜻에는 일반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뜻이 있고, 개별적으로 각자에게 해당되는 특수한 뜻이 있다. 보편적인 뜻은 무엇보다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에 이르도록 자라나는 것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지만 각자에게 두고 계시는 개별적인 뜻이 있으시다. 그 개별적인 뜻을 깨달아서 자신의 사명을 다할 때에 나의 나된 바의 존재이유를 만끽하게 된다. 은사를 주신 이유도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처럼 각 지체들이 본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때 공동체는 더욱 활력을 띠게 되고 주변 사회에까지 빛과 소금이 될 것이다. 그러한 교회 공동체는 주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모임으로 비추어지고 불신자들에 대한 전도의 사명을 더욱 잘 감당하게 될 것이다. 특히 각종 사회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들이 제시되는 가운데 더욱 사회를 밝히는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지체들 간에는 따뜻한 교제와 하나됨이 있고 주변 사회에는 유익을 끼치고 불신자들을 구원의 방주로 이끌어 들이는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될 것이다.
또한 샤머니즘적 문화 속에서 주어지는 육체와 사단, 잘못된 가치관 등에 기인한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을 체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도록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적의 불화살 공격을 막아내며, 성령의 검을 활용하여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주님의 군사들이 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적 전쟁에 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시인 하며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힘입도록 기도에 힘쓰도록 해야 한다.
샤머니즘 문화 속에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신까지도 도구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과 지상주의적 사고가 강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개발해 나아가는 과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성품을 개발하고 연마한 바탕 위에서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교과과정을 준비하고 훈련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일 중심적인 사람들, 성취 동기(Performance Orientation)가 강한 사람들, 동기가 잘못된 사람들이 자신을 돌이켜 보고 진정한 성숙을 꾀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한 목적으로 내적 치유 프로그램등을 통해서 내적인 성숙을 끼할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가운데 기쁨과 보람으로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초기 한국교회의 주체성 표명과 토착화의 발단
1911년 성경이 순 한글로 번역되고 한국 재래종교에서 쓰는 <하느님>이란 말을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 쓰게 된 것은 바로 한국의 기독교가 토착화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였다. 그리고 1917년에 「한국 기독교 연합회」와 그 후 1919년 2월 26일 「조선 기독교 교회 및 선교연합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 and Mission)가 조직되었다.
따라서 1925년 12월에 국제선교협의회 총무 마트(John R. Mott) 박사와 조선호텔에서 회합하여, 한국 교회가 정식으로 국제선교협의회에 가입하는 문제와, 1928년에 열릴 예루살렘 대회에 한국 대표를 파송할 문제 등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장로교 대표 韓錫晋 목사는 “조선 교회의 자주성을 무시하는 선교사들은 다 물러가라”고 발언하여 한국 교회의 주체성을 표명하였다. 한국 교회의 주체성의 자각이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 시작된 것은 자못 흥미롭다.
그리고 일찍이 한국 청년의 참된 지도자 李 선생이 젊은 선교사들로부터 “만일 선생님께서 선교사라면 지금 무엇을 하시겠읍니까?”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나는 먼저 내가 미국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겠다”고 대답한 일도 있다. 그리고 1923년의 《한국 예수교장로교회사기》라는 총회의 공문서에도 “차는 여타가 선교사 제군이 한국 교회를 同人視하며 형제시하지 않고, 야만시하며 노예시함이다. 선교사 제군이여 성신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結局하려느냐 속히 회개할지어다”라고 공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벌써 1905년 안 창호 선생이 평양 거리에서 선교사를 구타하여 망명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선교사들이 “조선 신도들을 노예처럼 접대”함에 격분해서라 한다. 이러한 처지와 아울러 이광수 씨는 벌써부터 한국 예수교의 신앙고백이 문자로 발표되지 못하고 있음을 공격했다. 전택부 씨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토착화 운동은 3․1운동 직후부터 싹텄다.
3) 초기 선교사들의 토착화시론
일반적으로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은 보수적이며 한국 고유의 문화에 대해서 이해가 극히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특히 한국 교회 교역자를 위한 고등교육을 억제한 졸렬한 교육정책도 한국 교회 육성을 위한 원대한 시야에서 된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동료 선교사들과는 달리 초기부터 한국 교회의 토착화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강조해 준 선교사도 없지 않다. 그 대표적인 선교사로는 언더우드와 피셔(James E. Fisher) 같은 분들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찍부터 강조하기를 “예수를 믿는 자는 어떤 나라 사람이든지 각기 그 나라 임금과 관원을 섬기고, 또한 그 나라 법을 지키되, 도리어 합당치 아니한 법과 착하지 아니한 규칙을 감히 좇지 못하나, 예수를 좇는 자-본국 풍속을 변하여 외국 풍속을 좇고 내 나라 어진 법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이상한 법을 좇으라 함이 아니니라”고 하였다.
당시 소위 학부대신(문교부장관)이라는 申이 말하기를 “…국문을 쓰고 청국 글을 폐하는 것은 옳지 않고, 외국 태양력을 쓰고 청국 황제가 주신 정삭을 폐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요…국문을 쓰는 일은 사람을 변하여 짐승을 만드는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처럼 유교에 중독되고 사대주의에 제 정신을 다 빼 놓은, 주체성 하나 없는 썩은 냄새만 풍기는 말과 대조해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정도이다. 윤 성범 박사의 이해에 의하면, 《성교촬리》에서 언더우드 박사는 “그리스도교를 매개로 해서 서양화하려는 것을 의미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 지적했다.” 이것은 벌써 그가 한국 교회의 토착화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카나다 선교사였던 게일(Gale) 선교사도 한국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깊은 경의를 되풀이 표현했다. 서양의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배운 슬기의 샘은 무한하다고 격찬하였다. 더욱이 그는 기독교의 서구적 요소가 반드시 우월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복음과 서구의 성분 구별을 분석해서 한국민의 역사와 道人的 존엄 및 슬기 넘치는 지성적 바탕을 서구화하기 이전에 복음의 순수한 씨앗으로 전향하게 함이 마땅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언더우드보다 훨씬 후인 1928년에 피셔 박사는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교 교육과 민주주의》란 중요한 저서를 내놓았는데, 이 책의 6장에서 <획기적인> 토착화론을 전개하고 있다.
피셔 박사는 우선, 피선교지를 이방(Heathen)이라고 부르는 대신에 유교적, 불교적, 토착적, 민족적, 비기독교적이란 말로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빚어진 이국적 교육 분위기를 신랄하게 비평하면서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가 솔선해서 한국의 예술, 전통, 관혼상제, 기타 풍습들을 올바르게 해석해서 그 탁월한 가치를 인식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학교나 기숙사나 교회 건물들도 한국인의 정서와 구미에 맞는, 평민적이고도 구수한 맛을 돋구면서 한국인의 생의 멋을 살려야 한다. 따라서 한국 고유의 모든 축제․제의와 같은 형식과 전통속에 깊은 도덕적 윤리적․정신적․종교적 교훈과 진리가 함축되어 있으며, 특히 조상경배의 풍습 속에는 고도의 형제애가 깃들어 있음을 지적했다. 피셔 박사는 주장하기를 “요는 우리가 강조하려는 모든 것을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the Korean is a Korean)이라는 것과, 그들은 그들 자신의 민족의 삶과 더불어 도덕적으로 결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를 통하여 한국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의 르네상스를 일으켜, 이를 통해 복음선교와 세계에 공헌해야 한다고 말했다.
4) 식민지 시기의 토착화 운동
1907년의 저 유명했던 대부흥운동이 당시 당면했던 조국의 위기를 통하여 오히려 불붙었듯이, 3․1운동 이후에 휘몰아친 엄청난 시련도 다시 한번 한국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과 자료가 될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염원과는 달리 한국 교회는 잔악무도한 <일본 헌병정치>의 기독교 박멸정책으로 인하여 교계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거의 잃어버려, 한국 교회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암담한 걸음을 후대의 학자들은 평하여 반사회윤리적인, <한국교회의 역사적 퇴락> 즉 반동의 걸음이라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이 1930년에서 1945년까지를 위기로 보기 보다는 한국 교회의 <타락>으로 보았다.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의 평가와 그 기술들을 통하여, 역사의 기록과 심판이 그 얼마나 냉정하고 준엄한 것인가를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카타콤 속으로 들어갔던 초대교회의 신도들이나, 공산치하에서 지하로 숨어든 <알 수 없는 신도>들을 과연 반동이나 타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지명관 교수의 말대로 신앙의 내면화가 곧 반사회를 의미함은 아닐 것이다. 한국 땅에 뿌리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한 짧은 역사를 가진 교회로서 지도자들을 거의 잃은 교회, 더욱이 일본이 탄압정치에서 소위 문화정치라는 회유정치로 탈바꿈하여, 한국 교회의 항거정신마저 마비시키려 했을 때가 가장 <위기>였다. 루터의 말대로 드러난 <검은 사탄>보다 도리어 천사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흰 악마>(White Devil)가 더 무섭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속에서도 한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참담한 감옥에서나 외국 땅에서 피와 땀과 생명을 바쳐 싸움을 계속하였다. “기독교가 그 시대의 과제 속에 생명을 희생하는 각오로 참여하는 것 이것이 창조적인 토착화의 길이라면”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교회사는 그 시대에 있어서 그래도 토착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하겠다. 특히 남궁억 씨의 불후의 찬송가 가사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의 일꾼을 부르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을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를 얼마나 많은 신도들이 얼마나 많이 불렀었던가.
5) 해방 후 토착화 운동
일본의 패전과 8․15한국의 해방은 교회사에서 볼 때 기쁨과 슬픔이 한꺼번에 닥친 사건이었다. 그 기막히고도 죽음과 같았던 <침묵의 시대>(the silent years)를 통과하고 믿음의 자유를 찾은 때요, 동시에 <혼란과 분열>의 때가 닥친 것이다. 당시 끝까지 남아 있었던 한국 교회의 교역자나 신도들은 넘치는 감격과 함께, 신앙의 정절을 유린당한 말할 수 없는 치욕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출옥성도들은 살아난 순교자로 변모하여 그들이 전가족과 생명을 내걸고 짊어졌던 십자가는 돌변하여, 함께 감옥에 가지 못했던 동역자와 형제들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무자비한 몽둥이로 변모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용감하고도 자랑스러웠던 <믿음의 선한 싸움>은 교회 분열이라는 수치스런 싸움으로 변했고,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단절시킨 독선으로 뻗쳐갔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교회의 미숙한 태도와는 판이한 예가 독일에서 벌어 졌다.
독일 복음주의 교회평의회는 1945년 10월 18일과 19일에 걸쳐 세계교회를 향하여 죄책선언을 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스튜르가르트 죄책선언」이다. 돌이켜 보건대 독일 교회는 히틀러의 폭정에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 복음을 위해 줄기차게 싸워 온 교회이다. 그러나 그들은 패정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 국민과 더불어 고난의 거대한 공동체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죄책의 연대성 속에도 있음을” 세계교회 앞에 고백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는 물론 오랫동안 전체 국가주의의 폭력적 지배 속에 그 무서운 모습을 드러낸 악령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왔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우리가 좀더 용감히 고백하지 못한 것, 더 충실하게 기도하지 못한 것, 더 기쁨으로 믿지 못한 것, 더 열렬하게 사랑하지 못한 것을 책망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새로운 시작에 있어서 전세계적인 친교 속에 있는 다른 교회와 마음으로부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때 깊은 기쁨으로 넘친다…그러므로 전세계가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필요로 하는 이 때에 우리는 ‘창조주이신 영이시어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기도한다”라고 끝맺고 있다.
한편 일본 기독단의 의장 스즈끼 목사가 제 2차 대전을 통해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에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뉘우치고 사죄하는 죄책문을 작성 발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의외에도 일본 교회 지도자의 냉소와 일본 교회 대다수의 반대를 거세게 받아, 스즈끼 목사는 고립되고 말았다. 그때 오직 그가 봉직하고 있던 西片町 교회만이 단결하여 스즈끼 목사를 지지하고 뒷받침 해주어, 간신히 스즈끼 의장이 다시 일어 서서 「일본 교단의 죄책문」을 겨우 통과시켰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상당수의 교역자들까지 2차세계 대전을 정당화하고 죄책문의 불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동양 교회의 장래를 위해 불행한 것들이다.
해방 후의 한국 교회와 6․25동란 중의 한국 교회는 <분열과 혼란>의 면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동족상쟁이라는 참혹한 고난을 모질게 겪고 있었던 겨레와 함께 교회는 고난을 나누지 못하고 도리어 겨레를 실망시켰고 괴롭혀 왔다. 그 뿐만 아니라 부정과 부패로 비대해 가던 자유당 정권에 영합 아부하여, “극동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로 될뻔 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따라서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적 문학계에 동단하여 노벨상까지도 기대할 수 있었던 이 광수 씨를 잃었고, 또한 신학자로서 세계적인 신학자로 뻗어갈 수 있는 소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김 재준 목사도, 한국의 억센 보수주의자들의 지나친 견제와, 한국 교계의 몰이해로 인하여 아깝게도 위축된 채 세계 신학계를 향하여 뻗어나가지를 못했다.
해방 후 약 10년간을 한국 교회의 분열과 혼란의 시대였다면, 이런 시기에 토착화운동이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분열의 원인이 “유교적 율법주의가 한국 신자의 기질로 화했기” 때문이라는 통속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첫째로는 한국 선교 사상 성공을 거둔 원인의 하나라는 지역분담 선교방안이다. 즉 지역을 분담함으로써 지역 교회와 교파 상호간에 교제하고 협력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개발 훈련시키지 못한 선교정책의 원인과, 둘째로 선교사 상호간의 불화이다. 근본주의 일색의 선교사 천지에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카나다 장로교회가 1898년에 한국 선교 사업에 들어섰다. 외국의 경우, 미국이나 영국 교회에서는 장기간 양자간의 분쟁을 통하여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가 함께 살며 일하는 것을 배웠다지만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그러지를 못한 외래 선교사 상호간의 불화가 한국 교회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셋째로는 비개방적이고 보수적인 신학교육 정책을 들 수 있다. 당시 신학교육은 거의 선교사가 전담하다시피 하여 외계와의 개방적인 접촉이나 신학교류가 원만히 되지를 못했다. 이를 김 재준 박사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교회라 평했다. 밖으로부터 새로운 신학 사조가 밀려 닥칠 땐 요동하기 마련이다. 넷째로는 해방 후의 무질서와 6․25동란을 처참하게 겪고 있던 민족에게, 외국으로부터 형형색색의 무수한 교파들이 쏟어져 들어왔다. 한국 선교 초기와 같은 조심성은 아랑곳 없이, 몇 푼의 딸라를 가지고 와서 허덕이는 민중에게 무작정 자기네 교파를 부식하기에 골몰하였다.
이상에 적은 네 가지는 외래선교사 및 선교정책이 한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원인이 되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면 한국 교회 자체내에는 어떤 요인들이 있었던가를 살펴 보자. 그 첫째는 위에서 지적한 유교적 율법주의가 한국 신자의 기질로 화하여, 서로 용납하고 사랑해야 할 복음의 진리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준으로 그 날을 예리하게 갈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일제의 간악한 동족분열정책의 독소가 완전히 가셔지지를 못한, 한 역사적인 원인이 교회 분열을 가져오게 했고, 셋째로는 한민족은 예부터 지방단위의 생활권을 벗어나지 못하여 오던 차에 6․25를 전후해서 이북의 피난민이 대거 남하하는 통에, 단일 민족이라 하지만 그 기질과 습성의 차를 이해하고 극복하지 못한 지정학적인 원인이라고나 할까, 이 문제도 교회 분열을 부채질했다. 그리고 넷째로 일제의 한국교회 박멸정책으로 인한 교계 지도자들의 학살과 신학교육의 중단, 그리고 6․25를 통해서 많은 교계 지도자를 상실한, 교회지도자의 절대수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속성 목사를 다량 배출함으로써 교역자의 질이 말할 수 없이 저락되었다. 이와같이 지도자가 원숙한 신학적 대화나 복음에 입각한 목회를 할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처세로 부동하였고,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원대한 교회육성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다섯째로 한국 민족은 민주적인 사고나 생활훈련을 많이 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적 생활을 해온 역사가 너무 짧았다는 사회 전반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여섯째로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원인이 있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자주적인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는 데다가 안수받은 교역자가 부족하여 성례식을 자주 베풀 수가 없었다. 소수였던 선교사들이 전국 교회의 성례전을 집행했으니 초대 한국 교회는 마치 신약시대의 초대교회가 사도들을 만나는 것만큼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와 대치할 만한 어떠한 방안도 세우지를 못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에 <성찬예식이 없는 교회>로 성장해 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함께 나누며, 주 안에서 한 형제됨의 감격과 신앙고백을 자주 하지 못한 교회가 <하나됨을 힘서 지킬> 수 없음은 당연하다. 여기에도 한국 교회의 신학적인 큰 문제가 있다.
일곱째로는 교회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신도들은 해방후나 6․25동란 이후 허물어지고 불타버린 자기들의 집이나 사업체를 짓고 세우기에 앞서, 거의 모든 재물을 교회에 바치고 그래도 모자라면 심지어는 결혼반지와 여인들의 머리털까지 모아 팔아서 성전을 세우고 종을 울리며,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헌금해 왔다. 그리하여 교회생활은 곧 일상생활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토록 피와 땀과 정성이 서려 있는 <우리의 교회>에 이질적인 요소나 색다른 신앙형태가 들어 올 때에 그 반응이 극렬하기 마련이었다. 교회의 변동이나 위협은 객관적인 한계를 넘어서 곧 자신의 생의 위협이나 변동으로 받아들여졌었다. 한국인의 종교적 열심히란 장점이 교회 분열이라는 단점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전 경연 박사는 “교회 분열을 너무 죄악시만 하지 말라”고까지 말하였다.
어쨌든 이러한 교회 분열과 혼란 속에 있었던 교회가 그때 만일 “환인, 환웅, 환검은 곧 하나님이다”란 말을 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토착화 운동이란 신앙적으로나 성숙하여 교회 전체가 다른 분야의 학문, 이를테면 철학, 역사, 문화, 예술 등의 학문들과 협력하여 되어지는, 종합적 <창조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때에 한국 교회가 토착화운동을 생각도 못한, 토착화운동의 암흑시대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교계 밖에서 몇 분의 중요한 활동이 있었다. 즉 함 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한국의 역사를 다룬 역사철학적 노작이 출간되었다. 이 노작을 통하여 교회의 분쟁에 실망하여 교회로부터 멀어져 가던 지식인층과 청년들 층에 자극을 주었으며, 조국 해방의 감격과는 달리 국토의 양단과 민족상쟁의 처참한 상처를 안고 하나님의 역사 경륜에 회의를 심각하게 느끼던, 사상적인 혼란과 공백기라는 중요한 시기에 그 소임을 담당한 저작이었다. 앞으로 한국 교회의 토착화란 관점에서도 다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리고 쉽사리 그 영향력을 헤아릴 수 없을 만치 크게, 한국 교회 토착화 운동을 자극하였고, 그 무드를 조성해 준 분으로는 나 운영 교수의 한국적 성가와 갓을 쓰고 치마 저고리를 입은 마리아, 색동 저고리를 입은 아기 예수를 그리기 시작한 김 기창 화백 등을 높이 평가해야 할 줄 안다.
6) 1960년대의 토착화를 위한 한국 신학자들의 논쟁
1960년대는 한국에 있어서 사회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공히 뜻깊은 해이다. 5천년 한국 사상 처음으로 경제자립을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1962년에 착수되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한국 땅에 한국인의 손으로 세워진 지(1884) 80년을 넘어서는 해였다. 1961년 말엔 단국신화에 대한 신학적 유형학적 이해가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방지역에 전도할 때 그 지역의 토착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 개발하려는 ‘네비우스 방법’(1890)과 “기독교 교육과 토착 문화와의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제임스 피셔(1928) 이래로, 한국인의 주체적인 복음이해와 생동적인 선교를 위한 중요한 논문이 유 동식 교수(1962)에 의해 씌어졌다.
이 논문은 특히 한국인을 위한 선교적 동기에서 토착화를 제창한 점이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이 유 교수의 토착화론을 뜻밖에도 전 경연 박사가 신세계誌에서 논박함으로써 <감리교 신학보>란 제한된 테두리에서 이끌려나와 전 한국 교계에 걸쳐 불꽃을 튀기는 「1963년도의 토착화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활기찬 거국적 토착화 논쟁의 와중에 한국의 고유한 문화전통 특히 건국신화와 기독교 신앙과의 접촉점에서 한국적 신학을 형성해 보려는, 윤 성범 박사의 《기독교와 한국사상》이란 문제 많은 저작이 출판되었다. 그런데 유 교수의 토착화 제안과 전 박사의 논박을 정리해 가기 전에, 거의 같은 시기에 《사상계》지에서의 윤 성범 박사와 박 봉랑 교수와의 논쟁에 대해 일언하고 지나 가야 겠다. 윤 박사는 조선 건국 신화에 나오는 “환인 환웅 환검은 곧 하나님이며” 이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개념의 세계적 성격’을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같은 바르티안인 박 봉랑 박사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단군신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민족 문화나 전통이나 신화는 기독교 계시와 단절되며 ‘성서만이 기독교 계시의 유일한 소스’라고 윤 박사에게 부정적인 답변을 하였다. 이런 식의 논쟁에는 양자간의 끝없는 단절과 거리를 느끼게 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였다. 단군신화라면 곧 토착화를 연상케 하였고, 반면 기독교라 하면 곧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의 단절을 느끼게 하였다. 따라서 한국 교계나 신학계에서도 이 사상계지를 통한 논쟁에서는 별다른 생산적인 의미를 찾지 못했다. 토착화를 위한 본격적인 논쟁은 역시 《기독교사상》지를 통하여 전개되었다고 본다.
물론 윤 성범 박사가 단군신화와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과의 관련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이 병도 박사가 1954년에 삼위의 문제를 암시하였고 또한 百世明도 하나님․예수․아담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 일이 있다. 파머(Palmer)도 이 단군신화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발상된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로는 동양에 경교(Nestorian)가 4세기에서 8세기에 널리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국 문화가 세계 최고의 문화권의 하나인 시베리아 문화권에 연유하는 수메루 문화(Semeru, B.C. 8000-2200)→투란문화(Turan)→문화(Bark, B.C. 2000)의 계통에 속한 것으로 보아 단군신화는 기독교 영향 이전에 발상된 것이 아닌가 싶다. 도리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이 동양 문명의 영향을 입어 발전된 것이 아닐까. 수메루 문명은 유대 또는 아리아인(Aryan)의 조상이 세운 것이 아니고, 그 혈통적 직계 상속자는 동양 인종이요 우랄 알타이족이 세운 문명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문제는 막대한 고고학적, 신화학적 뒷받침과 천재적인 창조적 상상력이 동원돼야 할 것이지만, 자칫하면 허황한 독단에 빠지기 쉽다.
토착화 논쟁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재해석하여 기독교 전통과 한국 문화를 접목시키려는 신학적 논의들이 이 잡지에 실리면서 촉발되었다. 이런 논의들은 기존의 한국 신학계가 서구 신학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던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토착화 신학이라고 불린다. 이 토착화 신학은 '비서구화'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장로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감리교 계통의 신학자들이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윤성범(尹聖範), 유동식(柳東植), 변선환(邊鮮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과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의 결합"을 한국 신학의 과제로 설정하였다. 특히 한국의 전통 종교와 대화를 하면서 한국 종교 문화 속에서 기독교의 원형을 찾으려고 하였다. 윤성범은 고대 단군 신화와 유교 속에서, 유동식은 무교(巫敎)와 고대 풍류도(風流道) 속에서, 그리고 변선환은 선불교 속에서 기독교 신학의 내용인 창조론, 기독론, 속죄론, 구원론, 삼위일체 신론 등의 신학 구조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신학의 '비서구화'에서 토착화 신학의 출발점을 찾았던 이들은 1960년대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주도하는 종교간 대화의 신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추구하는 타종교와 대화 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이들이 동양인이면서도 서구 신학에서 출발하여 동양 종교와 문화로 접근해 들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토착화 신학은 동양의 전통 종교와 문화를 서구 기독교적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토착화 신학 논의에 대해 일군의 신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논쟁이 촉발되었다. 신학의 토착화와 한국 문화와의 만남을 주장한 신학자들이 감리교 계통의 신학자들이었던 반면에,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한 사람들은 주로 장로교 계통의 신학자들이었다. 특히 윤성범과 신학적 논쟁을 벌였던 박봉랑, 전경연, 이종성 등은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소속이었으며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흐름에 속한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제기한 반대론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즉 토착화 신학처럼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강조할 경우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이 침해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론자들은 한국이라는 특수성보다는 기독교라는 보편성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토착화 신학자들과는 반대로 보편적 진리인 기독교를 통하여 한국 문화와 종교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토착화 신학을 둘러싼 논쟁은 한국의 전통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착화 신학자들은 한국의 전통 종교와 문화에서 긍정적인 가치와 기능을 발견하려 노력하였던 반면, 반대론자들은 그러한 노력을 오히려 기독교 전통의 보편성 유지에 쏟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5. 토착화신학의 문화이해
1) 신 개념의 변혁주의적 수용
천주교가 초기 선교시 유교를 신봉하는 한국 지성인들을 위해서 “상제” 개념을 사용했고, 개신교는 초기선교시 巫교인, 불교인, 유교인 그리고 일반인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하나님” 개념을 사용했다. 이 개념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기독교적 신관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기독교는 그의 신관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한국 전통종교가 지니는 “형식”(form)은 사용하고, “내용”(meaning)은 비판하면서 기독교적 내용으로 대치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변혁주의적 수용은 좀더 깊은 종교현상학적 연구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 기독교 신학은 종교학의 도움을 빌려서 신개념의 내용적 차이를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교리체계와 사상체계와 의식체계의 맥락 속에서 들추어 내어서 타종교의 신개념과 차이성과 그 독특성을 드러내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 문화형성의 기반으로서 아직도 한국 기독교인의 심성속에서 잔재하고 있는 무속적 신개념(재앙을 피해 주고 복을 가져다 주는 의인화된 초자연적 힘 내지 정령), 불교적 신개념(열반의 차원 내지 무아적인 황홀경의 차원 내지 범[Brahamnn]), 유교적 신개념(만물의 근원이요 진실무망하여 조화에 있어서는 실현[實現, 천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실심[實心]이 되는 誠, 내지 上帝), 도교적 신개념(만유가 거기서 출생되는 無내지 無名 내지 道)등 그 개성적이고 특이한 방식에 있어서 드러내면서, 인격적이고,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유를 지배하시고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시는 성서적 삼위일체 신의 독특성을 증언해야 한다.
단군신화에 대한 신학적 조명도 변혁주의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단군신화의 환인, 환웅, 단군을 바로 기독교 삼위일체 신의 흔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토착화신학(윤성범)의 시도는 무속 신과 기독교 신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지나쳐 버리는 혼합주의적 시도이다. 환웅천왕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되었다고 한다. 古記에 의하면 웅녀는 곰이 여인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웅(熊)을 곰으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한국 민족의 조상이 곰이라는 우스꽝스런 결론에 달한다. 이병도 교수는 熊이란 토템족의 여자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웅녀란 곰을 신성시했던 토템이즘의 사상에 있어서는 곰을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로 해석되어진다. 그래서 단군은 환웅이란 천신족(天神族)과 웅녀라는 지신족(地神族)과의 결혼에서 난 자라고 해석한다(이병도,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國祖, 1986년 조선일보 10월 9일). 이러한 이병도 교수의 해석은 단군신화를 비신화론화하며 역사화하는 시도이다. 기독교 신학은 토템이즘(Totemism)에 대한 고대 인류학의 연구성과를 수용하면서, 단군신화를 비신화론화하고, 단군을 국조라는 역사적 인물로서 수용한다면 한국의 기독교 문화 형성과 한국 정신문화 형성에 기여될 수 있는 새로운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고 본다.
2) 신앙사상개념의 변혁주의적 수용
기독교는 전통종교가 지니는 다양한 신앙사상 개념을 그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면서 기독교와 재래종교 사이의 공통성과 차이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
기독교가 수용할 수 있는 타종교의 긍정적 측면은 유교의 현세적인 리사상(충․효․의 사상등), 불교의 수도 정신과 禪사상과 태도, 무속종교의 신앙적 열성과 기복태도, 도교의 자연과의 조화사상, 무위(無爲)의 태도, 천도교의 인간 존엄성과 사회개혁 사상 등이다. 이러한 측면에는 각기 기독교의 세속 윤리사상, 금욕적인 생활과 명상의 태도, 신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과 축복사상, 자연에 대한 관리와 종말론적 초연성 사상, 미래지향적 소망과 메시야사상 등이 역동적인 동의어로서 대응한다. 기독교는 한국의 심성과 토양 속에서 표현된 이러한 재래종교의 역동적인 동의어를 성서의 로고스에 부합하는 한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형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독교가 비판하고 제거해야 하는 타종교의 부정적 측면은 유교의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당파성과 파벌성, 불교의 은둔주의, 현세도피주의와 보수주의, 무속종교의 현세적 기복주의와 비윤리성, 도교의 비인격적인 범신론사상, 천도교의 人乃天사상이다. 현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재래종교의 심성과 비성서적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이러한 신앙사상을 불식하지 않고, 도리어 기독교 신앙사상을 이러한 재래종교의 사고풍토 안에서 수용함으로써, 무의식적인 토착화를 통해서 혼합주의화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3) 관혼상제 의식의 변혁주의적 수용
한국 기독교가 아직도 직면하고 있는 문화적 측면의 실제적인 측면은 여태까지 한국인의 민속생활을 지배해 왔던 관례, 혼례, 상례, 제례의식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하는 점이다. 이 관혼상제의 예속의 저변에는 주술적인 무속신앙이 뿌리박고 있으며, 여기에 풍수설, 유교사상, 불교사상 등이 가미되어 혼합주의적 표상이 얽혀 있다. 한국인의 예속은 한국 민족이 농경민족으로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농경생활에 종사하게 되어 한 틀에 고착된 의식이 생겨난 데에 기인한다. 지방신과 농업신에게 제사하는 풍속이 널리 보급되었고, 이 풍속이 무속신앙과 결합하면서 상제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무속신앙은 인간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사람이 죽은 후에는 영혼의 유리(遊離)를 돕기 위해서 돌아가신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제례를 발전시키게 된다. 조상의 영혼은 죽은 후 안식소에 있으나, 끊임없이 자손의 예배와 공양을 받아서 위로를 받고, 그 대신 그 조상의 영은 자손을 가호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비록 몸은 타계에 있으나 가족으로서 친애감은 계속된다. 관혼상제의 예속 가운데 특히 이 제례는 이러한 무속신앙과 유교적인 조상숭배가 결합되어 내려왔고, 관혼상제 예속 가운데, 초기 기독교 선교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기독교는 제례의 형식이 지니고 있는 무속적 영혼숭배사상을 지양하고, 제례가 지니고 있는 조상추모와 효도사상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하여 기독교적 추도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관혼상제의 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관례(成人式)은 남녀 구별 없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는 시기(15-20)에 주로 땋아 내린 머리를 올려 상투를 만드는 예속이었다. 이 예속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사라지고 혼, 상, 제3례 의식이 예속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 4가지 예속에 대한 민속학적 규명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 예속에 남아 있는 무속신앙적 요소를 제거하고, 그 긍정적 요소를 기독교 신앙적으로 변혁시키고, 새롭게 의식화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 예속의 창조가 곧 관혼상제 신학의 과제이다.
4) 추석에 대한 변혁주의적 수용
음력 8월15일은 한국 민족에게는 한가위, 추석, 가배, 중추절로서 불리워지며, 이 날은 성묘의 날이기도 하다. 이 한가위에 한민족은 회소의에서 길쌈을 하며, 의복을 장만했고, 또 씨름과 그네뛰기를 하고, 석전과 서낭당제를 하였고, 소싸움, 닭싸움, 가마싸움, 줄다리기를 하였고, 국왕의 친시 하에 考課가 시행되었다. 백과가 무르익어 과일을 차례상에 올리는 것은 물론 집집마다 나눠 먹었다. 이 날이 만월인 것으로 보아 농경사회 속에서 달에 대한 숭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정월 대보름이 1년 농사의 풍년을 미리 기원하는 명절인데 비해서, 추석은 풍성하고 좋은 계절을 맞아서 힘든 농사를 마쳤다는 농경 감사제였다.
민속적으로는 5월절(파종시의 계절제)와 10월절이 이 계절제 가운데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이 두 계절제를 중요시했다. 5월제는 씨를 뿌릴 때 신에게 년사의 풍등(豐登)을 기원하는 제사였고, 10월제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였다 이 제전에는 천신에게 제사하고 가무와 음주로 주야을 쉬지 않고 즐기는 천신제(薦新祭), 감사제였다. 부여의 영고제, 고구려의 동맹제, 동예의 무천제 등은 추수감사제였고,, 고려의 중동팔관대회(仲冬八關大會)도 이러한 추수감사의 성격을 띤 것으로 이병도 교수는 보고있다(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 5면)
이 추석은 이런 의미에 있어서 기독교적인 추수감사절에 적합한 역동적인 동의어가 아닌가생각한다. 비록 한반도에서 벼, 조, 콩, 팥, 채소의 수확은 9월과 10월에서야 가능하나, 이 추석의 풍습이 한민족이 한반도로 오기 전 수확이 한반도보다 빨리 오는 탁수지역 정착 때에서 비롯된 것을 감안한다면(이상후, 한국농촌경제 전문가의 추석론) 그 정신은 비록 농경사회의 무속신앙에 기반을 둔 것이기는 하나, 천지신명에 대한 추수감사의 축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추석의 유래와 그 정신과 행사와 발전에 관한 고대 인류학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해서 기독교는 이 추석을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그 형식을 받아들이면서 그 내용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새롭게 채우고, 그 의미와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이 요청된다.
5) 한국 예술(문학, 연극, 미술, 건축, 음악 등)의 변혁주의적 이해
우리 재래문화 요소 중 종교적인 형식과 정신적인 부면은 성서적 로고스에 대립되는 요소가 많으나, 예술부분은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형식을 살릴 수 있다. 기독교 예술은 전통적인 형식을 수용하여 기독교 내용으로 채우면 된다. 한국의 문화, 연극, 음악, 건축, 미술의 형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 계시가 한민족의 심성에서 크게 왜곡됨 없이 반영되어 있다. 이 예술 형식은 영역은 인간의 순수한 정신과 활동이 죄의 부패성에 의해 오염을 가장 적게 받은 영역이다. 이미 기독교 신앙이 전통적인 문학형식으로 표현된 것으로는 이벽의 [성교요지](1786년 이전 작),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08), 최병헌의 [성산명경](1912), 심훈의 [상록수](1935), 임옥인의 [월남전후](1955) 등이다. 이러한 문학작품은 재래적인 형식 고시경체(성교요지), 우의적 형식(금수회의록, 성산명경), 개화기 소설(상록수), 1인칭 소설(월남전후)을 수용하면서 근세적 문화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 문화는 이러한 우리 재래의 문학형식을 수용하면서 우리의 문화적 상황을 기독교정신으로 재조명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기독교 건축은 재래적인 조형미인 조화통일, 형식과 선과 색의 통일적인 구성, 해학미 등을 수용할 수 있으며, 기독교 미술도 재래적인 형식인 무기교의 기교, 구수한 큰 맛, 순진한 맛, 순후한 맛 등을 수용할 수 있다. 광화문 같은 건축양식을 교회의 지붕에 응용하는 것도 교회당을 좀 더 한국적으로 친근케 하는 것이며, 박동진이 시도한 ‘판소리’ 복음성가, 나운영이 시도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에 부친 한국적 가락, 김기창이 시도한 ‘ 예수전’ 에 있어서 삿갓 쓴 예수의 모습은 한국적인 정취에 가깝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 민속의 민담, 탈춤, 판소리, 노래라는 형식은 반도민속이 이민족에게 받아온 한과 서민이 양반과 지배계층으로부터 받았던 억눌린 한을 표현함으로써 자기해방을 표출되고 있다. 그래서 해학성, 비판소리, 쌍소리, 자기해방의식이 표출되고 있다. 그래서 정서가 환기된다. 이 놀이 속에서 보는 자와 놀이하는 자의 선이 무너진다. 여기서 고통인 노동은 놀이에 의해서 변형되고 예술의 인간화(조요한, 예술철학)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통적인 형식도 기독교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그 내용의 역동적 동의어(한의 표출과 해소)는 기도와 응답, 문화 비판과 문화 창조라는 기독교적인 내용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그 내용의 무속적인 신 표상, 미신적 사상은 제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당 건축, 찬송가 작사와 작곡, 성화의 제작 등에는 이러한 전통적 형식을 수용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6. 마무리의 글
요약과 정리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 몇 가지 문제들을 추려 낼수가 있다. 즉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 전통적 문화와의 관계, 한민족의 종교습합성과 복음선교의 과제,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한국화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신학 수립을 위한 전이해(해석학)의 문제 등이다.
첫째, 그리스도교 신정은 민족의 전통적 문화를 초월하는 것(Richard Niebuhr)이냐, 아니면 상관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그런데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그것이 역사적 종교인 한에서는 민족문화를 무시 내지 대적시할 수 없지 않을 까. 장구한 세월을 통해서 이룩해 온 민족의 전통적 문화는, 전 인류가 갖고 있는 고귀한 문화적 유산 가운데의 하나가 아닐까. 이런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며 어떤 문화에 대해서도 이방인이 아니라”는 WCC 뉴델리 대회 봉사부 보고서에 동의할 수 있겠다.
둘째로 한민족성의 종교습합성과 복음선교의 과제이다. 종교습합성은 한국 민족성 뿐만 아니라 “아마도 유대인, 희랍인, 애급인들도 다 종교혼합적이다”
이와같은 종교혼합현상이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가 성공을 거둔 요인이었다고 주장한 정 대위 박사의 결론과는 달리, 유 동식 교수는 이 종교 혼합현상에서 빚어진 부정적인 면, 즉 사이비 신흥종교가 범람하는 등 기독교의 실패점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그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윤 성범 박사는 자기의 신학은 일종의 종교의 혼합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장식 교수도 “토착화란 채용과 모방과 융합을, 특히 문화면에서 종교혼합현상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셋째로 민족주의와 토착화 운동이다. 토인비(A.J. Toynbee)는 현대의 대표적인 사상을 민족주의와 개인주의, 공산주의로 보고, 비록 원자시대에 있어서도 이 셋 중 민족주의가 가장 우세하다고 했다. 폴 틸리히는 이 민족주의의 유사종교성 마저 보고 있다. 이 안에는 자기 주장을 위한 권력구조(악마적 요소)와 창조적 공헌을 위한 사명의식(무한한 가치)이 강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자기 주장을 위한 권력구조가 사명의식에 앞설 대, 거의 걷잡을 수 없는 악마성(demonic)이 발동하여 히틀러적인 것이 나오고 반그리스도적인 유사종교가 발동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 신학자들의 토착화론은 역시 복음선교를(사명의식을) 그 근본 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가 보기엔 민족주의 속에 들끓고 있는 악마적인 위험성은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토착화론과 전이해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복음의 대상인 본토민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토착화의 전이해로 보아 왔다. 그런데 한 철하 박사의 토착화론은 전이해와 관계없이 토착화가 가능하다. 한 박사는 불트만의 전이해가 기독교를 얽매고 있어, 마치 우리들이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처럼 되어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정신이 가지는 자기 초월의 능력은 전이해까지도 초월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와같은 인간 주체가 개종하여 가지는 신학적 견해가 그 민족사관을 결정하는 것이며, 한국에 있어서 개종한 인간 전체가 민족적 주체를 새롭게 하고, 또 민족사를 새롭게하려 할 때, 이 ‘민족의 신학’이 필요하며 산출될 것이라고 했다.
토착화의 개념을 넓은 지평으로 확장시켜 종교와 문화의 전통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복음이 수용되는 전반적인 적응의 과정 전체를 '토착화'의 과정으로 보는 신학사적 시각을 추론하고자 한다. 따라서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이른바 '한국적인 문화 양식'의 기독교내 적용이라든가, 적극적으로 다른 전통 종교와의 교류와 상호 인정 등의 '대화적 태도' 등에만 토착화의 의미를 고착시키지 않고 한국교회사에서 이루어진 복음의 수용 행위 전체를 내재적 토착화 과정으로 보는, 더 넓은 신학사적 안목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전제에서는 '복음수용'의 '프로세스'가 그대로 '토착화'가 된다.
2. 한국교회 '토착화'의 과정
(1) 성서번역
"(성서번역에서의 토착화란) 성서의 이미지를 가장 가깝게 한국적인 표현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서구적인 논리의 세례를 받은 일부 학자들의 심상에 비친 기독교가 아니라 한국말 성서밖에 읽을 수 없는 크리스천 대중의 체험 (성서의 리얼리티와의 만남) 속에서 솟아나는 것을 보자는 것이다."
'토착화'를 '복음수용'의 전체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더욱 광의적으로 규정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관심 선상에 떠오르는 것은 성서의 번역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히브리와 희랍의 언어와 문자, 사상의 토양에서 응축된 '말씀'이 한국인에게, 그것도 세계적인 사상의 조류를 섭렵하거나 접촉조차 못한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읽히고 이해시키며, 깨달아 믿게 하는, 그 성서를 번역하는 일이 그런 '토착화'의 첨병이 됨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성서번역은 어떤 경로를 거쳐 토착화를 선도할 수 있을까. 다른 글에서 문익환은 다음과 같은 이상을 주창하였다.
"번역된 한국말 표현이 한국말로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말이다. 성서를 생전 처음으로 읽는 독자의 생각과 무리 없이 맞아들이면서 그 생각을 돌리려면, 번역된 한국말이 번역투를 말끔히 벗어버린 극히 자연스러운 우리말이어야 한다.……히브리어의 굵은 톱니를 핵 문장으로 부수어서, 심지어 전치사 하나 하나 속에서까지 사건어를 찾아내면서, 우리말의 잘다란 톱니에 맞추어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재구성할 때에 비로소 성서의 신앙이 우리의 사고에 물리고 우리의 생을 돌려 기독교적인 새 문화 창조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정한 토착화는 그 때에야 이룩될 것이다.……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신학은 우리 민족의 사고에 물려 이 민족 역사의 궤도를 돌리는 힘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글성서의 번역사를 연구한 바 있는 이덕주도 "한글성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욕구를 연결시켜 줄 뿐 아니라 서양으로부터 흘러 들어 온 기독교란 종교를 한국이란 문화와 연결시킨 운하라 할 수 있다. 두 개의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가 만나 서로 교류하기까지는 운하를 파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성서번역이 바로 그 노력의 결산이다. 따라서 성서번역은 단순한 기독교 경전의 다른 말로 옮김이 아니라 신앙과 신앙과의 교류, 사상과 사상과의 교류, 문화와 문화와의 교류를 의미한다"고 하여 이 성서번역의 의미가, 앞서 규정한 바 있는 광의적 의미의 토착화 통로(운하)임을 주장하고 있다.
한글성서는 최초의 '로스역 성서'를 시작으로, 일본에서 진행된 '이수정역본 성서', 그리고 국내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된 공인 성서번역자회의 번역, 1911년의 성경전서의 완성과 그 뒤의 개역, 그리고 공동번역성서나 오늘날의 새 번역과 여러 사역(私譯)과 부분 성서에 이르기까지 120여 년의 번역, 간행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한글성서의 번역과 간행 역사의 노정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성서의 진리와 한국문화의 접속과 융합이라는 토착화 과정이 적용된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그 구체적인 사례 전체를 세세히 살필 여력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예로 든다면 '하 님'이라는 신 호칭의 문제는 숙고해 보아야 할 성서적 토착화의 대표라고 본다.
"이 성서의 특징 중 하나는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유독 '하느님'이란 단어 앞에서는 예외없이 한 칸 띄어쓰고 있다. 이것은 소위 대두법(擡頭法)이라 하여 문장 중 경의(敬意)를 나타내고자 할 때 그 낱말을 딴 줄로 잡거나 아니면 몇 자를 띄우고 쓰는 일종의 동양식 표기법인 것이다."
이는 로스역 성서에서 이미 '하느님'이라는 한국적 신 호칭이 결정되고 그 호칭의 앞에 '대두법'을 통한 동양식 표기의 경의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에 대한 개념 유추의 이해를 시도하고 있음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한편 동양 삼국(한·중·일)의 기독교 수용사에 있어 그 신 호칭 문제를 놓고 학자들 간에 담론을 하기도 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한국기독교 복음 수용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동의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즉 한국의 '하 님', 중국의 '상제'(上帝), 일본의 '가미사마'(神樣)는 나름대로 토착화된 신 호칭인데, 이것이 그 복음수용의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결국 한글 성서번역 과정에서 신 호칭이 '하 님'으로 결정되고 오늘날 '하나님'(혹은 하느님)으로 정착된 사실은, 그 호칭이 지닌 의미론적인 힘이나 한국의 종교 역사 문화적 전통으로 비추어 볼 때도 한국 기독교의 복음수용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사실에 많은 학자들은 거의 전적인 동의를 한 바 있다.
그러나 한글성서 번역사에서도, 처음 로스 번역에서, '하느님', '하나님'(요한복음 수정본)으로, 이수정역본 마가복음에서는 '신'(神)으로, 이수정의 '현토성서'(懸吐聖書)나 국내판 국한문성서에서는 중국식 '상제'로, 그리고 다시 국내의 공인 성서번역자회의 번역성서나 그 후의 개역 등에서는 다시 '하 님', '하나님'으로 변천되면서 성서적 토착화의 경로를 충분히 거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2) 의례와 예배의식
교회 절기 가운데 하나인 추수감사절예배를 11월에 드리지 않고 한국 고유의 추수감사제 절기인 '추석' 즈음에 드리는 것이 토착화된 기독교 예배의 전형이 되는 것일까? 예배에서 피아노나 오르간 등 서구 악기를 쓰지 않고 가야금이나 대금 등 국악기를 쓰는 것이 토착화 예배의 한 전형일까? 성직자나 성가대의 예배 가운을 한복으로 바꾸거나 교회 건축의 안팎 장식을 한국의 전통 양식으로 꾸미는 일, 성화나 기독교 미술의 조각·공예 등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나 따르는 무리들의 모습을 한복 입은 한국인으로 표현하는 것이 또한 토착화의 예표(例表)인가?
물론 이와 같은 시도나 그 결과물들, 그리고 그와 같은 적용의 과정을 밟아 온 한 경향의 역사적 전거들이 토착화 경로의 구체적 사례들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학적으로는 다소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한 조류의 흐름과는 달리, 보수적이라거나 심지어 근본주의적인 신앙양태와 신학을 표방하며, 한국교회 초기부터 전해지고 수용된 방식 그대로의 엄격한 예배전통이나 신앙표현의 전통을 지켜 온, 더욱 높은 비율의 한국교회의 대세적 분위기는 토착화의 적용과는 거리가 먼 별개의 흐름이 되는 것일까?
한국에 복음이 수용되고 신앙공동체의 정기적 예배가 시작될 때 어려운 문제 하나가 대두되었다. 곧 '남녀칠세부동석'의 강고한 유교적 내외법을 적용하고 있는 한국의 사회문화적 전통에서 최소한 공동 예배 등에서 남녀의 차별을 전혀 두지 않는 기독교가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비켜나서 공중예배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인수가 늘고 남녀가 한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 형편이 되자 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남녀가 서양인 앞에서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당시 유교 전통이 깊이 뿌리박고 있던 한국 사회에선 용납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휘장이 사용되었다.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휘장을 사용한 선교사는 1885년 입국한 감리교의 스크랜톤 부인(Mrs. M. Scranton)이었다. 휘장을 사용하여 남녀석을 구분함으로써 여성을 교회에 인도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인 비난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인이 계속 늘어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휘장은 그 한계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여기에 고안된 것이 ㄱ자 예배당이다. 교회를 ㄱ자 모양으로 지어 모서리에 강단을 설치하고 휘장을 쳐서 한편에는 여자석, 다른 한편에는 남자석을 따로 만들어 남녀가 갈라 앉아 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게 했으며 출입문도 따로 만들어 남녀의 출입을 구별하였다. 이 예배당의 형태가 한국 재래의 고패집(고패는 휘어진 고리를 가리키는 말로서 고패집하면 고리모양으로 지은 집을 말한다)과 하여 [고패집예배당]이라고 불렀다."
이 ㄱ자 예배당 건축의 대표적인 예가 초기 평양 장대현교회, 전주 서문교회, 춘천 중앙교회, 서울 새문안교회, 안동교회 등으로 전한다. 1910년경에 이르러 이러한 구습이 교회내에서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은 장로교회의 한석진 목사가 서울 안동교회 시무 당시 이 ㄱ자 에배당을 철거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한 시대의 '토착화' 교회 건축과 예배형태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先生은 入信 처음부터 祈禱와 聖經硏究를 힘섯다. 先生은 祈禱의 人이엇나니 每日 三回 定時의 祈禱가 잇엇다. 特히 새벽에는 일즉 어 日日의 事를 기도로서 하나님 議論하고 二十分間 默示錄 全篇을 暗誦하고 仙修式 體操를 行하고 午正과 밤에 定時祈禱가 잇엇다. 선생은 自己 혼자만 祈禱할 아니라 새벽 祈禱會는 先生이 처음으로 創始하엿다. 一九ㅇ六年 秋에 章(台)峴敎會 助師 視務할 에 朴致錄 長老와 함 새벽祈禱를 始作한지 月餘에 크게 恩惠됨으로 이를 堂會에 請願한지 數次만에 堂會決議로 全敎會가 새벽祈禱會를 繼續할새 敎人들이 새벽鐘 소리만 드러도 울면서 禮拜堂에 나왓다. 이리하야 始作한 새벽祈禱가 一九ㅇ七年 大復興에 準備祈禱가 되엿든 거시니 全世界에 새벽祈禱會는 先生으로부터 비롯한 거시다."
새벽기도회가 오늘날까지 한국교회만의 전통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물론 서구 가톨릭이나 성공회, 수도원의 전통 속에서도 이른바 '아침기도' 등이 있으나 그 시간과 예배 구조 등에서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새벽기도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국 민중의 탁월한 종교성이 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선교 후 20여 년이 경과하면서 이제 기독교도 한국인에게 하나의 완전한 종교로 용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든, 유교든 나름대로 토착화하여 발전시켰던 한국인의 종교성은 기독교의 경우도 일단은 그것을 내면적으로 수용하는 데 있어 신비적 체험을 하였다. 새벽기도의 모델은 한국교회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연결한 토착적 종교행위의 대표이다. 비로소 한국교회 교인들은 기독교의 종교적 향내에 심취하고 이를 완연한 종교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새벽기도회는 한국인의 종교적 전통과 그 심성 속에 용해되기 시작한 기독교 신앙의 의례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동시에 이를 통해 이른바 한국교회 초기 대부흥운동의 불길을 점화시키는 역할도 감당하였다. 곧 한국인의 종교적 정조의 골을 잘 탈 수 있는 새벽기도회의 경건과 신비적 모델은 한국교회 초기 성숙의 원동력으로 동원되고 오늘날까지 그 확고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한국교회 백년 전통의 새벽기도회를 이른바 '새벽기도의 신학'으로까지 주창한 보수계 신학자 박아론(朴雅論)은 한국교회 새벽기도회가 지닌 신앙적 요소를 '신비'(mystery), '고요'(tranquility), '생기'(vitality)로 규정하고 이 세 가지 요소는 한국 기독교인의 개인적 신앙훈련이나 교회성장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예가 된 몇 가지 요소, 곧 초기의 ㄱ자 예배당 구조와 예배 진행 양식,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되는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 등은, 보수나 진보로 가름되는 신학적 입장을 불문하고 한국교회의 내재적 요소로 적용되어 온 광의적 토착화의 전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 신앙정조
"〈聖書朝鮮〉아 너는 所謂 基督信者보다도 朝鮮魂 所持한 朝鮮사람의게 가라. 시고을노 가라 山村으로 가라 거기의 樵夫一人을 慰함으로 汝의 使命을 삼으라."
한국교회사에서 '한국 민족 기독교론'을 전제할 때 그 사상적 선례로서 가장 충실한 예표를 제공하는 것은 김교신의〈성서조선〉(聖書朝鮮)과 '조선적 기독교'임은 공감되는 바가 넓다. 일제 침략기에 수용된 한국기독교가 그 특수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민족수난과 십자가를 함께 하며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민족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해 온 사적은 예를 다 들 수 없을 만큼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역사적 노정을 넘어서 사상, 혹은 신학적으로 성서적 진리와 민족혼을 제휴시키고자 한 시도가 김교신에게서 만큼 절실하게 전개된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朝鮮보다 더 좋은 데가 地球우에 다시 있으랴? 비록 白頭山이 없었다 하고 金剛山이 생기지 않었다 하여도, 그래도 朝鮮은 다시없는 朝鮮이라고 생각하니 이는 勿論 우리 主觀이다. 第一 좋은 것은 聖書와 朝鮮. 故로 聖書와 朝鮮."
'성서와 조선',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는 세 가지 표어가 김교신이 품었던 '조선적 기독교 운동'과〈성서조선〉발행의 목표였다. 이 둘, '성서'와 '조선'의 하나됨이 얼마나 간절하였으면, 그 신앙잡지의 표제에서 '성서와 조선'이 같이, 두 주체 사이에 '와'와 같은 접속사마저 거부하고 하나로 붙여 이름하였을까. 이 운동에 있어 성서의 진리와 '조선혼'은 이미 상호 이질적 경계선이나 거부반응을 완전히 넘어서서, 이식된 피부에 신경과 혈맥이 통하듯이 한 몸체가 되었다. 이처럼 신앙적 동기와 정조로부터 토착화를 실현한 한국교회사의 전거가 또 따로 있을까 한다.
"멀니멀니갓더니 쳐량?고곤?며
슬프고 외로와 뎡쳐업시 니니
(후렴)
예수예수내쥬여 곳갓가히오셔셔
쉬 나지맙시고 부형 치됩쇼셔
예수예수내쥬여 셥셥?여울 에
눈물시셔주시고 날반갑게 쇼셔
니다가쉬일 갑갑?곳맛나도
홀로잇게맙시고 기리보호 쇼셔."
이는 1895년 작품으로 한말의 절박한 역사 정황과 맞물려 있는 배경을 지녔다. 민경배는 그의 저서에서 이 편역한 찬송가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895년이면 일국의 왕후가 일본 浪人의 칼에 그 참전에서 절명하던 때이다. 이것을 乙未事變이라 일컫는데, 그 깨지는 듯한 통한이 겨레의 심혼을 땅에 쏟아 놓을 때이다.……이 때에 베어드의 찬송가가 울려 퍼진 것이다. '쳐량?고 곤?며 슬프고도 외로와 뎡쳐업시 니니' 이것은 대단한 시적 구성이다. 한말의 처절한 나라의 정상을 이처럼 모질게 표현한 글이 다시 없을 것이다."
이는 결국 한 나라 교회의 신앙정조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하는, 그 시대에 지어지고 불리는 찬송가는 시대적 정황에 철저히 기인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토착화'의 의미 지평을 굳이 일정한 전통의 종교나 문화로 어렵게 한정하지 않고, 복음이 수용되는 역사의 현장까지를 포함한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 '토착화'의 생동성이 스며들어 있는 예는 없을 것이다.
이렇듯 광의의 토착화 개념을 통전적으로 한국교회사의 전체 이해 범위 안으로 끌어 들여 볼 때 이른바 '한국민족교회'의 신앙적 고백이나 행위, 한국 기독교인들의 '나라사랑'의 신앙이 모두 '한국적 기독교'의 구현 내지는 '토착화'의 과정으로 살필 수도 있다. 복음 수용 초기부터 태극기를 게양하는 기독교회, 찬송가와 애국가의 구별을 두지 않던 기독교회, 새벽부터 모여 쓰러져 가는 나라 형편을 두고 눈물로 기도하던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행위, 뿐만 아니라 저 3·1운동과 그밖의 여러 구국 독립운동에서 교회공동체적으로 혹은 기독교인들 개인적인 신앙결단으로 목숨을 걸고 투쟁에 나섰던 신앙실천 모두가 넓은 개념으로 상정해 볼 때 '토착화'의 범주에 속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기독교와역사 10집(99년)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과 문화적 갈등
차은정(서울대 종교학과 박사과정)
2. 전통의례와의 갈등과 접합
앞 절이 비교적 개신교 의례의 보편적인 성격을 다룬 것이었다면 이 절에서 다루는 것은 '한국'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형성된 한국 개신교 의례만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전통의례와 개신교 의례의 긴장관계를 아울러 서술할 수 있어야 의례의 성격을 균형있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전통의례와 개신교 의례의 관계 양상
한국의 전통적인 의례와 개신교 의례의 관계 양상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유형은 '거부형'이다. 대표적으로 조상제사와 관련된 의례가 거부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외에도 불교나 무속 등 타종교의 의례가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개신교인들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곧 우상을 섬기는 것이므로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로 보았다. 따라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거나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등의 모든 행위를 철저하게 거부하였다. Ⅱ장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죽은 이의 기일을 맞았을 때 음식을 벌여놓고 제사 지내는 것을 거부하고 기도와 찬미로 기일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도 1911년 이후 자료에 의하면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또한 혼례를 치를 때 일가친척이 모여 사당 차례를 지내는 것도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심한 경우는 사당을 불지르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전도사의 집으로 도망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상제사에 대해 거부하는 태도는 제례나 혼례에서만 문제시된 것이 아니라 설이나 추석·한식 등 전통 절기에 제사지내는 풍습에까지 이른다. 한국 개신교가 전통적인 절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데에는 이러한 절기가 공동체의 축제라는 의미 외에도 조상숭배의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1891년에서 1897년까지 선교사들은 세례시에 서약하는 7개의 조항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께서 영들을 숭배하는 것과 높이는 것을 미워하시므로 조상의 영을 숭배하는 것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받고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는 조상제사와 관련된 전통의례 외에 타종교의 의례에 대해서도 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무속신앙에 기반한 민간의 풍속은 헛된 것을 따른다고 철저하게 거부되었으며, 특히 초기에는 개화에 방해가 되므로 버려야 할 것으로 취급되었다. 집안에 터주나 조왕신·성주·부군을 모시는 것에 대한 비판과 길일을 택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강력하게 제기되었으며, 당집의 탱화를 찢고 돌부처를 깨부순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거부의 적극적인 행위가 수반된 경우 외에 보다 소극적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사월 초파일을 나라의 큰 명절로 지키는 것을 비판한 경우, 강력한 거부의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다만 유교를 종교로 존중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공자 탄일은 그냥 지내고 사월 초파일에는 해마다 불을 켜서 석가모니를 기념하는지 모르겠다며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기존의 종교적 풍습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방식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십계명을 따른다는 명분이 있었으며,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구습을 버리고 사회의 발전 방향을 따른다는 명분이 있었다.
관계맺음의 두번째 유형은 '절충형'이다. '절충형'은 그 의례의 필요성이 충분히 인정되며, 또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행해서 나름의 의미와 기능이 사람들에게 깊이 수용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거부할 수 없는 의례들과의 관계 양상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런 의례들을 기존의 방식 그대로 행하되, 우상숭배로 간주되는 부분만 배제하고 그 자리에 개신교의 예배를 삽입시켜 개신교 의례와 전통 의례를 절충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상례다. 한국 개신교의 상례는 시신을 처리하는 법이나 매장하는 법, 의례를 행하는 시간을 정하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인 의례의 흐름에 개신교식 예배가 부분적으로 첨가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경우에 그 의례를 최대한 개신교적인 것으로 의미화하기 위해 예배를 삽입하는 것 뿐만 아니라 상징물을 대체시키는 것도 흔히 보인다.
이처럼 기존의 전통의례 속에 개신교의 예배가 삽입되게 되면 전체 의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깨어지고, 다른 문화적 기반을 가진 두 의례가 필요에 의해 적당히 섞여 들어가게 된다. 이런 모습은 사실상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게 되면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외형상 하나의 의례 속에 성격이 다른 두 의례가 함께 존재하게 되면, 힘이 어느 쪽으로 쏠리는가에 따라 전체적인 의례의 형태와 내용이 달라진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개신교의 경우에는 전체 의례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추가된 개신교 예배가 그리 큰 힘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오랜 기간을 거쳐 익숙한 기존의 의례가 삶의 현실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삽입된 개신교의 예배가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어색함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유형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한국 종교문화가 가진 특성이다. 원래 서구 개신교에서는 없었던 의례가 한국에 들어와서 새로 생기거나 개신교 의례가 담고 있지 않았던 내용들이 새로이 첨가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의 종교문화와 서구 개신교 종교문화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또한 그 차이를 한국 개신교가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는가도 읽을 수 있다. '절충형'은 한국에서 전통적인 의례가 가진 의미와 기능이 단시일에 쉽게 없애거나 거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개신교 의례도 역시 이것을 흡수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번째 유형은 '묵인형'이다. 이는 굳이 개신교가 포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 의례들과 관계맺는 방식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그 의례가 이미 종교성을 상실하여 단지 문화적 관습으로 남아 있기에 더이상 위험스런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달리 보자면 이런 의례는 한국이라는 문화적 특수성에 의해 형성된 의례로서, 개신교에서는 여기에 해당하는 의례가 없으므로 결국 묵인할 수 밖에 없었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례로서 대표적인 것이 전통적인 절기의례와 생활의례이다. 한국에는 1년을 단위로 해서 여러가지 절기가 있으며 그에 따른 의례가 있지만 개신교에서는 음력설과 추석에 조상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만 거부를 보일 뿐, 다른 절기는 아예 언급조차 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태도는 기존의 절기의례들이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개신교와 이미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었고, 조상제사와 관련된 부분 외에는 별다른 비판이 없었다. 오히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다는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절기의례를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음력과 양력을 다 지키는 것이 사회적인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서구의 관습을 따라 양력을 지키는 것이 합리적임을 논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는 점차 양력을 지키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음력에 기반한 절기의례는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라질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개신교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점차 사라질 의례들, 이미 종교적 의미와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고 판단되는 의례들에 대해서는 굳이 그 의례의 종교성을 거론하면서 거부하거나 애써 개신교의 의례로 의미화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개화에 걸림돌이 되는 측면을 지적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전통적인 절기의례에 대해서 묵인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 외에 주택과 관련된 생활의례나 돌·회갑 등의 기념일과 관련된 생활의례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내거나 제물을 먹는 일만 아니면 특별한 규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의도하지 않은 채로 일반 신도들이 절기의례나 생활의례가 기반하고 있는 전통문화의 종교적 에토스(ethos)를 계속 유지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조상제사는 엄격하게 거부하고 제물을 먹는 것도 이른바 귀신들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 조상숭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는 전통적인 종교관을 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 신도들의 의례적 삶에 다양한 층위를 만들어내고 있다.
(2) 전통의례가 수용되는 지점
전통의례와 개신교 의례는 엄연히 서 있는 기반이 다르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 의례에서는 성격이 다른 두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개신교인들이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의례의 곳곳에서는 전통의례의 다양한 흔적이 발견된다. 흔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통의례의 요소들이 너무나 파편화되어 있고 또한 그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차용되기도 하기에 그렇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전통의례의 흔적들이 한국 개신교의 의례를 서구 개신교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만든다.
물론 정기의례인 주일예배의 경우에는 두 문화의 공존이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서구 개신교의 예배 형식을 확정적인 형태로 들여와서 그대로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혼례와 상례, 그리고 다양한 생활의례의 곳곳에서 우리는 전통의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개신교 의례의 진행 과정 앞뒤에서 전통의례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개신교에서 채워질 수 없는 의례적 욕구들을 해소하기 위해 전통의례를 받아들이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신교 의례에 전통의례가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구체적 형태에 대한 서술뿐만 아니라, 전통의례가 수용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 죽음과 관련된 의례들
우리의 전통에서는 죽음을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전환으로 이해해 왔다. 유교적 제사문화나 민간신앙의 의례들 속에서 이런 이해가 잘 드러나고 있다. 문화는 오랜 습관을 통해 전수된다. 그렇다면 한국에 살고 있는 개신교인들의 문화적 습관은 서구 개신교인들과는 다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죽음과 관련된 의례들은 서구 개신교와 한국 개신교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준거가 될 수 있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한국 개신교의 상례에서 개신교 고유의 것은 예배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며 그 외 전체 의례의 흐름은 전통 상례를 따르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구의 개신교가 죽음에 관련된 의례에 비중을 두지 않아 왔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 종교문화 내에서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개신교 의례 자체로는 담아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이해하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소통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 종교의 특성으로 인해 죽음에 관련된 의례는 매우 복잡하고 섬세한 구성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한 의례도 상례 못지않은 비중을 가지는 제례로 독립되어 있으며, 제례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이루는 공동체의 의미와 질서가 유지되었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서구와 판이하게 다르며, 역사를 통해 한국인의 삶에 체화되어 온 것이다. 그렇기에 개신교가 감사와 찬양, 확신과 찬미를 강조하며 전통 상·제례와 차이를 두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개신교의 상·제례의 전체 흐름을 보면 개신교식 예배와 전통의례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 공동체와 관련된 의례들
전통적으로 한국의 의례들은 개인을 신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주와 자연, 인간 사회와의 관련 속에 위치시켰다. 예컨대 돌이나 회갑 같은 개인적인 기념일에 행하는 의례는 혈연집단의 공동체감을 상승시키고 재질서화하는 역할을 한다. 탄생과 자라남·혼인·죽음 이 모두는 개인의 삶의 마디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와 관련된다. 즉 한국의 전통의례들은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시켜 주는 의례인 것이다. 이에 비해 개신교의 의례에서는 신과 개인의 단독적인 만남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 의례의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는, 한국의 신도들이 공동체를 규합하고 재질서화하기 위해 전통의례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구 개신교가 개인적이고 단독적인 의례를 계속 유지시켜온 것과 비교해 보면 한국 개신교는 공동체 문화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전통의례를 받아들이는 지점은 바로 공동체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생활의례에 대한 요구들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더욱 분명하게 이런 특성을 드러내주는 예는 바로 혼례다. 대부분의 개신교 혼례에서 폐백이 행해지고 있는데, 폐백은 신부가 신랑댁에 인사하는 순서로, 여기서는 전통적인 친족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전래 초기부터 지금까지 폐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오늘날 폐백은 한복을 입은 사진을 찍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그것이 사진 문화냐 아니냐가 아니라, 왜 하필이면 폐백이 선택되었나 하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혼인은 개인의 결합을 넘어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며, 남자의 집으로 여자가 들어가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라고 했을 때, 폐백은 새로운 구성원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친족 공동체의 질서를 재정비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형적인 서구 개신교의 혼례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규합하고 재질서화하기 위한 의례적 절차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 대한 한국 신도들의 의례적 요구는 공식적인 개신교 의례 속에 수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의례적 요구에 의해 개신교인들도 결혼식은 개신교적인 의례로 치르면서 동시에 함을 들여보내고 폐백을 드리는 것으로 보인다.
살펴본 바대로 '죽음'과 '공동체'라는 계기가 전통의례의 수용 지점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한국 종교문화의 특성을 읽을 수 있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의도하지 않은 채로 전통의례를 수용하고 있고, '죽음'과 '공동체'에 관련된 의례적 욕구를 가지는 것은 그러한 특성의 반영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