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8일(토) 사단법인 평화의길 제주지부 워크숍이 남선사에서 사무실 개원과 의귀 4.3순례길(남선사 출발-의귀초등학교-송령이골 무장대 무덤- 수망리 현의합장묘 참배- 추모관에서 유해발굴영상 시청- 남선사도착 공연-명진스님의 메세지-점심식사) 을 걸었다. 이사장 명진스님과 광주5.18 관련 단체등 60여명이 참석하여 양봉천 유족회장의 해설을 들으며 추모관에서 유해발굴 영상을 시청하며 제주 4.3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남선사에 돌아와 제주가수 우종훈의 공연을 보았고 이자리에서 명진스님은 "과거에는 4.3을 말하면 폭도요 빨갱이라는 시절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4.3을 말할 수 있는 시절이 온것만 해도 감개무량하지만 제주 4.3의 배후에는 누구였던가? 5.18의 배후는 누구였던가? 분단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민족의 고통의 배후는 누구였던가?에 대하여는 명확하게 이야기들은 것은 이직도 겁이 나서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진보쪽에서부터 386 정치인들조차도 대한민국 분단에 4.3에 5.18에 모든 역사의 아픔 속에서 무엇이 작용을 해서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기 두려워합니다. 친미를 넘어서서 숭미를 넘어서서 공미 미국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정치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4.3의 배후는 미국이고, 광주5.18의 베후도 미국이고 분단의 배후도 미국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털고 확실하게 인식하고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저 옛날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 묘역 앞에 가서 합장하고 부그러워 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뒤집어지지 않고는 올바른 역사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이고 다시한번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제주 4.3 사건이란?
제주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 한국전쟁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당국의 정책 실패와 사회문제 등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주도민의 민.관 총파업에 대응해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청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테러와 고문을 일삼았다. 결국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반대를 기치로 소요사태가 발생하였고. 5.10 총선거(200개 선거구) 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보도연맹사건)와 내륙지방 형무소 재소자 등이 또 다시 희생이 되었다. 결국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이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2만5천~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계적인 냉정 상황과 한반도 분단체제의 고착화 과정에서 발발.전개된 제주 4.3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집단희생으로 귀결되었고, 이 후 반세기를 넘어 진상 규명운동의 과정을 거쳐 명예회복을 통한 화해와 상생의 해결과정을 밟고 있다.
의귀리 4.3사건이란?
의귀초등학교는 4.3당시 1948년 12월26일부터 1949년 1월20일까지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실제 2중대원으로 이곳에 근무했었던 이 윤은 "진중일기" 에 "1대대 2중대는 1948년 12월16일 제주에 들어와 12월26일 의귀리에 주둔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 2중대는 학교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하며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은 매일같이 주변 수색에 나섰고. 의귀리.수망리.한남리와 가시리 주민들을 현장에서 총살하거나 마을 주변의 숲이나 궤(동굴)에 숨어 있는 주민들을 발견하면 즉시 총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잡힌 사람들.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하여 돌아온 사람들을 학교 창고에 감금해 두었고 1949년 1월10일 김재춘.양기필 등 30명이 1차 총살되었다.
1949년 1월12일 무장대는 다른 주민을 구출하려고 했는지 산에서 내려와 군 주둔지 습격을 감행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이날 교전 중에 4명의 군인 전사자와 무장대 51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군인들은 피의 보복으로 초등학교에 감금했던 주민들 80여명을 집단 총살했다.
이곳에서 어머니와 채 이름도 짓지 못한 동생을 잃은 김명운(남. 03년 71세)씨는 "생후 15일 된 어린 동생이 어머니 품에서 같이 죽었다" 고 말했다. 이곳에 흙암 씌운채 아무렇게나 버려졌던 희생자들의 시신 일부는 1년쯤 지난 1950년 마을 재건 즈음에 유족들이 찾아갔다.
이때 옷가지나 기타 특이사항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시신 일부를 유족들이 품치듯 찾아간 것이다.
찾아가지 않은 나머지 시신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민보단에 의해 들것에 실려 의귀리 765-7번지 (구 현의합장묘역)에 집단 매장되었다.
1976년 유족들을 중심으로 봉분을 쌓고 성묘를 하며 "삼묘동친회" 를 결성했다. 세 무덤에 묻힌 사람의 후손들은 같은 친척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1983년 "현의합장묘" 비석을 세웠다.
2003년 9월16일부터 20일까지 유해발굴 및 추도식을 갖고 수망리의 새로운 묘역에 안장했으며
2004년 10월7일 현의합장영령 유허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유난히 매섭고 시렸던 무자.기축년 그 겨울
곰도 범도 무서워 잔뜩 웅크려 지내면서도
따뜻한 봄날 오려니 했더이다. 아, 그랬는 데....
거동 불편한 하르방 할망, 꽃다운 젊은이들
이름조차 호적부에 올리지 못한 물애기까지
악독한 총칼 앞에 원통하게 스러져 갔나이다.
허공 중에 흩어진 영혼, 짓이겨져 뒤엉킨 육신
제대로 감장하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간다는 데
무시로 도지는 설움 앞에 행여, 누가 들을까
울음조차 속으로만 삼키던 무정한 세월이여!
'살암시난 살아져라' 위안 삼아 버틴 세월이여!
앙상한 어웍밭 방엣불 질러 죽이고 태웠어도
뿌리까지 다 태워 없애진 못하는 법 아닙니까
봄이면 희망처럼 삐죽이 새순 돋지 않던가요
참혹한 시절일랑 제발 다시오지 말라 빌고 빌며
뒤틀린 모진 역사 부채로 물려줄 수는 없다며
봉분 다지고 잔디 입혀 해원의 빗돌 세우나니
여기 발걸음한 이들이여! 잠시 옷깃을 여미어
한 가닥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 보듬고 가신다면
헛된 죽음 아니라 부활하는 새 생명이겠나이다.
송령이골 무장대무덤
1949년 1월12일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는 군부대를 습격했고 교전 중에 군인이 쏜 기관총에 맞아 51명이 사망했고 대부분의 시신은 친척이나 가족들이 수습해 갔고 17여구의 시신들이 의귀초등학교 북쪽 밭에 널 부러진 채 1년간 있었는데 마을이 재건되면서 마을사람들이 송령이골에 세 군데로 나누어 매장했다고 하며 제주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무장대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