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삼정 은사님을 모시던 일
강원채
-1990년 개교40주년기념 ‘금계’교지 창간호에서-
개교 40주년을 맞는 금계중학교에 진심으로 축하를 올리며 아울러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은사 계삼정 선생님의 적공을 높이 찬양하는 바이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뵙고 인연이 된 것은 1938년 평양숭인상업학교에 다닐 때 미술을 가르치시면서부터였는데, 그 당시 선생님은 젊으시면서도 열성있고 자상하게 이해 깊은 지도를 하시어 많은 학생들이 존경하던 선생님이셨다.
1940년 학교를 졸업한 후 뵙지 못하다 1947년 월남해서, 동기였던 고 김재현 형의 사무실 [유정공업기계회사]에서 8 년만에 재봉하였으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1947.7.1)하고 소위로 임관(1948.4.6) 된 후 로는 뵙지 못한 채 6.25 전란을 당하였다.
그 후 다시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면서도 기연인듯 싶다.
1951년 4월초 제 5경비대대 대대장으로 MSR의 임무를 띠고 김천에서 풍기로 부대 이동을 하였었는데, 풍기 장날인 4월 8일 풍기의 유지이던 엄창섭 씨와 함께 시내를 지나다 흰 무명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고무신을 신으신 분이 엄의원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고 누구신가 물었더니, 그 분은 수년 전 풍기에 오셔서 금계고등공민학교를 세워 농촌 젊은이들의 교육에 애쓰시는 평양 출신의 계삼정 교장 선생님이시라고 하기에, 제가 알고있다. 계명칠(계삼정 선생님의 구명) 선생님과 인상이 너무도 비슷하나 하도 의외의 장소에서 갑작스런 모습으로 뵈었기에 알아 뵙지 못하고 계 선생님의 백씨이신가 싶기도 하여 확인하였던 바 바로 은사님이시었으니, 그때의 반가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저는 당시 풍기를 비롯하여 단산, 부석, 봉화, 석보, 강원도 장승, 상주, 영양, 안동 등지의 공비 토벌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가끔씩 시간을 내어 선생님을 예방할 때면 늘 자상하게 반가워 하셨고, 그 때 제가 중령으로 승진된 것을 보시고는 무척 기뻐하셨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시내 볼일이 계시면 저희 부대까지 일부러 다녀가시고는 하셨다.
당시 군수로는 작고하신 권○○씨, 경찰서장에는 최석채(전 문화방송 회장)씨가 봉직중이었는데, 이분들을 함께 만날 때면 계 선생님과 강 부대장은 모범적인 사제지간이라고 칭찬을 하리만치 선생님께서는 항상 저를 사랑해 주시고 성원해 주셨던 것이다.
또한 그 무렵 중학교 승격 문제와 교실 증축 문제로 영주로 대구로 서울로 자주 바삐 다니시며 고충을 겪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때마침 부대 고문관으로 잇던 Palmar 소령이 원주 부근의 미공병대 친구한테서 얻어온 20여 자나 되는 교량용 목재 중 몇 본을 교실 대들보로 긴요하게 쓰시면서까지 힘겹게 교실을 증축해 나가셨다.
한 번은 학생들이 멀리 수학여행은 갈 수 없으나 가까이 있는 부석사 견학이라도 시켰으면 좋겠다며 부대 트럭을 지원해 주었으면 하시기에 선뜻 동의하고, 학생이 몇 명이나 됩니까 하고 여쭈니 동행을 원하는 학부형까지 100여 명쯤 된다 하시기에 트럭 3대를 지원하기로 약속드렸다. 마침 정한날은 다가왔는데 그 전날 종일 비가 내리다 당일 새벽에야 그쳤다.
금계천 냇물을 건널 수 있을 지가 걱정이 되어 즉시 현지에 가보니 약 2시간 후면 물이 많이 줄을 것 같기에 아침 9시 반경에 선생님을 모시고 저도 함께 동행하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는데 그 때 학생들은 심한 폭우와 설레임으로 거의 밤잠을 자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 날은 일기도 쾌청하게 맑아져서 온 종일 학생들이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잇었다.
그 외도 은사님과의 인상적인 일들이 허다하다.
그러던 중 10월 하순경 갑자기 청도로 이동하게 되어 존경하던 은사님과 작별을 하고 정들었던 풍기를 떠났다.
그 후 5.16 혁명으로 제가 뜻밖에도 대구시장직을 명받아 부임하였다.
재임 3년여 간 선생님께서 때때로 대구에 오시기도 하셨고, 또 그때 마침 대구 시청이 풍기 삼가리와 자매 결연을 맺었기에 수차 왕래할 때 마다 금계중학교 앞을 지나게 되니 아울러 선생님을 꼭 뵙곤 하였다. 그 때 학교 증축이 시급하다는 말씀을 듣고 당시 제 2군 사령부 민사참모이던 고 정원하 대령과 상의하여, 정 대령도 선생님을 존경하던 터라 적극적인 주선으로 주한 미 8군 사령부의 대민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교실을 증축하게 되었으며 그 결실은 선생님의 수차에 걸친 개인 미술전과 평소에 지니신 끈기있는 저성의 결정으로 본다. 그 후 오랜 기간 학교에 직접 가 보지 못한 관계로 근래의 발전된 모습을 보지 못함을 퍽 유감으로 생각한다.
계삼정 은사님의 평생을 두고 교육계에 공헌하신 공적을 어찌 필설로 형언할 수 있으랴!
이제 춘추가 8순이 되시는 선생님.
존체 더욱 강녕하시고 부디 부디 만수무강 하시어 앞으로도 더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이 사회에 보내시도록 손 모아 축도 드리는 바입니다.
○약 력 소 개
-숭인상업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졸업
-875 부대장
-대구시장
-보병 사단장
-동해 경비 사령관
-주월군 부사령관
-예비역 소장
-대우그룹 부사장 및 사장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역임.
첫댓글 강원채 장군님,그때 그런사연이 있었군요,지금 생각하니 고 계삼정 교장님과 의 친분으로 많은 도움을 받었군요, 강원채 장군님,약력중 가장 가슴에 와닫는 겄은 바로 875 부대장,우리가 1학년땐 고등공민학교였어요,그어렵던 시절,"풍중"또는 "영중"등 타지역 재학생들이 고공,고공 000들아,00을 옆에차고 875부대,이런 노래로 우릴 못살게하던 그 이픈 추억들이 되살아 나는.....그래서 그랬군요,감사 합니다 늘 건강 하시길 바랍니다
강장군님,정말 존경합니다,장군님이 학교 졸업 하던해 제가 태어났으나 같은 공통점 은 다같은 선생님의 제자 라는겄 전설같던 얘기가 이제야 제대로 알었읍니다,장군님,물심 양면 으로 도와 주신 은혜 ,당시의 재학생을 대표하여 다시한번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금계중학교 초창기 졸업생(2회,한경수)의 한사람으로서 강 장군님의 이글을 접함에 고 계삼정교장님과 더불어 강장군님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의 말씀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두서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무튼 강 장군님의 크나큰 은혜에 다시한번 깊이 머리숙여 고마운 뜻을 올리고자 합니다. 위의 팬더곰(2회, 이두식) 동문이 지적한 바 주위 타중학교 학생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노래를 부를 때에는 당시 어릴때의 심정으로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읍니다. 하지만 우리학교가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 날로 발전하고 좋은 학생들이 오니까 샘이나서 우리를 놀리는게 아니냐는 생각에서 한편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었지요. 좀 아련하기는 하지만 장군님이 내어준 트럭을 타고 소풍을 다녀온 기억이 나는군요. 강 장군님을 몇번 뵈온것 같은데 송구하지만 용모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뇌리에 너무나도 생생해서 꿈결에도 영원히 잊지못할말은 바로 "875부대"입니다. 이 낱말이야 말로 초창기 학생들의 그시절의 애환이 함께 서려있는 가장 함축적인 말이라고 할수 있읍니다.
강장군님께서는 현재 연세가 매우 높으시지만 물론 아직 생존해 계시겠지요? 계시다면 어디에 살고 계시는지도 매우 궁금합니다. 혹 서울 가까이 계신다면 한번 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강 장군님 다시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