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헤비메탈 밴드 <블랙홀>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는 우주의 블랙홀과 같이 음악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겠다는 취지로 결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헤비메탈 밴드이다. 1980년대 중반 헤비메탈 붐을 타고 무수한 밴드들이 생겨났다. 각 고등학교에서 '한 반에 한 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70년대부터 시작된 대학 그룹사운드의 열기를 이어받은 결과였다. 그들은, 몇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천편일률적인 대중가요로부터의 탈피와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멤버들이 학생 신분이었던 블랙홀의 데뷔 앨범은 1989년에 발매되었는데, 그 이전 3~4년 간의 무수한 라이브 활동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 정식 앨범 발매 전부터 그들의 공연엔 항상 관객이 넘쳤고, 공연마다 자신들의 자작곡을 선보이며 빅밴드로서의 수련 과정을 충실히 수행했다. 1988년 올림픽 행사였던 '명동가요제'에서 자작곡 "노을"로 대상을 타며 "칠레가요제" 본선행 을 거머쥐게 된다. 이때 '부활'의 전 매니저였던 백강기에 의해 앨범 제의를 받고, 첫 앨범 Miracle이 탄생했다.
블랙홀 1집 MIracle (보컬,기타:주상균/베이스:정항동/키보드:한국현/드럼:조유형) 1989년에서 91년까지는 멤버들이 학생 신분인 관계로 군 입대나 진학 문제 등에 부딪혀 몇 번의 단독 공연, 잡지, 신문 인터뷰, 라디오 출연 정도 외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깊은밤의 서정곡'이 대중들 사이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정작 본인들은 이러한 반응을 알지도 못하고 여느 밴드처럼 뿔뿔이 흩어져 자기 생활을 하고 있던 중, 선교사로 한국에 와 있던 미국인 Darrin Muir가 주상균을 찾아와 블랙홀에 합류를 요청한다. 선교 활동이 끝난 후 주상균과 데린은 두 번째 앨범 Survive를 작업하게 된다.
블랙홀 2집 Survive (보컬,기타:주상균/드럼: Darrin Muir/베이스: 김비오) 2집 앨범의 녹음이 끝난 후 새로운 기타리스트 박원조를 영입하여, 63빌딩 컨벤션 센터에서 6천여 명의 관객에게 첫선을 보이며 2집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드러머 데린뮈어는 Visa문제로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블랙홀은 주상균과 박원조만 남은 채 수 개월의 휴면 상태를 맞아야 했다. 곧 블랙홀의 전성기와 때를 같이 하게 되는 베이시스트 정병희, 조막손 드러머로 통하던 드러머 김응윤이 합류하고 다시 한 번의 도약을 시작한다. 주상균,박원조,정병희,김응윤의 라인업이 완성된 뒤, 프로 밴드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연습을 하며 더욱 스피디하고 정교한 메탈밴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블랙홀의 정체성이 형성된 시기였다.
블랙홀 3집 Blackhole (보컬,기타:주상균/드럼:김응윤/베이스:정병희/기타:박원조) 주상균은 각 지방의 기획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전국 투어'를 시작한다. 이러한 지지 기반에 힘입어 외국 직배사인 EMI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3번째 앨범을 출시한다. 3집 발매 후에도 지속적으로 전국을 돌며 공연을 펼쳐 나갔고, 블랙홀의 기반도 점점 넓어졌지만 정작 앨범의 판매 상황은 신통치 않았다. 그 결과 다시 팀의 활동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고 이 때 박원조가 팀을 탈퇴한다. 3집 판매량의 저조한 결과로, 다음 앨범에선 '대중성을 가미해야 한다'라는 압박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주상균은 오히려 전혀 다른 성격의 한국적 메탈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이 원했던 '대중성 있는 가사와 곡'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아픔을 노래하는 더욱 블랙홀스러운 음반을 추진한다.
블랙홀 4집 Made in Korea (보컬,기타:주상균/베이스:정병희/드럼:김응윤/코러스:이원재) 4집을 끝으로 재전속을 포기한다는 마음으로 탄생한 앨범이 4집 Made in Korea였다. 고대 한국사부터 현대사까지 아우르며 우리 역사의 아픔과 권력층의 부도덕적 가치관을 신랄하게 파헤치며 민중의 삶과 고통을 노래했다. 발매 후 재전속 포기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4집 앨범의 '의식'에 동조하는 수많은 대학가의 블랙홀 마니아들이 생겨나면서 발매 두달 만에 영국EMI 기준의 '플래티늄'앨범을 뛰어 넘었다. 각 대학들의 초청 공연으로 눈코뜰새없는 날들이 지속되었고, 이 무렵 MBC대학가요제 출신의 기타리스트 이원재가 팀에 합류했다. 전국의 대학교들 중 블랙홀 공연을 유치하지 않은 학교가 거의 없을 정도로 블랙홀은 최절정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블랙홀 5집 City Life Story (보컬,기타:주상균/베이스:정병희/드럼:김응윤/코러스:이원재) 이러한 상승세를 이어, 현대 도시 사회의 이면과 아픔을 노래한 앨범 'City Life Story'가 만들어진다. 수록곡 중 '바람을 타고'는 수많은 오토바이 마니아들의 필청곡이 되기도 하였다. 5집 발매 후 연 200회의 라이브 공연을 달성하며 가요차트 순위에도 오르는 등, 전성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첫 계약부터 이들과 동고동락하던 EMI 가요부 송선영 과장과 매니저 이관희 실장이 사정으로 회사를 나가면서 EMI 가요부가 해체가 된다. 그래서 EMI에 잔류를 하느냐 아니면 당시 외부에서의 이전 제의를 받아들이느냐를 놓고 고민했으나 잔류를 결정한다. 블랙홀은 EMI 전속이자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는 '기이한 전속'밴드가 되었다. 다행히 이 무렵 발표한 베스트 앨범의 반응은 좋았다.
블랙홀 6집 The Way (보컬,기타:주상균/베이스:정병희/드럼:김응윤/기타:이원재) IMF 경제난이 한창이던 때의 상황을 뼈저리게 느끼며 만든 앨범이 6집 'The Way'이다. '험난해도 나의 길을 간다' 라는 타이틀처럼 모든 곡들이 비장하고 진지하기만 하다. 때론 절망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모습을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요부가 없어진 EMI에서의 블랙홀은 99년까지 아무런 지원 없이 고군분투했다. 더욱 열심히 공연장을 찾아 다니며 노래했다. 앵콜을 받으면, 본 공연만큼 더 해주고 돌아오곤 했다. 그것으로, 부족한 프로모션을 메워야 했다. 오로지 음악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IMF가 터졌을 때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으나, 90년대 후반 인터넷 매체의 부각과 신종 장르의 유행과 맹종, 대외적 프로모션의 부재가 겹쳐 차츰 매체에서의 활동 영역이 위축되었다. 세상은 급격히 달라졌다. 이상하게 바뀌는 듯하였다. 이미 블랙홀의 눈에는 희망이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확실한 미래가 들어오고 있었다.
블랙홀 7집 Seven Signs (보컬,기타:주상균/베이스:정병희/드럼:김응윤/기타:이원재) 2000년...인류가 멸망하리라는 예언인 Seven Signs를 타이틀로 '그래도 항상 희망은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7집을 발매한다. 그리고 10년의 긴 세월을 몸담았던 EMI와 이별을 한다. 21세기와 함께 블랙홀은 자신들의 레이블 Metal.K를 설립하고 음반,공연에 대한 독자적인 운영을 시작한다. 이 무렵 여러 시민단체, 음악단체와 연합하여 공중파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 폐지를 위한 '문화 혁명'이라는 공연을 시작했다. 성과는 있었으나 IMF의 불황과 음반,공연 시장의 장기적인 불황은 고스란히 적자로 돌아왔다. 이런 어려움에 처하면서도 '깊은 밤의 서정곡'을 비롯한 블랙홀 스타일의 발라드만 모은 앨범 <깊은 밤의 서정곡>, '문화 혁명' 투어 중에 녹음한 곡들을 모은 라이브 앨범 <Live of Live>를 발표하였다. 이 무렵, 조막손 드러머 김응윤이 정신지체 3급의 유아적인 사고로 본인 자신이나 멤버들을 힘들게 했던 지난 날을 정리하고 밴드를 탈퇴하고, 오디션을 통해 블랙테트라 출신의 드러머 이관욱이 합류했다.
블랙홀 8집 Hero (보컬,기타:주상균/베이스:정병희/드럼:이관욱/기타:이원재) 2004년부터 8집 정규 앨범을 준비한다. 8집을 준비하던 중 주상균은 부친의 별세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나, 전국을 다니며 기획자,동료 뮤지션들을 만나고 공연,음반의 상황들을 의논하며 곡을 만들면서 슬픈 마음을 추스렸고, 새 앨범 작업에 힘을 쏟는다. 독일을 대표하는 메탈밴드인 'Rage'의 기타리스트 'Victor Smolsk'가 블랙홀의 앨범 프로듀싱에 참여를 한다. 부산 록페스티벌과 서울 공연에서 협연도 하여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그라나 앨범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제작사 문제와 녹음 문제 등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모든 문제는 블랙홀이 고스란히 떠안으며, 앨범 녹음이 무산될 위기를 어렵게 넘겼다. 최종 마스터링 작업은 우여곡절 끝에 대전의 한 스튜디오에서 마무리했다. 영국에서 유학하며 엔지니어의 포부를 품고 귀국하였으나, 음반 시장의 붕괴로 국내 유명 스튜디오들이 연달아 문을 닫자 자신의 꿈을 접으려 했던 이인호 엔지니어에 의해 마무리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정민균 어시스트 엔지니어의 적극적인 지원과 손질로 8집 정규 앨범 "영웅"이 제작 기간 1년 만에 빛을 보게 된다. ----------------------------------------------------------------------------------
블랙홀에 대한 여러 궁금증
조막손 드러머 김응윤의 탈퇴이유. 블랙홀의 라이브 음반까지 발매를 한 후 탈퇴를 하여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던 정신박약 3급의 장애를 가진 드러머. 연습과 공연에 매진하기에는 다른 멤버들과 김응윤 자신 역시 힘든 일이었다.
블랙홀은 맬로딕스피드메탈 밴드이다?? 블랙홀은 헬로윈 성향에 영향을 받은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딥퍼플이나 주다스 프리스트가 있다. 연주한 블랙홀에게 자연스레 멜로딕 스피드 메탈밴드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블루스 스타일의 (비가오는 도시위에는 달의 강이 흐른다), 스래시메탈 스타일의 (포카페이스), 펑크록 스타일 (홀로서기), 고딕메탈의 냄새가 짙은 (잃어버린신화 part 1.2) 등,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이 포진되어 있다. 결론은 짓자면 블랙홀은 그냥 '헤비메탈' 밴드이다.
헤비메탈만 고집하는 이유 당연히 블랙홀이 음악을 시작할 때 록의 주류는 헤비메탈이었다. 그렇다고 너도나도 대세에 따라 변종 장르를 따라 한다면 정통은 누가 지킬 것인가? 쉽게 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블랙홀이 좋아하는 한국의 다른 밴드 우선 블랙신드롬이나 크래쉬처럼 필드를 오래 지킨 밴드들을 좋아하는 건 당연지사다. 송골매나 무당 같은 선배밴드. 많은 후배 밴드들에게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
첫댓글 우연히 읽고 퍼옵니다~~제가 블랙홀도 조아해서요~~ㅋㅋㅋ
ㅎㅎ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