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훈련소에서, 머리도 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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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5월 15일에 대통령과 부통령의 직접선거가 있었는데 자유당의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때 자유당의 이승만 정권은 독재와 부패가 심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경찰을 앞세우고 모든 공무원들이 총동원되어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를 하였다. 금품, 막걸리, 고무신, 대리투표, 매표와 환표 등 온갖 부정한 짓거리는 다 행하였다. 야당인 민주당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구호로 선풍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5월 2일의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대통령후보의 유세장에는 무려 100만이라는 군중이 운집하여 크게 고무되었으나 5월 5일 호남유세를 하러 가던 중 이리역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하여 온 국민이 허탈해 하였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니 선생님들이 모두 침통해 하고 있는데 신기근 교감이 나를 보고 “김선생! 신익희 씨가 죽었대여!” 하기에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사실임을 알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다음 수업에도 들어가질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교무실이 마치 초상난 집 같았었다. 당시 부패한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의 무능한 독재정치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국민들에게 야당의 신익희 대통령 후보는 유일한 희망이요 우상이었기 때문에 실망을 넘어 허탈해 했었다.
이때 나는 신학년도가 시작되는 4월 1일 개학과 더불어 정식으로 교사의 임명장을 받았으며 2학년 매반을 담임하고 교무분장은 도서계를 맡았었다. 당시 도서계의 주된 일은 학생들의 교과서 수급에 관한 일이 전부였다. 교과서 담당계라 했어야 옳았다. 학생들로부터 교과서 주문서와 책값을 받아 학년별 교과서별로 집계하여 교과서 공급소에 주문하여 분배하여 주고 책값을 받아서 교과서 공급소에 계산하여 주는 일인데 이 일이 만만치가 않은 잡무다. 학교선생이 교과서공급소의 직원이 되어 장사를 하여주고 있었다. 학생이 교과서공급소에 직접 주문하거나 거기서 직접 구입하면 되는 일인데도 그때는 그랬다. 교과서공급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유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지역의 유력인사로 군내의 초중등학교의 모든 교과서를 독점 공급하였으며 가만히 앉아서 불과 한 달 내외에 재주는 곰이 넘어 돈을 벌어주는 땅집고 헤엄치는 장사였다. 그때는 자유당을 등에 업지 않고는 아무런 사업도 할 수 없었다.
신학년도가 되면서 서무과장으로 법인 이사인 신아무개씨가 취임하게 되어 서무과도 증원이 되었다. 이는 법인의 이사와 감사가 월급을 받는 직원으로 임용된 것이어서 이런 일들은 사학 부조리 중에서도 심했던 사례였다. 원래 그 자리에 신모씨가 있었으나 그 전 해에 도교육위원회의 사무감사에서 부실한 업무처리와 회계의 난맥상이 지적되어 사표로 처리가 되니 그 자리에 그 분의 아버지가 앉은 것이어서 말들이 많았었다. 노련한 김태수 이사장이 그때 왜 그렇게까지 무리한 인사를 해야 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 인사를 둘러싸고 신씨와 한바탕 충돌이 있었다는데 신씨가 “너희들만 먹을래. 같이 먹어야지!” 하며 대들었다는 소문도 있고, 이아무개 이사가 크게 반발하여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는 설도 있었다. 하기야 요즈음이야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사학들중에는 이사장과 교장을 겸직하며 제왕처럼 군림하다가 감독기관에서 이를 금지하니까 자기 마누라를 이사장에 앉히고 자기는 교장을 하기도 하고, 좀 심한 경우는 교감은 아들이 하고, 서무과장은 며느리가 차지한 곳도 있었다니 더 말하여 무엇하랴. 당시 낭주학회 재단의 수입은 왜정 때의 식량영단에서 운영하던 정부양곡 도정공장을 매입 정부양곡을 독점 도정하는데서 얻어지는 수입으로 운영하였었다.
개학과 더불어 신임교사 두 분이 부임하였는데 초등학교 교사인 이행식 선생이 미술교사로 부임하였고 흥덕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온 오동술 선생이 역사와 지리를 담당하였다. 이행식 선생은 재단 설립자인 춘헌 이영일씨의 아들로 전주사범 출신이어서 중등교사의 교과자격증이 없으므로 자격증을 얻기 위하여 서울의 무슨 대학인가에 학적을 두고 근무하였었다.
당시에는 그런 대학과 그런 대학생들이 많아서 이른 바 ‘먹고 대학생’이란 말이 유행했던 때였다. 등록금만 내고 학교는 안가고 밥만 축내며 먹고 노는 엉터리 대학생이란 뜻이다. 이것은 좀 심한 이야기지만 그때 읍내 어느 중학교의 체육교사가 도내 모 사립대학에 학적만 두고 있다가 졸업식날 갔었는데 자기는 지금까지 국문과인 줄 알고 국문과 좌석에 앉아 있었더니 법과에서 이름을 불러서 그때서야 내가 법과를 졸업 하는구나 했다고 하여 한바탕 웃은 일도 있었다. 이행식 선생은 부임한 2년 후에는 신기근 교감의 후임으로 곧장 교감자리로 옮겼다. 그는 설립 이사장의 아들이고 현 이사장과는 내외종간이어서 이와같은 정실 인사는 누구나 그렇게 되려니 하였고 집안이나 친족끼리 요직을 차지하는 일은 부조리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이 시절에는 땔감이 무척 귀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식량은 귀했지만 땔감은 넉넉하였으니 집 뒤 선산 솔밭에서 채취되는 솔 가랑잎 나무가 넉넉했고 학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양곡 도정공장에서 나오는 맵겨(왕겨)를 선생님들에게 100상자씩 무료로 주었는데(한 상자는 7가마의 분량임) 그 당시 이 맵겨는 돈 주고도 아무나 살 수 없는 인기 있는 땔감이었다. 이것을 풀무질하여 때면 방도 따뜻하고 밥도 잘 되어 사람들이 “자식 낳으면 부안여중학교 선생 시켜야겠네!” 하며 부러워한다면서 어머니께서 좋아하시었다.
11월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는데 운학동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출산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말을 못하고 멍멍히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큰 아들 민철(民哲)이가 태어난 것이다. “아! 이제는 내가 한 여자의 남편만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내가 갑자기 내가 아닌 것 같고 커다란 바위덩이 같은 것이 나를 짓누르는 것도 같았다. 어머니께서 미역을 사들고 다녀오신 후 나도 가서 부자 상면을 하였으며 아버지께서는 아명을 학손(鶴孫)이라 지으시고 운학동 큰 사랑에서 며느리와 손자를 보시고 오셨다. 학손이란 ‘운학동에서 낳은 손자’란 뜻이다. 그리고 동지 무렵에 아내는 학손이를 안고 신행하여 왔었는데 운학동에서 운강공(雲岡公) 홍균(鴻均) 처 백부가 상객으로 종현, 종호 두 분 처남이 요객(繞客)으로 왔었다. 이렇게 하여 내 혼사는 거의 1년이 걸려 마무리가 된 것이다.
다음 해의 가을이었던가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머리를 홀랑 깎고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되어 돌아와 계속 근무하였다. 누군가가 나를 병역기피자로 경찰서 병사계에 투서를 하여서 경찰의 조사를 받고 곧 지원입대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 투서를 한 사람은 내가 충분히 짐작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후 나와 같이 근무한 동료 교사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그가 우리 학교 교사로 취업하고자 조석으로 이사장 집을 부지런히 드나든 분이고 자리가 없다니까 나를 노려 밀어내고자 한 것이다. 후에 경찰서 병사담당 노반장이라는 분이 그 투서를 보여주었는데, 투서자를 「김인기」라 가명으로 썼었으나 그 달필의 글씨 필체만으로도 그가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없는 사실도 아니어서 혼자서만 그 사람을 치부하고 경계하며 살았었다. 이후 가까이에서 겪어보니 그는 가까이 상종할 수 없는 고약한 소인배였다.
그래서 나는 병사구사령부를 거쳐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였으며 입소하자마자 머리를 깎고 20여 일 쯤 훈련소의 밥을 먹고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 돌아왔다. 입소한 다음 날 밤 내무반에 상사 하나가 들어오더니 “김형주가 누구냐?” 하며 찾기에 저 사람이 내 소금(돈)을 좀 먹고 물을 켤라나는가 보다고 여겼다. 또 중대장이 나를 찾기에 갔더니 “당신 중학교 국어선생이라며?” 하면서 회람장을 써라. 누구 결혼인데 축사 하나 지어 달라. 바둑을 두자 하여 사역도 안나가고 주로 중대장실에 있다가 돌아왔었는데, 이때 신기근 교감이 병사구사령부에 줄을 대어 일을 도모하여 준 것이다. 까까머리에 중절모자를 눌러쓰고 학교에 오니 우리 반 아이들이 와! 하고 몰려와 반기는데 창북리 사는 배구선수 양증렵이가 “아이고! 우리 선생님 머리 깎어서 어쩐대여!” 하면서 엉엉 울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아이들이 부안여중의 5회 졸업생들이다.
이 무렵에 친구 이중석(李仲錫) 선생이 우리 학교에 부임하였다. 그는 서울대학교 농대를 나온 수재로 기술고시를 준비하던 중 함석헌(咸錫憲) 선생과 유달영 교수의 영향을 받아 고시준비를 접고 농사를 지으며 하나의 씨알로 흙에 묻혀 살면서 장승백이에 중국인이 경영하던 척박한 농장을 매입하여 노모와 날마다 일하면서 폭넓은 독서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나와는 자주 만나는 가까운 벗이었다.
그때 과학과 교사자리가 비게 되어 내가 이중석에게 권유하였더니 며칠 후에 뜻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기근 교감에게 후임교사로 추천을 하였는데 교감이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아보고 매우 만족해 하며 교장에게 추천을 한 것이다. 이중석 선생은 조용한 성품에 인자하며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정이 깊고 친화력이 있어서 누구나 그를 좋아한다. 우리 둘은 학교에서나 퇴근 후에나 붙어살다시피 하였다. 후에 내 제자 이성해(李星海)와 혼인하게 되니 모르는 사람들은 제자와 혼인했다고 오해하는 이가 있었으나 이성해 선생은 이중석 선생이 부임하기 전 해에 졸업하였으므로 사제관계와는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