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바위에서 백양사, 감동적인 하산 길을 경험한 백암산
1. 일자 : 2011. 1. 22 (토)
2. 장소 : 백암산 (741m)
3. 행로 및 시간
[남창골(11:16) -> 매표소(11:19) -> 몽계폭포(11:37) -> 몽계교(11:42) -> (평지길) -> 능선사거리(12:29) -> (사자봉 전경/전망바위) -> 상왕봉(12:47, 741m) -> (간식, 눈/바람) -> 소나무 전망대(13:18) -> 헬기장(13:35, 721m) -> 전망대(13:49) -> 백학봉(13:55, 651m) -> 학바위(14:01) -> 전망대(14:06) -> (긴 계단) -> 이정표(14:18, 백양사 1.4km, 상왕봉 2.8km) -> 영천굴(14:32) -> 약사암(14:43) -> 비자림(14:53, 백양사 0.5km) -> 백양사(15:05) -> 졸참나무(15:19) -> (야영장) -> 일주문(15:33) -> 주차장(15:37)]
4. 동행 : 홀로 / 안전산악회
5. GPS 궤적
t,d,35.460039,126.841692,00-22-2011,11:16:29,106,0 남창골
t,d,35.461760,126.840812,00-22-2011,11:19:17,189,2 매표소
t,d,35.465163,126.846986,00-22-2011,11:37:17,206,1 몽계폭포
t,d,35.465030,126.847719,00-22-2011,11:41:10,270,0 바지나무
t,d,35.465034,126.848596,00-22-2011,11:42:31,291,3 몽계교
t,d,35.458934,126.864739,00-22-2011,12:27:52,612,0 내장산 전경
t,d,35.458662,126.864932,00-22-2011,12:29:31,638,1 능선사거리
t,d,35.459900,126.866587,00-22-2011,12:38:07,687,0 사자봉 전경
t,d,35.461178,126.868288,00-22-2011,12:45:00,737,0 전망바위
t,d,35.461264,126.868348,00-22-2011,12:47:49,744,1 상왕봉
t,d,35.460597,126.869869,00-22-2011,12:54:39,726,0 중식
t,d,35.459021,126.873022,00-22-2011,13:08:22,718,4 눈꽃
t,d,35.458151,126.874743,00-22-2011,13:14:19,725,0 소나무 전망대
t,d,35.455108,126.880661,00-22-2011,13:35:01,761,0 헬기장
t,d,35.449309,126.882192,00-22-2011,13:49:01,672,1 전망대
t,d,35.448054,126.882509,00-22-2011,13:55:37,673,3 백학봉
t,d,35.447092,126.882142,00-22-2011,14:01:40,664,5 학바위
t,d,35.447621,126.883166,00-22-2011,14:06:28,659,2 전망대
t,d,35.447607,126.883399,00-22-2011,14:07:54,660,4 계단
t,d,35.447287,126.881490,00-22-2011,14:18:11,584,0 이정표(백양산1.4km)
t,d,35.445679,126.881483,00-22-2011,14:32:08,371,4 영천굴
t,d,35.445301,126.881159,00-22-2011,14:43:21,329,1 약사암
t,d,35.444168,126.880209,00-22-2011,14:53:05,262,1 비자림 이정표
t,d,35.440953,126.882314,00-22-2011,15:00:08,199,2 길가 비자림
t,d,35.440646,126.882949,00-22-2011,15:01:49,198,0 대나무 전경
t,d,35.440032,126.883747,00-22-2011,15:04:58,185,0 쌍계루
t,d,35.439664,126.883270,00-22-2011,15:07:51,175,0 대웅전
t,d,35.437562,126.883799,00-22-2011,15:19:12,166,1 키 큰 굴참나무
t,d,35.435439,126.883142,00-22-2011,15:23:13,158,1 백양사 비석
t,d,35.429098,126.879516,00-22-2011,15:33:03,134,1 일주문
t,d,35.426104,126.878992,00-22-2011,15:37:01,137,4 주차장
< 백암산 산행을 준비하며 >
3년 전 집사람과 함께 내장산 가을 단풍구경 겸 등산을 갔다가, 오랜 가을 가뭄에 색 바랜 단풍만 본 데다 버스 주차 위치를 잘못 알아 집사람을 무척 고생시킨 기억이 생생하다. 그 날 이후 집사람은 나와 등산 가는 것을 한동안 거부했었다. 초보에게 6시간이 넘는 산 길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서는 혼자 잘
난 체 하더니 막상 밖에 나와서는 길도 제대로 못 찾는 ‘찌질이’ 임을
집사람은 눈치 쳇을 것이다. 남편 체면이 이만저만 아니다. 당시
충분한 정보 없이 내장산을 얕보았다가 낭패를 본 것이었다.
오늘은 내장산의 이웃한 백암산엘 오르려 한다. 백암산은 내장산, 입암산과 함께 내장산국립공원을 형성하는 산이다. 봄 꽃과 가을 단풍이 좋은 산인데 철 지난 산에서 뒷북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었지만, 오케이마운틴에서 본 산행기 상의 설경이 그만이다. 특히 백양사에
바라 본 백학봉의 모습은 압권이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보물을 발견할 것 같다.
대부분의 백암산 산행은 백양사나 청련암을 들머리로 출발하는 원점회귀 이거나 내장산과 연계한 종주산행이지만, 오늘 안전산악회에서 택한 코스는 생소한 남창골에서 출발하여 몽계폭포와 사자봉을 지나 백암산을 오른 후 백학봉과 약사암을 지나 백양사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산행지도를 자세히 살피니 남창골에서 백학봉까지의 길은 전라남북도의 경계를 나누는 길이다. 산행시간은 남창골에서 사자봉까지 1시간 30분, 백암산까지 30분, 백학봉까지 1시간, 이후 백양사까지는 1시간 남짓, 도합 4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예전 내장산에서처럼 절에서 버스 주차장까지의 거리는 잘은 몰라도 여유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연초 올 산행을 시작하며 경상도 지역에 산에 더 많이 가자고 다짐했는데 쉽게 기회가 닿지 않는다. 늦게 이루어진 인연이 깊게 이어질 것을 믿으며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한다.
< 희망사항 >
한 달 째 계속되는 강추위와 함께 200만 마리가 넘는 가축을 산 체로 구덩이에 파 묻는 전대미문의 ‘만행’의 원인을 제공한 구제역이 온 나라를 신음 짓게 만든다. 착한 눈망울을 글썽이며 사지로 향하면서도 자식에게 젓을 물리는 어미 소에게서 태초로부터 이어지는 모성애를 느낀다. 가슴이 멍멍해지며 과연 이 방법 밖에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한참이나 멍하니 천장을 바라다 본다. 인간의 얄팍한 지식으로 하늘의 일을 예보해 보았자 턱도 없는 일인데도, TV에서는 한껏 멋을 부린 여자 리포터가 연일 주간 날씨를 읊조리고 있고, 매양 짜증을 내며 그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시간이 되면 다시 TV 앞에 앉는 내가 싫어진다. 초기 방역만 잘 했어도 자식 같이 키운 가축을 저 세상으로 보내며 ‘다음 세상에는 짐승으로 태어나지 마라’하고 울부짖는 농부의 모습은 보진 않았을 것인데 하고 생각하니 다시 화가 난다. 이래저래 힘든 시절이다. 날씨는 춥고 가축들은 죽어 가는데 여의도 난방 잘되는 큰 집에서 정치하는 놈들은 그래도 매일매일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싸운다. 하늘은 무얼 하시나 모르겠다. 저런 놈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잘못된 행태를 고치려면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만큼 책임도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으니 허구한날 주둥이를 마구 놀려 사회적 에너지를 헛되게 사용하게 하고 국민들에게 자괴감을 갖게 하니 말이다.
주말에는 날씨가 조금은 풀린다 하니 다행이다. 오늘 산행에서는 멋진 흰 눈을 머리에 인 학을 닮은 봉우리를 걷는 기쁨과 함께 겨울 산사를 한갓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다. ‘정읍’이라는 말에는 발음에 ‘ㅇ’이 2개나 연달아 들어 있어 그런지 따스한 느낌이 있으나, ‘ㅂ’으로 닫히는 끝말에서 범접할 수 없는 단호함이 느껴진다. 한 남자에게만 정을 주는 정조 깊은 여인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백암산이 정읍에 있는 산인 줄 알았다. 들/날머리에서 확인해 보니 장성의 산이었다.)
백양산은 수도권에서의 거리도 3시간 남짓으로 적당하고 고속도로에서의 접근성도 좋아 여러 모로 산행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한 겨울 추위에 당당히 맞서는 자세로 산에 올라야겠다. 또 하나 하산 후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맛난 음식도 기대된다. 정성 어린 식사대접이 이 산악회의 차별화 요소라 하겠다.
< 남창골 가는 길에 >
잠에서 깨어 산행준비를 하는데 뉴스를 들으려 껴 둔 TV에서 수도권에 눈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놀라 밖을 보니 눈이 나리고 있다. 깜짝 놀라 서둘러 집을 나선다. 많이는 아니지만 도로 위를 살포시 적시는 눈발이 만만치 않다. 복정행 좌석버스를 무려 20여분 기다렸다. 서둘지 않았으면 낭패를 볼 뻔 했다.
복잡한 복정역에서 버스에 오르니 45인승 버스가 만원이다. 매번 만원인 이 산악회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배낭을 앞자리 좌석에 걸면서 좁아진 공간에 불편함을 느끼며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자가 버스, 가족들이 운영하기, 여러 명의 등반대장, 맛 난 음식’ 등이 머리에 떠 오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이상의 것들과 회원들을 정성으로 대하는 그들의 ‘정성 어린 태도’가 아닐까 싶다. 새겨 볼 대목이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날씨가 맑다. 내장산 IC를 나와 11시가 조금 넘어 전남대 수련원 간판이 눈에 띠는 남창골에 도착한다. 오면서 언뜻 보니 지난 방장산 산행의 들머리였던 장성갈재가 부근인가 본다. 다시 길에 선다. 온통 눈밭이다. 지난 눈에 최근에 새 눈이 더해 져서 두텁게 쌓여 있다. 올해는 눈 구경을 질리도록 한다.
< 남창골에서 상왕봉 >
클램폰을 차고 목에 버프를 두르고 완전무장을 한 체 길을 나선다. 올려다 보는 하늘가에는 이름 모를 산봉우리들이 저마다 내게 손짓을 한다. 도로를 따라 길을 오르니 시인의 집이 나온다(11:19). 길은 임암산과 백암산으로 갈린다. 우측 몽계폭포 방향으로 길을 튼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향한다. 다리에 묵직함이 전해 온다. 산행 초반은 언제나 이리 무거운 다리를 길에 적응시키느라 애를 먹는다. 20여분을 걸었을까 커다란 바위 앞에 이정표가 보인다. 길 우측으로 50m를 내려가면 몽계폭포란다(11:37). 내려서 볼까 하는데 선행자가 폭포가 얼어 경치가 없단다. 가던 길을 이어 간다. 작은 수고를 덜었다던 안도와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스킵’한 찜찜한 느낌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길가에 저마다의 모습으로 눈을 맞는 나무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옅은 분홍빛 기둥에 매끈한 자태가 잘 빠진 여인의 긴 다리를 연상시키는 나무가 길가에 서 있어 카메라에 손이 간다. 밑동에는 보조개인냥 볼이 패여 있다. 곧이어 작은 다리가 보인다. 몽계교다. 몽계교 어름을 지나고부터 길은 이상하리만큼 순해지더니 곧 평지가 이어진다. 계곡 길인데 이러다 다시 된비알이 나오겠지 하고 걷는데 20분이 넘게 지나도 ‘꽃 길’이 이어진다. 특이한 길 구조다. 연약한 겨울 나뭇가지에 눈들이 얼키설키 쌓여 있다. 저 연약한 가지가 무게를 견디는 것이 신기하다.
< 몽계교 부근의 ‘바지’ 나무 / 내장산 능선의 원경 >
12시가 지나며 길은 본색을 드러낸다. 긴 오르막이 시작된다. 음지에 서니 매서운 바람도 느껴진다. 힘겹게 20여분 본 능선을 향한 오르막 길을 오르다 뒤돌아 보는 하늘가 끝에는 내장산의 긴 능선이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멋진 풍경이다. 그로부터 잠시 후 사자봉 능선사거리에 도착한다(12:29). 쉼 없이 내처 걸어서인지 예상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우측 사자봉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나 당초부터 그리로 오를 계획은 없었다. 갔다 오기가 힘겨워서가 아니라 왠지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백양사에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다.
< 상왕봉 전 전망대에서 / 상왕봉에서 >
능선에 올라서자 그 동안 좋았던 날씨가 흐려지더니 눈발이 내린다. 바람도 분다. 돌아보는 사자봉의 뾰족하고 우람한 봉우리가 인상적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오르막을 올라서자 커다란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멀리 내장산의 연봉들이 희뿌연 연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난다. 눈 발이 조금 더 거세어진다. 이 좋은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무척 아쉽다. 머지않은 곳에 백암산의 정상 상왕봉이 있었다(12:47). 여는 산과 다르게 정상석 대신 공립공원 안내 지도가 여기가 백암의 최고봉임을 알리고 있다. 독특하고 실용적이어서 좋다. 대신 정상에 올랐다는 감흥은 반감된다. 여전히 바람이 분다. 사진 한 장 찍고 백학봉 방향으로 길을 튼다.
< 상왕봉에서 학바위 >
배꼽 시계가 때를 알리고 있다. 아침에 먹은 미역국으로는 긴 오름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데 한계가 있나 보다. 배가 몹시 고프다. 그러나 바람 부는 정상은 온통 눈 밭으로 좁은 등산로 말고는 발 디딜 곳도 마땅치 않다.
정상에서 약 7분 거리 길가에 작은 공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너편 입암산 방향의 조망이 좋아 일부러 만들어 놓은 곳인가 본데 사람이 지나는 길가 바로 옆이다. 눈바람에 경치는 꽝이다. 온통 희뿌연 연무뿐이다. 식사를 할 적지는 아니지만 배낭을 푼다. 집사람이 준비해준 빵과 따스한 차로 허기를 날랜다. 앉지도 못하고 서서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다. 배 속에 따스한 것이 들어가자 기분이 급 상승한다. 지나는 사람들이 ‘길가에서 뭐하나’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 보아도 별 수 없다. 산에서만 생기는 뻔뻔함이다. 식사를 마치고 한결 좋아진 기분으로 산모퉁이를 돈다. 작은 바위 위에 소나무가 멋지게 솟아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예서 식사를 할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상에서 보이던 눈과 바람이 잦아들어 정상 능선은 걷기에는 더 없이 좋아진다. 도집봉은 어디 인지도 모르게 지나쳤다.
< 소나무 전망대에서 / 산 아래 장성의 어느 마을 전경 >
작은 오르내리막이 반복되더니 헬기장이 나타난다(13:35). 고도가 721m다. 일부 지도에는 이곳이 백학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상왕봉에서 약 50분이 걸린 것으로 보아 거리상으로는 이곳이 백학봉이 맞다. 헬기장을 지나 급한 내리막을 내려선다. 이리 내려 갔다 다시 그만큼을 치고 오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사실은 백학봉의 고도는 650m 수준으로 다시 오르막은 없었다.) 길이 거칠다. 눈이 덧쌓여 몹시 미끄러워 보인다. 10여분 조심스레 내려서자 펜스가 처져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좌측으로 눈 덮인 장선 일대의 모습이 검은색 먹을 짙게 사용한 수묵화처럼 보인다. 흐린 날씨와 어우러져 중독성 강한 인상을 내 머릿속에 새겨 놓는다. 바위 능선이 이어진다.
< 백학봉 부근 전망대에서 / 백학봉에서 본 가인봉 >
< 백학봉에서 >
백학봉 이정표가 나타났다(13:55). 조금 전 지난 전망대와 쌍둥이
같은 전망대가 나타난다. 산악회 분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한다. 지금까지는
우리 산악회 분들만 길에 보였는데 이곳부터는 백양사에서 올라온 분들과 엉킨다. 사방으로 좋은 경치가
널려 있다. 바위 길을 조금 내려서자 예사롭지 않은 바위가 보인다. 학바위이다(14:01). 절대고도의 위협을 느끼며 바위에 올라서자 길 건너 가인봉의 모습이 우뚝하다. 걸음을 난간으로 조금 더 딛자 백양사의 절집이 눈 속에 아득하다. 최고의
화가가 그린 수묵화가 이보다 더 멋질 수 있을까? 지금의 수묵화는 가을날에는 울긋불긋 단풍으로 변해
온 산이 물든 화려한 풍경화로 변한다 하니, 명불허전 백암산은 명산이다.
< 백학봉 부근 전경 / 학바위에서 >
< 학바위에서 본 백양사 >
좋은 경치를 잡아 두고 싶은데, 조금 더 내 기억 속에 잡아 두로 싶은데 아쉽다. 걸음이 떨어지지 않지만, 다시 길을 나선다.
< 학바위에서 백양사 >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학바위를 내려서자 긴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우측으로는 학바위의 그 우람한 모습이 눈 앞에 떡 벌어진다. 좌측으로는 또 다른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다시 그리로 오른다. 백양사에서 시작된 긴 협곡이 양 옆 산의 호위를 받으며 길게 이어진다. 길은 이렇게 또 다른 길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 학바위 계단 길 / 학바위의 위용 >
학바위의 빛깔은 암회색과 누런 그리고 붉은 색의 어울림으로 만들어진 묘한 조화다. 긴 계단으로 발을 내딛는다. 계단에 눈이 녹지 않아 몹시 위험하다. 클램폰 만으로는 부족하여 한 팔로 난간을 붙들고 조심스레 길을 내려 선다. 가파른 계단은 이렇게 20여분이나 계속되고 있다. 내가 이제까지 경험한 가장 긴 계단이다. 곳곳에 다른 빛깔과 모습의 학바위의 전경이 펼쳐지고 계단 중간중간에 키 큰 나무들이 있어 길은 단조롭지 않았다. 계단 중간에 설치된 이정표는 백양사까지의 거리가 1.4km, 백악봉은 0.4km, 상왕봉까지는 2.8km가 소요된다 한다(14:18). 이 길로 상왕봉까지 가자면 힘깨나 들겠다.
길을 내려 갈수록 백양사의 모습이 선명해 진다. 오늘도 눈이 호강한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백양사가 바로 발 밑에 있는 느낌이다(14:25). 나무 계단이 돌 계단으로 바뀐다. 클램폰의 쇠가 돌과 만난 허리에 부담이 된다. 학바위의 한 지류 봉우리 밑에 큰 구멍이 나 있다. 영천굴이다(14:32). 굴 안에는 새롭게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부처상이 있었다. 새 것의 풋내가 난다. 그 밑으로는 샘이 있다. 샘에 들러 바가지로 물을 퍼 마신다. 그 시원한 기운이 뼈 속까지 전해진다.
< 하산 길에 본 백양사 / 영천굴 >
클램폰을 벗어 던진다. 발의 족쇄가 풀리자 다리가 날아 갈 듯하다. 들뜬 기분에 부주의하게 걷다가 자빠진다. 눈도 없는 돌 계단에서 낙엽에 미끄러진 것이다. 왼손 엄지 손톱이 아리다. 창피함에 곧 아무일 없다는 듯 일어났으나 충격이 크다. 성급한 마음에 대해 산이 벌을 주신 것이다. 약사암에 도착했다(14:43). 새로 단청을 칠했는지 절 집의 색이 참 곱다. 길가에 건물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불심을 닦기에는 속세의 번잡함이 방해가 될 듯하다. 약사암을 돌아 나오는 길은 응달이어서 그런지 몹시 미끄럽다. 아무래도 클램폰을 너무 일찍 벗어버렸나 보다.
10여분 조심스레 미끄러져 내려서자 길은 곧 순해진다. 길가에 이국적인 나무들이 군락을 이룬다(14:53). 처음에는 주목이나 구상나무인가 했는데 비자나무다.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나무가 이곳 백양사에도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장산에서도 비자림을 본 기억이 나다. 이곳 장성일대는 비자나무의 북방한계선이라 한다. 잘은 몰라도 잎의 모양으로는 주목이나 구상나무와 유사하다. 한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과시하는 기풍 있는 나무의 모습에 걷는 나도 조금 더 우아해 짐을 느낀다. 이제 백양사는 0.5km 거리다. 하산 예정시간인 3시 30분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다. 천천히 겨울 산사의 정취를 느끼며 걷자.
< 백양사에서 >
3시가 막 지나 백양사 경내로 들어왔다. 지난 가을 찾았던 선암사에서처럼 같이 가람 배치를 역으로 관람하게 되었다. 길 우측 고색창연한 목조 천축물 옆으로 대나무가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밤색 나무와 초록의 잎이 묘한 어울림을 만든다. 역시 푸름이 주는 매력은 상상 이상이다. 작은 개울 넘어 쌍계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측은 백양사 경내로 향하는 길이다. 사천왕을 모신 문을 통해 백양사 경내가 한 컷으로 들여다 보인다. 경내는 겨울 성장을 한 나들이 객들로 붐빈다. 조심스레 대웅전 옆으로 다가선다. 신구 건물들이 조화롭게 백양사를 이루고 있다.
< 백양사와 옥녀봉 / 쌍계루 원경 >
대웅전 우측으로 하늘 높은 곳에 백악봉과 학바위의 모습이 보인다. 산과 절이 이리도 조화롭게 위치하여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니 백양사의 가람 배치를 기획한 선조의 지혜화 눈썰미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머리와 가슴에 담고 그것도 모자라 두고두고 보고자 카메라에 챙겨 넣는다.
< 약사암의 고운 빛깔 / 백양사 경내에서 >
산꾼들의 사진에서 보았던 것 보다 더 멋진 나만의 사진을 훈장처럼 달고 백양사를 내려온다. 여유로운 관찰은 앎으로 이어지고 그 앓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머릿속에서 맴돌 것이다.
< 백양사에서 학바위를 배경으로 >
다시 쌍계루를 지나 길을 나선다. 작은 연못가에 커다란 이팝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봄이 오면 그 특유의 하얀 꽃으로 백양사를 온통 희게 물들게 할 것이다. 조금 더 내려서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키 큰 졸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평소 참나무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나무의 종들 중의 하나가 이리도 클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우아한 자태까지 뽐내고 있으니 주위를 압도한다.
< 백양사에서 본 학바위 / 키 큰 졸참나무 >
길게 이어지는 도로도 주차장에 가까워지고 있다. 길 우측으로 캠핑장이 보인다. 이 추운 날씨에도 캠핑족들의 들뜬 목소리가 메아리 친다. 일주문을 지나며 다시 백양사와 백학봉을 올려다 본다. 어찌 저리 잘났을까? 절도 산도 말이다.
< 에필로그 >
백암산 산행을 준비하면서, 당초 원주 집들이 겸 찾기로 했던 태화산 산행이 취소되고 급히 예약을 한 관계로 사전 지식이 짧은데다, 내장산의 아류라는 선입견이 강하여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산행을 마치고 백양사 주차장에서 다시 백학봉과 학바위를 바라보며 내 짧은 생각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흠잡을 것이 없는 산행이었다. 남창골에서 상왕봉까지의 길은 걷기에 즐거움을 주었으며, 학바위에서 백양사까지의 하산 길은 다른 산에서 쉽게 경험해 보지 못하는 다이나믹을 선물해 주었다. 학바위에서 내려다 보는 백양사의 눈 덮인 모습은 잘 그린 한 폭의 수묵화 마냥 아름다웠다. 산이 먹이 되고 눈이 여백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길고 가파른 계단 길 우측으로 학바위의 그 거대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껴 볼 수 있었던 것도 또 다른 색다름 이었다. 계단 하산 길은 모험의 협곡 그 자체였다. 백양사는 그 절 집 자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학바위가 있어 더욱 빛 날 수 있었다.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백양사 구석 구석을 살피는 마음의 여유가 풍경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지 않았나 한다. 겨울 산사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론을 알게 되었다. 마음의 여유와 절과 자연을 함께 바라 보는 것이 그 비법이라 하겠다.
귀경 버스 안에서, 내 자리 뒤편으로는 걸쭉한 술판이 벌어지고 앞에서는 TV 뉴스 소리가 시끄러워도 난 내 길을 갔다. 김광석과 이선희의 음악을 들으며 오늘 새로 찍은 사진을 보며 때론 졸다가 잠시 생각에 잠겨도 보고, 긴 버스 여행을 나만의 시간으로 만들고 있다. 참 좋은 습관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나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버스에만 타면 좀이 쑤셔 안절부절 못하곤 했는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시간에 대한 조바심이 옅어지고 있다. 스스로의 노력이 아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얻어지는 지혜일 것이다. 또 하루의 토요일 오후가 이렇게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