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집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월세방을 거쳐 전셋집을 마련하고, 오랜 전세살이 끝에 내 집 한 채를 장만하는 건 대다수 서민의 꿈이었다. 전세는 자기 집을 갖기 전 거쳐가는 일종의 경유지였던 셈이다. 실제로 한국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임대차 제도인 전세는 무주택 서민들이 원금 손실 없이 주거비 부담을 줄이면서 알뜰살뜰 돈을 모아 내 집을 마련하는 주거 상승 사다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전세는 일종의 사금융이다. 전세보증금은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맡긴 무수익 자산이다.
적잖은 돈, 전세보증금을 저장 형식으로 보관해뒀다가 전세 계약이 끝나면 집주인에게서 그대로 돌려받기 때문이다. 일종의 '강제 저축'인 셈이다. 대신 전세 세입자는 계약 기간 동안 집값보다 낮은 가격으로, 월세보다 저렴하게 남의 집에 거주할 수 있다. 그리고 전세살이 동안 모은 돈과 전세금을 합쳐 내 집 마련에 나서는 게 세입자들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그런 전세시장에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깡통전세' 경고등이 켜졌다.
평생 모은 자산인 전세금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 커지는 역전세·깡통전세 공포
부동산 경기가 급속도로 냉각되고 집값 하락세도 뚜렷해지면서 '역(逆)전세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대규모 입주 물량이 쏟아진 지역에선 인근 주택 전세가격이 떨어지면서 2년 전 시세로 새 세입자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집주인들이 전세보증금 일부를 세입자에게 돌려주고 재계약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출 규제 강화로 추가 대출이 어려워지면서 보증금을 제때 반환하지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집값이 전셋값 밑으로 떨어져 집주인이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다 내줄 수 없는 '깡통전세' 공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깡통전세는 담보대출금액과 전세가격이 매매가격을 웃도는 주택을 말한다. 이 경우 주택이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세입자는 전세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기 어렵다.
깡통전세는 주로 신축 빌라에서 많이 일어난다.
주로 신축 빌라를 분양할 때 '신축'이라는 이유로 전세가격을 높게 받고 분양업자는 전세금보다 조금 더 높은 가격으로 갭투자(전세 끼고 주택 매입)자에게 집을 팔아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갭투자자인 주택 소유자는 대부분 세입자의 보증금만으로 집을 구입했기 때문에 다른 세입자를 구하기 전까지는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부동산 플랫폼 다방에 따르면 지난해와 올해 지어진 서울 신축 빌라의 상반기 전세 거래 3,858건 가운데 815건(21.1%)은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셋값 비율)이 90%를 웃돈 것으로 나타났다.
전셋값이 매매가격과 같거나 더 높은 경우도 전체의 15.4%인 593건에 달했다.
집값이 조금만 더 떨어져도 세입자가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는 계약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업계에서는 전세가율이 80%를 넘으면 깡통전세 위험이 크다고 보고 있다.
집값의 80%는 집이 경매에 넘어갈 경우 평균 낙찰가율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세가율이 80%를 넘어서면 추후 경매로 집을 매각해도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전액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매매가와 전세값 차이가 적은 집은 깡통전세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봐야 한다.
◇ 깡통전세 확산…신축 빌라에서 아파트로,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꼭 신축 빌라가 아니라 아파트에서도 얼마든지 깡통전세가 발생할 수 있다.
최근 기준금리 인상과 경기 불황 등에 따른 매수세 위축으로 아파트값 하락세가 본격화하면서 전국적으로 전세가율이 80%를 넘어선 아파트 단지들이 적지 않다.
깡통전세는 전세가율이 낮은 수도권보다 지방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부동산원의 6월 전국 주택가격 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 아파트 전세가율은 66.3%였지만, 수도권·광역시를 제외하면 75.4%로 껑충 뛴다. 일부 지방에선 전세가격이 매매가격을 추월한 사례도 나오고 있다. 전국 187개 시·군·구 중 19곳의 아파트 전세가율이 80%를 넘어섰다. 전세가율이 가장 높은 시·군·구는 전남 광양과 경북 포항 북구로 모두 85%를 기록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선 깡통전세 위험 지역이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지난달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한 아파트 매매 거래가 5억200만원에 이뤄졌고, 전세 거래는 5억원에 진행됐다. 같은 호수는 아니지만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거래가 이뤄진 점을 감안하면, 전셋값이 매매가격을 거의 따라잡은 수준까지 오른 것이다. 6월 전국 주택가격 동향조사에 따르면 경기도 이천시와 여주시의 경우 지난 6월 아파트 전세가율이 각각 82.4%와 84.2%를 기록했다.
◇ 전세금 '먹튀' 기승… 보증금 반환 사고 급증
깡통전세 사례가 속출하면서 전세보증금을 떼이는 사고도 늘고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지난 7월 발생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사고금액은 872억원으로 집계됐다. 건수로는 421건에 이른다. 금액과 건수 모두 월간 기준 역대 최대·최대 기록이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은 전세 만기 후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경우 집주인 대신 보증기관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대신 지급하고 나중에 집주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제도다. 현재 공공 보증기관인 HUG와 한국주택금융공사(HF), 민간 보증기관인 SGI서울보증에서 취급하고 있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사고 금액은 HUG의 실적 집계가 시작된 2015년부터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6년 34억원에서 2017년 74억원, 2018년 792억원, 2019년 3,442억원, 2020년 4,682억원, 지난해에는 5,790억으로 폭증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3,407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2,512억원과 하반기 3,278억원을 넘어서며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올해 상반기 사고액이 벌써 지난해 전체의 60%에 달했다. 집주인이 계약기간 만료 뒤에도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 사례가 그만큼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전세보증금을 떼먹는 악덕 임대인의 전세 사기 증가도 보증사고 금액의 폭증 원인이다.
실제로 최근 집값 하락과 금리 상승 등으로 깡통주택과 주거비 부담이 늘어나면서 집주인이 의도적으로 보증금을 편취하는 전세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깡통전세는 세입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전세난과 깡통전세가 속출하면 주택 투매로 이어지고, 결국엔 부동산 경기 침체를 심화시킬 수 있다. 전세자금 대출 부실로 연결될 경우 경제의 새 뇌관이 될 수도 있다.
깡통전세 사고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올해 하반기에도 기준금리 인상이 예고된 만큼 주택 거래 실종과 매매가격 하락으로 깡통전세 위험이 높아진 것이다.
◇ 서민 피해 더 커지기 전에 대책 마련해야
서민에겐 전세보증금은 전 재산이자 밑천이다. 알뜰사뜰 마련한 전세금을 떼인다면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전세 사기는 서민의 주거권을 침해하고, 재산을 강탈하는 악질 범죄 행위다. 민생경제 차원에서 엄벌해야 마땅하다.
깡통전세 경고음이 커진 만큼 정부는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부동산과 금융시장에 미칠 파장을 면밀히 파악하고 정교한 세입자 피해 방지 방안을 내놔야 한다. 국토교통부가 9월 중에 깡통전세 방지 및 전세 사기 근절 대책을 내놓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깡통전세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다. 문제는 가입 문턱이 다소 높다는 점이다. 모든 주택에 적용되지 않아서다. 조건에 충족하는 주택만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이다. 소유자와 임대인이 일치해야 하고, 선순위채권 총액이 집값의 60% 이내이고 경매 신청·가압류 등 소유권 권리 침해도 없어야 한다. 전셋값이 매매가를 넘을 경우에도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
또 전세보증보험은 전입신고를 마치고 확정일자를 받아야만 가입할 수 있다. 따라서 신청 과정에서 거주하는 집이 깡통전세라는 사실을 확인하더라도 전세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 '나쁜 임대인'이 아니길 기도해야 할 뿐이다.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선 전세보증보험의 사각지대를 보완해야 한다. 보증조건 기준을 낮춰 깡통전세와 같은 주택에 입주한 세입자의 전세금도 보증해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공인중개사 역할도 중요하다. 전세가율이 실거래가의 일정 비율을 넘어 깡통전세 우려가 있으면 중개사가 세입자에게 위험성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또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전세계약을 맺을 때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주택인지 아닌지를 고지하도록 법제화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전세계약 때 집주인의 세금완납증명서 첨부를 의무화하거나 공인중개사를 통해 세금 체납 여부를 확인하는 방안 등도 정부가 곧 발표할 대책에 담겨야 할 것이다.
◇ 주택 거래 활성화가 핵심 해법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택 거래 활성화다. 깡통전세가 늘어나느냐, 마느냐는 집값 하락세가 언제까지 지속되느냐에 달려 있다. 집값 하락폭이 커질수록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은 불안정해지고 매매·전세시장은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거래 절벽 속에 가격 하락 폭이 가팔라지게 되면 '깡통주택 속출→대출 부실화→금융시장 위기→실물경제 침체'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 수 있다.
지금 주택시장은 집을 사고 싶어도 대출이 안 나와 못 사고, 팔고 싶어도 세금이 무서워 못 파는 비정상적 상황이다. 매매 거래 활성화는 단순히 집 가진 사람만을 위한 대책이 아니다. 매매시장이 살아야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맡겨놓은 보증금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매매 거래가 살면 전세 수요가 매매 수요로 전환돼 전셋값 자체가 떨어지는 효과는 덤이다.
집값을 잡겠다며 전(前) 정부에서 성급하게 내놓은 마구잡이식 정책들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때이다.
아시아투데이 조철현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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