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 경영인 "가정 깰거냐" 비난에도...
전문경영인에서 국내 최고 '춤 선생'으로... 강신영씨
1999년 '섬유인이 날'에 대통령 상을 받은 모범 경영인. 그러나 지금은 알아주는 춤 선생이 됐다. 카바레 '제비족'을 연상할 지 모르지만 그의 춤은 스포츠다. 평생을 직장인, 전문 경영인으로 살아온 그가 춤 선생이 된 것은 1997년도 불어닥친 외환위기가 원인이 됐다.
강신영(60)씨는 스포츠용 글러브를 수출하던 (주)시즈이 전무이사 공장장이었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경영인으로 스카우트 돼 6년 만에 작은 회사를 2000만 달러 수출탑을 받을 정도로 키웠다. 그 회사에서 만든 글러브는 국내 한 언론사가 수여하는 '월드베스트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 사태로 어려움이 닥치자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났다. 경기 성남공단의 전문경영인 회원이었던 그는 같은 처지의 회원들이 하나둘 쓰러져 가는 것을 봤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실직한 회원 대부분은 다단계 회사 취업, 개인사업, 펀드 투자를 했다가 실패한 후 병을 얻거나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는 부인 덕에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주변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1주일에 1번 운동삼아 했던 댄스스포츠에 눈이 갔다. 댄스스포츠이 최고 권위자가 돼 보자는 생각에 발상지인 영국 유학을 감행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몰입했다. 그러나 어느덧 국내 최고의 춤 선생이 돼 있었다.
지난 10월 강신영씨를 서울 동대문구의 한 비즈니스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약속시간이 되자 그로 보임직한 중년이 나타났다. 약간 훤한 앞머리가 연륜을 말해주는 것 같지만 꼿꼿한 허리, 쫙 편 어깨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다. 수인사를 나누는데 건네주는 명함이 한둘이 아니다. '댄스스포츠 코리아'이사, '(주)대현 고문, '시니어파트너스' 시니어라이터, '로이쉬'어드바이저. '댄스칼럼니스트 강신영'이라는 명함까지... "홀해 환갑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더니 "춤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봉사하는 기쁨을 느끼고, 즐거움을 갖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강신영씨는 중앙대 무역학과 71학번이다. 졸업과 함께 유창한 영어 덕분에 1977년 미국 국방부 계약국 한국주재 직원으로 취직했다. 미 국방부 계약을 감사하는 일로, 고액 연봉 때문에 다들 선망하는 직장이었지만 혼자서 하는 외로운 일이어서 이듬해 '뱅크오브아메리카' 한국지점으로 이직했다. "여럿이 하는 직업을 하고 싶었거든요."
연세대 경영대학원에도 입학했다. "성격상 밖으로 뛰어다니는 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은데, 은행일이란게 그렇지 못하잖아요. 동료들도 다른 일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은행에서 얻은 소득은 두 살 아래인 동료 행원과 결혼한 것이다.
대학원 졸업과 함께 능력을 발휘할 만한 곳을 찾았다. 1980년 럭키개발에 입사했다.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4년, 독일 지사에서 1년을 보냈다. 중동 붐이 꺼지면서 귀국했는데 다른 동료들은 대부분 퇴사했다. 그는 그나마 능력을 인정받아 LG전자로 발령 나 냉장고 수출을 담당했다. "대기업 일은 재미도 있었지만 한계도 있었어요. 너무 큰 틀 안에서 개인은 나사못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수출과장을 끝으로 그는 시즈 사장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이직을 결심했다. 그가 35세 때였는데 곧바로 공장장 보직을 맡았다. "장갑은 계절상품인 데다 유럽시장에만 치중 해 여름에는 바쁘고 겨울에는 놀고, 그러더라고요. 미국 시장을 개척하러 출장을 갔지요. 1만 켤레, 1000만 달러어지 오더를 따 왔어요. 회사 생산력의 한계를 웃도는 물량이었죠. 나자빠지는 직원듥을 달래가며 6년 만에 회사 규모를 배 이상으로 키웠고 '섬유인의 날'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모범 경영인상을 받았죠.
하지만 외환위기의 여파로 1999년 퇴사했다. 같은 처지였던 경영인들이 건강을 잃고 세상을 뜨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 그는 건강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예전 독일에서 근무할 때 파티에서 춤을 추는 것을 참 아름답게 봤고 한국에 돌아와 1993년 문화센터에서 볼륨댄스를 배웠지요. 보통 1~2년이면 다 배웠다고 그만두는데 나는 5년이나 계속 배웠고 동호회도 만들어 활동을 해 춤 경력이 10년 가까이 됐었죠. 해외 스포츠 브랜드 라이선스 관련 일을 해 주면서 댄스스포츠를 한번 체계화시켜 보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됐죠. 국내에서 많은 춤 선생을 만났는데 어떤 분은 실기는 잘하지만 이론이 없고 이론적으로 해박해 보이는 분은 기량이 떨어지고. '춤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가슴에 확 와 닿게 가르쳐 주는 선생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댄스스포츠가 영국이 본고장이라는 것도 이때 알게 됐죠."
그는 2004년 경기대 사회교육원에 입학해 댄스스포츠 지도자 과정 1,2급 코스를 동시에 수강해 자격증을 따냈다. 그러는 사이 영국 유학을 미리 준비, 자격증을 따자마자 세계 댄스스포츠계의 전설적인 큰 스승인 준 머르도(영국)씨에게 사사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몇 달 있으면서 새벽부터 밤 11시까지 정말 열심히 춤을 췄지요. 유학 경비는 1000만 원 정도. 그런데 그게 처음으로 나 자신만을 위해 투자한 유일한 돈이었습니다. 실기 시험을 보는데 준 선생이 직접 제 파트너가 돼 주셨어요. 중년의 종양인이 영국까지 와서 열심히 춤을 배우는 것을 기특하게 봐서겠지요."
영국에서 그는 비로소 '댄스는 이런 것이구나' 하는 희열을 맛봤다. 혼자만 누릴 수 없다는 생각에 귀국하자마자 전문잡지인 '댄스스포츠코리아'를 찾아가 이력을 밝힌 후 관련 책을 출간하겠다고 하자 아예 기자로 오라고 권유했다. 영어에 능통한 그는 국내 대회에 출전한 외국 톱클래스 선수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영국에서 배운 해박한 이론을 잡지에 쓰면서 결국 자연스럽게 국내 최고의 춤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지금까지 블로그 등을 통해 춤ㄴ 관련 글을 5000여 편이나 썼고 댄스 책도 4권이나 출간했어요. 춤 공부는 끝이 없어요. 관련 학문이 너무 많거든요. 음악, 미술, 문화사, 의상, 해부학 등등. 매일 밤 11시까지 관련 학문을 공부하고 글을 올립니다."
그는 장애인에게 춤을 가르치는 동사활동도 한다. 서울시 장애인 체육회 경기위원장도 맡고 있는 그는 목요일은 오후 4시부터, 일요일은 오전 10시부터 강동구 상일동 사회복지센터에서 장애인들에게 춤을 가르친다. 그는 댄스스포츠가 정식종목이 되는 내년부터는 전국체전에 선수 겸 서울시 선수단 관리담당으로 출전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월, 수요일 저녁에는 강동구 길동 소재 전문학원의 지도자 강습반에 나가 세계챔피언들의 경기 모습을 담은 시디를 보면서제자들과 기량을 가다듬고 있다.
카파, 로이쉬 등 해외 스포츠 브랜스 국내 라이선스사 세 곳의 고문으로 아직 일하는 그는 오전 9시 스포츠용품사가 즐비한 동대문으로 출근, 이메일 확인과 업무지시를 한다. 남은 시간은 춤 관련 공부와 글을 쓰는 데 할애한다. 자문료, 원고료 등으로 벌어들이는 돈도 꽤나 된다. "고문 일을 놓더라도 춤 관련 일로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살 정도는 되죠. 인생 2막은 나를 중심으로 누리고 싶어요."
젊어서는 경쾌한 라틴댄스에 매료됐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방방 뛰기 힘들어' 모던댄스를 즐긴다는 그는 "댄스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지고 대형 서점에 댄스스포츠 관련 책 코너가 생긴것이 춤 선생으로서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처음 춤을 배울때는 주위에서 손가락질을 많이 했어요. '가정이 곧 깨질 것'이라고도 했고. 하지만 요즘은 모임에 나가 한 번 당겨주면 다들 부럽다고 가르쳐 달라고 하지요. 댄스스포츠를 즐기면 건강에도 아주 도움이 됩니다. 자세고 곧게 펴저 혈액순환이 좋아져 자연스러운 스트레칭 효과를 봅니다."
그는 중년 부부는 같이 춤을 배우지 말라고 충고한다. "춤이란 게 운전 배우는 것과 비슷해서 중년 부부라면 따로 배우는 게 좋아요. 그 핑계로 마누라 말고 늘씬한 젊은 여자들 하고도 잡아보고..."
[약간 건방지셔 보이는ㅎ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분명
그의 자신에 찬 포스를 읽을 수 있다 ]
첫댓글 글을 옮기면서 ' 내 인생'과 그의 '도전과 성취의 인생'을 비교하는 걸 발견한다.
한 계계에서 인정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는 보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댄스스포츠에 첫 입문한 계기가 궁금하다.
그의 글 중에 '제 2막'이라는 말이 유난히 돋올돼어 온다.
나는 인생 2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옳을까... 스마트폰을 빼앗기며
찌질하게 사는 나의 50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