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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근원인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길 |
찾아가는 출판사 11월 - 실상회 본부 토요강화 (1:03:11)
그러니까
'기도 안해서 또 뭐가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갖지 말 것.
"신이시여, 그때 왜 저를 외면하시고 버리셨나이까?
저 혼자 가게 두셨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신이 뭐라고 대답하신 줄 아세요?
"아니야, 그거는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때 내가 너를 안고 걸었단다."
죄는 본래 없는 거예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오늘은 예고해 드린 대로
[불행의 근원인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같이 공부를 하겠습니다.
오늘 교재에는 『생명의 실상』 6권이 되겠습니다.
[성령편 하편]하고 [실증편]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성령편]의 1장을 공부를 할 생각입니다.
이런 주제를 택하게 된 이유는
요즘 이제 한국교문사 TV, 유튜브를 통해서나
아니면 또 『생명의 실상』이라든지 광명도서를 통하셔서
이런저런 그 마음공부를 하셨던 분들이
본인이 공부했던 거와 이렇게 더 겹쳐지는 면도 있으셨을 거고
그래서 지금 내가 당면한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이
결국은 내 마음이 원인이 됐던 것이었구나! 하는 것들이
선명해지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근데 이제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현상 세계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제 분명히 어두워서 밤을 보내고
지금 또 날이 밝아서 새날을 맞이했는데
또, 이 날도 불과 이제 한 몇시간 안 되면은 해가 질 거고 또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현상 세계라고 하는 것은 끝없이 변화합니다.
그대로 가만히 있질 않죠.
그런데 항상 좋은 일만 있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근데 그 일어나온 일에는 또 항상 원인이 있다 그러니까
그 일어나온 일의 원인을 찾아서
지금 내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를
하나하나 다 밝혀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식의 접근들을 하는 경우가 왕왕 계세요.
그러다 보면은 가령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에
지금 저번 생의 문제의 시작은
대부분 어렸을 때 가정환경이 되게 많이 문제가 되거든요.
부모와의 관계나 아니면 또, 아버님 어머님 살아가시는 모습이
많이 옆에서 볼 때 괴로웠을 때 그런 것들이 마음에 어두운 것들이
많이 잠재의식에 새겨지게 됐을 때
언젠가 내가 가정을 꾸려 보면은 부모님이 사셨던 거와 별반 차이가 없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심각한 상태에 인생 문제를 겪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하고
부모님에 대해서 내가 부정적인 것을 받은 걸
참회하고 감사행 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긴 하지만은
그 부모님은 또 왜 그렇게 힘든 생활을 이어갔는가 하면
또 그 위에 여러가지 일들이 주변 환경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분명히 계셨을 거라고요.
계속 올라가다 보면은 조상님 세계까지도 이어지죠.
조상님을 한 10대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면요 직계로
그러니까 직계라는건 내가 있기까지는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잖아요.
각각의 아버지에는 또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잖아요.
이 숫자만 10대만 모아도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옵니다.
수만이 될지 억단위였던 것 같은지 지금 잘 기억이 안나요.
( 10대 : 1024명 ㅣ 30대 10억명 )
그런데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를 해봐도
다 우등생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 학교 다니실 때 한번 기억을 해보세요.
상위 그룹은 거의 반 전체 구성원에 10% 20% 이렇습니다.
나머지 중간 그룹이 있고, 그냥 학습 내용도 잘 모른 채로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친구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상님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우등생이냐 하면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단 말이에요.
그런 분들 하나하나 다 찾아내서
그 문제를 다 하나하나 해결하려고 들기 시작하면은
끝도 없는 일이 되게 됩니다.
그럴 때 저희들은 인과(因果)로 추락한다는 얘기를 씁니다.
인연법을 너무 따지기 시작하면 인과(因果)로 추락을 해 버립니다.
그러면 답답해집니다.
이건 또 무슨 문제일까? 또 뭘 해야 되나? 또 뭘 해야 되나?
이런 수행에 임할 때 즐거운 심정이 아니라
답답한 심정이 앞서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좀 말씀을 한번 드리고 가야겠다.
광명사상이라는 것이 출현한 목적이 그와 같은 데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광명사상이 세상에 나온 이유는
인간은 신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고
그리고 죽어서 가는 극락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바로 지상천국을 실현해서 살자고 하는데 그 뜻이 있거든요
그리고 인간이 신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신은 완전하신 존재이니까 인간도 본래가 완전한 존재이다.
병, 불행 본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 우리들이 지난날 마음으로 그것이 있다라고 착각을 하고
거기에 휩쓸려서 마치 있는 것처럼 잘못된 마음을 일으켜서
그 그림자로서 잠시 잠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런 얘기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그런 인과(因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처벌하는 일에서 좀 벗어나는
그런 계기가 되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준비를 했습니다.
미국의 매닝거 재단이라는 정신상담 같은 것들을 주로 많이 하는
그런 단체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일원이셨던 칼 매닝거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인류의 대부분의 병, 불행은 자기 처벌에서 온다는 얘기도 하셨습니다.
누가 누구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스스로 자기 처벌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결국 원인은 죄의식인데
그런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오늘 『생명의 실상』 6권이 선정된 교재이기 때문에
6권을 살펴봐 가면서 같이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6권의 13쪽을 보면요. 이런 얘기를 하고 계세요.
기도는, 우리가 늘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생활속에서
'기도는 현상 세계가 실상 세계로 확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그랬습니다.
사진 촬영에 비유를 하면
“현상 세계에 실상 세계의 그림자를 비추기 위해 렌즈의 방향 전환을 해서”
핀트, 초점을 맞춘다고 그러죠?
“핀트를 맞춘다고 하는 것”
이것이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건 또 다른 책에서는
“우리 생명의 깊은 곳으로부터의 선언이다.”
이런 얘기도 하십니다만,
그 선언이라는 것은 이제 관념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무엇을 선언할거냐?’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상 세계 쪽으로 향해서 카메라 렌즈에 비유를 하자면
렌즈가 사진을 찍으려면 렌즈가 피사체를 향해야 될 거 아니에요?
어느 쪽을 향하느냐에 따라서 그 피사체를 사진에 담아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드러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실상 세계를 향한다고 하는 겁니다.
완전한 세계, 그리고 거기에다 초점을 맞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것이 드러나온다는 하는 거예요
자주 이 시간에 얘기를 드립니다만
(칠판에 그림 그린다.)
좌측에 있는 것은 필름입니다.
영화관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가 극장에 가서 영화를,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많잖아요?
영사실에서 필름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라이트를 쬐가지고 필름을 렌즈를 통해서 확대를 시킵니다.
그러면 스크린을 통해 그 영화가 보이게 되죠.
그런데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을
이 다니구치 선생은 이와 같이 영화관에도 잘 비유를 하시거든요.
우리가 이렇게 보고 경험하고 이렇게 보고 듣고 만지고 살아가는
이 세계 모습으로 나타나온 세계,
이 세계를 스크린에 비유를 하고 계십니다.
이 원판 필름에 해당되는 것을
‘신의 이념(神의 理念)’이라고도 얘기하시고,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실상 세계죠.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창세기에 나오는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는 완성된 세계, 훌륭한 세계,
원판 필름이 분명히 있다 이거에요.
(10 :01~
그런데 그것이 온전히 드러나와야 되는데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그것이 확대돼서 다시 비춰져 나오거든요.
그 얘기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마음이 전부라는 건 다 공감하시잖아요, 그죠?
내가 생각한 대로 나타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것을 쉽게 얘기하신 비유 중에 하나가,
영화를 보고 있는데 다시 영화관으로 되돌아가서
영화를 지금 스크린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그러니까 이제 이건 현상 세계로 얘기하면
공간이 되는데, 우리들이 접하는
이 영화관으로 되돌아가서
스크린에 여기에 파리가 하나 앉았어요.
그럼 얘는 여기에 앉은 게 아니라
여기에 앉아 있는 놈이 확대가 돼서 비춰지니까
이렇게 보이지 않겠어요?
그러면 이때 스크린에 올라가서
파리를 떼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이에요. 그쵸?
얘는 암만 '워이~, 워이~' 이래도 안 없어져요.
얘를 없애버리려면 '워이~' 그럼 날아가면 얘는 없어지는 거예요.
인생이 그렇더라 이 말이에요.
완성된 훌륭한 세계가 그대로 온전히 드러나오도록
마음이 이쪽을 향하는 거예요.
아까 여기서 얘기하셨듯이
신이 만드신 완전한 세계를 향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 마음에 잡티가 일어나지 않도록~
이 잡티만큼으로 이렇다 저렇다 구분했던 것들,
아까 여기 파리로 비유하면 '파리가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파리라고 얘기를 했지만 우리들의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보죠. 그 사람 그 파리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어.
그렇게 보여. 말도 그렇게 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봐, 저렇다, 저렇다.' 그러면, 그게 어떤 효과를 갖고 나오냐면
'더 강하게 새기는 효과'를 갖고 오더라 이 말이에요. 마음에.
이게 잡티에 해당이 되는 거예요. 보니까 점점 더 나와요.
또 보니까 더 나와.
그래서 자기가 자가당착(自家撞着)처럼
그 세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하고 싸우고 있느냐 하면
자기 마음하고 싸우고 있는 거에요.
상대하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런 사람이라고 보고 있는 자기 믿음'하고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러니까 해야 될 일은 여기를 바꾸는 거는 헛수고예요.
100년을 해봐야 헛수고예요.
여기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없앤다고 하는 것을 오늘 지금 얘기를 나누려고 하는 거예요.
이 없애는 게 어렵더라 이거예요.
마음에 내가 그렇게 본다는 건 이해가 됐는데
내 마음의 반영이라는 건 이해가 됐는데,
그러니까 '내가 잘못 봤네. 아이고 죄송합니다'그것도 이해가 되는데
언제까지 이걸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에요.
이걸 잡티를 어떻게 더 없앨 거냐 하는 건데,
이제 오늘 이 공부를 한번 더 깊이 있게 해보자고요.
기도라고 하는 거는
현상 세계가 실상 세계로 확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여태까지 여기를 보고 살았는데 저쪽을 보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사진 촬영으로 비유하면,
현상 세계로 이쪽의 세계로 내 믿음을 통해서
그 실상 세계에 완성된 '보기 좋았다'고 하시는
그 훌륭한 세계가 온전히 드러나오도록
렌즈의 방향을 먼저 저쪽으로 향해야 되는 거예요.
이쪽을 보는 거에서 저쪽을 보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초점을 맞추라 그랬습니다.
자, 그러면 좀 더 뒤에 추가적으로 읽어드리죠.
기도를 해도, 이것이 바로 기도라고 하는 건데 이 기도를 해도
기도가 현상 세계에 기도한 내용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계세요.
첫 번째. 광선이 희미하다는 거예요.
빛이 없는 데서는 카메라가 암만 좋아도 사진이 안 찍힙니다. 그죠?
깜깜한 데서 데서는 안 찍혀요.
광선이 희미하거나,
두 번째. 핀트가 안 맞으면 초점이 안 맞으면 어떻게 돼요?
사진 찍어놔도 흐릿하죠.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광선, 광선이 희미하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광선이 희미하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 문제로 되돌아왔을 때,
실상 세계가 온전히 드러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깨달음에 대한 이 실상 세계에 대한
결국은 자각이 빈약한 걸 말하는 거예요.
아까 초점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초점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얘기를 하셨는데
깨달음의 광선이 밝다고 하는 것은 또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셨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미 실상 세계에 모든 좋은 것이 주어져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안다고 하는 것을 말하시는 거예요.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의 광선을 밝게 한다고 하는 것,
이게 빛이 풍족해야지 선명하게 그 사진이 잘 드러나오지 않겠어요.
사진으로 비유하면 그런데 그 광선에 해당되는 것은
우리 인생 문제로 비유했을 때는
실상 세계에 깨달음의 광선을 밝게 하는 건데
그것은 결국은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은
실상세계에 이미 좋은 것이 넘치게 이미, 이미 주어져 있다.
내가 뭘 지금 해서 뭘 만드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게 기도의 기쁨이 돼야 돼요.
우리가 할 일은 기뻐할 일이에요.
내가 뭘 어줍지 않게 기도를 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계가 얼마나 훌륭한 세계인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거예요.
『생명의 실상』을 끊임없이 자꾸 보시는 게 좋아요.
그래서 이미 주어져 있다고 하는 그 자체를 안다는 게
깨달음의 광선을 밝게 한다는 것이고,
초점을 맞춘다고 하는 것은
실상세계로부터 투영되는 광선을 적당하게 집중시키기 위해서
거기에다 신념을 강화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하셨어요.
"있다고 하는 걸 알아도 있으니까 드러나올 수밖에 없어.
좋아져! 좋아질 수밖에 없어!" 하는 걸
확신을 갖고 하는 걸 말하는 거예요.
진짜 믿음이 있으면요 믿음대로 됩니다.
내가 아직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항상 "네가 좋아질 것을 믿느냐, 믿느냐, 믿느냐?"
세 번을 물으셨거든요, 항상 병자를 고치실 때도.
믿음을 확인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안 고쳐 주실 리도 없고 못 고치실 리도 없잖아요.
그래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온전히 드러내 나오게 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이미 있는 훌륭한 세계에 대한 자각이 우선은 있어야 된다.
훌륭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깊이 이해하고
그것이 믿음화 돼야 된다.
“믿음화 된다고 하는 것은 초점을 맞추는거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밑에도 얘기하시는데
"하느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리다." 라고
말한 예수님의 기도를 보더라도
신의 뜻은 이미 하늘 곧 실상 세계에 있어서는
성취되어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아셨던 거예요.
이미 이루어졌던 걸 아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에서 이루어진 바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라고 기도를 그와 같이 하셨다.
그게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도 강조하시지만
이미 이루어져 있는 실상의 세계를
기도로 변화시키는 따위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에 떠올라오는 우리들의 깊은 곳의 어떤 희망, 그렇죠?
병자들은 대체로 건강해지기를 희망해요. 그렇죠?
더 아프기를 희망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어요.
보험금을 좀 더 많이 타기 위해서 뭐 그런 경우는 있어요, 잠재의식 속에
이게 증거가 있어야지 보험을 계속 탈 먹을 수가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다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이유는
자기가 본래 건강한 걸 알기 때문에
직감적으로 건강을 주신 걸 내가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에
건강을 바라는 거예요.
누구나 행복을 바라죠?
이미 행복한 게 우리 본래 모습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직감하기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신이 보시기에 '그건 좀 곤란한데..' 하는 내용이 아니면
이미 나한테 주어져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온전히 드러나오게 할 만한
내 확신이나 그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거예요, 아직은.
그리고 그냥 말만 이렇게 좀 해보다 말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뭐가 내 문제일까.
이런 세계만 자꾸 더듬었던 거예요, 지난날.
그래서 이런 걸 넘어서서 저 깊은 세계로 들어가서
거기에 대한 기쁨을 회복하는 것,
이런 것들이 진짜 중요하다는 얘기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 세계는 기성(旣成)의 세계라 그래요.
기성(旣成), 이미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고치는 세계가 아니다.
( 기성의 세계 = 이미 만들어진 세계 )
행복해도 행복해도 이만큼 행복해서 괜찮을까 할 정도로
그렇게 미안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끝없이 더 더 행복하라는 거예요. 번영도, 향상도.
세계 최고의 수준의 무슨 기술이나 운동선수나 이런 사람들은
거기에서 만족을 하고 "이제 나 더 이상은 끝!"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거기서 끝! 이런 사람 없습니다.
( 20 :01~
가도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왜, 신 자체가 무한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자식이기 때문에 우리 자체가 무한이거든.
그러니까 끝없이 향상하고 싶은 거예요.
그때 오는 그 향상에서 오는 기쁨은 점점 지금의 단계가 훨씬 더 크죠.
그래서 이런 얘기도 하고 계십니다.
"신을 아는 자는, 신의 완전함을 아는 자는,
신의 무한 능력을 아는 자는
신이 만든 실제의 세계는 이미 완전합니다.
예예. 감사합니다.
신이 만든 실재의 인간은 이미 완전합니다.
예예. 감사합니다. 라는 말,
다만 이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정 뭐가 복잡하고 어려우면은
"아 예. 이미 저는 건강한 게 사실입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이미 건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아요.
이 내용을 안다고 하는 것은
여기 뭐가 있어요, 분명히 원인되는 거 있어 내가 가렸던 게.
내가 가렸던 거예요. 완전한 것들을~
내가 가리고 있었네 하는 걸 아는 걸 마음의 법칙이라는 거예요.
내가 가려서 이 반영으로 내 생각만큼 여기에 가린 만큼
이렇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구나! 하고 알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말하자면은 꿈에서 깨어나는 거랑 비슷한 거예요.
꿈에서 막 악마가 쫓아오는데 막 땀을 흘리면서 막 도망가잖아요.
그러다 "악" 소리 지르다 깨 보니까 편안한 침대에 잘 누워 있었네.
그와 같은 거예요.
"아 도망갈 필요가 없었네" 하고 알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라지는 거야.
이게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하는 걸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봤던 거구나 하는 걸 아는 거지
이걸 뭘 없애려고 다시 다가설 필요가 없다. 이 말이야.
이게 본래 없었던 거니까 없는 세계로 되돌리는 거야.
얘가 본래 없었던 거잖아. 내가 착각했던 거잖아. 얘 자체가.
무(無)의 세계로 되돌리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게 여기서 우리가 마음의 법칙을 공부를 할 때,
'아, 이거는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고
그 다음에 해야 될 일은 사실은 '이미 훌륭한 사람이었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감사를 하는 거예요.
훌륭한 분이었는데 내가 잘못 보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내 본 만큼 이렇게 나타났던 거구나 하고
오히려 그렇게 봤던 거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용서를 구한 다음에
그 다음에 이미 훌륭한 분이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게 진짜 감사합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자기 처벌하고 했던 것 이런 것들을 내려놓는 방편이죠.
용서 안 하실 리가 없잖아요.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부족해서 뭐가 아직 안 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아직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런 단계를 넘어서시는 게 좋아요.
그렇게 수행을 하면 힘이 들어서 안 돼요.
그래서 중요한 거는 그냥 "예 예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좋다고 하셨으니까 이런 훌륭한 선생이 그죠?
우리도 그걸 믿고 그냥 기뻐합시다.
"이미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이 무엇인가 자기에게 줄 것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니까
소리 내어 때때로 신에게 주의를 줄 생각으로 신을 부르는 따위의 일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무시하는 것으로
신심, 믿음이 없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러셨거든요.
그러니깐
아 이거 '기도 안 해서 또 뭐가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갖지 말 것.
오히려 신은 이미 항상 함께하시고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게 그 증거거든요.
다 지금 숨 쉬고 계시잖아요.
아침 식사 드신 거 지금 피와 살로 만들고 있잖아요.
누가 하고 있어요?
내 안에 있는 신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거든요.
1분 1초도 나하고 떨어져 계시질 않아요.
어떤 사람이 말년에 자기 살아온 길을 돌아봤어요. 발자국을
그랬더니 항상 신하고 함께한 즐거운 그 발자국이 남아 있더래.
그런데, 가다 보니까 발자국이 하나가 없고
자기 발자국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간이 있더래요.
그때가 보니까 자기가 힘들었을 때
"신이시여, 그때 왜 저를 외면하시고 버리셨나이까?
저 혼자 가게 두셨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신이 뭐라고 대답하신 줄 아세요?
"아니야 그것은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때 내가 너를 안고 걸었단다.
그래서 내 발자국만 남아 있는 거란다" 라는 얘기도 있어요.
명언이죠. 그런 거예요.
인간은 그렇게 자기 본위로 생각을 하거든요.
신이 날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도 그런 오만이 없다고 얘기를 하시는 거니까
항상 함께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할 게 없어요.
이미 완성된 세계라고 그랬고 행복하라고 하셨고
모든 걸 누리라고 하셨는데,
오로지 우리가 할 일은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래서 기독교에서도 보면은
성서에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그랬잖아요.(1코린 5,16)
우리가 할 일은 그건 거예요.
그래서 항상 너희들 하느님을 잊지 말라 그랬잖아요.
하느님을 잊지 말라는 거는 이와 같은 세계가 이미 베풀어져서
너와 함께 항상 함께하고 있단다라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기뻐하라는 얘기입니다.
“야, 난 지금 뭐 그런 정도가 아니라 지금 죽겠는데
이게 지금 기뻐해서 될는지 어떨라는지 모르겠다”라는 분도
그런 채로 기뻐하는 게 좋아요.
그렇게 붙들고 있는 만큼으로
아직도 여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미 이루어진 세계라고 하는 것,
그리고 더 확신, 단언으로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고 계시는데
한번 들어보세요.
“신은 사랑이시며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다는 것
벌써 결산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결산 보고서를 앞에 놓고 기도를 해본들
그 결산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입니다.”
계속 강조하고 계세요 몇 페이지에 걸쳐서.
이게 1장이 한 40페이지 정도 되거든요.
계속 이런 말씀이에요.
그래서 주어진 계산서를 정확히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기도라고 그랬어요.
예금이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만큼으로 은행에 있어요 지금.
그런데 나는 그게 없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가서 “한 백만 원만 주세요” 하고
그렇게 은행에다가 지출해달라고 그죠?
지출 승인서를 써가지고 신청을 하잖아요. 예금을 청구할 때
그럼 청구한 만큼 나오잖아요.
백만 원 쓰면 백만 원 줄 거고 천만 원 쓰면 천만 원 주겠지,
자기 생각만큼 이니까요.
신은 무한이시니까 무한 억만금을 청구해도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쓸데없이 억만금을 갖다 쌓아둘 일은 아니고
필요할 때 언제든지 베풀어지도록 다 준비가 돼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승인하는 만큼 나오는데
문제는 그것을 자기가 자각을 안 하고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에서도 불교나 기독교나 똑같이
그런 것들을 안타까워서 비유의 말씀을 들고 계세요.
여러분 법화경이라고 잘 아시잖아요? 불교에,
거기에 보면은 법화 칠유라는 게 있어요.
법화의 7가지 비유라는 게 나오는데
그 중에 다섯 번째 비유가 계보주의 비유라는 게 있어요.
어떤 아주 억만금을 가진 부자가 저잣거리를 나갔다가
아주 오랜 친구를 만났어요.
근데 이 사람이 거지 행색을 하고 구걸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안 됐잖아요. 집으로 데려와서 좋은 음식을 먹이고
또 술도 한잔 주고 그랬더니 따뜻한 방에 오랜만에
이렇게 즐겁게 좋은 음식을 먹었더니 술까지 먹었더니 잠이 들어버렸네.
근데 이 부자는 지금 바빠서 나갈 일이 생겼어요.
안 됐잖아요, 친구가
다시는 이런 걸인 행각을 하지 않도록 이것만 팔면은
죽을 때까지 평생 쓰고도 남을 그런 억만금의 가치가 있는 다이아몬드를
옷깃 깊은 곳에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거기다 이렇게 꿰매서 달아주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이걸 찾아서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거지 행색을 안 하겠지! 하고
자기는 나갔어요.
그런데 한 몇 년 뒤에 다시 저잣거리에서 그 친구를 만났는데
여전히 거지 행색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이 사람아 내가 이만큼 좋은 걸 줬는데
왜 아직도 왜 이 꼴을 하고 있는가?” 하고
이제 얘기를 하니까 그 거지 친구는 받은 적이 없다고 그러거든요.
“아니 받은 적이 없기는 이 사람아 그때 자네가 잠이 들어서
내가 그 안에다 여기다 꿰매줬잖아 봐봐” 하고
아직도 옷이 한 벌밖에 없으니까 그걸 입고 있는 거 안을 열어보니까
떡 하니 달려 있다 이 말이에요.
다이아몬드를 지닌 채로도 자기가 없다고 생각하면
거지 행색을 한다 이 말이에요.
그건 비유예요.
그래서 법화 칠유의 제 다섯 번째 비유가
계보주의 비유라는 게 나옵니다.
여러분도 한 번 보세요.
지금 다이아몬드가 있는데 내가 모르고 안 쓰고 있는지
그런 다이아몬드 정도가 아니라
억만금의 가치가 있는 생명이 있잖아요.
(30:01~
내가 마음먹으면 못 할 게 뭐가 있겠어요.
더 힘차게 즐겁게 진리의 공부를 합시다.
기독교도 똑같아요.
탕자의 비유라고 또 나옵니다,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
아들이 어떤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돈을 미리 달라 그랬어요, 유산.
그걸 갖고 다른 데 가서 그걸 다 탕진하고 다 쓰고
쫄딱 망해서 다시 되돌아왔어요.
그랬더니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그렇게 반갑게 맞아주고
그 아들을 위해서 말하자면 잔치를 열어주는 거예요.
이 아들은 너무 죄송하니까 그냥
"이 집의 종이라도, 저를 머슴으로라도 좀 써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한테 부탁하러 왔는데 그렇게 반갑게 맞이하시거든요.
그런 것들이 다 종교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네가 어떻게 돌아다녀서 뭘 행색이 이렇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의 너 안에는 훌륭한 것들이 미리 다 준비되어 있단다.
네 안에 다 있단다.’하는 얘기를 하신 거지,
탕진을 했는데 그건 비유죠.
그래서 이런 걸 우리가 다시 이 광명사상이 나와서,
또 『생명의 실상』을 통해서 이렇게 중요한 부분만 꼭꼭 찝어서
이렇게 선명하게 해 주시니까 더 이렇게 자신감이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일이 다 찾아서 공부하려면 힘이 들잖아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우리가 믿고
즐겁게 생활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근데 이제 그래도 우리가 죄라고 하는 그런 의식으로
자꾸 죄의식을 갖게 되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한번 스스로도 점검을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기에 25쪽에 보면,
< 우리가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은
자신이 신의 자식이라는 것을 진실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
"자신을 도둑놈의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부모가 도둑이니까, 자신도 도둑질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물질이라고 생각하니까 부모의 성적 유희의 희생물이다.
내가 언제 낳아 달라 그랬냐, 제멋대로 낳아 놓고...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함부로 자기 몸을 사용하게 되고
부모에 대해서도 순진한, 신이 주신 그런 훌륭한
본래 자연스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엉뚱한 마음을 일으키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엉뚱하게 봐가지고
엉뚱한 일들이 여기 벌어진 건 모르고
저렇다, 저렇다, 하고 자꾸 거기에 말려 들어가는 거예요.
결국은 이 세계를 못 벗어나는 것을 윤회전생( 輪廻轉生 )한다 그래요.
중생들이 윤회한다 그래요. 거기를 계속 못 벗어나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은
행동이 고쳐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라 그랬어요.
죄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회한, 뉘우치고 한탄하는 것!
그런 생각이 일어나온다 그랬습니다.
인간만이 반성을 합니다.
고양이가 생선을 훔쳐 먹고
‘하~ 오늘도 내가 또 나쁜 버릇을 못 끊었구나!’ 하고
막 자기 전에 무릎 꿇고 기도하고 이런 거 상상이 안 되잖아요.
인간만이 반성을 합니다. 죄의식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신의 자식이기 때문에 죄의식이 일어나옵니다.
연기가 나는 것은 불이 붙기 직전에 제일 연기가 많이 납니다.
씨불을 갖고 오죠. 이렇게 부싯돌로 하든지 뭐 하여튼
불쏘시개 같은 걸 갖고 와서 불을 피울 때
큰 불이 없다고 하면은 그때 불이 다 죽어가서,
이제 말하자면 약간 불씨가
조금 남아 있는 상태에다가 짚 같은 걸 올려놓고 후후 불잖아요.
옛날에는 가스나 이런 것들이 원활치 않을 때는
시골에 가면 그 부엌에 가마솥 걸어 놓고 불을 땠잖아요.
그럴 때 보면 후후 분단 말이에요.
근데 언제 제일 연기가 많이 나느냐 하면
불이 확 올라붙어서 화르륵하고 타오르기 직전에
연기가 제일 많이 나요. 연기가 난다는 게 죄의식인 거예요.
죄의식이 자꾸 올라오고 뭔가 안 될 것 같고 이런 것들은
진짜 내 안에 불성이 막 나오려고 하는 거예요.
진짜 죄의식에 쩔어 있는 사람들은 죄의식 자체가 별로 안 듭니다.
완전히 이 세계로 몰락해 있는 경우는
그러니까 여기 오면 더 괴로운 경우가 있어요.
처음에 진리의 수련을 하면은 지난날 자기의 진짜 이것을
잊고 지냈던 것들이 거기서 막 불이 붙기 시작하거든요.
“그래!” 하고 막 이쪽도 봤다가 저쪽도 봤다가 혼돈이죠, 처음에는.
그러면서도 뭔가 안 되는 채로라도
실상관도 해보고 감사행도 해보고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런 것들이 불씨를 점점 더 지피게 되거든.
그러면 그런 것들의 결과로서 막 더 괴롭기도 하고 막 이래요.
나쁜 게 아닙니다.
힘들 때 그냥 듣기 좋은 말로 하는 말씀이 아니라
곧 동이 트기 직전이다, 이 말이야.
불이 올라붙기 직전이다, 이 말이야.
그때 믿음을 갖고 더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왜? 이미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면 이제 이 죄라고 하는 걸 우리가 어떻게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것도
또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건데 26쪽입니다.
" 죄가 사라지는 것은 오직 우리가 절대 무죄의,
나의 실상에 녹아들었을 때뿐입니다" 그랬습니다.
나는 본래 죄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라고 하는 것에 충분히 마음이 이렇게 일치가 돼서
확신이 생겼을 때라고 하는 겁니다.
" 암흑이 사라지는 것은
오직 빛에 비추어지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그랬어요.
암흑, 여러분 책상 위에 지금 손을 한번 올려보세요.
위에 우리가 전등불이 다 있으니까, 그 밑에 그림자가 생기죠?
그림자 쪽으로 점점 다가가 보세요. 그림자가 점점 진해집니다.
걔는 없애려고 해서 없애지는 게 아니에요, 그림자는
손을 치워버리면 돼. 그럼 빛이 드러나오죠. 그와 같은 겁니다.
암흑이 사라지는 것은 오직 빛에 비추어지는 것에 의해서만 사라지는 겁니다.
힘들 때일수록 기뻐해야 되는 거예요, 사실은.
죽겠을 때 더 감사해야 되는 거예요.
밝은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 거예요.
일본의 어떤 부부가 망해가지고 쫄딱 망해가지고
이 생장의 집 연송 도장에 왔어요.
처음에 남편이 오셨지.
부도가 나가지고 매일같이 빚쟁들이 찾아오고 죽겠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런 진리의 수련을 하고 집에 갔는데,
다른 거는 너무 이제 얘기들이 많았어 가지고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웃기 연습은 선명하니까
"웃으면 웃을 일이 자꾸 온다."
그런 걸 자꾸 들었던 기억이 나니까 집에 가서 자꾸 웃는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는 부인이 보면 뭐라고 할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혼자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막 웃었던 거예요, 남편이..
근데 뭔가 화장실에만 들어가면 무슨 자꾸 웃는 소리가 들리는데
부인이 이상하잖아요.ㅎㅎㅎ
"당신 그 화장실에서 혹시 뭐 어디 보고 그렇게 웃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나 여기 생장의 집 갔다 와서 웃기 연습 하는 거라고...
"왜 냄새 나는 데서 혼자서 그러고 있냐고 같이 합시다," 이래가지고.
이제 부부가 이제는 같이 마주 앉아서 웃기 연습을 한 거예요.
이렇게 하다 보니까 자꾸 점점 잘 웃게 되고,
웃다 보니까 점점 즐거워요.
그래서 그냥 뭐 이틀 삼일 계속 웃고 있는데,
하루는 빚쟁이가 이제 돈 받으러 찾아왔어.
근데 집 안에서 막 웃음소리가 들리니까
"이 사람들이 뭔가 일이 잘 됐는가 보다.
오늘 이제 돈을 받아갈 수 있겠구나 "하고 이제 들어왔는데,
웃으면서 " 아, 곧 잘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
그러는데 그게 뭔가 신뢰감 있게 들리는 거예요, 빚쟁이도.
" 아, 그랬어요. 알았어요. 그럼 제가 좀 더 기다려보죠. 잘 부탁합니다. "
그러고 또 웃으면서 그 사람들이 가고...
근데 실제로 다 갚았어요, 웃는 것만으로...
실제로 있었던 실화입니다, 여러분.
힘들수록 웃고 기뻐해야 됩니다.
그리고 방금 지적해 드린 대로 여기 나오듯이
암흑은 빛에 의해서만 사라진다고 하는 것
그런데 이제 죄를 소멸시키는 것은
그런 빛에 의해서 사라진다는 것도 공부를 했고요.
그런데 이제 종교상의 죄사함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계시는데요.
종교상의 죄의 사함이라고 하는 것은
"죄 없애고, 죄를 없애고 죄를 소멸시키는 것이다,."그랬습니다.
"죄 그대인 채로 용서해 주시며, 죄 그대인 채 우대해 주시며,
죄 그대인 채로 쾌락을 주신다."는 따위의 말은
대인관계에서는 쓰이는 말이지만
종교상의 죄의 사함이라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랬습니다.
종교상의 죄의 사함이라 하는 것은
죄 자체가 죄가 되며 죄 자체가 본래의 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죄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얘기하셨는가 하면
감쌈이라고 그랬어요. 감쌈...
죄라고 하는 것은 감쌈이다. 다른 말로 하면 또 쌓음.
(40:01~
죄라고 하는 것은 본래 완전한 세계를
내 마음에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가로막아버리는 것, 덮어버리는 것,
그래서 이쪽이 가로막혀서 덮여진 상태를 말하는 것,
죄라고 하는 것은 감쌈이며 쌓음입니다.
거기다 실상 위에다가 쌓여서 겹쳐서 실상을 감싸서 숨기고 있는
염파( 簾波 )의 축적( 蓄積 )
우리들 생각에 파장이 있잖아요?
그것이 모이고 쌓인 것이 바로 죄라고 합니다.
죄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것은 신의 자식인 우리들의 실상은 아니므로
존재하지 않으며 무 (無)입니다.
죄는 본래 없는 거예요.
이게 이 광명사상에서 해석하시는 인류 무죄 선언입니다.
실제로 이 『생명의 실상』 40권 중에
인간, 신의 자식 병 본래 없다. 불행 본래 없다. 죄 본래 없다.
이런 얘기만을 모아 놓은 책이 하나로 따로 있어요.
저희들 월간지 『광명』에서는 그것을 다 번역 연재를 끝낸 바가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제 단행본으로 출판할 기회가 나올 겁니다.
『인류 무죄 선언』이라는 책이예요.
그 책을 이제 구스모토 가미노라는 선생이 편찬을 맡으셔서
그 책을 출판하는 날, 그 집의 가업이 끊어졌다고 그랬거든요.
대대로 자손이 유산이 되고 낙태가 되고
뭐 자손이 태어나질 않아요 그집은.
윗대로 계속 그랬어요.
근데 이 구스모토 가미노 선생이 『인류 무죄 선언』이라는
이 책을 완성하시고 출판돼서 세상에 책이 이렇게 태어나온 날
부인이 출산을 하셨거든요.
그리고 내리 삼 남매를 두셨어요. 가업이 끊어져 버렸죠.
계속 죄 본래 없다는 것들이 그 구스모토 선생 머릿속에 계속 심어진 거예요.
그 책을 출판하는 몇 년 동안.
그러니까 결국은 없는 걸 내가 붙들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 깊이 믿음이 자라나신거죠.
그러니까 가업조차도 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죄라고 하는 건 본래 없는 것입니다.
가상의 세계, 이쪽이 가상의 세계거든요.
현상 세계라고 하는게
그 가상의 세계에 있어서는 가짜의 존재로서
일종의 운동 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가짜지만 운동 광성을 지닌 거예요.
우리가 공을 던지면 계속그쪽으로 날아가려고 그러잖아요.
가던 힘이 있어서 차도 가다 급브레이크를 잡아도
계속 그쪽으로 이렇게 가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막 끼익 하고 이렇게 차가 움직이잖아.
그런 운동 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의 유전력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집 안에 암 환자가 있으면
계속 끊이지 않고 암이 이어진다든지
그런데 이 죄, 곧 업의 유전력은 가존재, 가짜의 존재이니까
영구성은 없는 거예요.
영원토록 그렇게 가는 길은 없는 거예요.
결국은 사라져 가는 것이지만
이 운동 관성, 즉 업의 유전성을 없애지 않고
내 죄를 용서해 준다고 해도 그 죄 자체가 사라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거예요.
이 자체가 사라져야지만 이것이 사라지고
온전한 것이 드러나오는데
얘가 모이고 쌓이면 가짜지만 그 자체도 관성을 갖게 된다, 운동.
그러니까 그걸 업의 유전력이라고 얘기하셨죠.
막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안 내야지 하면서도
뭔가 사소한 일에도 또 벌컥벌컥 나오는 거예요.
그것이 버릇이 돼버려 가지고
그래서 이게 문제는 이 죄의 관성, 그죠.
가짜의 잘못된 믿음에서 온 거지만은
그것이 이제 관성를 띠게 되는데,
그 죄를, 문제는 이제 파괴를 해야 되는데
이 죄의 파괴라는 제목으로 또 이렇게 쓰고 계세요.
나의 실상의 완전한 상락의 그런 상태를 뒤덮고 있는 죄,
가리는 게 죄라고 하는 건 아까 이해를 하셨고 그죠.
완전한 세계를 내가 가리고 있는 것, 덮고 쌓아두고 있는 것.,
그것이 죄인데 이것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가 하면은
죄 자체의 본래의 성질에 의하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계속 얘기가 반복은 됩니다만은
죄가 표피, 즉 표면을 덮고 있는 그 껍질로써
나의 실상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것은
마치 비유를 하자면 구름이 지구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것이
지구 자체의 인력 끌어당기는 힘,
지구 자체가 인력이 있잖아요?
그래서 구름이 어느 정도 이렇게 완전히 다 날아가서
우주권으로 날아가지 않고,
지구 대기권 안에서 이렇게 맴돌고 있잖아요.
그 지구 자체의 끌어당기는 인력에 의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의 염(念)의 견인력(牽人力)에 의해서
이것이 계속 그 성질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결국 우리들이 생각으로 계속 그것을 당기고 있다 이 말이에요.
결론은 우리의 염의 견인력이 사라지면 없어지면
죄는 저절로 사라지고 파괴되어 버린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파괴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면은
죄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단순히 묵과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랬어요.
묵과하는 것은 오히려 죄를 날뛰게 하게 하는 수가 있다 그랬어요.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죄는 오히려 감추는 것보다도 드러내는 쪽이 좋다 그랬어요.
드러낸다고 하는 것은 표현시킨다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정심행(淨心行)
근데 그것을 같이 막 이렇게 세상에 이런 데 휩쓸려 가지고,
"그래 맞아. 그 사람 내가 봐도 좀 고약해"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모여서 뒷담화를 하듯이
자꾸 그런 얘기를 해봐야 그 죄는 더 증폭이 돼요.
그것이 아니라 신 앞에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신 앞에 우리는
"내 이런 저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잘못된 믿음이긴 했습니다마는
지난날 오랫동안 아마 이것은
제가 이번 한 생에 생긴 습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앞선 생에 계속 쌓아두었던 그런 경향이
자꾸 그렇게 보게 저를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치 진짜 그런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여전히 괴롭습니다.
저로서는 이것이 너무 힘듭니다" 하고
그것을 그대로 신 앞에 지난날 이렇게 심판했던 것들,
일체 어두웠던 것들은 다 적어서 표현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드러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드러내게 되면은
"이건 신의 자식인 나의 실상과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가짜의 자신이었다.
진짜의 자신은 이 따위 불완전한 짓은 하지 않아" 하고 깨우치고
그 죄를 버리면 그 버리는 것에 의해서
죄를 실상의 표면으로 끌어당기고 있던 견인력이 끊어진다고 그랬어요.
내가 계속 당기고
그렇다 그렇다 하는 그 힘이 단절이 되고,
이게 순환하고 있었던 거거든
보고 또 그렇다 보니까 그렇게 보이고,
볼 때마다 저봐 저봐 저봐, 또 저러잖아. 또 저러잖아.
제일 대표적인 게 남편 양말 벗는 문제,
"제발 좀 갖다 벗으세요" 하고 나쁜 데를 자꾸 지적을 해.
그러면 자기 믿음만큼으로
상대가 물론 나는 그걸 고치려고 한 말이지만은
나쁘다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나쁘다라고 보는 모습 그대로 자꾸 나쁘게 드러나요.
원래는 잘 벗는 훌륭한 남편이 있었는데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되지.
근데 이쪽을 보고 있으니까 지금은 그렇게 여실하게 보이거든요.
볼 때마다 이쪽에다 더 새긴다니까~ 자꾸
그래서 그렇다라고 보는 그런 것들을
표현시킨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견인력이 끊어지게 되고
죄는 저절로 구름이나 안개가 흩어지고 사라지듯이
날아가버린다 그랬어요.
죄 본래의 성질에 의한다 그랬습니다. 죄는
죄를 어떻게 소멸시키느냐?
실상에 녹아들을 때 뿐 우리가
절대 무죄( 絶對無罪 )
죄의 본래 없는 죄를 본래 지을 수도 없고,
본래 완전한 자기의 훌륭한 모습,
상대의 훌륭한 모습에 녹아들 때 밖에 없다.
그때만이 죄가 사라지고
그리고 죄 본래의 성질, 죄는 본래 없는 거니까.
본래 성질에 의해서 사라지는 건데
그것도 하나의 경향성을 띠고 있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자꾸 봐왔던 염의 견인력으로서의
그 힘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표현시켜 버려라.
또 이런 얘기도 하고 계세요.
죄의 실상이 고통이며 불행인 것은
상락(常樂)의 신의 자식의 실상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가리고 있을 때 힘들죠?
이 세계가 지옥이잖아.
맨날 지지고 볶고 싸울 때 저렇다 저렇다 할 때
그때가 사실은 지옥이에요. 지옥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근데 그 죄의 실상이라고 하셨습니다만
하여튼 죄의 실체 참모습이라고 하는 게
고통이고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50:01~
상락(常樂), 저쪽에 상락(常樂) 의
신의 자식이 실상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시면서
신은 사랑이시니까,
우리가 신에게 기도해도, 신은 죄를 그대로 둔 채
용서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불행인 채 참고 견디라는 일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나를 죄인 채로 용서해 주십시오.
죄인 채로 죄인인 채로 행복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것은 제발 내가 눈을 감고 있는 채로 빛을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라고도
또 얘기를 하고 계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눈을 뜬다고 하는 것,
이쪽을 향해서 그 세계에 대한 훌륭한 세계에 대한
이쪽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그걸 내려놓고
이것은 신 앞에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 봤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맡겨버리고
표현시켜 버리고 정 안 되면 적어서라도 표현시켜 버리고
그리고 이쪽을 보고 눈을 뜨고
"이미 훌륭한 남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엔 실감이 안 나지, 왜냐?
아직도 이런 믿음이 안 자라나 있고
초점을 맞추는 것도 아직은 능숙하지가 않거든요.
그게 이제 아까 실상관이라든지 기도를 통해서
믿음을 키우는 거라 그랬잖아요.
진짜 막 그것이 드러나올 것 같은 막 설렘이 있고
기쁘고 환희심이 들고 이래야 되거든요.
근데 아직은 멍한 거예요.
그냥 자세 취하는 것조차도 어렵고
실상관 외우는 말도 이렇게 봐가면서 해야 될 정도니까
그런 몰입이 되겠냐고요. 그런 정도는 해야지 처음에는,
기본은 『생명의 실상』을 꼭 보셔야 돼요.
40권이라고 해도 천천히 한꺼번에 다 본다고 생각하시지 말고
1번부터 이렇게 차곡차곡 읽어가시다 보면은
점점 재미도 생기고 그리고 한 번 보고 이게 알아지는 책이 아니거든요.
한번 기본적으로 한 10번은 본다.
이렇게 생각하고 천천히 또 보고 또 보고 하는 거죠.
그래서 죄라고 하는 실체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습니다마는
죄 자체가 파괴돼야 된다.
그리고 그 당기고 있었던 염의 견인력이
사라져야 된다는 얘기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그래도 책 속에 있는 이론이지
그렇게 감사하고 더 훌륭한 세계를 본다고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오느냐 하는 사례가 있으면
또 우리들한테 더 믿음을 줄 것 같아서
『생명의 실상』 11권 [만교귀일편 상편]인데요,
여기 서문에 선생님이 직접 소개하신 엔도 요시오라고 하는
사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던 죄수가
감사하고 실상 세계에 그 상락의 세계에 희열을 느끼고 기뻐하고 있는 중에
풀려난 기적적인 그런 생환을 한 그런 사례를 소개를 드립니다.
11권 서문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우리는 이제 태평양 전쟁으로 잘 알려져 있죠.
거기에 카이난도, 한자식 표기로는 해남도(海南島)라고 합니다.
아마 타이완 밑쪽에 있는 그런 섬일 거예요. 남방에
거기에 전범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고
억류당하고 있던 엔도 요시오라는 분의 얘기입니다.
근데 이제 감옥이니까 거의 즉결처분에 가까운 거예요.
그냥 형식적으로만 그냥 함부로 막 죽이면 안 되니까
그냥 요식 행위로만 이렇게 절차를 밟아서
그냥 매일같이 문이 열리고 죄수가 한 명 끌려나가면
좀 있으면 타당하고 총살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죽은 거예요.
근데 어느 날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가던
한 다른 옆방에 있던 죄수가 이 엔도 요시오씨 방으로
이 『생명의 실상』 그때는 이제 이 두주판이 나오기 전인 것 같아요.
지금은 두주판은 40권으로 전체가 권수가 이루어졌는데
그때는 20권으로 애장판이라고 해서
양장본 형식으로 해서 20권으로 이 40권이 돼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때 6권이라고 했으니까
이게 지금 11, 12권에 해당이 되는가 봐요.
이 책을 주셨는가 봐요.
그래서 이 『생명의 실상』 6권과
그 다음에 이제 이렇게 사경으로 적은 『감로의 법우』 손으로 적은 거죠.
그거를 이렇게 자기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그 사람 방에 그냥 툭 던져주고 간 거예요. 간수가 모르게
뭐 이제 내일 죽나 모레 죽나 이러고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할 일이 딱히 없잖아요?
그래서 그걸 열심히 봤어요.
그런데 책을 볼 때마다 인간 신의 자식 이런 것들이
막 그렇게 새겨지는 거에요. 깊이
사람이 절박할 때는 더 이게 깊이 와닿거든요.
그리고 마침내 이 실재계는
우리들의 정토는 항상 천인(天人)들이 충만해 있고
그 불멸의 천인이 곧 나였구나! 하는 것들에 대한 자각이 생기게 돼.
그러고 나니까 사형이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아요.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자각을 그 11, 12권을 통해서 얻은 거예요.
그리고 『감로의 법우』적어준 걸 글을 수시로 읽고
그러는 중에
그분의 진짜의 그런 생명의 자각이 드러나온 거에요.
그래서 책에 계속 실상관, 실상관 이런 얘기가 나오니까
"아마 이런 거겠지"하고 자세를 취해서 실상관도 하고
하다 보니까 그 삼매에 빠진 거예요.
내가 어디 있는지도 전혀 느낌이 안 들 정도로
그냥 희열, 법열이라고 하죠?
그런 환희심이 일어나서 기쁨으로 충만한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근데 신기한 거는 남방지방이니까 모기가, 모기가 말도 못해요.
그리고 전부 오늘 내일 다 즉결처분할 사형수들이니깐
대접을 제대로 해주나요? 엉망징창이죠. 위생 상태라고 하는 것도
그러니까 모기가 여기 써놓기를 뭐라고 해놓으셨는가 하면
온몸에 검은깨를 뿌린 것처럼 붙어 있었다고 해요.
아, 상상만 해도 징글징글 맞죠? 그렇죠.
저 예전에 3사관학교에서 소위 임관하고
광주 상무대라는 데서 이제 소대장 교육받을 때,
외출이 통제가 됐는데 외출, 외박이 통제가 됐는데
나중엔 배짱이 생겨서 '그냥 에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집에 한 번 왔다 갔어요.
그랬더니 그날 그냥 무단 이탈했던 그 동기들
하여튼 한 열댓명이 같이 잡혀 가지고
구대장이라고 하는데, 교육시키는 구대장님한테 잡혀가지고
모기 회식이라는 걸 그때 하여튼
새벽 3시까지 스물 몇 가지 기합을 받았어요.
인간이 이런 기합까지도 받을 수 있구나! 하는 그때 처음,
하여튼 이런 다양한 대한민국에 기합이 있는 건 처음 알았어요.
근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모기 회식,
다 벗고 팬티 하나 입고 2m 간격으로 개인 간격 팔을 벌려서
2m씩 떨어져서 연병장에 30분 동안 서 있는 거예요. 팔 벌리고
그때가 8월 달이거든, 모기가 모기가
막 근데 움직이면 안 돼. 왜? 이게 말하자면 이제 벌칙이니까
그래서 이 벌칙 이름이 모기 회식이야.
그날은 모기들이 회식하는 날이지. 빤히 먹는 걸 봐야 돼.
근데 한 열몇 마리 붙었는데도 죽겠던데
여기는 지금 검은깨를 뿌렸다 그랬으니까 얼마나 많이 붙었겠어요.
근데 신기한 거는, 이 검은깨를 뿌린 듯한 모기가 한 마리도
이 엔도 요시오씨의 피를 빨지 않는 거예요.
대조화를 이루고 있으니까... 완전한 대조화의 세계가 있어요.
성서에 나오는 양과 사자가 같이 풀을 뜯고 이런 얘기가
그냥 비유거나 이런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실제로 그런 거예요.
그리고 침대에는 빈대가 줄을 지어서 있었지만
한 마리도 엔도 씨의 피를 빨지 않았다고 하는 거예요.
오히려 줄을 지어서 옆방으로 이사를 가더래요. 쭉~
분위기가 안 맞으니까 이 쪽은 축복을 하고 있으니까
별일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
예전에 우리 회원님들 보면은
그 집에 막 천장에서 쥐들이 저녁마다 막 달리기 대회를 하잖아요?
걔들이 막 와당탕탕탕탕 뛰어갔다 그죠?
그래서 그 쥐 때문에 죽겠다는 분들이 많았거든.
옛날에 그 쥐하고 화해의 실상관을 해요.
여기 와서 배우셔 가지고 "당신도 신의 자식이고 나도 신의 자식이고
그래서 모쪼록 좋은 데로 가서 번영하시고 잘 사세요."하고 축복을 하고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는 일은 본래 없습니다." 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 중에 쥐 다 이사 가고 없대요.
실제로 개미 때문에 죽겠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실상관을 하니까 개미가 실제로 줄을 지어서 이사를 가더래요.
그런 거 본 분 많았어요.
우리 회원 중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여러분.
모기가 검은깨를 뿌린 것처럼 붙어 있어도
한 놈도 빨지도 않고 피를, 빈대도 그렇고...
갈수록 이분은 환희심이 환희심이 넘쳐서 감사하고 감사해서
뭐, 그러니까 뭐든지 이렇게 막 소중한 거예요.
( 1:00:01~
자기 발목을 채우고 있는 쇠고랑조차도
그 옆에 붙어 있는 흐트러져 있는 지푸라기를 갖다가 모아 가지고
그거를 갖다가지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감사행을 혼자 하시면서 쇠고랑을 얼마나 닦았는지
쇠고랑이 반짝반짝 빛이 나네.
나중에 또 뭐 닦을 거 없나 보니까 요강이 있어요.
요강을 닦는데 요강도 빛이 나고
근데 하루는 간수가 지나가다 엔도 요시오씨를 이렇게 보는데
이 사람이 얼굴에서 빛이 나거든
이 사람은 맨날 이제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죽을 상이 된대요.
얼굴만 봐도 안대요. 자기는
그런데 이 사람은 죽을 상이 아닌 거야.
암만 봐도 신기하지. 얼굴에서 점점 빛이 나니까.
내가 이렇게 많이 봐왔지만 당신은 죽을 사람이 아니다.
지금 당신은 얼굴이 밝고 씩씩하고
안심으로 대안심으로 빛이 나고 있다.
사형 당할 사람의 용모라고 할 수가 없다, 이건
혹시 탄원서를 한번 내본 적이 없냐? 사형을 면할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날 전쟁터에 급하니까
막 다 끌려오니까 전부 전범 이래가지고 다 처형되는 이런 시국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엔도 요시오씨가 군에 탄원서를 내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라고 얘기를 하니까
군 같은 데다 군대에다가 그거 내봤자 아무 소용없다.
장개석이 있는 중앙정부에다 내야 된다.
자기는 중국 사람이니까 잘 아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내가 일어를 할 줄 아니까 당신이 탄원서를 써!
그럼 내가 중국어로 번역을 해가지고 제가 중앙정부에 전달을 해줄게."
시키지도 않은 일을 간수가 나서서 도와주는 거에요.
그게 통과가 됐어요.
마침내 기적적으로 사형 직전에
일본으로 생환이 됐다는 실화입니다. 여러분
이 분이 나중에 일본에 돌아와서
'감사는 사형수의 쇠사슬도 끊었다!'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자기를 살렸던 이 『생명의 실상』 11, 12권 그땐 합본이지만
이 책을 3만 권을 사가지고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드렸습니다.
애행을 했죠. 실화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죽을 날을 처형될 날을 기다리는 것만큼
각박한 상황에 처하기도 힘들어요.
그거에 비하면 우리 얼마든지 더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인 거예요. 지금
그래서 오늘 죄는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내가 염의 견인력으로 계속 땡기고 있지는 않는가?
자꾸 죄를 이리저리 더듬지는 않는가?
뭘 더하면 좋아질까? 이런 궁리를 내려놓으시고
오로지
있는 훌륭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점점 더 키우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생활
그리고 기뻐하는 생활로 나아가시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라면서
오늘 준비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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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녹취 >
시작 ~ 05:00 무비
05::01~ 10:00 마카리오스
10:01~ 15:00 그대로되었다
15:01~ 20:00 무사
20:01~ 25:00 신비
25:01~ 30:00 해처럼
30:01~ 35:00 무지
35:01~ 40:00 득의
40:01~ 45:00 무소
45:01~ 50:00 무척
50:01~ 55:00 온리아바
55:01~ 1:00:00 정배
1:00:01~ 끝 무비
<주말특강> 녹취를 수고해 주신
기조실 + 회장단 보조교사님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오늘 죄는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내가 염의 견인력으로 계속 땡기고 있지는 않는가?
자꾸 죄를 이리저리 더듬지는 않는가?
뭘 더하면 좋아질까? 이런 궁리를 내려놓으시고
오로지
있는 훌륭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점점 더 키우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생활
그리고 기뻐하는 생활로 나아가시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라면서>
본래 죄가 없다는 이런 내용은 처음 접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 구세주가 오시게 된
가톨릭의 교리와는 너무 다른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강의에서 '신의 자식'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하듯이
거내영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거내영을 알고 변화된 이유가
하느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사랑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면
인간적으로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더이상 그것 때문에 괴롭지 않으며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니
다른 이들도 아버지의 사랑스런 자녀들임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며,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렸기에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니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매일 성경 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을 얻고,
끊임없는 아버지기도로 아버지께 집중할 수 있는
이런 신비의 삶으로 저를 불러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내맡겨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영상을 듣느라 좀 힘들어서 낮에 도중하차했었는데,
기조실 보조교사들의 수고로 끝까지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 드립니다.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가 한꺼번에 버무려졌지만
정작 하느님아버지께서 창조주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는,
가장 중요한 알맹이는 쏙 빠진 맥아리없는 강의라고 생각되는데
젊은이들이 이런 것에 열광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는 게 현실입니다.
제가 신흥영성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거룩하고도 탁월한 신비신학인 < 거내영 >으로 이끌어주심에
다시한번 엎디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어리석고 교만스러우며 무지했던 저를 죄의 수렁에서 건져내시어
내 뜻의 종교생활에서 벗어나 아버지 뜻의 신앙생활로
삶 자체가 바로 기도이고 기도가 삶임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아버지앞에서 아버지만을 바라보면서
끊임없는 아버지기도에 집중, 몰입함으로써
아버지의 참자녀 되고자 저를 완전히 내맡기오니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제 안에서 이루어주소서.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아빠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긴 내용 녹취하느라 수고해 주신
기조실 보조교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20:22~20:46)
이런 얘기도 하고 계십니다.
" 신을 아는 자는 신의 완전함을 아는 자는
신의 무한 능력을 아는 자는 신이 만든 실제의 세계는
이미 완전합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신이 만든 실제의 인간은 이미 완전합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라는 말,
다만 이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35:43~36:09)
죄가 사라지는 것은 오직 우리가 절대 무죄인
나의 실상에 녹아들었을 때 뿐입니다 그랬어요.
나는 본래 죄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라고 하는 것에
충분히 이렇게 일치가 돼서 확신이 생겼을 때라고 하는 겁니다.
(40:47~40:58)
죄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것은
신의 자식인 우리들의 실상은 아니므로 존재하지 않으면 무입니다.
죄는 본래 없는 거예요.
이게 이 광명사상에서 해설하시는 인류 무죄 선언입니다. >
< 지도사제
2012년 2월 21일(화) 강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부족해도, 허물이 많아도,
하느님이 모든 걸 채워주시고, 정화시켜 주시고,
하느님이,
앞에서 다~~~ 마귀로부터 오는 모든 공격들을 다 막아주십니다.
그건 뭐,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어린 자녀가, 스스로 대적을 할 수 없는,
외부로 부터 어떤 위험이 올 때,
스스로 몸을 던져서 다 막아 주는 것처럼,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 사랑하는 내 자식이 엄마의, 아빠의 이런, 도움을 뿌리치고,
`내가할 수있다!'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다른, 같은 말은, 뭐라고 말씀드렸죠?
이제 나올 수있죠!
★인간의 다른 비슷한 말을! "한계"★
완전히 하느님 앞에 낮아진 존재가 바로 어린이예요.
자기 자신이 완전히 낮아지지 않으면, 하느님은 절~대로 볼 수 없어요.
그 엄청난,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서 완전히 땅바닥보다 더, 낮아졌기 때문에
그 낮아진 바닥에는 예수님이 계셔요.
내 자신을 완전히 어린이처럼 겸손되이 낮 추 어 졌 을 때
그 때야 비로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말씀드렸지만, "내맡김의 화살기도"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화살기도" 를 통해서
하느님의 보호를 받을 수있고,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은총으로 마귀의 대적을 물리치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갈 수있는 것입니다.
이것 밖에 없어요.
아~무리 자기가,
뭘~하고 무슨 행위를 하고, 뭘 하느님께 열심히 바쳐 드린다고,
마귀를 대적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성인들 조차도 그걸 다 보여 주셨지 않습니까?
결국은 맡기는 거예요. 주님께!
그런데 주님께 맡기기 위해서는
"화살기도를 열~심히 부르면, 하느님께 저절로 맡겨진다."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어린이 같지 않은, 겸손하지 못한, 자기 지식으로 꽉 채운 사람들은,
이 화살기도를 못해요!
이 마음 안에, 자신도 모르는 교만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가 되면 하느님이 저절~로 찾아온다.'는 이런 말씀입니다. >
< 지도사제 12.03.10 15:30
제가 강론 때 자주
★ "인간" 이라는 말의 다른 같은 말은 "한계" ★ 라고 했듯이,
인간 그 자체가 한계적인 존재인데
그 한계적인 인간이 아무리 무엇을 완벽하게
잘 준비하고 잘 대비한다 하여도
그것은 한계가 있다는 말은 "진리"나 다름없다.
인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은 다 한계가 있는 것이다.
반대로, ★ 한계가 없는 존재 ★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로
우리 인간과 우주의 만물들을 창조하신 ★ "하느님" 뿐 ★이시다. >
< 지도사제
11.02.01 22:43
저는 비오신부님의 말씀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비오신부님의 말씀은 "순서" 가 거꾸로 입니다!
비오신부님의 말씀대로 하면 하느님을 따르기에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순서가 역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먼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저절로 다른 어떤 고통도 다 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고통을 짊어지려 안간힘 쓰다가 떨어져나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비오성인같은 소수의 사람은 그것을 이겨낼 수 있어도
저와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가능"합니다.
비오신부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내맡김의 삶"은 "하느님"이 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저의 글 - "과거 성인들의 묵상 방법에 반기를 듭니다."
"나는 기도를 이렇게 생각합니다"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내맡긴 영혼은에서)
적어도 저의 경우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어도
★ 인간이 하는 것은 반드시 한계 ★가 있고,
한계가 있음을 아는데
굳이 어렵게(역순) 헤쳐나갈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극기" 는 가정보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가장 바르고 안전합니다!
100% 내맡기면
예수님이 친히 "스승"이 되어 주셔서
모든 훈련을 다 시켜 주심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하나하나", "나날이 조금씩조금씩", "때로는 엄청나게" 말입니다. >
[ ▣ 주일강론
신앙의해, 연중 제24주일(2013, 09, 15)|
지도사제 2013.09.14
정말,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福된 말씀이다.
아니,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만의 福音이다.★
과거의 나는 정말 하느님 앞의 큰 죄인이었다.
목자가 잃어버렸던 한 마리의 "양" 이었고,
어떤 부인이 잃어버렸던 한 닢의 "은전" 이었고,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어 먼 고장으로 날라버렸던 "작은 아들" 이었다.
그러나,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랬던 나를 다시 찾아주셨고, 어느덧 나는 다시 아버지의 것이 되었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나의 것이 되어주셨고,
아버지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다.
나는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몸에 죽을 병이 들어 "제정신이 들게 된" 다음,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간절히 또 간절히 부탁드렸을 뿐이다.
그때 저의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너무도 초라하여 내가 나를 바라다 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나의 아버지께
나의 초라한 그 모습 그대로를 몽땅 다 내맡겨 드렸다.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런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몽~땅 다 받아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좋은 옷인 ★<하느님 뜻의 예복>을 입혀 주셨고,
★<천국의 반지>를 끼워 주셨고, ★<거룩한 내맡김의 신발>을 신겨 주셨다.
주님의 거룩한 산,
지리산에서 모든 것을 다 마련해 주셨다.
참으로 <야훼이레>였다, 아버지가 <나의 참주인>이셨기 때문이다!
나의 참아버지께서는 뼈에 가죽만 남이 있던 나에게
살진 송아지로 내 살을 불려 주셨고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해 주셨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차려주신 잔치는 끝나지 않고,
아니 끝날 수도 없고, 날이 갈 수록 잔치상은 풍요롭기만 하다.★
아버지께서 이 잔치상을 거두어 주실 때가 잔치가 끝나는 날일 것이다.
★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부족하고 죄스런 나에게,
내가 원하지도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모든 것을 다 해 주신다.
아버지께서 해 주시는 모든 것을 나는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주시는 모든 것을 거절하지 않을 수록 아버지께서는 너무 기뻐하신다.^-^
이에 神바람이 나신 아버지께서는 내 손에 열쇠까지 쥐어 주셨다, 정말이다!
이 모습을 지켜 보던 "큰 아들"은 화가 잔뜩나서 잔치상을 뛰쳐 나가려 한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타이르신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나는 나의 형이 잔치상에서 나와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잔치상을 뛰쳐나갈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알 필요가 없다.
그것마저 나의 아버지께 다 내맡겨 드렸기 때문이다.
★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차려 받은 잔치상엔 날이 갈수록 손님이 넘쳐나고
날이 갈수록 즐거움이, 기쁨이, 흥이 더해 갈 뿐이다.★
나는
<반지>를 낀 손에,
<열쇠>를 거머쥐고,
<신발>이 가는 길을 그저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이 <신비의 잔치상>에 작은 아들들을 초대해 드리고 싶다,
아니, 나의 아버지께서 이미 작은 아들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주셨다,
★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놓여있는 선물
아버지의 초대장선물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 ]
아멘 아멘~!!!
사랑하는 신부님, 부족한 저도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광명사상의 인류 무죄 선언! 이란 다소 아리송한(?)
이런 신영성도 있네요.
부족한 저는 창조주 하느님을 저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한계일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주인이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고 살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다른 복잡한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고
죄인이어서, 한계를 갖고 있는 인간이어서 행복합니다.
부족하기에 내맡겨 드릴 수밖에 없고
내맡겨 드려 아버지가 살아 주시고 해주시는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삶이 너무나 좋습니다.
사랑하는 지도 신부님 따라쟁이로 허상인 죄의식에 놀아나지 않고
아버지 세탁기 안에서 아버지를 사랑해 드리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 모두가 아버지만을 진실로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한계인 인간들과
그렇지 못한 인간들까지 모두를 내맡겨 드립니다.
< 거내영 >과 모든 사제를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시며
거룩하신 아버지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뉴에이지 강의를 통하여
아버지 나라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엄선하여 올려주신 강의, 비록 뉴에이지 강의이지만 나름 수준 있는 강의,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녹취에 이끌려 주신 보조교사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육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얼치기로 교리 수업을 받고 고 3 때 학력고사 보기 두 달 전에 세례를 받은 저는
집에서도 가정 교육으로 신앙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전혀 없고
친구 중에서도 가톨릭 신자가 전혀 없어서
가톨릭적인 뿌리가 워낙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눈 앞에 빨간 십자가로 친히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던 강렬한 체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교리나 가르침에 매달리기 보다는
제가 한창 지적인 호기심과 영적인 갈망이 충만하던 때에
뉴에이지의 메시지들이 제 주위에 넘처나기 시작하였기 떄문에
그러한 메시지들에 귀가 솔깃해지기 일수였습니다.
부족하기만 했던 저는,
성당의 미사 참례와 청년 활동만으로는
저의 영적 갈망이 채워지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미사 때에 기쁘고 충만한 느낌이 들고,
성가를 부르며 눈물도 흘리곤 하였지만 말입니다.
제가 왜 갑자기 그토록 어린 나이에
젊디 젊었던 사랑하는 육의 아버지를 잃는 엄청난 일을 당해야 했으며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지,
마음속의 답답함과 현실의 막막함과 불안과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고 처리해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성당 안에서 그에 대한 시원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방황과 함께,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시련의 연속들을 살아오면서
아버지의 은혜로 다시금 가톨릭 신앙 안으로 들어와 하느님께 매달리기 시작하였고
그 끝에 마침내 <거내영>이라는 종착역에 다달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부모님 때문에 잠시 불교 신자였던 시절과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뉴에이지 근처에 얼씬 거리다 잠시 깊이 발을 담글 뻔 했던 시절도
모두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참으로 불경스러운 고백이지만, 저의 무지와 교만으로
성당 안에서의 신앙 교육으로만은 만족하지 못하였던 것,
이 우주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가졌던
이러저러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
가톨릭 안에서는 궁극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옴니아.보조.기조실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자세하게 속 시원히 설명해 주는 곳을 찾고 싶어
이 책, 저 책,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던 제가
거내영 안에서 그 모든 의문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저의 영적 지평을 넓혀주시고, 분별력을 높이기 위하여
이러한 강의를 엄선하여 소개해 주시는 영적 지도사제까지 보내주셨으니,
저는 더 이상 삿된 호기심으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릴 필요마저 사라졌습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 못하고 얇은 귀를 팔랑거리던 제가
성전 안에서의 여러 교육을 통하여
이제는 뉴에이지의 가르침이나 불교 등 타 종교의 교리와
완전하고 보편적인 가톨릭의 진리 사이에 위치한 미세한 균열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으니
더욱더 아버지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 강의를 들으면서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없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원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셨음을 마음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엄청난 진리를 알고 깨닫게 되더라도,
그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은총은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옴니아.보조.기조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모든 심오한 경經들이 밝힌 진리와 뉴에이지의 가르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다른 종교들과 우리 가톨릭의 진리를 가르는 핵심임을
이 부족하고 교만하고 무지한 죄인이,
거내영을 통하여 확실히 깨닫고 마음 깊이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가장 값지게 누리는 방법이,
그분의 피가 한방울도 헛되지 않도록 보답하는 길이,
바로 예수님처럼 하느님아버지를 죽도록 사랑하면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맡겨드리고 그분의 제자가 되는 길임을요!
[★벌거벗은지금
Re: Re: Re: 1부 더 잘 알아야 할 것이 있는 우리 - 좋지 못한 앎ㅣ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4-2편
l 절대 진리는 오직 하나 2
지도사제 23.08.15 00:15
(...)
< ■ 내맡김 영성 ■
7. 내맡김의 영성의 수준은? (1)
지도사제 09.12.21 10:20
내 것들!
나의 모든 것-내 생명, 내 자식, 내 배우자, 내 재산, 내 일, 내 취미,
내 명예 특히 내 뜻 등-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려, 내 것이 없어진 상태!
그것이 '무아(無我)'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옴니아.보조.기조실
누구한테 맡겼는가?
하느님께! 하느님만 남은 것이다.
완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겨 드림으로 소위 '하느님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자신을 닦고 진리를 만나러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산이나 절(寺)로 들어가
그토록 힘겹게 수 십 년의 세월을 선(禪)을 행하고 명상하고 요가하고
면벽수도하고 마침내 얻게된 깨달음!
●그에 비해 '하느님께 내맡김'으로 얻게된 깨달음은
질적으로 매우 높은 고차원의 것이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무아가 됨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가 된다." 라는 깨달음!★★
한마디로 "인간이 하느님(神)이 된다." 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깨달음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 하느님만이 남는 것이다.
하느님께 내맡긴 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그저 단순히 하느님(色)께 내맡기기(空)만 하면 된다(無我).
진리란 단순한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 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다, 복잡하면 진리가 아니다.
●하느님께 내맡기는 방법!
이 방법보다 더 나은 방법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
(...)
@옴니아.보조.기조실
< 하섭내 3-1
신비 19.06.28 07:44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어렵게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지만,♠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긴 우리는 아무런 어려움에도 처해 있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 집착한 나머지
제자리 걸음만을 계속하며 문제들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매순간 발생하는 사건들을 알아차리면서 또 그것을 잊어버리는 가운데
단지 그분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그분께 빈틈없이 응답하고자 깨어있습니다.
★하느님께 완전히 자신을 내맡긴 사람들,
★그들이 그렇게 현존하고 행위하는 모든것은 커다란 힘을 발휘합니다.★
그들의 삶은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입니다. >
< 지도사제 12.05.16 08:05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 드리면,
진리의 영이 찾아오십니다, 정말입니다.
"성령의 은사" 가 아니라
그 은사의 주인이신 "성령" 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찾아오신 성령께서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 사람은 그 이끄심에 이끌려 살게 됩니다.
따라서 내맡김은 "새로운 성령운동" 입니다. >
@옴니아.보조.기조실
[ ▣ 주일강론
신앙의해, 연중 제22주일(2013, 09, 01)
지도사제 13.08.30 21:44
우리들의 입에서 적어도 몇 번쯤은 오르내렸던 말 중에,
"에~말도 안 돼!"라는 말이 있다.
그 "말도 안 되는 말" 중에는 정말로 "말이 안 되는 말"도 있고,
정말로 "말이 되는 말"도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진리>는 말이 안 되어도, 또 말이 되어도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
●진리란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란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지식의 한도 내에서는 "말도 안 되는 말"이 "말이 되는 말"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말이 되는 말" 이 "말이 안 되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지식은 아니 <인간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구가 둥글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간 "말이 되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 말이 <진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진리에 근접한 지식인가에 따라
그 말의 진위가 가려질 수 있는 것이다.
진리에는 <인간의 욕심>이 뒤섞일 수 없다.
욕심이 섞이면 진리가 아니다, 그야말로 <거짓>이다! ]
@옴니아.보조.기조실
[ 지도사제 18.01.21 08:43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와
★그 본연의 위치★와 창조된 목적에로 돌아오게 하시는 부르심
창조된 목적 = 본연의 위치 = 질서 =
원칙 = 근본 원리 = 참된 이치 = 우주의 근원적 원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불변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근본 원리(원칙)가 있고 질서(차례)가 있습니다.
근본 원리에 따라 질서가 바로서는 자리가 ★본연의 위치★이며,
모든 사물이 그 본연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목적 입니다.
모든 것은 순서(順序)가 있습니다.
하느님 신앙에 있어서도 순서가 있습니다.
순서를 지키는 것이
질서가 바로서는 길이며,
질서를 바로 세우면 모든 것이 ★본연의 위치★로 돌아오며
그렇게 본연의 위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목적을 구현하는 일입니다.
< 신명 6 >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5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옴니아.보조.기조실
7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
(...)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본연의 위치, 질서를 벗어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목적을 잃어버린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하느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
아멘아멘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이 동영상에 올려진 많은 내용들에 공감하며
부분적인 진리일 뿐이지만 그 심오함에 동의합니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진리의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원래 진리와 비 진리를 섞어 놓는 것이 마귀와 사기꾼의 수법이니까요!)
열심히 잘 살아보려고 많이 노력하셨을 테지만
많은 부분 미숙하고 부족했던 저의 부모님,
그 부모님으로 인해 창조주 아버지께서 의도하셨던 바와 동떨어져
창조 질서와 멀어져 살아왔던 수많은 아픔의 시간들..
그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 그리고 저의 자녀!
인간의 원죄의 엄청난 집합인 이 업장, 카르마들을
한방에, 그리고 완전히 소멸하는 유일한 방법은
온 세상 모든 죄를 없애 녹여버리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옴니아.보조.기조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이신 예수님을 뒤따라
그분이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 세상에 내어 주신 길,
하느님께 모든것을 내맡겨드리고 살아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 뿐임을
이제는 확실히 압니다!
< ▣ 주일강론
연중 제20주일(2012,8,19)
지도사제 12.08.19 09:07
'事實'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眞實'이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眞理'가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사실과 진실과 진리는 '외로울 뿐'이다.
그러나, ★사실과 진실과 진리는 사실과 진실과 진리일 뿐,
전혀 불변하는 것★이다.
그 어떤 무엇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고
그것이 정말 '진짜'이고
그 어떤 무엇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거짓'이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참된 '거짓'일 뿐이다.
'진리'란 많은 사람들의 기준에 맞는다고 그것이 '진리'이고
그렇지 않다고 그것이 '거짓', 또는 '잘못'이 아닌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참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옴니아.보조.기조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단 오늘 복음의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뿐만이 아니라 더 나가
당신 實存 그 자체마저도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인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의 진리를
당신의 "죽음"으로 증명해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처럼 ★사실과 진실 그리고 진리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
아멘아멘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계심을,
거내영의 지도사제를 통하여 소개해 주신 뉴에이지 동영상을 통하여
더욱 깊이 깨닫고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불교의 심오한 교리도, 뉴에이지의 교리도
거내영의 참으로 단순한 진리를 넘어서지 못함에 탄복할 뿐입니다.
천연 진주 옆에 양식진주와 가짜 진주를 보여 주시며
둘의 확연한 차이를 알게 해 주시니
감별력을 높일 수 있어 더욱 감사드립니다.
@옴니아.보조.기조실
<지도사제 18.02.21. 12:35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의 의로움이
유사종교나 뉴 에이지 영성가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아멘아멘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참으로 율법에 충실했던 바리사이는 커녕,
유사종교나 뉴 에이지 영성가의 의로움도 능가하지 못했던
이 불충하고 무지하고 교만한 이를 거내영을 불러주시어
이토록 성장시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거내영의 모든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집채 만한 죄의식을 없애주신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인간만이 반성을 합니다. 죄의식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신의 자식이기 때문에 ★ <죄의식> ★이 일어나옵니다. ]
고해소 에서 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죄의식이
< 거내영 봉헌 >과 < 끊임없는 화살기도 >를 통해 어느 날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
저의 체험을 뒤돌아보니,
집채만한 저의 죄의식이 사라진 원리(?)는 분명
★ < 실상에 녹아들을 때 뿐 >★ 이라는 이 분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죄의식에 시달렸던 지난 시간들을 뒤짚어보면,
내가 느낀 괴로움은, 그 사건도 사건이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었던
제 영혼의 상태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그 사고에 대해 생각하고 괴로움을 느끼고 있을 때
동시에 제 영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져 있던 나(我)의 상태를
직감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제 마음은 언제나 불평 불만 미움 분노, 허탈함,,,등등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지금 뒤돌아보면 그 당시 저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 처럼 그렇게 내리막길( 내 뜻대로의 길) 을
내달리고 있었으니,ㅜㅜ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렇게 나를 부르셨을까 싶습니다.
그 고통이 나를 멈추게 해준 사랑이었고
★ 그 괴로움(죄의식)이 신의 자식이기에 느낄 수 있는 귀한 느낌이었습니다. ★
성체조배를 하며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하느님 안에 잠겨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평안함,
안식(죄의식을 못느끼는 상태) 이 분명히 있지만
그 상태를 지속하기도 힘들 뿐더러
그렇게 잠시잠깐 하느님 안에 머룰러 있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을 아니지요.
죄란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하는 것 > - 창,화살 제2부- 05
이라고 할 때에,
인간은 분명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하느님이 싫어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에,,
< ★ 죄는 본래 없는 거★니까.>라는 이 동영상의 말씀은
조심하여 들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창렬 주교님의 (2000년 부활) 메세지 에서와 같이
사탄은 분명 <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시는 일을 사사건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하고 있 >음을,
저 또한 선명히 체험하고 있으니까요.
{▣ 보조교사방
Re:마귀에 대한 글들 (김창렬주교님 메시지)
지도사제 2017.06.01. 16:22
< 마귀를 얘기하지 않는다면,
죄와 죽음에 대하여 얘기할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고,
따라서 구원이나 구세주에 대한 가르침도
의미를 상실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하느님이시며 100% 인간이셨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은,
내 뜻을 십자가에 못 박 듯 온전히 아버지께 내맡겨
내 뜻(에고)의 죽음과 하느님 뜻의 맞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과 하나되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 아닐런지요.
< ★ 죄는 본래 없는 거★니까.> 라는 이 메세지는
하느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분명 하느님과 하나되지 못한 상태의 인간에게는 얼토당토 않은 말이지요.
죄인이었던 제 안에서도
하느님의 씨는 늘 있었지요.
그것은 저를 창조하신 분이
바로 나의 근원이요 생명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생명)으로 인해 살아 숨쉬는 인간이
어떤 죄를 짓건 간에
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는 것임은
자명한 진실이요 진리이겠지요.
그러나 참으로 오묘하신 하느님의 신비로
인간에게는 하느님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자유의지)가 주어졌기에,
얼만든지 죄를 지을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나는 원래 하나였지만
하나 이면서 둘인 채로 끝없이 합일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갈 수도 있겠지요.ㅜ
그러나 그렇게 하느님 뜻과 분리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마저도
어찌 보면 하느님의 허락하심으로 인해 존재하고 있으니,
그마저도 하느님의 뜻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완전한신 하느님의 뜻으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 하섭내 제 2장 04
왜 하느님은 이슬람교도들과 이단자들이 커나가는 것을 보고 그대로 방치하셨을까?
그들은 ★ 하느님의 무한한 완전성( 完全性 ) ★을 선포합니다 >
< 신이 만든 실제의 세계는 이미 완전합니다.>-
이 부분은
하늘에서는 이미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 신이 만든 ★ 실재의 인간 ★ 은 이미 ★ 완전 ★ 합니다. >
내 안에 시뻘겋게 살아계신 아버지는
분명 완전하신 하느님이시지요.
그러니 내가 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겨져 ★ 내가 없어진 상태 ★
★ 無我 ★ 의 상태는 분명
★ < 완전하다 > ★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없이진 상태를 어찌 이룰 수 있는지,,,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방법 밖에는 없음을 깨닫습니다.
내 (뜻)의 죽음 없이는 육적인 인간을 벗어날 수 없기에
영적인 인간으로서의 부활이 있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부활의 삶을 하려면,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내맡겨 내 뜻의 죽음을 맛보아야 하겠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만이
강물인 우리가 바닷물이 되듯,
완전하신 하느님께로 귀의 (완전한 회개= 거룩한 내맡김) 할 때 만이
나 또한 완전한 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창조주가 누구신지에 대한 인식없이
나의 침 주인이신 분(하느님)께
완전한 귀의 없이는 누구도 내가 완전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자신이 신의 자식이라는 진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모두 참 구원(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는 하나가 될 수 있는 거룩한 내맡김의 삶만이
참 구원의 길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모든 것의 모든 것인 아버지를 품에 안고 나니
당신과 하나되어,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당신과 하나로 보입니다.
거내영 봉헌을 통해 아버지 소유가 되어 살아가니,
저의 죄는 사라진 채,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당신과 하나되는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오물 묻은 그대로 아버지께 내맡겨져
저의 죄가 당신의 사랑의 바다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지요.
당신 안에서는 선,악도
행, 불행도 둘이 아님을 알지만,
나약하고 무지한 인간들 세상에서는 분명히 존재하는 악이
단지 선하신 당신 뜻대로 다스려져야 함을 깨닫습니다.
오롯이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께 집중 몰입하오니
저의 모든 것을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사용하시어
거룩하시고 선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주말 특강을 통하여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맡긴 영혼이 된지 만 7년이 넘어가는 동안
아버지기도와 무소유 고백으로 아버지와 더 더 하나가 되어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말 특강 동영상에서 강연자의 말씀에서 문제가 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은 없었고
내맡긴 영혼이 되면서부터 제가 믿음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에 대한
단계들이 그대로 적혀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관점에서 설명한 부분이 많아서
아버지와 하나된 삶을 살지 않으면 꼬이는 부분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거는
현상 세계가 실상 세계로 확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기도를 해도, 이것이 바로 기도라고 하는 건데 이 기도를 해도
기도가 현상 세계에 기도한 내용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계세요.
첫 번째. 광선이 희미하다는 거예요.
빛이 없는 데서는 카메라가 암만 좋아도 사진이 안 찍힙니다. 그죠?
깜깜한 데서 데서는 안 찍혀요.
광선이 희미하거나,
두 번째. 핀트가 안 맞으면 초점이 안 맞으면 어떻게 돼요?
사진 찍어놔도 흐릿하죠.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광선, 광선이 희미하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광선이 희미하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
< 예수님은 항상 "네가 좋아질 것을 믿느냐, 믿느냐, 믿느냐?"
세 번을 물으셨거든요, 항상 병자를 고치실 때도. >
내맡김이 온전히 자리잡기 전에는
내맡겼으면서도 뭔가 불안함과 걱정이 스며드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안 일어나게 하려고 애쓴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약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믿음'은
'아버지께서 세상적으로 좋게, 아니면 내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주실 것이다.'라는 기대가 아닌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버지가 이끄시는대로' 충분히 받아들이고 따라가겠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평안과 자유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마음에서는
걱정과 두려움에서 떨게 될 이유와 마음은 사라지고
절대지존의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될 순간만 존재하지요.
@무사.보조.기조실
<" 죄가 사라지는 것은 오직 우리가 절대 무죄의,
나의 실상에 녹아들었을 때뿐입니다" 그랬습니다.>
< " 암흑이 사라지는 것은
오직 빛에 비추어지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그랬어요.>
< 죄라고 하는 것은 본래 완전한 세계를
내 마음에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가로막아버리는 것, 덮어버리는 것,
그래서 이쪽이 가로막혀서 덮여진 상태를 말하는 것, >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눈을 뜬다고 하는 것,
이쪽을 향해서 그 세계에 대한 훌륭한 세계에 대한
이쪽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그걸 내려놓고
이것은 신 앞에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 봤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맡겨버리고*
표현시켜 버리고 정 안 되면 적어서라도 표현시켜 버리고..>
< 처음엔 실감이 안 나지, 왜냐?
아직도 이런 믿음이 안 자라나 있고
초점을 맞추는 것도 아직은 능숙하지가 않거든요.
그게 이제 아까 실상관이라든지
*기도를 통해서 믿음을 키우는 거*라 그랬잖아요. >
아멘, 아멘!
동영상에서도 내맡김과 기도의 중요성을 얘기하시네요.
@무사.보조.기조실
'거내영 봉헌'과 '무소유 고백'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바뀌어지지 않고
끊임없는 아버지기도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깨달음의 광선을 받을 때
저절로 죄가 물러가게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체험합니다.
마침,
오늘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1서 6장에서도 이와 관련된 말씀이 나왔네요.
< 17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20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
< 죄는 오히려 감추는 것보다도 드러내는 쪽이 좋다 그랬어요.
그대로 신 앞에 지난날 이렇게 심판했던 것들,
일체 어두웠던 것들은 다 적어서 표현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드러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
죄는 존재하고, 죄라고 명명짓기도 하지만
아버지 안에서는 '죄'가 남아있지 않게 됨을 알아갑니다.
죄는 끝이 아닌 선을 향하는 시작이 되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으면 죄로 끝나버릴 모든 것이
아버지와 함께 하면 선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입니다.
@무사.보조.기조실
이 세상이 고정되지 않고 변하는 시공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진리를 펼쳐내기 위한 가장 적합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고정되지 않았기에
저와 같은 죄인도 내맡긴 영혼이 되어
아버지의 흰 옷을 입을 수 있는 영혼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죄를 단죄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어느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내맡긴 영혼이 되어 아버지의 뜻을 알아가고
부족함 속에서도 아버지의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게 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시니
무엇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매순간 부족한 저를 이끌어주시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아버지를 죽기까지 사랑하고 더 더 아버지와 하나가 되렵니다.
<거내영>과 <내맡긴 영혼>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저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죄에 대한 새로운 공부를 통해
내맡김이야말로 완전한 기도요 죄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더 뚜렷이 알게 하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선별해 주신 뉴에이지 영상 잘 들었습니다.
<불행의 근원인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주제로
<기도는 현상 세계가 실상 세계로 확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라는
생명의 실상을 수련하는 새로운 신영성에 대해 또 알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드리며 사랑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원인이 됐던 것이었구나!>라니 불교인가 했다가
성경말씀과 예수님을 들먹이며
<믿음화 된다고 하는 것은 초점을 맞추는거다.>라고 하시니
믿습니다! 믿습니다! 했던 지난 종교인의 저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실상세계에 이미 좋은 것이 넘치게 이미, 이미 주어져 있다.
내가 뭘 지금 해서 뭘 만드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게 기도의 기쁨이 돼야 돼요.
우리가 할 일은 기뻐할 일이에요.
내가 뭘 어줍지 않게 기도를 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계가 얼마나 훌륭한 세계인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거예요.
『생명의 실상』을 끊임없이 자꾸 보시는 게 좋아요.>
어찌 보면 죄책감까지 모두 주인이신 아버지께 맡겨드리고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단상 하며 지금 여기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아버지의 뜻이라 믿고 받아들이며
그 뜻의 영광을 위해 이끌려 드리는 삶을 잘 표현했다고 느낄 수 있으나
분명 내 힘으로 노력하여 원래 있던 행복을 믿고 바라는 것의
탐진치가 몰래 숨어 있는 것도 같으며
<“신은 사랑이시며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다는 것
벌써 결산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결산 보고서를 앞에 놓고 기도를 해본들
그 결산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신을 도깨비방망이로 여기는
전형적 믿습니다! 의 설교 같습니다.
<죄는 본래 없는 거예요.
이게 이 광명사상에서 해석하시는 인류 무죄 선언입니다.
그 책을 이제 구스모토 가미노라는 선생이 편찬을 맡으셔서
그 책을 출판하는 날, 그 집의 가업이 끊어졌다고 그랬거든요.
대대로 자손이 유산이 되고 낙태가 되고
뭐 자손이 태어나질 않아요 그집은.
윗대로 계속 그랬어요.
근데 이 구스모토 가미노 선생이 『인류 무죄 선언』이라는
이 책을 완성하시고 출판돼서 세상에 책이 이렇게 태어나온 날
부인이 출산을 하셨거든요.>
이 말씀은 초반에 나온 내용인 아래 말씀과 모순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상님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우등생이냐 하면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단 말이에요.
그런 분들 하나하나 다 찾아내서
그 문제를 다 하나하나 해결하려고 들기 시작하면은
끝도 없는 일이 되게 됩니다.
그럴 때 저희들은 인과(因果)로 추락한다는 얘기를 씁니다.
인연법을 너무 따지기 시작하면 인과(因果)로 추락을 해 버립니다.
그러면 답답해집니다.
이건 또 무슨 문제일까? 또 뭘 해야 되나? 또 뭘 해야 되나?
이런 수행에 임할 때 즐거운 심정이 아니라
답답한 심정이 앞서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결혼도 출산도 안 하는 요즘 시대에는
또 무슨 고통과 불행을 들먹이며
마인드콘트롤 같은 의식을 행해야 할지 더 막막한 느낌입니다.
40권을 10번은 봐야 알 것 같다고 하시니
사실 이 내용만으로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지
부족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에 엔도 요시오씨의
<감사는 사형수의 쇠사슬도 끊었다!>는 내용이 감명 있긴 했습니다.
역시 내맡김도 체험이고 신앙도 체험이고,
모든 것이 체험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도 힘도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이 되지 않으면
현상계에서 우리끼리 상 주고받는 자가당착으로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영성은 이제 다 쓰레기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무지렁이를 끊임없이 공부시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려는 깊으신 사랑을 받들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을 내맡기며 죽도록 아버지만을 사랑하는 기도 외에는
한계인 인간이 설명할 수 있는 고통과 불행에 대한 이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거내영과 모든 사제를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시며
부족한 저를 통하여도 아버지만이 홀로 기뻐하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이 곳 무형의 성전으로 달려와서 영적 글들을 읽게 이끌어 주신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불행의 근원인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이란 뉴에이지 동영상을 보며 마음에 와 닿는 구절만 옮겨봅니다.
보조교사님들의 댓글을 읽어보며 저와는 차원이 다른 분들이라는 걸 느끼며 배웁니다.
<다이아몬드를 지닌 채로도 자기가 없다고 생각하면
거지 행색을 한다 이 말이에요.>
아버지가 주신 다이아몬드를 보지 못하고 허상인 내 마음하나 어찌하지 못하고 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기지 못하고,
예전의 습성인 동냥질하려고 기웃거리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렇게 살수는 없다! 느끼며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자기 믿음만큼으로
상대가 물론 나는 그걸 고치려고 한 말이지만은
나쁘다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나쁘다라고 보는 모습 그대로 자꾸 나쁘게 드러나요.>
<이쪽을 보고 눈을 뜨고
"이미 훌륭한 남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저의 십자가라고 느껴졌던 저의 옆지기에게 제가 어찌하지 못하고 이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미 훌륭한 남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로지
있는 훌륭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점점 더 키우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그리고 기뻐하는 생활로 나아가시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라면서>
거내영의 휼륭한 가르침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점점 더키우고
아버지께 촛점을 맞춰 기뻐하는 생활로 나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을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만이 저의 삶을 채워 주실수 있는 분임을 믿습니다.
저의 이런 저런 에고들에 휩쓸려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께 더욱더 초집중하여 거내영의 선배들을 따라가겠습니다.
거내영이 주는 기쁨을 맛 본 저이기에
여기서 헤메고 멈출수는 없습니다.
저의 모든것을 아버지께 맡기오니 이끌어주소서!
부족한 저를 통해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언제나 아버지께 가는 바른 길을 인도하여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 죄는 오히려 감추는 것보다도 드러내는 쪽이 좋다 그랬어요.
신 앞에 드러내는 거예요.>
사랑하는 신부님, 녹취해 주신 보조교사님들, 감사히 잘 시청하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불행의 근원인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저는 미사 중에 드리는 참회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제게는 가슴을 3번 치며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제 탓이로소이다’라고 드리는 이 기도가
못마땅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뭐가 다 제 탓이라는 건지 수긍하기 어렵기도 하고 또 반복될 것이 뻔한 마음의 죄를
입으로만 고백한다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내영을 통하여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함으로 파생되는 많은 것들이 잘못임을 알게 되니
진심으로 참회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1452.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통회를 ‘완전한’ 통회(사랑의 통회)라 한다.
이 통회는 소죄를 용서해 주며, 가능한 한 속히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굳은 결심이 포함된 경우 죽을죄도 용서받게 해 준다. –가톨릭교회교리서 >
하느님아버지와의 관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은 강의를 들으며
모든 것 위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기초로 놓아주시고 다져주신 아버지의 은총에 또다시 감사드렸습니다.
<계속 올라가다 보면은 조상님 세계까지도 이어지죠.
각각의 아버지에는 또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잖아요.
이 숫자만 10대만 모아도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옵니다.
수만이 될지 억 단위였던 것 같은지 지금 잘 기억이 안 나요.>
사랑하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저의 참 아버지이심을 깨닫고 나니 언제부터인가 육의 모든 관계들이
재 창조됨을 느낍니다.
세상의 쌓아져 있는 인간의 족보 아래 깔려있는 제가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 온 영이 곧 저이며
그 부서지지도 쪼개지지도 않는 진리의 존재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다 보니
죄라는 단어는 낯선 단어가 되었습니다.
@깨끗한마음.보조.회장단
<“현상 세계에 실상 세계의 그림자를 비추기 위해 렌즈의 방향 전환을 해서”
핀트, 초점을 맞춘다고 그러죠?
“핀트를 맞춘다고 하는 것”
이것이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어느새 제 시점은 저를 떠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저를 더 많이 기억하게 되어갑니다.
이 말씀도 제게는 아버지만 바라보는 철부지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들립니다.
어느 강의를 들어도 모두 거룩한 내맡김 영성을 통해 배운 것들을 다지고 반복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아버지, 저의 모든 것을 맡기오니 아버지의 거룩신 뜻대로 이끌어주소서.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벌거벗은지금
1부 이미 받은 선물 - 두려움과 오락에 굴복할 때
마카리오스.보조.회장단 23.06.12
완벽함이나 통제, 또는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추구하는 것은 참된 영성이 아니다.
참된 영성은 지금 여기에서 신과 하나 됨 unity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받았음을 보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발견이다!
내가 그것을 발견한 게 아니다.
그것이 나를 발견한 것이다.
꿈에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본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내지른 외침(Eureka!)이
바로 그 것이었다.창세 28,16-17
@깨끗한마음.보조.회장단
우리는 약속받지 못한 곳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고,
아무도 우리에게 무질서와 불완전함 속에서 희망할 수 있게 해줄 소프트웨어를 제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약한 것은, 우리가 희망과 하나 됨이 같은 것이고.
참된 희망은 정신적 확신과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강의를 들으며 강의 시작부터 죄는 본래 없는 거라고 말하는 부분이
처음 들어보는 말이면서 우리의 교리와 맞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었고
강의의 전체적인 내용에서는 죄가 본래 없다고 말하는 점과 연결지어
크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고
이말 저말 끌어다가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거내영에 와서 아버지께 나의 모든 것을 내맡김으로
나의 부족함 마저도 아버지의 것이 되어 살고
하느님은 당신께 내맡긴 영혼들을 “죄를 통해서도”
나날이 조금씩조금씩 당신 가까이로 이끌어 주신다는
지도사제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나는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명하고
현재에 충실하도록 더더 내맡겨 드리고
내맡김의 삶을 유지시켜 주는 화살기도를 더 열심히 부르면서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거내영을 알게 하시고 이 삶을 살도록 은총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가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하렵니다.
거내영과 모든 내맡긴 영혼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