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양치기들이 광야에서 길을 찾기 위해 만들었을까. 바닷사람들이 망망한 바다 위에서 뱃길을 찾기 위해 지어냈을까. 아니면 농사가 중요했던 고대에 별자리를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알아내려고 별자리를 만들게 됐을까. 아마도 복잡한 것을 단순한 형상으로 이해하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 무질서해 보이는 하늘의 별들이 어떤 형태를 띤다고 생각했던 것이 별자리일 것이다.
사람이라면 옛사람이건 오늘사람이건, 서양인이건 동양인이건 모두 별자리를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저 하늘의 별자리는 원래 임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민족마다 나라마다 자기 나름의 별자리가 있다. 시베리아의 축치족은 북두칠성을 여우를 쫓는 사냥개와 사냥꾼으로 보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북두칠성을 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사람들도 북두칠성을 곰으로 보았다. 하지만 같은 곰이라도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그리스인들이 만났던 곰의 모습은 서로 달랐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본 곰은 꼬리가 짧은 곰이었을 것이고, 그리스인들이 보았던 곰은 꼬리가 기다란 곰이었을 테니까 별자리도 달라질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겨레에게도 특유한 별자리가 있었을까. 아쉽지만 우리의 독자적인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실망하진 말자. 1천5백년 전에 이 땅에 들어와 우리의 손길로 다듬어져온 별자리와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오롯하게 우리 것이니깐 당연히 그 별자리는 우리 것이다. 학문적으로 따져봐도 중국별자리와 우리별자리는 다른 면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편가름은 별로 흥미롭지 못하고, 더구나 우리 나름의 것에만 비중을 두는 일은 지나치게 편협한 생각이다. 여기서는 다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우리에게 물려진 별자리 이야기를 한번 즐겨보자고 청하려 한다.
고구려고분 천장에 쓰인 ‘북두칠청’ <img.src = http://www.dongascience.com/db_contents/report_img/0101/0101018-1.jpg >
북두칠성은 우리민족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옛날 청동기시대 고인돌 뚜껑에도, 고구려 사람들의 무덤 속에도 북두칠성은 빠짐없이 그려졌고, 고려시대의 무덤에도 어김없이 북두칠성이 나온다. 또한 시골에 가면 마을마다 칠성당이 있으니 북두칠성을 모신 사당이며,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칠성각은 우리민족의 토속신앙이었던 칠성신앙이 불교라는 외래종교 속에 녹아든 자취요, 죽어서 땅에 묻힐 때도 우리는 칠성판을 지고 가는 것이다.
이렇듯 장구한 세월을 우리민족과 함께 한 북두칠성이 원래부터 북두칠성이라는 중국말(한자)로 불렸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우리 동방문명은 고대의 문헌기록이 빈약해 자세히 검토해보긴 힘들다. 그나마 한가지 알쏭달쏭한 힌트가 있다면, 고구려고분 중에서 장천 1호분의 천장에 그려져 있는 두개의 북두칠성 사이에 희미한 붉은 물감으로 ‘북두칠청’(北斗七靑)이라고 적어놓은 것이다. 북한학자들은 이것을 이두식 표기(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신라에서 발달한 표기법)가 아닌지 의심해보지만, ‘별 성’(星 )이 아니라 ‘푸를 청’(靑)이라고 적어둔 까닭이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靑이란 것이 맑은 정기를 나타내기 때문에 북두칠성의 맑은 기운을 나타낸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정답을 알 수는 없을 것 같다. 판독의 오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청과 성이 소리가 비슷하니 장인이 먹글씨를 쓸 때 착각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북두칠성을 이루는 일곱 별은 각각 탐랑성, 거문성, 녹존성, 문곡성, 염정성, 무곡성, 파군성으로 사람의 목숨을 쥐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도가의 개념이다. 도교의 경전인 도장의 내용을 보면, 사람의 수명을 늘려서 영생을 추구하거나 도를 깨닫기 위한 주문들과 연단술이 많이 나오는데, 어김없이 북두칠성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탐욕스런 늑대의 별
맨먼저 우리의 눈길을 끄는 별이름은 탐랑성, 문곡성이다. 몇년 전 ‘판관 포청천’이란 대만 사극이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적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포청천은 원래 하늘의 문곡성이었다고 한다. 못된 사람의 죄를 심판하고 벌하는 그의 이마에는 반달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천문을 상징한다. 문곡성은 하늘의 권력을 거머쥔 별로 살기를 띤 나쁜 별들의 정기를 모아 땅으로 내려보내는 일을 맡는다. 다시 말해 심판을 내리는 별이니 판관 포청천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겠다. 정의의 사자 포청천에 대적하는 악당은 왕위를 빼앗으려고 항상 기회를 엿보는 양양왕인데, 이 사람은 바로 하늘의 탐랑성이 지상에 내려온 것이라 한다. 한밤에 눈을 번득이면서 먹이감을 노리는 늑대를 상상해보면, 탐랑성이란 이름과 양양왕은 참 어울린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탐랑성을 직역하자면 ‘탐욕스런 늑대의 별’이란 뜻이니 말이다.
또하나 파군성이 눈에 띄는데, 삼국지연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제갈공명이 죽을 때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유비가 죽고 그의 아들이 임금이 됐으나 나이가 어려서 나라를 다스리기 힘들었다. 이에 유비는 죽으면서 제갈공명에게 여의치 않으면 공명이 스스로 왕이 돼도 좋다고 했으나, 제갈공명은 충의의 인물이라 이를 마다한 채 그 유명한 출사표를 던지고 위나라와의 결전에 나서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진중에서 제갈공명은 천문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파군성에 객성이 나타나서 빛살을 점차 발하매, 원래 파군성은 제빛을 잃고 있지 않던가. 제갈공명은 이를 보고 자기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다. 제갈공명은 어떻게 그와 같은 결론을 내렸을까.
원래 북두칠성의 일곱 별들은 모두 인간 세상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과 하나씩 연결돼 있다. 탐랑성은 하늘, 거문성은 땅, 녹존성은 사람, 문곡성은 시간, 염정성은 공간, 무곡성은 오곡과 음율(음악과 법률), 그리고 파군성은 군대와 별을 나타낸다. 따라서 파군성은 군대를 나타내는 별이기 때문에 당시 촉나라 군대의 사령관이던 제갈공명은 자기 별이 희미해지고 불운을 예고하는 객성이 나타나 빛살을 발하자, 자신에게 불운이 닥칠 것을 예고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더군다나 별이름도 ‘군대를 깨뜨린다’는 파군(破軍)이니 그 징조는 더욱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