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주일(5.18광주민중항쟁기념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5월 19일(주일)
신명기 10:12-22
“빛은 틈 사이로 들어온다!”
5.18민주화운동이 마흔네 돌을 맞았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광주항쟁, 광주 민중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광주 민중봉기, 광주 시민 항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김영삼 문민정부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계승을 자처하고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광주 시민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저항이요 투쟁입니다. 4.19혁명이 학생이 중심이었다면 5.18민주화운동은 시민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를 수호한 위대한 혁명이지요.
그런데 안타까운 건 지금도 여전히 5.18때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극우 정치세력이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거나 폄훼(貶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이 진보와 보수를 떠나 그 가치와 의의를 공유, 인정하면서 공동선(共同善)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나서서 5.18 유가족의 아픔과 상처를 공감하고 어루만져 줄 때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광주 민주시민은 총과 곤봉과 군홧발에 쓰러지면서까지 그토록 저항하며 투쟁했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들불처럼 일어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조선 관군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면서도 무모한 전투를 감행했던 130년 전 동학농민군의 의연한 절개(節槪)가 80년 5월 광주 민주시민의 마음에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게 사람답게 살고픈 의지였지요. 곧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각인한 거예요.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란 깨달음이지요. 이게 바로 국민이 지켜내는 공동선, 곧 민주주의입니다.
그렇습니다. 5.18 광주 민주시민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았던 거예요. 민주주의는 국가가 만드는 게 아니고 바로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지키는 거지요.
하여 민주주의는 세 가지 기본 정신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인간 존엄성’입니다. 둘째, 어떤 권력으로도 제한할 수 없는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할 가치인 ‘자유’입니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평등’이 그것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은 광주 민주시민이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를 저항과 투쟁으로 규정했다면 이제는 완전한 5.18 진상규명과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으로 민주주의 완성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한국 사회는 인권, 자유, 평등이 살아 숨 쉬는 공동선을 이룰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저는 5.18민주화운동, 5.18 광주 민중항쟁은 ‘하나님 나라’를 실천한 위대한 혁명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할 때 지금 이곳에 실현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우리말로 대동사회(大同社會), 대동세상(大同世上)입니다. 모두 하나 되는 세상이란 뜻입니다.
5.18때 물밀듯이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치료한 병원의 의사들과 간호사들, 피가 부족하다고 줄을 이은 헌혈행렬,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주먹밥을 나누는 부녀자들, 도청을 사수하겠다던 시민군들 등등 당시 광주는 대동 세상을 보여준 거예요.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를 광주에서 실현한 거지요.
광주 민주시민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거예요. 사람이라면 총에 맞아 쓰러지면 나 살겠다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총을 맞더라도 일으켜주는 거지요. 피가 부족하다고 하니 너도나도 헌혈하겠다고 줄을 서는 사람들, 특히 그중에는 5.18 숨은 주역인 ‘황금동 여성들’이 있었지요. 그들은 성매매 여성들이에요. 그들은 처음엔 헌혈을 거부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헌혈했지요. 그들은 헌혈뿐만 아니라 집회에 참여하여 돌멩이와 맥주병을 무기로 삼아 싸웠고, 물과 주먹밥을 시민군들에게 제공하기도 하고 공수부대에 쫓기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숨겨주기도 했지요.-(“인자, 진, 아방궁... 5.18 숨은 주역 ‘황금동 여성들’을 찾습니다”, [5.18 40주년 특집]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이제 ‘전설’에서 ‘역사’로 끌어올리자, OhmyNews, 박정훈, 20. 05, 15)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게 무엇일까요?
넘어진 사람 보면 일으켜주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 보면 먹을 것을 함께 나누어 먹는 거예요. 헐벗은 사람 보면 내 옷을 벗어주는 거예요. 비 맞는 사람 보면 함께 비를 맞아주는 거예요. 우는 사람 보면 같이 울어주는 거예요.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 보면 함께 있어 주는 거예요. 불의를 보면 침묵하지 않고 저항하는 거예요. 욕하고 비방하는 사람 보면 용기 내어 타이르는 거예요. 힘들어하는 사람 보면 얼마나 힘들었냐 하고 공감해 주는 거예요. 사람답게 사는 건 지극히 단순해요. 돈도 안 들고 힘 드는 일도 아닌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거예요. 자식이라면 부모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거지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답게, 자식답게,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아마도 이기심과 욕심, 그리고 탐욕이 도사리고 있어서 끊임없이 우리를 옭아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게다가 하나님의 자녀란 정체성마저 빼앗는 사회통념, 편견, 집단 이기주의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인간의 탐욕과 숱한 걸림돌이 산재해 있는 시대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지를 안내하는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신명기 본문입니다.
신명기는 흔히 ‘두 번째 율법’을 뜻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이 헌법이라면 신명기 율법은 이를테면 헌법 법조문에 해당한다고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법 규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여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직접 생활에 적용하고 제시한 책이에요.
신명기 전체 맥락에서 보면, 신명기 삶의 자리는 모압 땅입니다. 곧 모세가 두 번째 율법을 선포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과 제2의 언약을 체결하는 겁니다. 그리고 신명기 전체는 모세의 설교를 빌어서 두 번째 율법을 선포하고 있어요. 두 번째 율법이 신명기 12장 1절부터 26장 15절까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명기 전체의 핵심은 율법 선포입니다.
또한 신명기의 역사적 배경은 열왕기 하 22~23장의 기록에 따르면 요시야 왕(주전 639~609)이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데 있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상숭배의 관행을 깨끗하게 제거하지요. 그리고 지방 성소를 없애버리고 예배의 중앙화 작업, 곧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게 합니다.
하여 학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이 신명기 법전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신명기 삶의 자리와 역사적 배경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게 신경 쓸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신명기 저자의 의도입니다. 그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따라 살아야만 생명을 얻게 된다는 거예요.
신명기 전체의 핵심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면 번영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고, 불충실하면 불행과 부여받은 땅을 잃고 만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따라 먼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서로 위해 주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 골고루 나누는 새로운 사회를 세워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명기 전체는 이스라엘이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네 말로 표현하면 ‘대동세상’을 이루는 거지요.-(『해설판 공동번역 성서』, 국제가톨릭성서공회 편찬, 일과놀이, P.264)
그러면 오늘 본문은 모세가 율법 선포를 준비하는데 신명기 4장 44절부터 11장 32절까지 긴 호흡으로 설교식 내용을 펼쳐가는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선포하기 전에 언약의 조건을 말합니다. 그것은 언약의 조건들을 따를 때만 생명, 곧 땅을 소유한다는 거예요.
율법 선포 준비 내용을 보면 쉐마(שֵׁמַע), “들으라”(신 6:4, 9:1, 20:30)는 명령어가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쉐마는 신명기의 핵심 단어 중 하나입니다. 쉐마는 듣다, 경청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이해하다, 내면화하다, 반응하다 등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순종하다”(to obey)를 뜻하는 동사에 가까운 성서 히브리어입니다.
쉐마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볼 수 없다는 측면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오직 들을 수만 있습니다. 쉐마가 맨 앞 구절에서 “들으라!” 강조한 까닭은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직 들을 수 있을 뿐이지요(신 4:12).
하나님은 우리가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듣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경청(敬聽), 곧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행위입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보는 것을 말하면서도 실제로 듣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께서 불길 속에서 당신들에게 말씀하셨으므로, 당신들은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었을 뿐,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오직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신 4:12)-(『오경의 평화 강론』, 랍비 조너선 색스 지음/김대옥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324-325)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일상에서 우리에게 수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하나님이 내게로 가까이 오십니다. 경청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개방하는 거예요. 그래야 구원이 내게로 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라는 겁니다. 앞서 십계명(신 5:7-21)을 받아 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생명을 얻고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의 근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아!”(12절)하고 부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아!” 하고 부르는 것은 경청하라는 거예요. 귀를 기울여 들으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물은 뒤에 자상하게도 그 요구를 설명합니다. 그 요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며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선 그분의 모든 길을 밟는 거지요. 말하자면 그분의 모든 길을 따르는 거예요. 또한 그분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을 섬기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냥 말이 아닌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거예요. 여기서 마음으로 옮긴 히브리어 레바브(לֵבָב)는 ‘심장’이란 뜻이 있어요. 심장은 제2의 뇌라고 합니다. 심장은 혈액순환 펌프 기능뿐만 아니라 대뇌와 관계없이 사물을 학습하고 기억하며 느끼고 감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나 중심이란 추상적인 의미보다는 심장처럼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심장이 두근두근하면 뭔가 느끼고 반응하는 거잖아요. 심장이 느끼고 반응하듯 하나님을 섬기는 거지요. 또한 뜻(네피쉬/נֶפֶשׁ)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목숨 다하여 섬기라는 거지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누리는 행복의 조건은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데 있습니다(13절).
그러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그 율법을 인정해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생명과 땅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생명을 얻고 땅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며 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생활방식입니다. 또한 이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새로운 시도랄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 하나님의 모든 길로 가는 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하나님을 심장처럼 반응하고 기억하는 일, 그리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하늘과 땅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늘과 땅 모든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명기 본문은 온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근거를 말하는 거예요.
여기서 신명기 저자의 의도는 모든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또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게 마땅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특히 14절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근거를 찾는 제2 이사야 예언자의 열정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포로를 불러 그들을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사 42:5~6). 제2 이사야 예언자 활동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인 거예요. 나라가 망하고 민족도 흩어진 거예요. 이스라엘이란 존재조차 사라진 거예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다른 모든 민족을 제쳐 놓고 보잘것없는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건 상당히 역설적인 느낌을 줍니다.-(『국제성서주석 신명기』, G. 폰 라트 지음/번역실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P.85)
그러니 더더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심장처럼 섬기라는 거예요. 이미 망해버린 나라, 포로와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해 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다른 모든 민족을 제쳐 놓고 선택하셨다는 거예요. 아~ 얼마나 놀라운 역설입니까?
여기서 신명기 저자는 두 번째 율법, 곧 신명기 법전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지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13절)를 잘 지켜야만 하나님이 그들을 잘 되게(토브/טוב)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철저한 신뢰와 성실함이 바탕이 되어야 하겠지요.
사실, 16절에 ‘할례’(물/מול)는 남자의 성기 포피를 잘라내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할례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자기 정체성의 중요 기준이 되었지요. 말하자면 할례는 하나님 백성이란 외형적 징표와 같은 거예요. 또한 이것은 성별 구별과 정결 행위를 뜻하기도 해요.
그런데 육체의 할례는 특별한 마음가짐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를테면 마음(레바브/לֵבָב), 곧 구체적으로 반응하고 느끼는 심장에 할례를 하라는 거예요.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거지요.
그리고 다시는 고집을 부리지 말라는 게 그런 뜻이에요. 겉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지 말고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소외된 자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19절에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나그네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여 모세는 늘 반응하고 느끼는 심장처럼 하나님을 섬기라고 강조합니다. 심장에 할례를 한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보지 않으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세우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는”(신 10:17~18) 분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관인 동시에 약자들의 변호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듯 이스라엘도 이집트의 나그네였던 것을 기억하고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거지요(19절).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치유하듯 억울하고 불행한 사람의 마음이 되어보면 가엾고 불쌍한 마음, 곧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심장에 할례는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이에요.
20절에서 모세는 다시 한번 하나님을 섬기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명령하면서 다짐까지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어서 일상에서 곧바로 행동과 삶, 곧 생활로 살아내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은 하나님이 제2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약속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역사의 역설입니다. 망해버린 나라와 흩어진 백성, 여기에는 절망과 좌절뿐이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불러 세워 그들이 이방의 빛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한 거예요.
80년 5월 하얀 찔레꽃이 온 들녘을 감쌀 때, 빨간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하늘을 수놓을 때 그날 금남로는 진홍빛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무자비한 계엄군의 강제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광주 시민과 전남 도민은 저항과 투쟁으로 민주화의 빛이 되었지요.
캐나다의 가수인 레너드 코엔의 “송가”(anthem)에 보면 이런 노랫말이 나옵니다.
“소리 낼 수 있는 종들은 모두 소리 나게 하라 / 완벽한 것은 없다 / 어디에든 틈은 있기 마련 / 빛은 그곳으로 들어온다”-(레너드 코헨(Leonard Cohen) - 송가(Anthem) : Naver Blog / https://blog.naver.com › chanwoolee)
그렇습니다. 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은 신군부 계엄군에 의해 유혈진압이 되었습니다. 그사이 수많은 사람이 총 맞아 죽었고 부상당 했지요. 그런 절망과 좌절 틈 사이로 결국 광주 민중항쟁은 민주화의 빛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여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섬기라!” 하는 명령은 나라가 망하고 없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면서 예배 공동체를 이루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가치인 거지요.
세상에는 완벽이란 건 없습니다. 하지만 항상 어디든 틈은 있기 마련입니다. 찬란한 빛은 항상 그곳을 비집고 들어오지요. 비록 나라가 망했지만, 절망과 좌절 틈 사이로 이스라엘이 하나인 예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율법, 곧 이스라엘의 기본 가치인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었습니다.
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도 역시 신군부의 유혈진압이란 절망과 좌절 틈 사이로 한국에 민주화의 빛이 되었던 거지요. 광주 민주화의 빛이 계속 이어지려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구체적인 행동과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비 맞는 사람 보면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입니다. 돈 안 들고 가장 하기 쉬운 실천 방법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보면 옆에 같이 넘어지는 거예요. 이게 공감입니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어주고, 불의를 보면 침묵하지 않고 같이 저항하는 거예요.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싸움이 났을 때도 혼자서는 못 이기더라도 힘을 합치면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한 겹 줄은 쉽게 끊어지더라도 세 겹 줄은 잘 끊어지지 않는 법입니다.”(전 4:12)-(『더바이블 전도서』, 송민원 지음, 감은사, P.271)
기도 /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
세상 어떤 절망과 좌절 속에도 그 틈 사이로 반드시 빛이 들어오기 마련임을 깨닫습니다. 나라가 망해버린 이스라엘도, 80년 5월 광주에도 역사의 역설이 있었습니다. 그 역설이 틈 사이의 빛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섬김이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이들에게 찬란한 빛임을 알기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기대합니다. 성령님, 지금 여기에 우리 가운데 오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