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安州에서 모래늪에 빠진 윌리암 샌즈
1.
William Franklin Sands는 1874년7월29일 워싱턴에서 태어났다.
1898년에 조선 근무를 자청하여 朝鮮 駐箚 美國公使館 1등 書記官으로 부임하여 곧 辨理公使로 승진했다. 1900년에 公使職을 사직하고 高宗의 顧問이 되어 격동의 韓國 근대사의 목격자가 되었다. 乙巳條約으로 朝鮮의 公使館이 철수하자 그는 귀국했다.
1916년, 그는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포로송환위원회에서 활약하면서 150만명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捕虜送還協商에 성공했고, 그 명성으로 스웨덴, 덴마크 적십자사에서 포로 송환을 협상했다.
朝鮮에서 봉직할때 1901년 일어난 이재수의 난 당시 프랑스 宣敎師를 보호한 공로로 프랑스 政府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46년6월17일 워싱턴에서 사망했다.
2.
이전의 글에서 윌리암 샌즈가 高宗의 밀명을 받고, 조선의 북방경계를 넘나들며 세력을 키워오던 장작림에 대해 결국 朝鮮에서 의화단의 난과 같은 어려운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에 대비해 그를 제거하기 위해 義州로 출발했던 부분의 글을 올렸었다.
그런데 그의 기록물을 보면, 그가 북방여행을 하다가 安州부근에서 모래늪(流沙)에 빠져 생사를 넘나들었던 장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流沙는 사막지대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 반도땅 평양 安州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牧隱문고 제1권 / 기(記)
신축년(1361, 공민왕10) 겨울에 병화(兵禍)를 피해서 동쪽으로 가다가 처음으로 영해부(寧海府)에 발을 딛게 되었는데, 이곳은 나의 외가(外家)인 동시에 나의 형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해로 말하면 동쪽으로 대해(大海)와 맞닿아 일본(日本)과 이웃하고 있으니, 실로 우리 동국(東國)의 극동(極東)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하겠다. 지금 내가 다행히 한 모퉁이에 이르러서 동극(東極)을 극(極)할 수 있었고 보면 다른 모든 곳도 미칠 수가 있을 것인데, 하물며 이 동극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 서극(西極)의 유사(流沙)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누대 위에서 술잔을 들고 있을 적에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흔쾌히 이와 같이 적게 되었다.
辛丑冬。避兵而東。始得至寧海府。是吾外家。而吾兄居之。寧海東臨大海。與日本爲隣。實吾東國之極東也。今吾幸得至一隅。以極其極。他可及也。矧流沙相對之地哉。擧酒其上。就索爲記。欣然書之
목은선생의 글을 보면 流沙는 서쪽 끝(西極)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래의 윌리엄샌즈의 기록과 구글어쓰로 安州와 義州길목의 모습을 보면 流沙가 있는 高麗나 朝鮮의 西極이 어디인지를 알수 가 있는 것이다.
3.
윌리엄 샌즈의 기록을 보자
어느 여름 나는 말을 타고 美國이 採掘權을 가지고 있는 金鑛근처인 北方地域을 여행했다.
우리는 조그마한 배를 타고 江(安州江)을 건너고 말들은 가죽끈으로 매어 헤엄치게 하면서 강을 건너 넓은 모래사장에 내렸다.
내가 말 안장위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서 있는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우리는 강들을 건너, 때마다 주의해 온 流砂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우리와 같은 많은 일행은 결국 표면을 무너뜨렸으며 나의 큰 말이 그 속에 빠져 들었다. 나는 뒤에 있는 행렬을 향하여 널리 흩어지라고 소리 지르면서 말의 머리위를 기어올라 표면이 무너지지 않는 곳으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 모래 표면이 마치 스케이트를 타는 연못뒤의 얼음처럼 말의 무게에 눌러 무너졌다.
우리가 영화속에서나 보는 모래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이 바로 朝鮮의 평안도 安州지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流沙는 사막지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니, 1900년 平安道 安州는 사막지대를 끼고있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위1번의 기술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정도의 인텔리인 샌즈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거나 거짓을 기록하고 있다고 볼수 있을까? 또 그런 신의없는 사람을 高宗의 고문으로 임명하고 정책자문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건 정말 웃기는 일이다.
그렇다면 윌리암 샌즈가 빠져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流沙가 있던 지역은 어디일까?
白頭山의 위치와 鴨綠江의 역사상 위치가 확정됨으로써, 우리는 이 流沙가 있었던 평안도 安州지역을 대체적으로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ADCB445CD4DCE225)
붉은원안의 평안도 안주를 확대하면 아래와 같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D344D5CD4DCFD22)
위 지도를 보면 안주는 명확히 사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安州는 의주에서 朝鮮의 漢陽으로 가는 5천리여정의 초입에 위치하여 뒤에 위치한 妙香山 줄기와 寧邊(영변)의 철옹성을 배후로 끼고 있는 것이다.
유추하건대 윌리엄 샌즈가 빠졌던 流沙는 위 지도의 1,2,3번 중으로 추정해 본다.
현재의 안주모습을 확대해 보자.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3B6465CD4DD2320)
동북쪽 妙香山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인 淸川江(살수)줄기를 중심으로 사막지대가 형성되어 있음을 명확히 볼수가 있다. 저 청천강을 安州江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저 강의 어딘가를 건넌후 流沙에 빠졌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4.
구한말 外國人들의 기록물을 보면 平安道에 대해 기록하기를, 낮에는 기온이 30도에 이르며 밤이 되면 영하30도를 오르내리는, 60도의 기온변화가 있다고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형적인 사막기후다. 이러한 사막지대가 평안도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바로 平安道는 대륙조선의 수도 漢陽을 기준으로 서북쪽으로 뻗어나간 거대한 영토와 사막지대를 끌어안으면서 白頭山아래 義州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직선거리만도 5천리에 이르는 거리인 것이다.
저 5천리 길을 淸太宗은 전격전을 구사하기 위해 安州를 거치지 않고 사막지대를 가로지르는 모험을 감행해 朝鮮의 수도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래서 실록에서는 安州도 함락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마르티니 신부의 <달단전쟁사>에서는 後金軍이 安州를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남하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결국 丁卯胡亂은 전군을 동원해 방어에 나선 朝鮮軍중 7만이 죽고, 淸軍5만이 죽고, 明軍은 거의 전멸에 이르렀다고, 역사상 가장 참혹한 혈전이었다고 마르티니 神父는 1650년경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들은 전쟁의 양상을 기록하며, 朝鮮軍의 승리를 또한 말해주었던 것이다.
윌리암 샌즈가 漢陽에서 말을 타고갔던 의주까지의 길을 淸太宗 홍지타이는 거의 직선에 가까운길로 돌진해 왔음을 우리는 예상해 볼수 있는 것이며, 몽고가 역참을 운영할 때 파말마가 하루 400km까지 달렸음을 고려해 볼 때 청태종이 하루 400km를 이동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에 버금가는 속도로 이동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義州에서 시작된 烽火(봉화)로 淸軍의 공격을 감지한 朝鮮朝廷은 이미 철저하고도 완벽한 대비책을 강구했던것이고, 丁卯胡亂에서 낭패한 淸太宗은 丙子胡亂에서는 江華島에서 왕실의 가족을 사로잡는 방법으로 쉽게 朝鮮의 항복을 받아냈던 것이다.
2019.05.10. 松溪
첫댓글 오늘도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십니다
윌리암 샌즈의 안주에서 모래늪에 빠진 이야기는 연행록에서 사하역에서 모래늪에 빠진 장면과 너무 닮아 있읍니다. 연행사들이 북경가기 직전 사하역에서 말이 모래에 빠저 허우적대는 장면은 수 많은 연행록에 나와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평안도의 안주지역과 연행록상의 사하역 이야기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라 생각하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수 있겠으나 대륙조선이라는 하나의 역사를 둘로 나누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같은 이야기일수도 있읍니다. 저는 같은 이야기가 나누어졌다 생각하는쪽입니다.
지금의 천산산맥 이동(東)은 조선(대륙조선)이고 그 중앙에 중앙정부인 중국이 있으며, 지방정부에서 이 중국으로 사신을 갔었던 기록이 연행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른바 중국역사라 하는것과 조선사와는 너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닮은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저 있어 따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것입니다.
지금의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 서북쪽에 대륙조선을 능가하는 또 다른 세력(청)이 있었는가는 선뜻 이해 할수 없읍니다. 이는 반도 조선사의 확장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단지 제 개인적 생각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청나라는 조선의 제후국입니다.
지금의 반도사학에서 안주의 위치는 평양과 의주 사이 입니다. 반도 식민 사학에서 말하는 개성에서 의주까지의 지명을 임의대로 몇개 나열하면,... 개성,청석골(경기도와 황해도 사이), 총수(평산), 극성(사리원근방),평양, 영원(영원군), 곽주, 의주.....이렇습니다. 그런데 연행록상의 압록강 건너서 북경까지의 행로를 보면 .... 개주, , 청석령, 총수, 극성, 영원, 산해관, (곽주), 북경등으로 거의 흡사 합니다.[문무의 조성사 극성(棘城), 봉산(鳳山), 청석(靑石)....등등의 두 얼굴 참조]
이는 하나의 역사를 둘로 쪼개었다고 할수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위의 지명중 다른것은 평양과 산해관 차이 입니다.
연행 여정의 많은 지명중에 산해관은 그 규모나 화려함이 북경 심양 다음으로 큰 도시이지만, 그 고유한 지명을 쓰지 않고 관명(산해관)으로 대신(?)하는 이유를 모르겠읍니다. 제 판단에는 그 본래의 이름이 아마도 평양이 아닐지 싶습니다. 여기서 평양은 본래의 평양으로 열하일기에 나오는 만주 평양(북평양)을 이야기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산해관이 평양인 것이죠.....
간이집 제6권 신사행록(辛巳行錄) 산해관(山海關)에서 차운하다.
이제 산해관에 발길이 닿고 보니 / 朅來山海衛
제왕의 고을임을 불현듯 알겠도다 / 知是帝王鄕
민간의 집들도 모두가 저택(邸宅)이요 / 下戶皆重屋
거상(巨商)들이 사방에서 또 모여드네 / 豪商聚四方~~~후략~~~
평양과 산해관 ..... 같은곳 아닐런지요..
열정적인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많이 공부하시고 고민하셨는지 그 열정이 글에서 느껴집니다. 대륙조선을 공부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백두산이 알타이산이고 몽고가 우랄산과 알타이산의 중간지대 즉 만주이자 최초의 시베리아 지역과 일치함이 증면된다면, 우리의 역사분석에는 많은 변화가 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번역된 외국인탐사기록에 보면 남만주에 산동이 위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870년 영국기록) 즉 현 자이산호의 우측부분으로 보입니다. 또한 중국학자 주학연이 밝힌 언어에 따른 민족과 역사분석에 따르면,결국 중국이란 것이 몽골족과 여진족=애신각라(김씨종가)가 지배
계층으로 군림하면서 그 역사가 이루어져 왔다고 분석하는데. 가령 우리말의 후졌다(뒤떨어지고 낡았다라는 의미)라는 말도 몽골어 후친(huuchin)에서 나왔듯이,다양한 연원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중원의 역사가 五帝=여진=김씨종가(황금겨레,金-淸)에 의해 이끌어져 왔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갈에서 마자르가 생김으로써 헝가리의 시원이 말갈임을 분석하고 등등 엄청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가 가능한 지역은 분명 카자흐의 동북지방과 현 알타이산의 광활한 북부지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계역사가 시작되어 퍼져나갔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것 같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고조선도
남동쪽으로 민족이동이 시작되면서 구한말까지 그 역사를 이룩했다고 보여집니다. 즉 삼황오제의 역사가 현 카자흐동북쪽에서 시작되어 삼대를 거치고 전국시대를 거쳐 明,淸에 이른것은 하나의 사실로 인정해 분석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고래의 중국이 조선과 현중국으로 분리된것으로 이해했었으나, 공부가 진행됨에 따라 의문이 생기게 되었고, 환국고려님의 글을 접하면서 전광석화처럼 기존 관점이 재정립되었습니다. 청이 망하고 서유럽에서 유물탈취대가 조직되어 왔다고 합니다. 그정도였다면 하나라도 남아있을리가 없을것입니다. 파괴와 약탈...그리고 러시아학자들에 의해 자행된 역사조작..이런것들이
오늘의 현실에 이르렀다는 판단입니다. 많은 의구심과 재론의 여지가 많은 우리의 역사인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토론과 문제제기에서 하나씩 정립되어 나가리라 생각합니다. 이것들 또한 저의 생각이며, 앞으로 지속적인 비판과 문제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