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덕분에 국제적 스타가 되다
이수열•김영애 가정
1. 남편(이수열)의 생애 2. 어머니의 통일교회 입교 3. 나의 청소년기 4. 축복 5. 임지동원 및 가정출발 6. 일본 생활 7. 앞으로의 계획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김영애, 남편 고향 영천의 섭리적 의의, 배가 고파서 통일교회에 입교한 남편, 철도고등학교 졸업, 공군하사관 생활 및 방통대 수업, 가톨릭 마을, 어머니의 대종교 입교 및 이백림 순회사와 함께 통일교회로 개종, 대전에서 성화학생 청년활동, 부모님의 기성축복, 군인남편과 나의 부부 인연, 양평 용문교회 임지 동원, 남편의 교회 헌신, 일본에서 온갖 고생, 무역회사 사장 및 갑작스런 실직, 김치 책 출간 성공,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초청, 호텔레스토랑 근무, 일본 헌금 섭리 승리 기원
1. 남편(이수열)의 생애
1956년 1월 23일(음) 경북 영천시 오수동 133~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영천시는 복귀섭리사 차원에서 두 가지로 큰 의의를 갖는다. 하나는 통일교회 역사에서 참아버님께서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조건을 세우셨다. 참아버님께서 6•25 동란 발발시에 중국군대의 개입으로 남하하셨다. 1951년 1월 18일, 영천의 철길 둑에서 평양시절에 어떤 제자에게 보냈다가 되돌아온 편지를 갖고 계시다가 마침내 그것을 찢어서 버리셨다. 부모로서, 스승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그 식구를 그리워하고 만남을 고대하셨다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태에서 편지를 버리셨다.
이어서 참아버님께서는 평양에서부터 남한으로 피난하시는 동안에 다리가 불편한 박종화씨를 자전거에 태우고서 동고동락하셨는데, 경주에 이르러 박종화씨는 자기 갈 길을 갔다. 참아버님과 김원필씨가 부산 범냇골에 도착하시어 통일교회를 개척하셨다.
둘째는 종말을 맞이하여서 아담국가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한국이 먼저 북한의 공산주의 사탄 세력으로부터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영천에 육군 정예 장교 양성의 요람인 <육군 3사관학교>가 세워졌다. 김일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남한에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면서 적화통일의 꿈을 이루려고 하였다. 1968년 1월 21일에는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급습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발각이 되었다. 그 외에도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 및 울진과 삼척지역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이 각종 방법으로 남한은 적화통일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처럼 국가안보가 총체적 위기를 맞이하여서 1968년 10월 15일에 단기사관학교 설치법에 의하여 육군 3사관학교가 설립되었다. <조국, 명예, 충용>을 핵심가치로 추구하며 충효에 앞장서는 장교를 양성한다. 육군사관학교는 4년제이기에 장교배출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에 비하여 육군3사관학교에서는 일반대학에서 2년 수료한 자를 3학년 편입생으로 받아서 2년간 집중 단기 과정을 통하여 장교배출을 하였다. 남한 장교의 반 정도가 이곳 3사관학교 출신이다.
북한 김일성은 두 가지 이유로서 남한 적화통일을 서둘렀다. 첫째, 남한이 가난하고 군사적 힘이 약할 때에 남침을 해야 하였다. 김일성은 “남한이 못 살기 때문에 불쌍한 남한의 인민을 해방하여 잘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슬로건으로 앞세우고서 북한 인민들을 군사동원체제로 몰아세웠다. 그런데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살게 되면 이 슬로건이 선전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남한이 새마을운동에 성공하여서 차츰 북한보다 잘 살게 되자 김일성은 초조함을 느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한국이 빈곤한 상태에 있을 때에 남한을 침공하려고 호시탐탐 노렸다. 그래서 무장공비를 많이 침투시켰다.
둘째, 김일성은 남한 청와대에서 그의 회갑잔치를 벌이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1912년 출생이었고, 늦어도 그의 회갑을 맞는 1971년까지는 적화통일을 완성하여서 전쟁 승리 및 그의 회갑 잔치를 남한 청와대에서 거창하게 벌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써 무장공비나 간첩을 보냈다. 그들을 척결하기 위한 군대가 영천에 설립되었다.
앞으로 영천이 천일국 안착에 앞서는 성화(成和) 용사(勇士)들이 배출되는 유명세를 타기를 기대한다. 이는 참부모님의 생애와 사상과 3사관학교가 결합되면 가능한 일이 될 것이라고 소망한다.
남편은 4남매의 장남이었고, 여동생 2명, 남동생 1명이 있었다. 집안은 경제적으로 빠듯한 형편이었다. 시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영천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할 즈음에 담임선생께서 미래 진로를 조언하셨다. “너는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가라. 국가에서 장학금으로 공부를 시키고 직장도 보장해 주는 용산 철도고등학교로 가거라.” 남편은 시험을 쳤고,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런데 방을 구할 형편이 안 되어서 경기도 화성의 달동네에 작은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하면서 통학을 했다. 철도고등학생은 차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남편이 다녔던 철도고등학교 자리가 구 세계일보가 들어선 자리였다. 이 또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은 여름방학이 되면 귀향하였다. 그러나 집에 가면 또 부친이 술을 드시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 고민을 하다가 고픈 배를 움켜잡고 언덕에 올라서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십자가처럼 보이는 불이 반짝이는 집이 보였다. 문득 교회를 다니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고 들은 기억이 살아났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 교회를 다니자.”하고 언덕위의 집으로 찾아갔다.
가서 보니까 A형 통일교회 건물이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빛이 남편의 눈에 십자가로 보인 것은 하늘의 역사였다. 도착해 보니, 마침 그날이 성화학생 하계수련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교회에서는 웬 낯선 학생이 자발적으로 찾아왔으니까 대환영을 해주었다. 기동대원 형들도 잘 대해주었다. 남편은 일단 배가 고픈 처지에서 일주일간 공짜로 먹여준다고 하는 말에 솔깃하여서 수련회에 참석하였다.
일주일 수련 종료 이후, “아, 이런 귀한 뜻이 있는 교회가 있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원리공부에 매력을 느껴서 집중을 하였다. 그런데 교회장께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성화하였다. 남편은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첫 번째 불신의 시험이 닥쳤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대신자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는데, 어찌 그런 사람이 죽게 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안 계신가보다.” 교회를 그만 둘 생각이 머리를 온통 감쌌다. 사탄의 검은 마수가 그의 머리를 강하게 주관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기동대원 선배들이 혼란스런 마음을 잘 잡아주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하면 군대 생활도 면제받고, 월급도 받을 수 있고, 경제적 빈곤에서 탈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남편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군하사관을 지원하였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바로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였다. 약혼이 있을 무렵에 남편은 공군 제5672부대에 근무하면서 김해공항 활주로를 담당하였다. 남편은 군 생활 중에서 영천교회 소속으로서 십일조 생활에 충실했고, 성실한 식구가 되었다. 남편은 고등학교 때부터 믿음의 부모 없이,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혼자서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했고, 축복까지 받았다.
2. 어머니의 통일교회 입교
나는 1959년 4월 15일(음)에 충남 부여군 구롱면 금사리 330번지에서 6남매 중 세 번째로 출생하였다. 그곳은 공기 좋고 물 좋고 또한 멋진 정자가 있어서 유명하였다. 140년 건축 역사를 갖는 성당이 있었고, 그것은 국제문화제로서 인정을 받았다. 마을에는 100호가 넘는 규모의 주민들이 살았다. 성당 정문은 우리집 정문으로부터 100m떨어져서 마주보고 있었다. 아버지 외가 형님이 가톨릭 총회장을 역임했고, 조카는 신부가 되었다. 이런 환경으로 인하여 나는 전혀 어색하지 않게 어린 시절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성당 마당에서 친구들과 같이 뛰어 놀면서 자랐다.
우리 집만 빼고는 주민 모두가 가톨릭 신자였다. 우리 집안은 4대가 같이 살았고, 유교사상이 투철했다. 할아버지께서 “가톨릭은 조상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절대로 가지 말라.”고 호통을 치셨다. 할아버지 4형제 중에서 아들이 우리 아버지 밖에 없어서 어머니가 제사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1년에 제사를 15번이나 지내야 하였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 사촌 누님(당고모)이 대종교 신앙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대종교로 인도하였다. 논산군 연산면에 있는 대종교로 다니셨다. 우리 집에서 그곳으로 가려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구름다리를 건너야 했고, 다시 버스를 배에 싣고 건넜다. 지금은 백마강 다리를 건너가면 곧장 도착할 수 있다. 6남매 중 나 혼자 어머니를 따라서 대종교로 다녔다. 일요일이 되면 어머니는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대종교로 가셨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가려니 일찍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나는 새벽잠이 없다.
그 당시 논산 대종교에는 이백림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1년에 4번 심방을 오셔서 기도를 많이 해 주셨다. 그분은 통일교회가 전개하던 노방 승공강의에 매료되어서 통일교회로 개종하셨다. 할머니는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통일교회로 가라.”고 하셨다. 그 말을 따라서 어머니도 통일교회로 개종하셨다.
할머니는 1973년부터 참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조상해원을 하셨다. 1975년 1월 3일에는 특별순회사 직분을 받고서 전국 교회를 순회하면서 조상해원을 하셨다. 성가 37장에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선부의 인친표>를 제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 인친표를 할머니가 나누어 주셨다. 교회에서 특별집회를 하면, 성가 37장을 계속 반복해서 부르면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기도를 하였다. 조상영인체가 어깨를 통하여 강림하면, 두 손이 아주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면서 떨렸다. 그러면 앞으로 불러내어서 인친표를 주셨다. 인친표 크기는 가로 세로 5cm정도의 흰 종이였다. 보통 5~15장을 주셨다. 순회사님은 남편으로부터 모질도록 매를 맞고 구박을 받으셨다가 대종교를 믿으셨고, 마침내 3년 정도 참부모님을 모시고 순회사로서 전국을 순회하시다가 1976년 9월 12일에 성화하셨다. 짧지만 굵게 사신 분이었다.
3. 나의 청소년기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다.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거쳐서 귀국하여서 육군장교로서 한국의 전 지역을 돌면서 근무하셨다. 제대 후에는 예비군 중대장을 역임했고, 그것도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정년을 하셨다. 그 후에는 마을 이장으로서 일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대종교와 통일교회를 다녔다. 그 때에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위생관리를 위하여 우물 청소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나도 우물 청소에 가담했다. 우물 안으로 들어가서 벽에 끼어 있는 이기들을 솔로 문지르면서 닦아 내었다.
나는 중학교까지 집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부터 대전에 가서 성화학생, 청년활동을 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가정에서 핍박을 받기도 했다는데 나는 그런 경험은 전혀 없다. 순탄한 성화학생 시절을 보낸 것, 그것만 해도 정말 다행이었고 복이었다.
4. 축복
1978년 6000가정 매칭 때에 기성축복 3가정이 있었는데, 부모님도 거기에 포함되셨다. 어머니는 친가, 외가에 걸쳐서 62명을 전도하셨고, 부여교회 중심 식구 역할을 했다. 777가정 선배들이 임지동원이 되어서 식량이 부족할 때는 쌀을 갖다드렸다. 어머니의 정성은 내외적으로 어려운 교회 환경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가 성화하셨을 때에는 언니가 가톨릭 신도로서 성당에 계속 나갔기에 가톨릭 의례로 장례식을 치렀다. 어머니가 기성축복가정이기에 성화식을 해야 하지만, 숫자가 우세한 가톨릭 신도들이 몰려와서 그들의 방식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1800가정 교회장께서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우리 집안 형제자매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언니는 지금도 가톨릭 신자이고 제삿날에 가톨릭식으로 미사를 올린다. 빨리 언니를 복귀해야 할 텐데… 일본에 있는 나로서는 고심이다. 영천교회 사모님이 군대에 근무 중인 남편을 축복식에 들어가게 하려고 군대로 편지를 썼다.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니까 속히 집으로 오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부대에 제출하고서 1주일간 휴가를 받았다. 곧장 수택리로 갔다. 나는 가족들이 이해해 주는 상태에서 아무런 반대나 방해가 없이 대전교구 출신으로서 축복식장에 갔다. 가족의 반대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축복식장에 들어선 형제자매들에 비하면 나는 아주 평탄하게 축복을 받은 셈이었다.
1981년 5월, 512쌍이 축복가정으로 탄생하였는데, 우리 부부도 포함되었다. 그 때 같이 약혼한 가정들이 지금 우리 교단에서 중심인물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로 이기성 회장과 황선조 총장이 있다. 여동생도 1982년에 약혼하여 6000가정 축복을 받았으나 지금 휴면(休眠) 상태라서 아쉽다. 속히 여동생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원한다.
1981년 5월 10일, 대전교구 청년들이 약혼식에 참석하려고 상경을 하는데, 유종관 교구장께서 나를 제지시켰다. “영애, 너는 35살이 되어도 도망을 가지 않을 것이니까 이번에 올라가지 말고 다음에 축복을 받아라. 그 대신에 430가정 유병우 장로님과 김권사님과 같이 교회를 지키고 있거라.”고 하셨다. 나는 “내 정성이 부족한가?”라고 생각하면서 교구에 남았다. 이를 본 어머니는 애가 타셨다. 이번에 내가 축복을 받고, 다음 기회에 셋째 딸을 축복가정이 되게 하려는 것이 어머니의 계획이었다. 그것이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다.
그런데 자정이 넘어서 교구장께서 운전기사를 보내셔서 급히 나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내가 수택리에 와 보니까 똑똑한 청년들이 다 모였구나. 똑똑한 영애도 이번에 좋은 남자를 주체로 맞이하도록 해야겠다.”라고 하시면서 기사를 급히 대전교구로 보내셨던 것이다. 똑똑한 남자를 내 주체로 맞이하게 해주시려는 교구장님의 의도를 뒤늦게 파악하였다. 나는 핸드백 하나만 들고 후다닥 기사를 따라 나섰다.
갑자기 집을 나서서 약혼식장으로 가는 나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신신 당부하셨다. “참부모님께서 짝을 지어주시면 절대복종하거라. 얼굴에 구멍이 일곱 개만 뚫렸으면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무조건 감사하게 주체로 받아들여라. 팔이 하나 없어도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나는 “예”하고 답하고 급히 집을 나섰다.
그런데 내 뒤에서 어머니께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씀이 내 귀에 드렸다. “그래도 군인만 아니면 좋겠는데…” 군인가족이 되면 자주 이사를 해야 하고 생활이 뭔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걱정이 되셨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그 동안 아버지는 일본 및 출장을 가셔서 혼자 가사를 돌보아야 했던 쓰린 경험이 많아서 이런 독백을 하신 것이다.
그 다음 날, 나는 하루 늦게 도착한 입장이라서 뒷문으로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목회자, 장애인 순서로 매칭을 해 주셨다. 그런데 매칭이 잘 진전되지 않았다. 옆에 계시던 김영휘 협회장께서 “아버님, 오늘 저녁에 부대로 돌아가야 할 군인들이 있으니까 먼저 매칭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간청을 드렸다. 그러자 “오를 귀대할 군인들 다 일어서봐”라고 하셨다. 군인들 모두 일어섰다. “군인가족이 되려면 아내는 아담한 사이즈가 좋다구. 그래야 남편들이 파티장에 데리고 다닐 수 있다.”고 하시고는 장교 두 명을 매칭시켜 주셨다.
내 주체 앞에서 참아버님께서 갑자기 멈춰 서셨다. “너는 군대에 말뚝 박을 것이냐?”라고 물으셨다. 주체는 “아닙니다. 제 나름대로 할 일이 있어서 평생 직업 군인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참아버님께서 가운데 통로를 따라서 내가 앉아있는 뒤쪽까지 오셨다. 나는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귀에 맴돌아서 고개를 숙였다. 저 군인 남자가 내 주체가 되지 않기를 속으로 빌었다. 참아버님께서 뒤쪽에 계시다가 “너, 일어서.”라고 하셨다. 내 앞에 있는 언니와 옆에 있는 언니들이 차례로 일어섰으나 참아버님께서는 “아니야. 머리를 처박고 있는 놈, 너 일어서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아닌 줄 알았다가 아차 싶었다. “군인을 데리고 가면 어머니께서 좋아하지 않을텐데… 군인과 짝이 되는 것이 인연이고 팔자인가?”
나는 말씀에 복종하여 일어섰고, 주체와 같이 밖으로 나가서 정원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주체는 대뜸 “내가 꿈에서 이미 봤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어머, 이 아저씨 거짓말 하시네. 이백림 할머니 같이 신령한 분이나 그렇게 말씀하시는데…”라고 응수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나는 일반 식구가 미리 몽시를 통해서 배우자가 될 사람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화를 시작으로 하여 주체는 장황하게 자기가 걸어왔던 신앙생활을 늘어놓았다.
“나는 가족 중에서 혼자만 통일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믿음의 부모도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 뜻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고, 경제적 여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4남매의 장남이라서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입장입니다. 나는 특별히 내세울 것은 없지만, 공부를 좋아합니다. 늘 반에서 1등을 했습니다. 1등을 안 하면 서러워서 잠을 못 잤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을 보지 마시고, 내 머리 하나를 믿고서 나를 따라와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 군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독백이 내 귀에서 여전히 소용돌이를 치면서 왕왕왕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직업군인이라서 경제적 도움이 될 것 같고, 사지가 멀쩡하고 건강해서 좋았고, 박력이 있어 보였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 둘의 명찰을 떼어서 상자에 담고, 참부모님께 경배를 드렸다. 이제 매칭이 되었다. 생각과 달리 흥분되지 않고 차분해졌다. 그러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주체는 돈이 없었는지 밥을 사 줄 생각도 안 했다.
들판을 거닐면서 산책을 하다가 나는 작은 어머니께서 개봉동에 큰 한식 식당을 하는 것을 떠올리고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작은 어머니께 약혼식 상황을 설명해 드렸다. 그러자 작은 어머니는 아주 반가워하고 축하해 주시면서 점심 식사를 푸짐하게 대접해 주셨다. 작은 어머니 집안은 불교를 믿고 있었지만, 이렇게 우리 둘이 통일교회에서 약혼을 한 입장에서 불교집안을 찾아 준 것에 대해 아주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기독교와 불교는 서로 만나지도 않고 등을 돌리면서 종교간 갈등이 아주 심하던 시대에 내가 자진해서 인사를 드리려고 갔으니까 작은 어머니는 좋아하셨다. 교파 장벽을 넘어선 사건을 일으켰다.
5. 임지동원 및 가정출발
축복가정이 걸어가야 할 피할 수 없는 노정이 동원되어서 임지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첫 임지는 경기도 양평이었다. 양평읍 용문교회에는 식구가 1800가정 한 가정이 있었다. 양평읍에서 용문교회까지는 허허벌판이었고, 군부대가 있어서 군인 차량이 많이 다녔다.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군인들은 나를 쳐다보면서 뭔가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했고, 먼지를 뿌옇게 일으켰다. 옷에 달라붙은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어버리고 내 갈 길을 갔다.
교회에는 4명의 대원이 배치되었다. 서울, 충청, 경남, 전북 김제에서 왔다. 교역장께서는 “활동을 하다가도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아오라. 그리고 절대로 군인 차량을 타지 말라. 큰 일 날수 있으니 특별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왜냐하면 군부대가 많아서 자칫 불행한 사건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대원들은 “열악한 환경이지만 뭔가 해 보자.”고 의논하고 실천했다. 노인학교를 열었고, 어린이 학교를 운영했다. 어른 공경법, 자녀 양육법을 우리 팀이 먼저 배우고 나서 이웃에게 가르쳤다.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을 통하여 나는 신부수업(新婦授業)을 자율적으로 잘 한 셈이었다. 요즘은 가정 출발 교육이 있고, 세상에서는 예비 신랑 신부 교육이 진행되고 있어서 얼마나 좋은가? 그 때만해도 각자 알아서 가정출발을 준비해야 하였다.
교역장과 총무도 함께 동참하셔서 분위기가 차츰 고조되었다. 교회 개척의 과정에는 그토록 숨은 땀과 헌신이 요구되었다. 나도 양평 지역에 통일교회가 정착하는데 적지만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협회가 정한 매달 용돈 3만원씩 4명의 주체들이 보내 준 돈을 합하여 12만원으로 함께 생활을 하기는 버거웠다. 절약하는 대책을 안 세울 수가 없었다. 그 때에 터득한 근검절약 정신이 지금도 내 몸에 배어 있다. 제2 임지는 서울 동대문 교구였다. 거기서 답십리 교회까지 왕래하면서 활동했다. 한국의 수도 서울생활의 명암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2년 10월 14일에 6000쌍 축복식장에 합류하였다. 부산교구에서 탕감봉행사를 했다. 가정출발은 김해교회에서 했다. 남편들도 3년 임지동원령이 있었고, 이에 복종하여서 남편은 현역 군인이라서 군생활을 하면서 교회헌신을 하는 것으로써 동원을 대체하였다. 김해교회에서 학생부장과 총무를 맡았다. 그리고 김해공군5672부대에서 김해공항으로 취직을 하였다. 김해공항 대한항공 통근버스로 교회 학생들을 새벽5시에 학교까지 통학시켜 주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특혜에 해당하였다.
학구열이 강했던 남편은 동아대학교 야간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경영학 석사를 졸업할 즈음에 참부모님께서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하여 천안에 성화신학교 매입하셨다. 장차 종합대학교로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 교회에 공지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남편은 빨리 일본에 가서 박사 학위를 따서 귀국하여 참부모님이 세우시게 될 대학교에서 경영학 교수를 하려고 작심했다.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최고로 안정된 고급 직장인 공항 근무를 포기했다. 당장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1987년 1월 23일, 일본 유학을 떠났다. 나하고 의논은 전혀 없었다. 결단이 강한 것이 좋아 보이기도 했으나 가정살림을 걱정해야 하는 나로서는 “저렇게 좋은 직장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가장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인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6. 일본 생활
남편이 일본으로 떠난 날, 나는 아들 둘을 데리고 시댁으로 갔다. 남편이 말한 것처럼 시아버님은 술을 아주 좋아하셨다. 내가 복귀되지 않은 시댁으로 가는 것에 대해 남편은 내가 구박이나 핍박을 당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복귀된 친정보다는 앞으로 복귀해야 할 시댁을 선택하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종족복귀의 열정을 가졌다. 혈육을 하루라도 빨리 전도하려는 종족메시아의 자세로 시댁을 향하였다.
그런데 도착한 그날 저녁에 큰 아이가 몸에 열이 났다. 38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누이들이 아기를 업고 종합병원 응급실에 갔다. 감기 증상도 없이 열만 나니까 병원에서는 해열제만 처방하였다. 치료비가 엄청 비쌌다. 시아버님은 그 날 술에 만취가 된 상태에서 집안의 장손인 우리 아기의 병세에 대한 걱정을 안 하시고, 오히려 치료비가 비싸다고 역정을 내면서 당장 친정으로 가라고 질책하셨다. 나는 내심 시아버님의 그런 용단이 있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아기가 아팠던 것도 하늘의 역사(役事)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에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놀란 아버지께서 트럭을 빌려서 새벽에 영천으로 오셨다. 큰 세간을 놔두고 당장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친정인 부여로 갔다. 부모님은 1978년 기성축복가정이어서 우리 아이들을 잘 돌봐주셨다.
6개월 뒤, 1987년 7월, 둘째 아이가 아빠를 너무 찾았다. 아빠도 애들을 너무 보고 싶어 하였다. 나는 용단을 내렸다. 3살, 1살 된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남편 하나 바라보고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어차피 인간의 미래 운명은 하늘에 달린 것, 앞으로 일본에서 전개될 미래가 어떤 것이 될지 알 수 없으나 무조건 하늘 앞에 맡기기로 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일본 동경 동포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되었다.
빈손으로 일본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였다. 빠칭코 카운터에서 하루 8시간 돈 계산을 했다. 고객들이 오락하고 남아서 가져 온 구슬을 헤아리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품을 교환해 주었다. 일본 말을 잘 못해도 계산만 잘 하면 채용이 되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지금은 그 일도 대학교에서 관광학과를 졸업한 청년들만 할 수 있다.
3년 반을 일하고 나니 일본어도 능숙해졌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게 되자 나는 기아자동차 동경연구소에 취직했다. 취직 중에 셋째 아기를 임신했다. 아침이면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큰 아기를 소학교에 보내고, 작은 아기는 보육원에 보내고, 나는 배가 부른 모습으로 전철로 30분 이동하여 회사에 출근하였다.
1992년 5월에 딸(향지)을 출산했다. 회사도 쉬었다. 임신 중에 내가 운동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아기가 커서 자연분만을 못하고 제왕절개를 했다. 산후조리를 못해서 그 이후로 몸이 많이 아팠다. 큰 아이 5학년, 작은 아이 3학년, 향지 3살 때에 울산의 어느 대학교로부터 남편의 교수 초빙 제안이 왔다. 가족회의를 했으나 큰 아이가 일본에 남겠다고 해서 그냥 일본에 머물기로 했다. 남편은 일본 IBM 계열회사에 취직하여 상당한 월급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취직을 안 해도 생활이 유지되었다. 가족회의에서 큰 아이의 의견을 존중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 한 것이었다.
그런데 1992년 8월, 3만쌍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 있고 나서 일본 전역에서 통일교회를 비난하는 분위기가 들끓었다. 텔런트, 베트민턴 여자 국가대표 선수, 국가대표 여자 체조선수가 축복식에 참석하였는데, 신문, 잡지, TV 등의 매스컴에서 온통 비난 일색이었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에게는 배우자를 선택할 자유가 보장되는데, 어찌하여 그런 난리법석을 피우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유명세를 타는 이들의 배우자고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물어보고 정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지 않는가?
축복가정이 많을수록 복을 받는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와 불신에서 나온 언행들이었다. 아마도 그 배후에는 기독교인들이 선동을 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재림메시아로부터 복을 받아야 할 일본 국가와 기독교가 복을 스스로 차버리고 심판을 자초하였느니, 심히 통탄할 일이었다. 머지않아서 저들은 통곡하며 회개를 할 것이다.
그 즈음에 일화 제품인 인삼엑기스를 일본식구들이 청평 수련회에 올 때마다 구입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것을 나누어서 팔았다. 사업이 잘 되자 정식으로 무역을 하는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그 책임자로서 남편이 선택되었다. 한•일 혹은 일•한가정이 회사 사장이 되면 바로 밖에서 통일교인이라고 눈치를 채기 때문에 한•한 가정이며 일본어에 능통한 우리 가정이 회사 책임자가 되었다. 남편은 게이오대학교에서 경영학박사과정을 마쳤기에 적임자였다.
20년 정도 근무하던 중에 갑자기 해고되었다. 문국진님이 일본으로 와서 K•J (한국•일본)사무실을 정리하면서 남편을 해고시켰다. 아마도 뭔가 보고를 잘 못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남편은 정말 사심이 없이 열정을 쏟았는데, 사전 통보도 없이 난데없이 잘렸으니 어안이 벙벙했고 황당했다. 그 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심정세계에서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하는 원망이 생겼다. 이요한 목사님이 자주 말씀하시던 섭섭이가 내 가슴에 덜컥 자리를 잡고 말았다. 아이들이 고3, 고1, 중3이라서 한창 돈이 들어갈 때였는데, 가장이 실직했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다. 지금도 가끔 그 섭섭이가 불쑥 생각날 때도 있다.
나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원망만 할 수 없었다. 아줌마의 파워를 발휘해야 하였다. 나는 통역, 번역, 택배배달, 등 온갖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였다. 한 푼이라도 벌 수 있으면 물불을 안 가렸다. 내가 생각해도 초인적이었다. 그러다가 김치 장사를 시작했고,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 그런 중에 유명한 카메라맨인 니시까와 오사무(西川浩) 선생과 인연이 되었다. 그가 조언을 하여서 그가 발간한 책 중에서 5페이지 정도 내가 하는 김치사업을 소개해 주었다. 반응이 괜찮았다.
니시까와 오사무 선생이 내 책을 출판해 보라고 권유하였다. 나는 한국 김치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제목은 《맛있는 김치와 한국 밑반찬 90品》이었다. 초판 4천부가 다 팔렸고, 재판 3천부도 팔렸다. 그 당시는 운이 좋게도 한국에서 겨울연가 드라마가 방영되어 일본에 대대적인 한류붐이 일어났다. 내 책은 그런 시대적 흐름에 딱 맞았다. 그래서 히트를 쳤다. 내가 일본에서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히트를 칠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에게 요리를 배우러 오는 수강생도 몰려들었다. 신쥬꾸 코리아 타운에 요리교실을 열었다. 인기가 고공 행진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국제적 스타(?)가 되어 있었다. 모두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은혜 덕분이었다. 그저 감사,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데 몇 년간 잘되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중국 우한으로부터 발생한 코로나가 덮쳤다. 대재앙의 물결이 세계를 강타했다. 많은 영세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았다. 나도 그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가게 문을 닫는 그 심정은 정말 처참하였다.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또 다시 도래한 험난한 앞길이 무섭게 나를 짓눌렀다. 나도 그런데 나보다 큰 규모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충격과 상심은 얼마나 컸을까?
인간 세상사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더니, 나도 이 말의 의미를 혹독하게 체험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피조체인 인간이기에 우리는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불도저처럼 앞을 향해 도전하고 전진해야 한다. 그런 자에게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게 된다. 바다에 폭풍의 거센 바람과 파도가 쳐서 한바탕 뒤집어지는 소란이 있고 나면, 오히려 플랑크톤이 풍부해서 고기가 많아지고, 어부들은 신명나게 고기를 잡는다. 뒤집어지고 바로 서고,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아침 태양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에는 역전(逆轉)과 반전(反轉)이 많다.
나는 다시 실직했고 곤두박질 쳤다. 그러나 뭔가를 해야 하였다. 먹구름을 보지 말고 장마가 지난 뒤에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을 미리 내다보는 긍정적 자세를 가져야 하였다.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자녀 교육을 비롯하여 가족 생계를 위해 주저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제출했다.
동경에 있는 메구로가죠엔이라는 유명한 호텔 레스토랑이 있다. 그 곳은 동경에서 정원이 가장 잘 꾸며져 있기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특히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결혼식이 17~20쌍이나 있다. 평일에는 연회가 많이 열렸다. 거기에는 일식, 양식, 중국식은 있는데, 한식은 없었다. 가끔 한식 음식을 찾는 손님이 있었다.
나는 그 호텔 레스토랑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내가 출간한 저서와 유창한 일본어를 하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중요한 장점으로 채택되었다. 면접을 본 그 다음날부터 바로 출근을 하라고 허락하였다. 나는 주로 김밥, 불고기, 김치를 주로 요리하였다. 직원들은 “내가 채용된 것은 세 가지 면에서 그 호텔 역사에서 처음이다.”라고 나를 칭찬하였다. 60대 중반 아줌마가 채용된 것, 면접하자 곧장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게 된 것, 한국인이 처음으로 채용된 것이란다. 주방장과 선배들이 나를 차별하지 않고 잘 대해주었다. 정치적으로 두 나라 사이에 냉기가 돌 때에도 직원들은 가족처럼 대우해 주었다. 범인들은 국경을 초월하여서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데, 정치적 논리가 괜히 불편한 관계를 만든다. 정치인들이 통일원리를 이해하고 인류한가족의 거시적 관점을 가질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한다.
그럭저럭 30년간 일본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요리를 전수해 주었더니 지역유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2022년 5월 10일 오전 11시, 제20대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을 받았다. 취임식장에서 대통령과 영부인과 악수도 나누었다. 저녁에는 롯데호텔에서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리셉션에도 초대를 받았다. 그 다음날, 윤대통령께서 호텔에 오셔서 감사의 말씀을 해주셨다. 축복가정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내가 대통령과 가까이 지낼 수 있으며 칭찬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축복가정이라는 범주에 들어섰기에 나도 모르게 국제적 인사가 되었고 존중을 받게 되었다.
7. 앞으로의 계획
부여 시골출신인 내가 참부모님을 만나서 운명이 확 달라졌다. 훌륭한 남편도 만났고, 일본생활도 했고, 책도 출판했고, 유명강사가 되었고, 출세한 재일교포로서 뽑혀서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그 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보람을 느낀다.
나도 이제 연금 생활을 하게 된 나이가 되었다. 종족메시아로서 친인척을 찾아야겠다. 어머니가 연결해 주신 친인척 62명을 내가 계속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식구로 인도를 해야 하는데, 내가 일본에서 35년 이상 장기 체류를 하다보니까 쉽게 연결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 분야에 더 적극적인 관심과 열정을 쏟아야겠다. 일본과 한국을 자주 오가면서 천보가정이 되고 종족메시아로서 사명을 완수하여서 하늘 앞에 큰 영광을 올려야겠다.
2019년 8월에는 피스로드에 참가했다.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10일을 달렸다. 그리고 천정궁에 도착하여 참어머님을 뵈었고, 완주 기념 금메달과 꽃다발을 받았다. 그리고 10월에는 신씨족메시아 사명 완수를 위해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갔다. 또한 천보가정을 위해 큰 비용을 빚내어서 지출했고, 빚을 갚는데 2년이 걸렸다. 2년간 허리띠를 동여 메었다.
그리고 일본에는 헌금섭리가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사람 외에는 집을 가진 자가 거의 없다. 헌금섭리를 하느라 많은 식구들이 월세방에 산다. “일본은 세계 인류를 살리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참부모님의 지시를 성취하기 위해 일본식구들은 정말 열심을 다하고 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여성은 아무나 될 수 있지만 어머니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사건이고 놀라운 은혜이다. 국가적 차원도 그러하다. 일본이 인류 구원을 위하여 어머니가 되려고 식구들은 주야로 열심을 다한다. 이런 노력과 희생과 헌신이 머지않아서 밝혀지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까지 일본식구들이 지치지 않기를 나는 늘 기도한다.
나는 내 발로 일본에 가서 36년째 살고 있다. 평화여성연합 동경지부 소속이며, 매주 월요일에는 777가정 일본 언니들과 노방전도를 한다. 그 중에서 한국부인이 5~6명 있다. 그들과 함께 만나서 한국말로 실컷 수다도 떨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자서전 보급운동도 전개하고 있다.
영사관 옆과 요꼬꾸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에 꽃을 달아드리고 청소를 한다. 그 외에 민단 활동 및 귀화한 재일동포들에게 찾아가서 말씀은 전한다. 한 명이라 더 빨리 찾아 세워서 축복가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살고 있다.
이런 저런 곡절이 있는 삶을 살다보니 어느덧 아이들이 다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 큰 아들은 국립대 공대를 나와서 엔지니어이다. 둘째 아들은 소프트웨어 설계사 엔지니어이다. 막내 딸은 쥬얼리(보석) 디자인 및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족들 모두 각자 건강한 모습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각자의 분야에서 천일국 안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참부모님 덕분에 국제적인 스타가 된 나! “이 크신 은사를 무엇으로 보답을 하랴! 이 크신 은사를 무엇으로 보답을 하랴!”(성가 4장) 감사하면서 효정의 실적을 만들어 드리는 충효의 축복가정이 되고 싶다.
첫댓글 손기문님 댓글
그동안 일본소식을 잘 전해주셔서 김영애님의 남편이 일본사람으로 일 한 가정인줄 알았습니다. 자서전을 읽고 훌융하신 남편을 두신 한 한 가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남편이 당했던 큰 아픔속에 자칫 교회를 떠날수 있는 상황속에서 엄마는 용감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 고 베타적인 환경권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뒤안길에는 많은 눈물과 땀과 노력이 있었음을 유추 해봅니다. 한국과 일본의 사랑의 가교역활을 하시며 노방전도를 하시며 신앙을 열심히 하셨던. 이수열 김영애 부부는 이시대의 진정한 사도라고 존경해 올림니다. 늘 건강하시고 온가족 행복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