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만공스님 조실로
법희.만성.일엽 등 見性
1971년 상륜스님 취임해
비구니 선맥 오롯이 이어
부처님께서 석가국의 가비라성에 머물 때다. 부처님의 이모이며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다가와 예배하며 “대덕이시여, 여성은 여래께서 설하신 법과 율에서 출가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간청했다. 고타미는 세 번에 걸쳐 간청했지만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가비라성을 떠나 베살리로 떠났다.
고타미는 이번에는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수많은 석가족 여성들과 함께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 곳에 나아갔다. 고타미는 다리가 붓고 먼지가 덮인 채 고통스럽게 울면서 문 밖에 서있었다. 이를 본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나아가 여성의 출가를 세 번에 걸쳐 간청했지만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이에 아난은 다른 방법으로 부처님께 출가를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덕이시여, 여성이 여래께서 설하신 법과 율에 출가하여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또는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은 “성취할 수 있다”고 답했다. 아난은 만약 4과를 성취할 수 있다면 고타미의 출가를 허락해주실 것을 간청했고, 부처님은 팔경계법(八敬戒法)을 수지한다는 전제하에 이를 인정했다. 이리하여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했다.
출가를 간청 드린 것이 부처님 성도 후 15년경이며, 허락을 받은 것은 아난 존자가 부처님의 시봉을 들기 시작한 첫 해라고 한다. 부처님이 수차례에 걸쳐 고타미의 출가를 거절한 것은 여성 차별관 때문이 아니라, 계급과 남녀 차별이 확고한 인도사회 분위기를 감안, 승단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해석이다.
실제 비구니 승가가 성립된 것은 비구 승가와 재가신도가 탄탄하게 형성된 후의 일이다. 〈숫타니파타〉에 “세상에 이름으로 성(性)으로 붙여져 있는 것은 통칭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난 그 때에 붙여지고 임시로 시설되어 전해지는 것이다”라고 하듯 부처님 법에 남녀의 차별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신분과 귀천을 떠나 수많은 여성들이 출가의 길에 들어서 출가2부중의 전통을 당당히 구축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튼튼한 비구니 승단이 이 땅에 꽃피고 있다. a
지난 12일은 하안거 결제일이었다. 아직 5월 중순이지만 봄은 이미 저만치 가고 있었다. 한 주 전만해도 산벚꽃이 흐드러지던 북한산은 이미 녹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찰 버스가 있지만 걷기로 했다. 승가사 제일선원(第一禪院)을 찾아가는 길이다. 구기매표소를 지나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자연 휴식년에 따라 5년간 구기동과 평창동 쪽 계곡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만 느껴야한다.
사람들이 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장끼 한 마리가 풀 숲 사이를 다니며 여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힐 쯤 되자 갑자기 큰길이 나타나고 신도들을 실어 나르는 승합차가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승가사다.
신라 경덕왕 15년(756) 수태(秀台) 스님이 창건한 승가사는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에서 생불 소리를 듣던 서역 출신의 승가대사(627~708)를 경모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지었다한다.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하여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겼는데 홍수와 한발 등 천재지변이 있을 때 이 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면 많은 효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도 그 굴 앞에는 많은 신도 등산객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고 마시면 병에 효험이 있다는 약수를 떠간다.
대웅전 앞에 서면 종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파도가 밀려오듯 숲을 헤치고 집들이 산으로 산으로 밀려오다 멈춰 섰다. 음력보름, 신도들은 기도를 올리느라 여념이 없었고, 하안거 결제일을 맞은 스님들은 인기척조차 보이지 않았다. 꽃들로 담장을 드리운 ‘삼각산 제일선원’은 신도들조차 그곳이 선원인지 모를 정도로 고요 속에서 마치 딴 세상인 듯 머물러 있었다.
낯이 익은 한 노비구니 스님이 부지런히 후원과 선원 사이를 오갔다. 신도들 손에 과일을 들려 들어갔다가 한 참 있다 다시 나오기를 수차례. 스님은 선원 일만 관심 있는 듯 다른 곳에는 눈조차 두지 않는다. 상륜스님이다. 오늘날의 승가사로 일으켜 세우고 선원을 다시 연, 한국 비구니계의 큰 스승이다.
승가사에 선원이 생긴 것은 1935년이다. 당시 만공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1명의 납자가 안거에 들었다. 만공스님은 한국 비구니 승단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분이다. 스님은 수덕사에 머물며 제방에서 수행하다 찾아오는 비구니 스님들을 제접, 법을 인가해 비구니 교단을 되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근대 비구니 선맥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법희스님을 비롯,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최초의 비구니 선방을 개설한 만성스님, 후학들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성문스님, 뛰어난 선객 본공스님, 신여성 운동을 주도하다 불문에 귀의한 일엽스님 등 근대 한국비구니 교단을 일으킨 주인공들이 대부분 만공스님에게서 법을 인가받았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선사들이었다. 만공스님을 비롯 효봉스님 향곡스님 등 당대의 고승들이 인정할 정도로 비구들 못지않은 구도행으로 일대사 인연을 깨친 이들이다. 그 중에서도 법희(法喜,1887~1975)스님은 최초로 한국비구니 선맥(禪脈)을 일으킨, 비구니계의 별 중의 별로 추앙받는 분이다.
승가사 제일선원은 한국 비구니계의 시류(始原)이라할 수 있는 만공스님과 법희스님의 선맥과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비인 윤비가 서울 정릉 인수재에 선원을 열어 모실 정도로 법력이 뛰어났던 법희스님은 이곳 승가사에서 조실로 지내며 납자들을 제접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잠시 문을 닫아야 했던 제일선원은 1960년대 후반 비구니 스님들 몇 명이 모여 정진하면서 선원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1년 상륜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선원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72년 하안거부터 춘성(春城)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납자 60명이 방부를 들였으며 이후 벽초 원담 숭산스님 등을 조실로 모시고 정진하는 등 제일선원은 비구니 선원 중에서도 중심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대웅전 옆에 선원인 적묵당을 만들면서 선원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1988년 동안거부터는 승가사 제일선원(第一禪院)으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승가사 제일선원은 해제 결제 없이 정진대중을 맞는데 산철이 결제철보다 수선 대중이 많다고 한다. 사찰 운영은 선원 정진대중들 중심으로 꾸려 참선수행에 불편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비구니 교단의 높은 법력과 깊은 학식은 이처럼 스님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다.
부처님 열반 후 가섭은 아난의 몇 가지 잘못을 들어 참회를 받는데 그중에는 비구니를 받아들이도록 부처님께 간청했다는 이유도 들어있다. 하지만 가섭이 오늘의 한국 비구니 승단을 보았다면 아난에게 되레 참회하지 않았을까.
고타미 비구니의 뒤를 잇는 한국의 비구니 수좌 1000여명이 이번 하안거 결제철에도 정진에 들었다고 한다. 승가사 뒤편 우뚝 선 봉우리가 북한산 선불장(選佛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제일선원 이끄는 상륜스님
법희스님 은사로 득도
한국 비구니계 큰 어른
승가사 제일선원을 맡고 있는 상륜스님은 만공스님, 법희스님〈사진〉으로 이어오는 비구니계 선맥을 이은 오늘날 한국 비구니계의 어른이다. 스승을 따라 일찍부터 제방선원에서 수선 정진하였고, 법희스님이 수덕사 견성암에 머물 때 승가사 소임을 맡아 불사를 계속하면서도 먼 길을 마다않고 공부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192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55년 법희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사형 도원스님을 이어 71년 승가사 주지 소임을 맡고, 본격적인 가람 중창에 나섰다. 이후 승가사 중창 불사에 나서 보물 215호 마애불 까지 108 계단을 만들고 대웅전 영산전 산신각 적묵당을 확장.중건하고, 향로각 일주문 종각을 신축했다.
1994년에는 9층의 ‘남북통일 호국보탑’을 세웠다. 군포교에도 남다른 열정을 기울여 해군 중앙법당 통해사를 창건한 것을 비롯 매년 ‘한국전쟁 전몰장병 천도위령재’를 지내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10여년에 걸친 법륜사 불사를 회향했다. 경기도 용인시에 들어선 법륜사는 남방불교 양식의 130여평 규모의 ‘아(亞)‘자형 대웅전과 석굴암 부처님보다 세배가 큰 본존불, 50여명이 함께 정진할 수 있는 비구니 선원, 선원 수좌들을 위한 요사채, 재가자 시민선방 등 매머드급 사찰을 건립했다.
스승을 따라 오직 참선 수행에 매진했던 스님은 사부대중 누구든 마음 놓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도 촌음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