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한계
사실 한 사람 속에 숨어 있는, 평소와 전혀 다른 인격들이 표면으로 올라와 말하고 행동하는 다중인격 현상은 고대로부터 모든 문화권에서 관찰돼왔고, 흔히 귀신들림이나 빙의(spirit possession)현상이라고 생각돼왔다. 따라서 이런 환자들에 대한 치료는 오랜 세월 신비로운 영적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지던 주술사나 종교인들의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각자가 가진 종교 교리나 믿음에 따라 치료법을 개발하여 때로는 치료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미신과 무지에 따르는 많은 부작용과 문제점을 피할 수 없었다. 19세기 말까지도 다중인격 현상의 원인과 실체를 분명히 밝히지 못한 채 악령의 장난이나 마술, 신의 저주일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의 안개에 싸여 있었다. 그러다 현대의 심리학 이론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최면치료를 이용하는 정신의학자들은 사람 마음속에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최면을 이용한 다중인격의 치료 사례를 많이 발표했고 다중인격과 귀신들림의 정의와 진단기준, 유사점과 차이점 등에 관한 많은 가설과 이론을 내놓았다. 이들은 귀신들림으로 생각돼오던 다중인격과 망상·환청·환시·신비체험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신증상들을 모두 심리학 이론으로만 설명하려고 했다. 나중에 정신분석이론을 주장한 프로이트도 이때 최면치료를 통해 무의식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런 관찰과 치료경험은 정신분석이론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최면상태에서 환자들이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반응들에 대한 오해와 부담감 때문에 최면치료를 포기하고 정신분석이론을 만들어내면서 모든 정신 병리와 증상들을 이 이론에 맞추어 설명하려고 하였다. 과학적 분석과 논리적 설명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 자만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정신분석이론은 사실성에 대한 검증 없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정신의학과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환자의 실질적인 증상 호전에 탁월한 효과를 가진 최면치료도, 한층 더 추상적이고 복잡한 이론에 환자를 꿰어맞추는 정신분석치료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최면상태에서 주로 진단되던 다중인격은 그 얼굴을 감추고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이라는 새롭고 모호한 진단명 뒤로 숨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다중인격이라는 진단이 거의 쓰이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실제로 다중인격을 가진 환자들은 엉뚱한 치료를 받게 되면서 난치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다시 최면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그동안 연구가 부족했던 다중인격과 해리 장애에 대한 연구보고가 점차 늘었고 1980년대 말부터는 많은 학자들이 다중인격에 대한 논문과 사례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 이후 다중인격이란 진단명이 점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사용 빈도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