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천 남구만으로 더 유명한 의령 남씨
이종구 승인 2014.01.28 11:03
남구만 초상
남(南)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60여 본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한 뿌리로 세거지명에 불과하며 의령, 고령, 영양 등 세 본이 있다. 이는 모두 영의공 남민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후대에 나뉘어 본관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조인 남민은 본래 중국 여남 사람으로 본명은 김충이다. 김충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한 뒤 신라에 영주할 것을 밝히자 경덕왕이 여남에서 왔다하여 성을 남(南), 이름을 민(敏)으로 내리고 영양현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이후 후손들이 영양현을 중심으로 세거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돼 오다가 고려조에 들어와 남민의 후손 가운데 3형제가 있어 첫째 남홍보는 영양 남씨, 둘째 남군보는 의령 남씨, 막내 남광보는 고성 남씨의 1세조가 되어 각각 세계를 잇고 있다.
남문(南門)은 조선조에 들어와 남재, 남은이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후 상신 6명, 대제학 6명, 호당 3명 청백리 1명, 공신 7명을 배출하는 명문으로 성장했다. 특히 조선시대 명문거족을 나타내는 지표로 흔히 정승보다는 대제학을 많이 배출한 가문을 더욱 자랑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는데, 남문은 대제학 6명을 배출하면서 전주 이씨, 광산 김씨, 연안 이씨의 7명에 이어 많은 수를 배출한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씨족들보다는 수가 적으면서도 문과급제자 180명을 배출했는데, 이를 본관 별로 보면 의령이 139명, 영양 28명, 고성 8명, 미상 5명으로 압도적으로 의령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간 형제들
남사면 창리 화곡마을에 있는 남은묘와 화곡마을 입구 남은묘소 안내 표석
의령 남씨 1세조인 남군보의 증손으로 을번, 을진, 을경 3형제가 있었는데 큰아들 을번은 출사해 영의정까지 오르고, 둘째 을진은 고려조에 절의를 지켜 형제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둘째 을진은 고려 말기 명신으로 국운이 기울자 지금의 양주에 은거했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그의 학문과 충절을 높이 사 출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며 불응하자 태조는 그의 충절에 감복해 ‘사천백’이라는 작호를 내렸다고 한다. 사천백이란 작호가 내려졌다는 소리를 전해들은 을진은 수모를 당했다고 말하고는 머리를 풀고 통곡하며 더욱 깊은 산인 감악산 바위굴에 들어가 식음을 전폐하고 사람을 만나지 않다가 절명 했다 한다. 후세 사람들은 사천백이 절명한 바위굴을 남선굴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반대로 형인 을번은 고려 말에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아들 남재, 남은이 조선 개국공신이 되어 조선시대 의령 남문 발전에 기틀이 되었다. 남재(1351~1419)는 세종연간에 영의정을 지냈고 남은(1354~1398)은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특히 을번과 을진 형제가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처럼 을번의 두 아들 중 장남 재는 태종의 왕권 강화에 기여한 반면, 동생 남은은 정도전과 함께 신권이 강한 나라를 꿈꾸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형 남재의 초명이 ‘겸’이었는데 조선 태조가 ‘재’로 이름을 하사해 남재로 개명했다고 한다. 도량이 넓고 술을 좋아하는 호방한 인물로 특히, 산술에 능해 남산이라는 별호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1차 왕자의 난 때 잠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태종 즉위 후 세자사부가 되고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의령 남씨 문중의 첫 정승이 되어 남씨 영화의 터전을 만들었다.
둘째 은은 1384년(우왕 4) 삼척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자 수령에 적임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자청해 나아가 왜구를 물리친 후부터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요동정벌 때 정벌군으로 참여해 위화도에서 이성계에게 회군할 것을 건의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개국 후 방석의 스승이 되고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편에 서서 죽임을 당한 후 묘가 양주에 초장(初葬)되었다가 곧바로 현 처인구 남사면 창리 화곡(꽃골)으로 이장돼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후 의령 남씨들이 용인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의령 남씨와 용인의 선조들
의령 남씨는 조선 초기 남은, 남재가 개국공신으로 이름을 떨치고 남재의 손자 남휘는 태종의 딸 정선공주와 혼인해 왕실과 인척관계를 더하면서 영화를 누리기 시작했다.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우고 20대 나이에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나 무고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남이 장군은 남재의 5대손으로 정선공주의 손자이다. 남이 장군은 용인의 각종 읍지에 용인 출신으로 이름이 올라있기도 하다.
모현면 초부리 용인자연휴양림 안에 있는 남구만 시비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넘어 사래 긴 밭 언제 갈려 하느니’라는 유명한 권농시는 은퇴 후 영의정을 역임한 약천 남구만 선생이 모현면 파담마을에 살면서 지은 시라고 전한다. 남구만 선생은 1629년 태어나 숙종조에 장희빈 처벌문제가 발생하자 노론의 김춘택, 한중로 등이 중형에 처해야 된다는 주장에 맞서 가벼운 형을 주장했으나 숙종이 사사를 결정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그 후 부침을 하다가 1707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파담마을에 은거했다. 선생은 의령 남씨의 시조 남군보의 15세손으로 남재로부터는 10세손이 된다.
남은, 남구만의 조부이며 평강 현감을 지낸 남식, 남구만의 아들이며 금성현감을 역임한 남일성, 남계우의 묘가 남사면에 있다. 남계우는 나비그림으로 유명해 ‘남나비’로 이름을 날렸는데 모현에서 출생했다. 음죽현감을 지낸 남학성, 양성현감을 역임한 남학청, 영의정을 역임한 남구만의 묘가 모현면에 남아 있다.
용인 여기저기에 세거
용인의 의령 남씨는 처인구 남사면 창리 꽃골에 조선 개국공신 남은의 묘를 조성한 이후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용인에 오랫동안 세거해온 지역을 보면 남재의 후예들은 모현면 갈담·초부리 일대와 남사면 봉명·창리 일대에 세거해 왔다. 남사면 창리는 남은의 후손들도 많이 세거하고 있으며 남동에도 남씨들의 세거지가 있다. 또 기흥구 지곡동에는 남재의 숙부이며 고려의 절신 남을진의 후손들이 세거해오고 있다.
을진의 후손이 지곡동에 살게된 동기는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즉 군보로부터 19세손이자 을진의 15세 손이 한산 이씨와 혼인해 지곡동에 터를 잡은 이후부터이다. 현재는 3가구가 남아 있으나 과거에는 7~8가구가 살았다고 하며 이중 서울농대에서 잠사학 교수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잠업발전에 기여한 남중희가 유명하다.
남사면 봉명리의 남씨들은 조선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들이다. 이곳은 평택시 진위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로 진위면에 터를 잡고 세거해온 남씨들이 시계를 넘어 이거했기 때문이다. 진위면에는 태종의 딸이자 남휘의 부인 정선공주의 묘소가 있어서 이미 300여 년 전부터 터를 잡고 세거해온 남씨 집성촌이었다.
봉명리 남씨들은 한국전쟁 전에는 30여 호가 넘었다고 하며 현재는 세집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남사면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남사면장을 비롯해 박사 10여명을 배출한 가문이다. 이마을 출신 남선우는 성남문화원장을 지내고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 지회장을 지냈다.
남동에 살고 있던 남씨들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근대에 이르러 남참봉으로 불리던 남상학이 운수회사를 경영하면서 남동의 남씨 가문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현재 수원과 용인을 중심으로 경기도 남부 일대에 주로 운행되고 있는 경남여객은 용인에 남씨들이 운영한다고 하여 용남여객으로 부르다가 사세가 커지면서 경기도민을 위한 여객이라 하여 경남여객으로 명칭을 변경해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용인 출신인 남평우는 수원시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그의 아들 남경필 또한 현재 5선 중진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모현면 일대 남씨들은 약천 남구만 선생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모현 출신으로 1919년 수원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원이 되어 활동한 독립지사 남정각 지사가 유명하다. 남정각 지사에 대한 학술 세미나를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바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모현면장을 역임하면서 보통학교 설립을 위한 계를 조직했으나 여의치 않자 면장직을 내던지고 이웃집을 얻어 유신의숙이라는 학교를 설립한 교육자 남계양이 있다. 근대 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학교는 사라지고 없으나 이곳에서 공부한 이들이 파담마을 입구에 비를 세워 남계양 선생의 애국계몽정신을 기리고 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약천 남구만 선생의 시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시조를 지은이가 용인과 관련이 있는 인물임을 아는 용인시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선생의 유택이 있는 모현면 초부리 묘소 앞이나 재실이 있는 갈담리 별묘 안에는 용인이 아닌 동해시와의 인연을 강조한 시조비가 서 있다. 시조의 고향이 용인이냐 동해냐 하는 사실관계를 떠나 용인시민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현재 용인문학회에서 약천 선생의 시 문학사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약천문학제를 열고 있음은 진실로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보다 많은 시민들이 용인을 알고 사랑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그 중심에 용인의 의령 남씨가 있음을 되새겨본다.
이종구 webmaster@yongin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