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집

[이미영]

도플갱어

안 현 주

길을 가다가 모퉁이를 돌려는 찰나, 보이지 않는 반대편 모퉁이에서 오는 누군가와 얼굴을 부딪칠 뻔한다. 그런데 그 상대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면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 순간 눈은 있는 대로 크게 떠질 것이고 입은 크게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 입속에선 ‘헉’하는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이 세상 어디엔가는 자기와 꼭 닮은 사람, 도플갱어가 살고 있다는데,

L은 자기 일에 대한 성실성이나 일을 처리해 나가는 방식이 뛰어났다. 싹싹하고 예의도 발라 위아래 알아서 처신하는 것까지 맘에 들었다. 항상 명랑 쾌활하여 주위에 있는 누구에게나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아가씨였다. 그 나이대의 아들이 있다면 며느리 삼고 싶을 만큼 아껴 주고 싶었고 사랑스러웠다. 회의 시간에 그녀의 동료들 앞에서 그녀를 칭찬한다는 것은 상사로서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조심을 한다면서도 불쑥불쑥 그녀에 대한 칭찬의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내게 신임을 받고 예쁨을 받았다. 그녀는 외모도 결코 예쁜 얼굴이 아니다. 그녀의 다른 동료들에 비해 대학도 썩 괜찮은 곳을 나온 것도 아니었다. 처음 면접을 왔을 때 문을 밀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외모를 보지 않고 능력 위주로 사람을 뽑는다고 나름 자부하던 나도 좀 심하다 할 정도였다. 그러나 면접 시간이 진행될수록 프레젠테이션도 잘 해내고 싹싹하고 명랑하며 맡은 바 일도 잘 처리할 것 같은 믿음을 심어 줬다. 무엇보다도 인간성이 좋을 것 같아 낙점을 찍었다. 그 이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앞으로는 직원을 뽑을 때 출신 학교의 레벨은 안 볼 거라며 그 한 사람의 됨됨이와 인간성과 성실성만 볼 거라며 자신 있게 말하고 다녔다.

하던 일을 그만둔 이후에 L과 둘이서 소규모의 일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규모가 작아 실무는 거의 그녀가 보다 보니 아무래도 그녀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체제였다. 자연히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나는 뒤로 빠지는 형태가 되었다. 그녀에게 종전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인 이익도 안겨 주었다. 심지어 나보다도 더 많은 금전적인 혜택도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알 수 없는 어디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에이 설마 하고 머리를 흔들어 털어 버리며 그녀를 믿었다. 졸졸 새는 누수가 점점 그 양이 늘어나더니 종래엔 돌아올 수 없는 강으로 흘러갔다. 믿음에 대한 배신감에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 지냈다. L은 같이 하던 일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더니 종래엔 통째로 다 삼켜 버렸다. 삼십도 안된 젊은 사람이 아주 노련한 협잡꾼이 하는 짓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처리해 나갔다. 옛 전래 동화에 나오는 여우 누이가 사람들을 다 잡아먹고 돌아서서 입맛을 다시며 씨익 웃는 그런 장면이 자꾸 오버랩 되었다. 심장이 뛰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열기가 약을 복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에 고통을 주었다. 어떤 것으로도 마음을 다스리거나 가라앉힐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렇게 이익을 주고도 이런 배신을 당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괴로워할까. 찬찬히 뒤돌아보았다. 분명 잘못한 사람은 상대방인데 분노의 칼날은 가해한 상대방을 향해 있는 게 아니라 당하고 괴로워하는 나를 겨누고 있었다. 문득 거울을 본다. ‘언젠가 너도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한 적은 없는가. 네가 모르는 전생에라도 더도 덜도 말고 그만큼 누군가를 막막하게 하고 가슴 치게 한 일을 만든 적이 없었을까.’ 그렇다면 이건 원망과 분노로 괴로워하고 응징한다고 끝나질 않을 것 같았다. 용서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신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다. 상대야 스스로 어떤 형태의 벌을 받든 말든 나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싫지만 용서하기로 했다. 하지만 숨어 있던 배신감이 또 불쑥불쑥 치밀어 오른다.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어디 얼마나 잘되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도 끊임없이 고개를 쳐든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잠결이 고르지 못하다. 이 용서는 어떻게 해야 평정심을 되찾아 줄까. 도대체 용서를 한다고 되뇌어도 끝나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상대방에 대한 이 마음을 어떻게 풀어서 정리할까. 용서란 상대방 가슴의 돌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내 가슴의 돌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상대방이 잘되도록 빌어 주고 마음의 응어리까지 풀어내야만 용서는 마무리가 되는 것인가. 일흔일곱 번을 용서를 해야 할 정도의 상대방은 도대체 누구인가. 또 다른 나의 분신이 아니고서야. 자기 자신이 아니고서야.

거리에 흘러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본다. 저 사람들 중의 누가 어떤 인연으로 앞으로 나와 조우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각도를 달리하여 걸어가는 무수한 나의 분신들이 아닐까. 세상이라는 동그란 원 안에서 각각의 개체로 살아가지만 한 덩어리를 이루어 굴러 가야 하는 원이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삐죽삐죽 나와 있으면 굴러 가지 않을 것이다. 굴러서 삶의 완성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르려면 어느 부분이든지 부드럽게 둥글어야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투병 중인 암으로 다시 입원했다 한다. 빨리 쾌차하도록 빌며 원을 다듬어 굴려 본다. 도플갱어, 이름을 달리한 무수한 우리 자신이니까.

4엔

염 우 권

방을 배정 받고 가방을 풀어 정리하고 나자 방문 초인종이 울린다.

객실 담당 직원이 자그만 봉투를 건네주며 ‘지난번 방문 때 빠트리고 간 것을 챙겨 둔 것’이란다.

전혀 기억나는 것 없고, 예상치 못한 일이라 궁금해하며 봉투를 뜯었더니 일화 4엔이 들어 있었다.

무엇에 부딪힌 듯 잠시 멍청해졌다가 생각을 더듬는다.

일화 4엔은, 환율로 계산하면 우리 돈 60원 정도이니 우리나라에서 우리 돈이라면 용처가 있는 돈이나, 일본에서 외국 관광객이 쓸 만한 용처는 거의 없으며 특히 일본을 떠나는 마당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일본에 거주하는 방 청소부 아줌마라면 잔돈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싶은 가벼운 생각으로 실내 탁자 위에 두고 왔던 일이 기억에 떠오른다.

묘한 감정에 휩싸이며, 생각이 어지러워진다.

내 것이 아니면 탐하지 아니하며 만지지 않는다는 정직함과,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손님의 것을 중히 여긴다는 업주의 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아득히 먼 옛날의 일화가 뇌리를 스친다.

1964년 7월, 군의관으로서 미국 육군병원 파견 근무 6개월 기간을 마치고 일본 하네다 공항을 거쳐 귀국할 때 공항 대기실 의자에 손가방을 두고 온 것이 김포공항 상공에서 생각났다.

승무원에게 사실을 알리고 승무원이 하네다 공항 사무실에 연락하여 다음 비행기로 실려 온 손가방을 찾았다. 대합실은 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오가는데도 그 자리 그 의자에 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니 당시는 감격적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십 수년 전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여행할 때, Holiday In 호텔에 투숙하고 아침 차편을 기다리는 사이 호텔 로비의 공중전화를 이용한 일이 있는데 1〜2분 후 전화를 끊고 보니 발 옆에 둔 손가방이 없어졌다. 진짜 눈 깜박할 사이였는데, 호텔 측에 신고했으나 공염불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 전짜리 동전 네 닢, 기약도 없는 손님이지만 고이 챙겼다가 되돌려 주는 그 세심함과 정직성이 우러러보이면서도 한편으론 뭔가 상큼하지 못한 느낌이 든다.

하찮은 것이라도 남의 것을 중히 여기는 그 정신은 분명히 존중되어야 하나,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이 어떤 여운을 남긴다.

일본 운동 시설의 사우나장 바닥에 젖은 물수건이 던져져 있으면 “조센진이 왔었구나”라고 비아냥거리는 일본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는데, 정말 민망하고 부끄러움이 비아냥거림을 탓할 수만 없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우나장 바닥에는 자기가 쓰던 물수건을 수거함이 옆에 있는데도 그냥 바닥에 던져서 널브러져 있는 것을 자주 본다.

명승 유원지 낚시터 산야를 막론하고 나뒹구는 쓰레기들은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기가 필요해서 가져갔다가 필요가 없게 되자 던져 버려진 것들인데, 남 생각 아니 하고 내 편한 대로 해 버리는 병든 마음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바람에 날려 공원 잔디밭에 떨어진 모자를 손이 닿지 않아 줍지 못하고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란 팻말 앞에서 울고 있는 소년의 모자를 지나가던 노신사가 지팡이로 꺼내 줬다는 소년과 ‘처칠 경’의 일화나, 별것 아닌 동전 네 닢이라도 손님의 것을 알뜰히 챙겼다가 되돌려 주는 세심한 배려의 정신은 신선한 충격이기도 하다.

되돌려 받은 일화 4엔, 알뜰히 챙겼다가 되돌려 주는 그 손결이 부럽고 고마우면서도 마음은 마냥 즐겁지만은 아니하다.

정녕 일본 사람이 이렇게 정직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이렇게 세심하고, 남의 것을 소중히 여겨 챙기는 마음이 이렇게 알뜰하다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일제 강점 36년간의 식민지 생활의 서러움, 특히 일제 말기를 살면서 겪은 잔혹상과 참담함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일본이 이웃 나라와 벌이고 있는 영토 분쟁은 무엇인가?

러시아, 중국, 필리핀과 영토 분쟁을 일으키고 우리 땅 독도를 죽도(竹島)란 이름으로 자기 땅이라 억지를 부리는 소행은 무엇인가?

나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 주장하면, 대마도를 ‘우산도’인 우리 땅이라 주장함이 걸맞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이런 식의 주장은 너 그렇고 나 그런 격이 되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세계 몇 대 문화유산, 세계 몇 대 자연경관 등 나는 그중에서도 ‘세계 3대 잔혹사’라면, 히틀러에 의한 유태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가스 참살, 잔혹한 노예상의 손을 거친 아프리카 자유민의 미국 노예화, 일본군에 의한 정신대를 꼽고 있다.

일본군에 의한 인간 생체 실험이나, 군수 보급품화한 정신대의 잔혹상은 인간 말살이며 참혹 무비라 할 것이다.

선(善)으로 위장하여 악을 징계하는 잔인성, 사기꾼의 가장한 정직성과 예의 바른 품위, 꼬리를 무는 생각에 휘둘리는 사이 노천탕 온천에서 몸을 풀던 일행은 자리를 뜨고 혼자만 남았다.

이 호텔은 산 정상부에 자리해서 노천 온천탕에 서면 가고시마 시내가 발아래 한눈에 들어온다.

노천 온천 잔디밭 모서리에 서서 가고시마 시내를 발아래 내려다보며 언덕 숲을 향해 사나이는 물총을 쏜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 또래가 일렬로 늘어서서 누가 누가 멀리 가나를 뽐내며 물총 쏘던 생각을 하며, 또 한편으론 신라 29대 태종대왕 비 문희가 언니 보희의 꿈, “서악에 올라 소변을 보니 경성이 물에 잠겼다”는 꿈 얘기를 떠올리며 짐짓 가고시마 시내를 내 소변으로 물바다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시골 선비가 장터에서 뺨 맞고 고갯길에서 눈 흘기며 고함치는 모습과, 개구쟁이 사내아이 물총 쏘는 모습이 일 엔짜리 동전 네 닢과 겹쳐져 시야가 흐려진다.

나의 노래

윤 길 수

새벽이면 때때로 나는 아버지의 낭송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그것은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같은 불경 암송 소리이기도 하고 때론 적벽부나 추성부 같은 명작 암송 소리이기도 했다.

맑고 깨끗한 그 목소리가 너무도 청아해서 아무 뜻도 모르는 어린 나의 귀에 조금도 거슬림이 없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내 나이 열 살 전후의 시절 잠결에 들릴락 말락 한 그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그 뒤 아버지의 암송 작품들이 다 수준 높은 고전이고 명작들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긴 문장들을 육십이 넘은 연세에도 그렇게 막힘없이 줄줄 외우셨던가, 지금 생각해도 그 기억력과 가창력이 놀라운 일이다.

그때 어머니도 은근히 아버지의 그 낭송을 즐기고 있어서 가끔 내게 아버지처럼 노래를 소리 높여 불러 보게도 했는데 주로 “이 풍진 세상에”로 시작하는 「희망가」나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로 시작하는 「학도가」를 청하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너는 너의 아버지 목청을 타고나서 노래를 참 잘한다.” 하며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요즘 세상에 태어나셨으면 훌륭한 테너 가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목소리는 특출했다.

우리 여섯 남매 중 둘째 오빠와 막내인 내가 아버지 목소리를 닮아 태어났다. 그런데도 둘째 오빠는 청년 시절 그림도 아버지처럼 썩 잘 그리고 무슨 무슨 콩쿠르에 나가서 최고상을 여러 차례 받기도 하였으나 그 길로는 가지 못하고 건축업을 하다가 유명을 달리하였고 나 또한 하고 싶은 음악을 전공하지를 못했다.

어릴 때부터 공회당이나 키네마 같은 큰 무대에서 독창도 하고 교내 합창부에서 솔리스트이기도 한 나는 끝내 음악을 좇아가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일생 동안 마냥 그리워하기만 했다.

아버지와 우리는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따라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예술을 천시하던 어둡고 몽매한 시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참 용기 없고 문명에 뒤떨어진 사람들이었다.

평생 학습 열풍이 불어 닥친 2000년 이후 그제서야 나는 가곡교실을 찾았다.

아무 할 일도, 무슨 바쁜 일도 없는 이 느지막한 나이에 찾은 나의 소망. 비록 프리마 돈나의 꿈은 영원히 기억 속에 묻혀 버렸지만 늦게나마 찾은 새로운 도전. 일주일에 한 번 모여 두 시간씩 마음껏 노래 부르는 이 시간이 기다려진다. 노래가 좋은 사람, 음악의 꿈을 버리지 못한 나 같은 사람들이 모여 다하지 못한 삶의 열정과 향수를 부추기고 또 달랜다.

최고의 자격과 지도력을 갖춘 미성의 테너 성악가. 내 맏이 연배쯤의 젊은 ‘ㅂ’교수. 점점 사라져 가려는 경로효친과 미풍양속, 우리것을 중히 여기는 그 마음 씀이 너무도 고맙고 갸륵하다. 게다가 어찌나 유머 감각과 위트가 시간마다 넘실대는지 언제나 그 시간은 활기차고 즐겁다.

우리는 거기서 남녀노소의 차이와 구별을 잊고 아름다움을 향한 마음에 하나가 된다. 그때는 어디서 그렇게 신명과 힘이 나는지 나도 모르게 젊은이가 되어 버린다.

노래는 역시 인생을 너그럽게 하고 살찌게 한다.

반가운 금요일.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음악 속에서 세월의 가시와 구김일랑 날려 버리고 마냥 행복해 한다.

11월에서 12월 한 해의 마무리 그 어느 쯤에 가서 향상음악회라는 작은 연주회를 갖는다. 그때 우리는 흥분과 긴장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리 우리끼리의 소박한 발표회라 하더라도, 제 기량과 열정을 선보이는 현장임에야! 낯선 눈빛 앞에서 야무진 용기마저 부끄럼을 탄다.

다 풀어져 향기 한 끝 없는 나의 일상에 일침이라도 맞는 듯한 긴장감이 그 발표를 준비하는 내내 나를 떠나지 않는다.

꽃잎 같은 감성에 새로운 도전이 아니겠는가?

이제 저마다 지나간 세월의 속살들을 바람처럼 흘려보내고 다만 시험을 치르는 소년 소녀가 되어 마음 졸이며 작은 무대에 선다.

수십 번을 외우고 다 외웠대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는 가사와 박자, 그것의 정확도가 언제나 문제이다. 그래도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다짐한다.

실내가 떠나가도록 터져 나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를 들으며 무대를 내려오는 자신을 꿈꾸며

‘나는 잘할 거야!’

‘그래! 아직 내 목소리는 늙지 않았어!’

라고.

수석 사랑

尹 鍾 五

내 앞에 수석 한 점이 놓여 있습니다. 문경을 가로질러 흐르는 영강(潁江)이 산지로 쌍봉형 산수경석입니다. 스무 해 전 손수 탐석하여 오늘까지 내 사랑을 받아 오고 있습니다. 까만 돌로 색감이 뛰어나고, 물씻김도 잘되어 있고, 질감이 좋아 광택이 자르르 흐릅니다. 주봉과 부봉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삼면법에도 맞아 밑면은 안정감이 있으며, 능선이 유연하고, 깊이 주름이 져 태고의 신비와 고태미가 물씬 나는 명석입니다.

이 한 점의 수석 앞에 앉으면 상상의 나래는 억만년 세월을 거슬러 오릅니다. 아승기겁 전에 지심(地心) 깊은 곳에서 형체도 가누지 못하는 마그마(암장)로 활활 온몸을 태운 적도 있었던 게 지표(地表)를 뚫고 화산으로 터져 나와 지열(地熱)이 식어 화성암이 되고, 화성암이 변하여 변성암이 되어 큰 바위덩이가 또 모진 비바람을 맞고 세월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깨어져 나왔습니다. 사원도 모를 곳에서 무량겁을 유전하여 이렇게도 신비하고 매력적인 수석으로 한 개체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니, 북송조의 미원장(米元章)이 바위를 보고 돌 어르신네(石丈) 하며 절을 한 그 심정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며, 옷깃을 여미고 고개가 숙여집니다.

나는 수석을 무척 사랑합니다. 40년 세월 동안 애석의 도가 점점 깊어 갑니다. 내가 수석을 이렇게도 사랑함은 수석이 나에게 베푸는 크나큰 사랑에 대한 보답이요, 갚음입니다. 수석은 신의 최상의 솜씨로 빚은 신공(神工)의 예술입니다. 인간이 창조한 예술로는 추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의 매력은 마력을 가지고 그의 신비성은 매혹을 불러일으킵니다.

수석은 석인들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고, 한없는 위안을 선사합니다. 수석은 어머님의 품 안처럼 아늑한 평화로움을 안겨 줍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 삭막한 사바세계를 살아갈 참으로 살맛을 안겨 줍니다. 수석은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정겨운 태곳적 얘기를 들려주어 내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내가 수석 앞에 나앉으면 수석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억만년 세월 동안 뼈를 깎는 아픔을 참고 견디는 인고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수석은 또 어떤 괴로움에도 한마디 하소연도 없이 침묵과 무언의 교훈을 줍니다.

수석은 나의 벗, 영원한 반려자입니다. 수석은 심오한 자연의 이법을 설법하는 내 마음의 부처요, 나의 제2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수석은 나의 갈 길을 인도하는 스승이요, 속세의 칠흑을 밝히는 등불이기도 합니다.

나는 수석을 사랑합니다. 한시도 잊지 못하고 미칠 만큼 사랑합니다. 만약 나에게서 수석을 빼앗아 버린다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수석이 없는 세상은 극락도 지옥이라 단정하고 싶습니다. 이렇게도 수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을 정복한다’느니, ‘목석연(木石然)하다’느니, ‘황금(黃金)을 보기를 돌 보듯 하라’느니 하는 자연과 수석을 모독하는 그런 말은 아예 쓰지를 않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수석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돌밭을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마음에 드는 심석(心石) 한 점이라도 얻으면 온 천하를 얻은 듯 기뻐 날뛰며 탐석하다가 손에 든 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갗에 상처를 입힐까 조심스럽게 돌을 제자리에 놓습니다. 탐석해 온 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산지로 지고 가 돌려줍니다.

참된 애석 생활을 하다가 보면 두 가지 큰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탐석의 즐거움입니다. 탐석행 전날 밤은 초등 학동이 소풍 가던 전날처럼 마음이 설레어 밤잠도 설칩니다. 어떤 수석과 인연을 맺을까 기대감에 부풀기도 합니다. 탐석행 차 안에는 동호인만 탑승하고 즐거운 돌 얘기로 왁자지껄 떠들어 댑니다.

돌밭에 도착하면 쉴 새 없이 탐석에 열중합니다.

철벙철벙 물속을 헤매며 천진하게 동심으로 돌아가 수석을 줍습니다. 장원석을 탐석한 석인은 으레 장원주를 내고, 장원주에 거나하게 취하는 귀로에는 마이크를 잡고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고 흥을 돕웁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구워 먹고” 하는 실언(失言)도 튀어나옵니다. 거지가 도승지보고 불쌍하다 하듯 수석을 모르는 미국의 빌 클린턴을 불쌍하다 동정하며 객기(客氣)에 찬 기분으로 탐석의 즐거움을 만끽합니다.

둘째는 감상(鑑賞)의 즐거움입니다.

석력(石歷)이 쌓여 가니 내 석실(石室)은 알찬 수석으로 쌓여 갑니다.

산수경석(山水景石)·물형석(物形石)·문양석(紋樣石)·미석(美石) 등 다채롭게 모였습니다.

청산은 우거져 새들이 깃들고, 호수는 푸르러 명경지수를 이루었습니다. 쏟아지는 폭포수는 골을 울리고 넓고 푸른 평원에는 풀을 뜯던 소들의 새김질이 한창입니다. 사군자(四君子)는 청초한 운치를 풍기고, 구순 노부(九旬老父)는 문설주에 기대어 자식을 기다리는 의려지망(倚閭之望)도 있습니다. 푸른 장송 위에서 율을 켜는 청학도 있고, 십장생(十長生)·십이지(十二支)도 빠짐없이 갖춰 놓았습니다.

나는 출근 시나 나들이를 할 때는 반드시 석실을 노크하여 하나하나의 수석에 눈맞춤을 하고 애정을 주고 떠나며 돌아와서는 다시 어루만지며 출필곡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을 합니다. 자고 나면 바로 석실을 찾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석실을 들르니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는 격입니다.

내가 석실 문을 노크하면 진열된 백여 점의 수석 가족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나를 반가이 맞습니다. 아마도 내 사랑을 갈구하고 대화를 나누자는 것이겠지요. 나는 물을 뿜어 주며 애정을 쏟고 밤이 이슥하도록 대화를 나눕니다.

날이 밝으면 또 배낭을 메고 한가로이 콧노래를 부르며 산하를 누빌 것입니다.

파노라마

이 경 숙

사십 년 가까이 근무하던 직장에서 퇴직한 지 일 년이 넘었다. 그동안 어떻게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모르게 세월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고 있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조금씩 기웃거리기도 하고, 건강에 이상 징후가 보여 병원을 들락거리기도 하면서. 다행히 입원할 정도의 상태는 아니어서 안심은 하였지만 지금까지의 생활 태도와는 다르게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경고장을 받은 셈이었다.

주위에서 친구들이 퇴직 기념 해외여행을 간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아예 먼 나라의 얘기인 양 한쪽 귀로 듣고 흘려버리곤 했었다. 지난날 한때 무척 좋아했던 여행을 건강 때문에 못 간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지만.

건강에 도움이 될 것같이 보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였다. 그러기를 어언 일 년이 지나가며 스스로 느끼기에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지인들도 퇴직한 후 확실히 나아졌다고 하며 좀 더 일찍 나올 걸 그랬다고 하기도 했다. 직장 일이 힘들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두지 못하고 끝까지 머뭇거렸던 것이 조금은 후회스럽게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여름 어느 날 우연히 동유럽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한 열흘 남짓 걸린다고 했다. 나는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힘들어서 못 갈 것이라고 거절부터 하였다. 며칠도 아니고 열흘이 넘는 날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고 하면서. 그런데 돌아서서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지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여행을 권유하는 사람들은 지금 안 가면 이제 더 늙어지고 죽기 전에 다시는 못 가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말들을 들으며 “누가 가기 싫어서 안 가나……” 하며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었다.

동유럽 하니까 제일 먼저 스위스 생각이 났다. 중학교 때 밤을 새며 읽었던 ‘알프스의 소녀’에 나오는 ‘하이디, 클라라’ 같은 이름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로라하는 친구들의 유럽 갔다 온 얘기들을 들으며 부러웠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동안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리라는 기대감이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심정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프랑크푸르트에 내려서부터 전용 버스로 여행을 시작하였다. 긴 버스의 옆면에 ‘파노라마’라는 영어 글씨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매번 차에서 내려 구경을 하고는 다시 그 파노라마에 올라타곤 하였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며칠이 지난 후 이상하게 대문자로 굵게 쓰여진 그 단어가 자꾸만 눈에 띄는 것이었다.

여행을 다니며 소설에서나 읽고 사진으로만 보던 이국의 경치를 직접 보며 감탄도 하고 꽤 유식한 가이드의 끊임없는 설명을 듣기도 했지만 머리에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하루 구경을 마치고 돌아서서 자고 나면 그 전날 무엇을 봤는지 얘기하기가 힘들 정도로 기억력이 영 말이 아니었다. 단순히 나이 탓을 하기에는 좀 심한 건망증이 느껴져 자신에게 실망을 하곤 했다. 단지 세 여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몽 군주 마리아 테레지아와 엘리자베스 씨씨 그리고 소피아 왕비—에 얽힌 얘기들은 가슴에 진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버스로 댓 시간씩 몇 개 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가이드는 정말이지 많은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 내용들을 건성으로 들으며 차창 밖을 무심히 내다보곤 했다. 육백 년의 건축 기간에 걸친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며 성당, 아름다운 건물과 경치들. 여행은 일정에 따라 루체른, 인스부르크, 잘츠부르크, 비엔나, 부다페스트, 프라하 등의 생소한 도시들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하여 움직이는 여행.

온 산야가 푸른 잔디로 뒤덮여 있고 크리스마스카드에서 본 듯한 그림 같은 집들이 띄엄띄엄 보이는 스위스의 알프스 산장에 내렸을 때는 무리를 해서라도 여행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유럽 여행을 떠난다고 했더니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구나” 하며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구십 노구를 힘겹게 지탱하시던. 그 어머니 말씀대로 힘겨워 못 올 뻔했던 이번 여행을 하며 그동안 애쓰며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을 받는 듯 마음이 푸근해지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무상이 신속하여 언제 지나가 버렸는지 모르는 육십여 년의 시간들. 좋은 일들이 더 많았음에도 안타까운 기억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완벽주의적인 성격 때문일까. 한 생각 돌이키면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만족하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어리석고 욕심이 많은 탓으로 바보스럽게 살기도 하고 누군가의 말처럼 젖은 짚단에 불을 붙이듯 했던 기억들. 오욕칠정에 끄달리며 쉼없이 흘려보낸 지난 날들이 오래된 전생의 사실인 양 희미하게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져 가곤 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라는 말과 같이 어떤 상황도 고정되거나 영원한 것은 없는데 너무 집착하며 살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에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특히 진한 의미로 기억되는 몇몇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고마움 등이 절절하게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어쩌면 그 모든 사람들은 수 억년 전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내가 만든 인연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 생이 끝이 아니고 또다시 다음 생으로 윤회전생 하며 이어질 끝없는 생사의 파노라마.

멈춰진 시간

이 금 태

소녀의 젖 망울만큼 봉긋이 올라온 석류가 빛살에 반짝인다. 미처 벌, 나비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붉은 꽃들은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파아란 하늘이 가득 찬 나뭇가지 아래 어머니의 순정과 아버지의 멋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박여 있다. 당신들이 손수 심으신 그 나무 아래서 찰나의 움직임을 붙들어 둔 두 분은 그 순간만큼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

뜻밖이었다, 사진을 발견하게 된 것은. 두 분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버지의 오래된 지갑에 사진은 끼워져 있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 대하듯 했던 부부간의 정을 생각하면 이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곁에 서 있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꼭 지금의 나인 것 같은 착각이 될 정도로 빛바랜 사진 속 어머니는 젊었다. 두 분의 데면데면함이 집 안의 분위기까지 냉랭하게 하여 어린 우리들 마음까지 그늘지게 했었다.

삶에 골물이 들어 내외간의 정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선지 본래 타고난 성격이 무뚝뚝하고 매몰차서 그런지 어머니가 지아비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당신께서 거처하시던 안방에 여러 가지 사연을 지닌 자식들의 사진과 앙증맞은 손자들의 모습은 군데군데 있었지만, 어디에도 두 분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진첩 몇 권을 뒤져도 영정으로 모신 것 외엔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자식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그 사진의 발견으로 숨이 가빠지며 가슴이 절로 메어 왔다.

살면서 당신처럼 옹이가 마디마디 박인 삶은 살지 않으리라 늘 다짐을 두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여로에 덧칠하듯 하나씩 닮아 갔다. 반백 년을 훌쩍 넘긴 나에게는 야위어지는 추억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탱탱하고 아름다운 시절에 찍었던 사진은 헤어진 남편의 집에 깡그리 두고 나왔던 것이다. 정신없이 혼란한 시간에 그것까지 챙길 겨를도 없었지만, 홀가분하게 털고 나오느라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한 불찰이었다. 멈춰진 시간 속 흔적을 내가 아닌 그가 모두 연기로 날려 보냈다고 들었을 때, 나의 가슴은 덩어리가 콱 막히는 것 같았다.

하얀 귀밑머리가 늘어나면서부터 나의 형태를 종이 한 장에 남기는 것이 두려웠다.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손이 되어 떠나지만, 미련처럼 남기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시간의 변신은 기술의 변화까지 불러와서 모습을 바꾸는 고도화된 기술이 들어간 요즘 사진은 도통 정이 가지 않아서, 허기진 세월의 흑백 사진 속 기억으로 빠져들게 한다. 흑백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곰곰이 스며든다는 것은 늙어 가는 증거일 텐데, 갑자기 마음에 조급증이 난다.

인간의 모든 일들은 인(因)과 연(緣)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하여 결과가 생긴다고 했다. 그렇다면 삼베처럼 질긴 연(緣)이 무슴슴한 그들에게 삶의 단편을 남긴 것인가. 빛 좋은 개살구같이 허울 좋은 남편을 거름처럼 뒷받침하느라 마음에 골병이 들었을 어머니에 대한 빚 갚음이었을까. 그 무렵 필시 두 분만의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흠잡을 데 없는 살림살이와 집안 대소사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신 어머니에게도 필시 그때에 찾아오는 절망과 고독을 품고 드러나지 않는 병을 앓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첫새벽 살어둠 사이로 매일같이 장독대 위에 정화수 떠 놓고 두 손을 비비고 계셨다. 무엇에 대한 당부인지 지금도 알지 못하지만, 가끔은 꿈에서도 그 모습이 보인다. 그럴 때면 가슴이 갑갑해지고 식은땀이 몸에 젖어 한기마저 들었다. 어느 사이 나도 문신처럼 남기고 간 그 행위를 따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누덕누덕해진 손때 묻은 지갑 속에 아내와의 정을 못물처럼 가두어 두고 조금씩 꺼내어 흘려 보내셨나 보다. 파뿌리같이 희어진 머릿속 깊은 곳에 안타까이 못 잊는 세월을 반추하며 멈춰진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아이들이 어디에서 내 흔적을 찾을까? 언제고 한때를 머물러 가는 바위 위에 앉던, 그늘이 드리워진 선(善)한 나무 곁에 서던 한 폭의 그림처럼 나를 남겨 두고 싶다.

실크 로드를 따라서

이 동 민

이번 여행에 따라나선 것은 순전히 무지의 소치였다. 불교 미술을 공부하면서 보살상의 화려한 장식이 소그드라는 곳의 영향이라고 알았다. 이번 여행의 일정이 바로 예전에 소그드라고 불렀던 땅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책을 통해 알았던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오늘에는 무슨 스탄, 무슨 스탄이라고 이름이 붙은 나라들이다. 칭기스칸 이래로 티무르 제국 등의 거대한 국가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내가 흥미를 느꼈던 것은 이곳의 역사가 아니고 문화이다. 문화의 교류가 일어난 실크 로드라는 길을 달려 보는 것이고, 그 문화가 우리나라에 흘러들어 온 길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몇 해 전부터 실크 로드 답사를 통하여 서안에서 까슈가와까지 가는 사막 길에서 많은 불교 유적을 보았다. 천산북로라고 부르는 또 다른 실크 로드에는 어떤 유적이 나를 맞아 줄지가 궁금하였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때도, 공항을 빠져나올 때도 어떤 유적이 나를 맞이해 줄까 싶어서 가슴이 설레었다. 초원지라고 하니 시원한 풀밭이 펼쳐져 있으리라는 기대도 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다시 두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본 땅은 온통 황토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타림 분지라고 하던가. 아니 타클라마칸 사막이라고 하였다. 그 길을 다시 12시간 동안이나 버스를 타고 달려야 하는 지옥 길의 행로는 까맣게 몰랐다.

히바는 16세기 초에 티무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지금 20개의 모스크, 20개의 메트레서, 6개의 미나레트를 남겼다. 여장을 푼 호텔의 바로 앞에는 티무르 왕국의 성벽이 가로막았다. 이후의 여행 길에서는 꼭 같은 형태(내 눈에는)의 건물을 두고 모스크, 메트레서, 미나레트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고, 영묘도 수없이 보았다. 어디에도 내가 기대하였던 불교 유적이나, 스키타이 문명은 흔적을 보지 못하였다.

나무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들었던 흙 벽돌담 사이의 골목길은 후끈 달아오른 열기가 가득하였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듣는 일도, 아니 햇볕 아래에 서서 왕국의 역사 이야기를 듣는 일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담벼락이 만들어 주는 좁은 그늘이라도 나타나면 우 몰려가서 햇볕을 피하였다. 일행 중 한 사람이 현지인에게 빌려 온 온도계에는 그늘인데도 섭씨 47도를 가리켰다. 햇볕에서는 족히 55도는 된다고 하였다. “이걸 기록으로 남겨야 돼,”라면서 온도계를 들고 사진을 찍느라 법석을 떨었다.

나는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이슬람 미술은 외면하였다. 그림과 조각상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흥미를 끌 만한 작품을 만날 수 없었다. 모스크로 대표되는 건물 양식도 단조롭고, 변화가 없었다. 그만큼 기대하였던 미술품을 만나지 못하였다. 거기에다 사람의 생기를 흐물흐물하도록 녹여 버리는 열기는 여행에 따라나선 내가 후회하도록 해 주었다. 그렇더라도 젊은 시절에 보았던 영화 속의 대장 부리바가 말을 타고 달렸던 대초원이고, 용맹무쌍하였던 코사크 기병의 고향이라는 땅을 버스를 타고 달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즐거움이었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스키타이 문화라고 하는 황금 갑옷과 동물 문양의 장식품을 만났다. 그러나 전시품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박물관을 소개하는 책자를 구하였으나 소련어로 된 논문집이어서 살 수 없었다. 내가 기대하고 왔던 것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던 것은, 한 시간도 안 되었지만 알마티 박물관의 관람이었다. 책이라도 구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알마티에는 그리스 정교의 교회도 있었다. 성당의 내부는 모스크와 달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정면에는 수많은 성인이 열을 지어 있는 그림이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 상만으로 장식되어 있는 한국의 성당이나 교회보다는 훨씬 더 화려하였다. 이에 비한다면 모스크의 내부는 텅 빈 창고나 다름 아니었다. 사막 지대에서 생겨난 종교가 그림이나 조각상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코란에 의하였더라도, 코란이 금지한 까닭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내가 무지한 것이다.

고딕 성당이나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에 수많은 성인을 조상하여 숭배하는 것은 또 하나의 다신교적인 면모라고 쓴 글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슬람교가 형상을 없앤 것은 유일신 숭배를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이슬람의 예배 의례가 비교적 단순하다니까 몸을 지탱하기도 겨운 더위에 적합한 예배 의례라서일까? 모슬렘의 단순성이 그런 환경에 연유한 것이라면 수긍이 될 듯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마찬가지로 유일신을 신봉하는 가톨릭에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상을 만들고, 성인을 숭배하는 것도 나름대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라 싶었다. 그렇다면 알라 신을 신봉하는 모슬렘도 인간이 갖고 있는 원초적 욕망을 벗어 버릴 수 있을까?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 대왕의 영묘를 방문하면서 얼핏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단순한 모스크에 대신하여 화려하게 지은 영묘에는 시신을 모시고 참배를 한다. 영묘도 화려하게 꾸민다. 타지마할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나온 도시의 모슬렘 유적지에는 모스크와 이웃하여 영묘가 있었다. 교회 안의 성인상과 영묘에 모셔져 있는 유명인의 시신은 서로 유사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모스크도 영묘도 정교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문양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무 문에 조각해 둔 문양도, 여인들이 입고 있는 의상의 문양도 화려하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너무 화려하여 오히려 번거로웠다.

“맞다. 저거다.”

순간 내 머리를 스쳐 가는 것은 우리나라 보살상이 입고 있는 의상의 화려함이었다. 저 화려한 문양과 장식이 우리나라 보살상에 연계되어 있겠구나. 모슬렘은 모스크에 비록 그림과 조각상은 남기지 않았더라도 영묘와 화려한 장식을 통하여 인간이 갖는 욕망을 채웠구나. 그렇다면 인간이 사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2011. 8.

선물

이 미 영

엉덩이에 라이트를 치켜세운 차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약속 시간이 빠듯한 탓에 유독 내 앞길만 더 늘어선 듯이 보인다. 사이드 미러, 룸 미러를 바쁘게 곁눈질하다가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차선을 갈아탄다. 내달리지 못하고 신호에 걸려서 기다라고 있자니 앞차의 꽁무니를 붙잡고 따라가지 못한 것이 마지막 기차라도 놓친 기분이다. 파란 불이 들어올 때까지 100m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는 달리기 선수처럼 심박동이 숨 가쁘다. 출발 신호와 함께 불붙은 로켓처럼 튀어 오른다. 방해가 되는 다른 차들을 향해서 저들은 들을 수 없다는 얄팍한 심정으로 비난을 퍼붓는다. 요리 빠지고 조리 빠져서 슬라이딩을 하듯이 가까스로 시간에 닿는다.

성악설에 관계된 강의가 있는 곳이다. 고난을 헤치고 당도한지라 보상 받으려는 심리가 작용한다. 좋은 자리를 찾으려고 소리 없이 곁눈질을 한다. 훑어보다가 탐나는 자리 하나 발견한다. 앞줄에서 세 번째 자리다. 무슨 연유로 띄엄띄엄 몇 명만이 앉아 있다. 한눈에도 명당이다 싶다. 다들 자리를 잡은 터라 다리가 가슴팍에 닿을 듯 움츠려 앞자리로 찾아간다. 여유가 있어 보이는 그 줄의 중간 정도가 적당하다 싶어 가장자리의 여자 분에게 비켜 달라는 뜻으로 미안한 안색을 짓는다. 그 여인의 얼굴을 살핀다. 순간 후회가 엄습해 온다. 그러면 그렇지, 누구나 바라는 자리가 비어 있을 리 있었겠는가. 이마는 쑥 들어가고 볼 주위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안면 기형이 아닌가 싶다. 때는 이미 늦었다. 벌써 눈이 마주친 상태이고 그녀는 몸을 옆으로 틀어 공간을 내어 준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하고 하는 수 없이 오른쪽으로 들어가 앉는다. 다행히 우편의 여유가 좀 더 있음을 감지하고 티가 나지 않도록 옆으로 당겨 앉는다. 물론 가방도 오른편 사람 곁으로 둔다.

다행히 강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주섬주섬 필기구를 꺼내 무릎에 둔다. 다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우측으로 엉덩이를 최대한 밀어 넣는다. 강사가 올라오기 전까지 소개 말씀이 진행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눈을 굴려서 옆자리 여인네를 탐색한다. 차마 허리 위쪽까지는 레이더를 작동시키지 못한다. 군데군데 표피가 벗겨진 검은색 구두에 오래 전에 떨어져 눌어붙어 거무스름하게 된 고추장 국물 흔적이 보인다. 천천히 시선을 당기니 허벅지 전체로 땟자국이 반질반질하다. 가자미눈을 한 탓에 안구가 빡빡하게 조여 온다. 더 살펴보고 싶지만 눈 상태가 허락하지 않는다. 이를 어쩌나, 두 시간을 저런 사람 옆에서 견딜 자신이 없다. 자리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니 마칠 때까지는 없는 인내심이라도 만들어 내야 하는 자신을 책한다.

연사가 등장하고 박수 소리가 요란하다. 간단한 인사말 뒤에 본론으로 이어진다. 코가 예민하게 반응한다. 어디서 동물원의 코끼리 우리 냄새가 배어 나온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으로 동물원에 갈 적이면 폐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오던 바로 그 냄새다. 동물성 비린내 때문에 헛구역질을 했던 후각의 기억, 절대 즐거운 나들이가 될 수 없었던 그곳을 지키던 고약한 내음. 몇 초 지나지 않아 악취의 진원지가 옆자리임을 간파한다. 어찌하여 저런 몸가짐으로 이런 자리에 왔단 말인가.

그녀는 지금 진행되는 강의가 무슨 내용인지는 이해할 수 있을까. 어라 제법 책도 찾아보고 필기까지 한다. 점점 모호해진다. 차림새만 보면 이곳에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인물이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이제 강의는 뒷전으로 하고 여인 속으로 빠져든다. 사람들의 존경은 받지만 얼굴은 없는 도인일 것이다. 위장을 하고 이 자리에 나타나 편견 없이 자기를 바라보는 의인을 찾고 있다. 자신을 알아보는 이에게 그가 터득한 도, 그리고 이제껏 쌓아 온 재물을 주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이 사람의 진면목을 찾아내는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 되리라. 그래도 후각을 마비시키는 정체불명의 지독한 냄새가 이성을 일깨운다. 정신 차려라, 정신을…….

어느새 옆자리 여인의 존재를 잊고 내 안으로 몰입한다. 과연 누구나 다 착하게 태어났을까. 성선설을 믿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세상이 그나마 살 만한 것 같았다. 티 없는 존재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나쁜 것들을 배워서 행하게 된다고 굳게 믿었다. 하나 그 악은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태어날 때부터 불의란 몰랐던 인간 존재가 어떻게,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체득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악한 피조물로 출발한 것인가 보다. 본체 안에 미미했던 선이라는 부분이 가르침을 통하여 조금씩 커지는 모양이다. 처음보다 더 좋은 것들로 채워 가면서 착하고 도리에 맞는 모습으로 발전되는 과정이 인간적인 삶의 자세는 아닐는지.

겉모습이 다르게 생겼다고 경계하고, 초라한 모양새라고 몰래 비켜 앉는 내가 어찌 고운 심성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왔다는 말인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지만 혹여 비난의 눈총이라도 쏟아질까 봐 내색도 못 하고 있으면서. 꽁꽁 싸 두었던 인격이 드러날까 봐 고개를 숙이고 눈동자만 분주히 돌리는 사람이 무슨 성선설을 운운할 자격이라도 있단 말인가.

강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내 안에 빠져 있는 사이에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렸다. 강단 위의 저 사람과 자리만 지킨 이 사람은 한 공간에서 낯선 의식을 공유했다. 저 여인네가 이 시간 내게 하나의 숙제를 안기려고 온 모양이다. 이 무슨 원효 대사의 해골 물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순자의 성악설 공부 따위가 이런 이중적인 인사에게 무슨 쓸모가 있겠다고 복잡한 도로를 탓하며 여기까지 왔는지.

박수 소리가 커지고 연단에만 켜져 있던 불이 강당 전체로 퍼진다. 다들 분주히 일어나 돌아가려는 채비를 차린다. 앞줄에 자리한 터라 사람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린다. 지켜보던 왼쪽 여인이 일어나 길을 터 준다. 다시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다. 웃어 준다. 하얀 편에 속하는 안색이 맑아 보인다. 볼살이 유독 많은 편이지만 얼굴에는 이상이 없음에 틀림없다. 시작 전에는 보조 조명만 밝혀 놓았던지라 안면에 그늘이 져서 그렇게 보였던가 보다. 남루한 옷차림이며 코를 잡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 여인 내게 웃고 있다. 나도 따라 웃는다. 갑자기 좋은 사람으로 변신한 기분이 든다. 미소 한 번 받았을 뿐인데 가슴이 두둥실 떠오른다. 숙제로 왔던 그녀가 선물이 되어 돌아간다.

살판을 위한 멍석을 펴자

이 병 훈

서양 연희(演戱)의 기원은 신들의 경배를 위한 것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신들은 인간과 똑같은 모습과 감정을 지녔는데 다만 죽지 않는다는 생각에 인간은 신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신과 인간의 경계를 위한 무대가 생겼고 그곳은 신성한 곳이며 또한 연희자는 신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희자는 객석이 아닌 무대 뒤에서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연희는 ‘놀이판’이었다. 커다란 마당이나 빈 터에 멍석을 깔면 그것이 곧 무대였으며 또 그 위로 차일을 치면 바로 공연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 놀이판에는 무대와 객석에 대한 특별한 경계가 없는 듯하다. 결국은 한 치 높이의 멍석의 안과 밖이 바로 무대고 객석이었던 것이다. 연희의 파장(罷場)은 연희자와 관객이 한데 어우러지는 뒤풀이로 연결되어져 있다. 이처럼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것이 우리의 전통 연희다. 이는 서양의 연희와는 매우 다른 특성인 것 같다.

멍석에 대하여 언급하면, 우리 속담에 “하던 짓도 멍석을 펴면 안 한다”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어떤 행위를 더 잘할 수 있도록 해 주면 막상 하기 싫어지는 사람들의 야릇한 심리를 담고 있다. 즉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리도 마찬가지이며 이 속담은 심리적인 반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규보의 지지헌기(止止軒記)에 ‘지지(止止)’라는 말이 있다. 이는 ‘능히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에는 허물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즉 처신의 어리석음을 꼬집는 경구가 아닌가 한다. 판이 아무리 흥이 난다 하여 파장도 아닌 막중에 무대로 뛰어 들어가는 무모함도 문제거니와 이쯤에서 내려옴이 마땅한 판세인데도 막무가내로 버티는 아둔함도 문제일 것이다. 말하자면 ‘박수 칠 때 떠나야’ 함이 옳다는 것과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우리의 놀이판에는 살판(땅재주놀이), 덧뵈기(탈놀이), 버나(접시돌리기), 어름(줄타기), 덜미(꼭두각시놀이), 풍물이 있는데 특히 ‘살판’이 그 중심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들 ‘살판났다’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좀 지나면 나라에 대선(大選) 총선이라는 신명나는 한판의 놀이판이 준비되어 있다. 얼마 전에는 서울 한마당에서 일개 시민운동가가 거대한 조직의 기성 정당 후보들을 제치고 놀이판에서 ‘얼쑤’ 추임새를 외치며 민초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제 제대로 된 신명나는 한판을 위하여 모든 이가 횃불을 밝히며 추임새를 넣으려 한다. 그런데 막상 판은 벌어져 있는데 청개구리 심보도 고약하지만 ‘지지’를 모르는 연희자가 있어서도 정말 곤란할 것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흥겨움으로 파안대소할 수 있는 그런 살판이 되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그래야 우리 같은 민초들도 얼쑤 하며 한바탕 어깨춤이라도 흉내내 볼 수 있을 테니까.

한 장의 사진

— 외손녀 육아 일기 초(抄)

이 원 성

×월 ×일

딸이 산후 조리를 하기 위하여 멀리 경기도 화성에서 왔다.

오늘이 삼칠날인 지원이는 포대기에 싸여 놀란 새가슴처럼 색색 숨을 쉰다. 잠자는 모습이 천사의 얼굴처럼 평화만이 깃들어 있는 듯 맑고 밝다.

태어나서 스무 날밖에 안 된 핏덩이 같은 것이 두 시간여를 차에 시달려 왔으니 엄청난 긴 여행이다. 신생아에 알맞게 조절되어 있는 산후조리원의 공기 속에 있다가 기차에 실려 멀리 왔으니, 환경이 섞바뀌어 놀라지 않았을까 염려된다.

상전 모시듯 조심조심 방에 고이 눕혔다. 조막만 한 것인데도 온 집에 가득 찬 듯하다.

갑자기 무엇에 놀랐는지 ‘응애 응애’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우리 집에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는 실로 이십 년 만이다. 집 안에 생기가 도는 것 같다.

이 여름을 잘 넘기고 두어 달 뒤엔 무탈하게 제집으로 가야 할 텐데 싶어 걱정이 앞선다.

×월 ×일

지원이가 우리 집에 온 첫날 새벽부터 찡얼거린다. 무엇인가가 불편한 듯하다. 체온계로 열을 재 보니 38도를 오르내린다. 일요일이라 동네 병원은 휴진이니 P병원 응급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하루 사이에 환경이 급작스레 몇 번씩이나 바뀌었으니 감기가 들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의사는 뇌수막염이나 패혈증일지도 모르니 입원을 하여 검사를 해 보아야 확실한 진단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뇌수막염은 척추 물을 빼서 검사를 하고, 패혈증은 혈액 검사를 해야 된다고 하니 이 갓난아이에게 주삿바늘을 어떻게 꽂는단 말인가. 기가 막히는 일이다.

어제저녁까지도 아무렇지 않던 아이가 느닷없이 뇌수막염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단순한 감기가 아니겠느냐고 반문을 하니, 신생아에게는 단순한 감기약은 쓸 수 없으니 그냥 퇴원을 해도 좋지만 만약 집에 돌아가서 열이 더 올라 심해지면 손을 쓸 수 없을 터인데 어떻게 할 거냐 한다. 아마도 과잉 진료다 싶지만 더 할 말이 없어 의사가 하라는 대로 따랐다.

척추에 주삿바늘을 꽂으니 놀란 울음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내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듯 온몸이 오그라진다. 어른 엄지손가락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아 채혈을 하고 거기에 링거를 연결한 후, 손바닥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아 고정시킨다. 그 광경은 목불인견이라 차마 옆에 서있을 수 없었다.

병실에 눕혀 놓으니 숨을 할딱인다. 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사 표시를 못하는 이 갓난아이에겐 너무나 큰 시련이다.

×월 ×일

입원한 지 나흘 만에 검사 결과가 나왔다. 뇌수막염은 아니나 패혈증이라고 한다. 패혈증도 위중한 병이다. 어떻게 이런 병이 지원에게 온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검사 결과를 가지고 진단한 것이니 믿을 수밖에.

병상에 누워 편안히 자는 지원은 평상 상태다. 링거를 꽂은 손이 불편한 듯 꼼작거린다. 살며시 쥐어 봤다. 앙증스럽게 보드라운 손의 온기가 내 손으로 옮겨 온다.

×월 ×일

입원한 지 닷새 만에 퇴원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외래로 오라며 먹는 항생제를 처방해 준다. 생후 한 달도 채 안 된 어린것에게 항생제를 먹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그러나 패혈증에는 항생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집에 오니 분위기가 병원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지 얼굴 표정에 한결 편안함이 배어 나온다. 제 어미도 딸 곁에 앉으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자식 키우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할지…….

×월 ×일

숨소리가 고른 것으로 봐서 몸 상태가 정상이 된 것 같다. 온 식구가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다.

약이 아직 이틀분이 남았는데 약을 먹이지 않았다. 계속 약을 먹이는 것이 걱정스러워서였다.

새근새근 잠자는 모습에는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잠자면서 한 번씩 방긋 웃는다. 무슨 뜻이 있는 게 아닐 게다. 그냥 본능적인 배냇짓의 웃음이다. 이 세상의 귀여움이란 귀여움이 다 모인 이 웃는 얼굴을 보고 같이 웃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보냐. 온 방 안에 소리 없는 밝은 웃음이 가득하다.

×월 ×일

아내가 지원이를 재우고 있다. 다독다독 다독이며 자장가를 부른다.

“자장자장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멍멍개야 짖지 마라

꼬꼬닭도 울지 마라

우리 지원 잠 못 잔다”

4·4조의 율조를 4분의 3박자로 조용히 부른다. 노래를 알아듣는지는 몰라도 잘도 잔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평화롭게 자는 얼굴에는 부처의 자비가 흐르는 것 같고, 하늘이 내린 사랑이 가득한 것 같다. 종교 이상으로 참되고, 예술 이상으로 아름답다.

나도 자장가를 불러 본다. “자장자장…” 음정이 뒤죽박죽 엉망이다. 이 난맥의 가락에 아이가 깰 것 같다. 6남매의 자식을 키웠고, 손자 손녀 9종남매를 뒀는데도 생활에 쫓겨 바삐 쏘다니느라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들을 재워 본 적이 없었다.

×월 ×일

보채는 것으로 보아 수상쩍어 체온을 재 보니 미열이 있다. 생후 40여 일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자주 아프단 말인가. 육아에 무슨 잘못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사돈네 보기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외손은 친손보다 조심스러워서인지 키우기가 더 어렵다.

젊은 의사보다 임상 경험이 많은 나이 많은 의사가 나을 것 같아, 승용차로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B소아과로 갔다. B원장은 노경의 의사로 나와는 오랜 친분이 있어 깊은 대화가 되기에 갖가지의 의문을 물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냥 형식적이 아닌 세밀한 진찰을 하여, 직접 주사를 놓고 꼼꼼히 생각하여 약을 처방해 주니 무척 고마웠고 낯선 병원보다 믿음이 갔다. 정성을 다한 치료 덕분으로 해 질 무렵부터 훨씬 덜해졌다. 마음이 놓였다.

×월 ×일

지원이가 옹알이를 했다. 백일이 가까워야 옹알이를 한다는데, 아직 백일이 멀었는데도 어르면 표정이 달라진다.

올되나 싶지만 한 달도 채 안 되는 차이이니 그리 대견한 것은 아니다.

“지원아!” 하고 부르면 얼굴이 환해지며 옹알거린다. 하도 귀여워 모두가 자꾸 얼러 댄다. 그런데 내가 어르면 더 활짝 웃는다. 어르는 사람에 따라 감정의 전달이 다르다는 것은 지각 신경이 조금씩 발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음성을 구별하여 들을 줄 아는 것이 신기하다.

×월 ×일

아내가 매일 부르는 자장가가 귀에 익었는지 지원에게는 이젠 자장가가 아니다. 놀이의 노래다. 자장가를 부를라치면 자다가도 눈을 활짝 뜨고 환히 웃는다.

그 표정이 하 좋아 나도 곡조도 안 맞는 자장가를 자주 부른다. 내가 자장가를 부르면 아내의 자장가보다 다르게 옹알대며 더 진하게 반응한다.

아내의 자장가는 박자가 정확한데, 내가 부르는 자장가는 옆에서 들으면 논어나 명심보감을 읽는 것 같다고 한다. 그래도 지원이는 내가 부르는 자장가가 더 좋다는데 어찌하랴.

×월 ×일

날이 밝으면 지원이가 제집으로 간다.

석 달 가까이 데리고 있다가 보낸다고 생각하니, 간직하고 있던 귀한 보옥을 잃는 것 같은 애틋한 마음이다. 제집으로 가는데도 말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 동그랗게 뜬 눈에

내 가슴 찡하게 젖는다.

별빛에 반사된 까만 눈동자

별보다 더 반짝이네.

별이 알알이 박힌 현요(眩耀)한 동공에

눈이 부시어 나는 눈을 감는다.

투명한 눈빛에 신의 기도가 흐르듯

신비의 광채가 투영(透映)되네.

×월 ×일

사진 한 장을 거실 장식대 유리판 밑에 끼워 놓고 지원이는 갔다. 지원이의 흔적은 이제 사진 한 장뿐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니 지원이의 체온이 가득히 배어 온 집 안에 흐른다.

고학력 시대

이 은 재

고학력 시대에도 검정고시학원은 성업 중이다. 매년 2회에 걸쳐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검정고시는 초·중·고등부를 합쳐 일만 오천여 명씩 지원하지만 합격률은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고학력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검정고시학원 문을 두드렸다. 놀빛으로 물드는 이순의 해(2005. 6. 5)였다. 교실 문을 들어서자 아줌마 몇이 희끗해진 내 머리칼을 바라보며 “아저씨는 우리들의 희망입니다.”라고 말을 걸었다. 말뜻을 몰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어리둥절 하자, 자기들도 나이가 많아서 좌절감에 자주 젖곤 했는데, 아저씨가 들어와서 새롭게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서글프게 들렸지만, 애써 기분 좋은 척하며 “우리 다 같이 잘해 봅시다.”라고 대꾸했다.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중등부 검정고시(2005. 8. 3)를 대비하기 위해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었다. 시험 결과가 좋지 않아 눈물 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운이 좋아 전 과목을 합격하고도 웃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 강의록으로 독학하고 야학에 다닌 것이 밑받침이 되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또다시 고등부 야간반에 접수했다.

몇몇 사람은 뒤늦게 공부하는 데도 애로사항이 많은 것 같았다. 남편 모르게 공부하는 아줌마 학생도 있었다. 아내 눈치를 살피면서 공부하는 아저씨 학생도 있었다. 그들의 마음고생에 비하면 나의 주경야독은 오히려 안락의자처럼 편했다.

장미가 천형의 가시 옷을 걸치고 살아가듯 아름다운 것도 죄었다. 사십 줄에 고등부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아름다운 아줌마 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몸매 하나로 대졸과 결혼했지만 학력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다며 목멘 소리를 했다. 검정고시 날짜가 임박하여 저녁마다 남편을 곤하게 잠재워 놓고, 거실 바닥에서 밤늦도록 공부하다가 학력이 탄로나 창피를 당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자신의 뒷모습에 반해 버린 대학생이 성가시게 따라다니면서 사랑을 고백할 때, 어딘지 끌리는 데가 있어 중졸을 고졸로 속이고서 상대한 것이 빌미가 되어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지금껏 숨죽이고 살았다며, 몸매가 아름다운 것도 죄라며 울먹이자 여기저기에서 꾹 참고 있던 울분들이 축포처럼 터져 나왔다.

학력으로 살림 사는 것도 아닌데, 시부모를 잘 모시고 아들딸 낳아 주는 것도 아닌데, 학력 이야기만 나오면 세상살이가 지옥 같더라. 우리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가자며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한편에서는 손과 손을 부딪치며 잘해 보자고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고학력 시대라 하지만 저학력으로 의기소침하던 아줌마들이 오늘따라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그들에게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일까. 어둑하던 표정들이 여름밤 박꽃처럼 환해졌다.

부티가 나면서도 마음이 허전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등부 야간반에는 내 나이와 비슷한 아저씨 학생이 두어 명 있었다. 그들은 중앙로 인파 속을 걸어가도 빼어나게 보일 정도로 허우대가 멀쩡했다. 전생의 연줄이 닿아 있거나 아픈 가슴이 통했던 것일까. 우리는 통성명을 하는 순간부터 죽마고우처럼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동병상련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학원 수업을 마치고 술자리를 가진 적도 있었다. 절친한 사이거나 정직한 사람들과 한잔 술을 나누다 보면 오장육부까지 훤히 드러날 때가 있다. 두 사람은 이름 있는 회사의 전문요원으로 있었다. 그들의 언행을 미루어볼 때, 공부를 더 이상 안 해도 하이칼라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배움의 결핍으로 말 못하고 지낸 사연들이 가슴을 쳤다.

두 사람은 성은 달랐지만 닮은 데가 많았다. 처갓집 그늘로 잘사는 것도, 뒤늦은 나이에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것도, 수업을 마치면 책과 노트는 보관함에 넣어 두고 빈손으로 귀가하는 것도 서로 닮았다. 빈손으로 귀가하면 공부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명문여고를 나온 아내와 연애할 때 학력을 속인 죄밑으로 집 안에서는 도저히 공부할 수 없다는 이유까지 똑같다.

내친김에 몇 마디 조언을 해 보았다. 공부를 하려면 체면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아내에게 솔직히 고백하는 게 나을 성싶다. 당신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아 학력까지 속이게 되었노라고. 그리고 살다 보니 모르는 것만큼 부끄러운 게 없어 늦게나마 공부하게 되었노라고. 그러면 당신들의 아내도 충분히 이해하고 적극 협조해 줄 거라 하자, 통하는 게 있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던 두 남자.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들도 한잔 술이 들어가자 가슴속 응어리를 토해냈다. 수업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동네 마트에서 캔 맥주를 한두 개쯤 마시고 들어가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늦은 귀가를 따져 묻는 아내에게 변명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나의 서투른 조언이 통했던 것일까. 아내를 설득하기가 간단치 않을 거라 우려했던 그들이 며칠 뒤부터 책가방을 들고 다녔다. 얼굴 표정도 그전보다 훨씬 밝았다.

고학력 시대에도 검정고시 학원은 성업 중이었다. 중·고등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한글과 아라비아숫자를 배우며 초등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늦깎이 학생도 많았다. 이런 현상은 아직도 문맹자들이 존재한다는 증언이다. 문맹의 암흑으로부터 타출하려는 그들의 도전정신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한결 밝아진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밝은 미래를 보았다.

상그리아

李 在 浩

어떤 때는 내가 낯설어진다.

먼 우주 어디에서 이 행성에 처음 온 것처럼 낯설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더 낯선 곳, 더 멀리 가고 싶어지고는 한다.

신문을 펴 보면 이상한 사람들, 이상한 행동들이 역겨워진다.

TV를 켜 보면 청문회에 나온 장관 후보들의 탐욕에 나라가 싫어지고 서민들의 힘겨운 한숨소리, 주위의 생로병사의 아픔에 어디론가 멀리 가고픈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런 감정은 어릴 때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집에는 탄피가 가득했고 집은 기울어져 있었다.

부상당한 어린 몸으로 기울어진 초가집 뒷골방에서 느낀 암담함과 절망.

골방에는 밤마다 별빛과 달빛이 찾아왔다. 그 별빛 달빛을 타고 이 암담한 골방을 벗어나 훨훨 날아 고통도 없고 절망도 없는 행복하기만 한 이상촌을 찾아 환상 여행을 하고는 했다.

때로는 옥토끼가 떡을 빚는 달나라에 가기도 하고 꽃들이 만발한 어느 낯선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옥토끼가 찧어낸 하얀 쌀밥. 배고픔에 괴로워하던 어린 입에서는 침이 가득하고는 했다.

나의 환상 여행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중학교 때 포교당에 나가서 들은 도솔천을 알고부터는 도솔천에 가기도 하고 책에서 본 우주 이야기에서는 행복이 가득한 별나라도 가기도 했다. 그때 ‘상그리아’라는 소설을 읽었는 듯한 기억이 어슴푸레하다.

대학과 수련의 생활. 임상 생활로 바빠진 젊은 시절에는 현실에 매몰되어 환상 여행은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다. 오래된 환상 여행이 그리움으로 다시 살아난 것은 현실의 답답함도 있겠고 또 많이 흐른 세월 때문이기도 하리라.

비도 많고 불쾌지수도 높았기에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에 신문 광고를 뒤척이다가 상그리아라는 지명이 눈길을 끌었다.

「그래 이곳으로 가보자. 오랜 그리움의 세계로…」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어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이상향. 상그리아가 지명에서 보통명사가 된 것은 한 편의 소설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글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아무 걱정 없고 늘 즐거운 마음이 가득했기에 그 땅의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 수명이 백팔십이 되고 나이 들어도 늙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땅. 그곳에 외부에서 서양 청년이 들어왔다. 그 서양 청년은 상그리아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그 여인과 상그리아를 떠나기로 했다. 상그리아를 떠나오다가 조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젊어 보이던 여인은 백발의 노파로 변하여 그 청년이 알아보지 못한다.

그 여인은 사실은 백 세 된 노파였지만 상그리아의 공기, 물, 즐거운 마음 때문에 늙지 않고 젊어 보였기 때문에 그 청년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상그리아로 여행이 결정되었을 때, 초가집의 골방. 찢어진 창호지로 스며들던 별빛, 절망, 암담함, 그리고 육체의 고통, 배고픔, 별빛을 따라 환상을 떠나던 어린 영혼의 상흔이 다시 아파왔다.

해발 삼천 미터가 넘는 고원에 펼쳐진 티베트 문화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차마고도. 텔레비전에서 오랫동안 재방을 거듭하고 광고에도 등장하던 그 길이 상그리아로 가는 길이었다. 당나귀에 차를 싣고 절벽 길을 오르내리던 그 길에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낸 것은 불과 오륙 년 전이라고 한다.

깊은 계곡, 좁고 험한 찻길에 안전벨트도 없는 중국제 차를 타고 터덜거리며 오르는 여행 길은 진땀을 흐르게 했다. 아찔한 순간도 여러 번. 낭떠러지 밑에는 황하의 원류인 황토물이 콸콸거리고 있었다.

그 험한 길을 서너 시간 오르니 갑자기 더 넓은 분지가 나타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 같은 분지. 그곳이 상그리아라고 했다. 티베트어로 해와 달을 의미하는 상그리아는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 있었다. 외부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지리적 조건 갖추고 있는 이곳이 옛날에는 이상향일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1957년 중공군 오만 명이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왔다. 목탁과 부처님의 말씀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티베트가 그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상향이라던 그곳의 청년들은 차마고도가 펼쳐진 험한 산길에서 가마를 타라고 권한다.

「한국 돈 오천 원, 오천 원」 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절규같은 것이 느껴졌다. 옛 티베트 땅이었던 운남성이 개발되어 도시에는 현대식 고층 빌딩이 즐비하지만 그것은 한족의 풍요이지 티베트 원주민인 장족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들은 힘겨운 가마꾼이 되거나 험한 산간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식민지-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곳은 식민지였다. 우리나라에서 느꼈던 답답함보다 더 큰 갈등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힘겹게 가마를 메고 있는 아빠를 따라 나온 듯한 초라한 예닐곱 살의 아이는 물끄러미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민지의 아들답게 옷차림은 초라하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지만 눈망울은 맑았다. 그 눈동자 속에서 문득 어린 시절의 우리가 떠올랐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초라한 모습. 배고픔에 냉수를 벌컥 벌컥 마시던 예닐곱 살의 어릴 적 친구들의 얼굴. 전쟁터의 포화 속에서 울며불며 쫓기던 아이들. 우리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그 티베트 아이에게 돈 몇 푼을 쥐어줄까 하다 관두었다. 옛날 어린 시절의 나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아이는 해맑은 미소로 오히려 나의 어린 시절의 아픈 상흔을 위로해 주었다. 차마고도의 험한 산길을 넘어 사방가라는 옛 장터에 앉아 그들의 고달픈 여정이며 말굽 소리를 연상하며 상그리아 - 식민지의 노을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뜨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저 별빛을 타고 떠나던 환상 여행을 또 다시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이 행성, 인간 세계에는 상그리아는 없는 것일까.

시간을 노 저어 가는 여인

이 정 기

버스는 도시를 벗어난 듯싶다. 차창 밖의 풍경은 우리나라의 여느 농촌과 비슷하다. 이번 베트남 여행은 그냥 자연 속에서 조용히 인생을 성찰할 수 있는 곳을 택했다. 그리하여 평범한 일상들을 재점검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떠났다.

하노이에서 짱안으로 간다. 그곳은 북 베트남의 한 도시이며 현재 통일 베트남 이전, 옛 쩐(TRAN) 왕조의 수도였다. 옛 성지를 찾아다니던 고승들에 의해 발견이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된 것은 2007년도부터다. 그래서 자연경관이 잘 보존된 숨겨진 보석과 같은 곳이라고 한다.

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호수는 고요함을 넘어 처연하다. 마음은 물결 따라 잔잔히 흔들리고 세상 잡념들이 씻겨 나가는 듯하다. 참으로 청초한 풍경이다. 시끄러운 세상사를 떠나 마치 절해고도에 혼자 와 있는 기분이다. 아름다운 호수를 따라 살아 있는 종유석 동굴 속을 돌아 나오는 관광이 시작된다.

비옷을 받아 입고, 우산을 받쳐 든 우리는 네 사람씩 보트에 올랐다. 노를 젓는 사공은 처녀 같기도 하고 아줌마 같기도 한 날씬한 몸매의 얌전해 보이는 여인이다. 노 젓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건지 나는 잘 모른다. 그저 유유히 떠가는 조각배를 보면 저 배를 타고 하염없이 흘러가고 싶은 소망 같은 그리움이 있었다.

마음과는 달리 빨리 달려가는 세월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맞이할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무엇을 위해서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지난날엔 강을 노래하고, 삶을 천천히 노 저어 갈 수 있는 여유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허나 세월이란 것이 묘한 마력이 있어 그 파도를 넘고 회오리바람을 피할 수 있는 처방을 내려 주기도 하지 않던가. 그 덕분에 한 고비, 한 언덕을 넘어 먼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배는 서서히 선착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풍경화 속의 인물이 되어 흘러간다.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따라 작은 물무늬가 생겼다 사라지고 또 생겼다 사라지곤 한다. 내 삶의 모습이 가슴속까지 스며든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이 물 위에 그리는 그림 같은 것이 아닐까. 물 위에 사랑의 편지를 쓰고, 소망을 그려도 물무늬가 사라지듯 그 순간 그 모습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수초들이 배 밑바닥에 닿고 옆구리를 스친다. 노를 휘저으면 이리저리 자리를 비켜 주고, 물이 흔들리면 물결 따라 춤추어 준다. 그것은 마치 이 나라 국민들의 지난 삶을 말해 주는 듯했다. 또한 베트남의 역사와 자연은 우리나라와 흡사하여 외세에 휘말려 이리저리 요동치며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그들의 과거나 우리의 아픈 역사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불어 대는 바람이었을까. 그 모든 역경을 흔들리며, 굽히며, 비켜 나가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자기 것을 지켜 온 삶은 이 물속에 잠겨 춤추는 수초의 생명력과 같다.

비가 그치고 햇살은 수줍게 번져 간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시간을 노 저어 가는 그 여인은 흐르는 강물처럼 말이 없다. 나 자신의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 배는 서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앞은 캄캄하고 너무도 적막해 잠시 지옥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출렁출렁 물소리, 통통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들, 그리고 바깥 세상에서 들리지 않던 내 마음의 소리까지 공명이 되어 천상의 울림같이 들려온다.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친구의 머리를 아래로 푹 눌러 버린다.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에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이곳 짱안의 동굴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정리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좋았다.

한 시간이 훨씬 지난 것 같다. 지금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노를 젓던 사공은 여전히 무표정하다. 그의 연약한 두 팔에서 무슨 힘이 있어 이토록 완강히 버틸 수 있는 걸까.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이 노를 대신 좀 저어 주겠다고 했더니 어림도 없다. 자연에 취해 옆을 잊었던 나는 고단한 이웃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어떻게 하면 저 여인을 좀 도와줄 수 있을까. 그 생각은 함께 탄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옆을 스쳐 지나는 배에 탄 친구들이 손을 들어 환호하며 철없는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발로 노를 젓는 사공도 있었다. 또 한 대가 가까이 왔다. 그곳에서는 뒷좌석에 앉은 친구가 함께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그때서야 살펴보니 우리 배에도 뒷자리 옆에 여벌의 노가 있었다. 사공의 노를 받아 저을 생각만 했지 함께 저어 갈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융통성 없는 네 사람은 서로 웃었다. 뒤에 앉은 남편과 그의 친구가 함께 노 젓기를 시작했다. 배는 쑥쑥 앞으로 나갔다. 함께 한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을.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배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한 얼굴의 주인공 우리 배의 사공은 그제서야 웃으면서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살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인생을 꽃피울 수 있다고 했던가.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노 저어 갈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행복하리라.

쇠죽

이 정 연

시골에서 한 며칠간만이라도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꼭 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 막 눈이 녹은 양지쪽 산에서 관솔이나 솔방울을 주워 가마니에 담아 오는 일도 하고 싶고 허드렛물로 쓰던 샘을 치우고 바위틈에서 퐁퐁 솟는 샘물이 이윽고 샘에 차고 넘쳐서 미나리꽝으로 흘러가는 모습도 보고 싶다. 가을무를 뽑아서 집 앞 밭에 깊게 파고 움 저장하는 것도 초겨울에는 꼭 해 보아야 하고 무엇보다 가장 해 보고 싶은 일은 쇠죽을 끓여 보는 일이다.

쇠죽 끓이는 일은 어느 때 해도 좋지만 아무래도 눈발이 날리는 겨울 늦은 오후가 좋다. 먼저 부엌에 가서 설거지통에 있던 쇠죽물을 가마솥에 붓고 아궁이에 불부터 지핀다. 설거지통에 있던 물이라고 해서 더럽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시골이라 당연히 세제를 쓰지 않은 개숫물은 밥이나 반찬 찌꺼기가 있는 물에 쌀뜨물이 섞여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 가족이 미처 하지 못한 발우 공양을 소가 대신해 준다면 맞을 것이다. 부엌 밥솥의 땔감은 잔솔가지도 좋고 콩대 같은 것도 괜찮지만 쇠죽솥의 땔감은 통장작이 제격이다. 그래야 큰 솥의 여물이 다 잘 익을 때까지 불이 있고 남는 불은 고래 저 안까지 밀어 놓아야 긴긴 겨울밤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작두로 말려 두었던 볏짚이며 고구마 줄기를 잘게 썬다. 작두에 썰어야 할 볏짚을 넣는 것을 ‘여물을 먹인다.’라고 한다. 여물을 먹이는 사람과 작두자루에 발을 올리고 여물을 써는 사람은 아무나 함께 하지 못한다. 까딱 잘못 하다가는 손가락 끊기 십상이다. 거기엔 세상에서 가장 돈독한 신뢰가 존재한다. 여물을 썰 동안 물은 이미 설설 끓기 시작한다. 물이 끓을 때 여물이며 썩어 가는 호박 벌레 먹은 콩이나 정미소에서 얻어 온 쌀겨 따위를 넣어야 재료들이 익으면서 넘치지 않고 많이 들어간다. 겨울밤엔 소도 밤참을 먹어야 할 만큼 길고 춥다. 아버지는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라고 해서 함부로 먹이지 않으셨다. 봄이면 꼭 우리더러 쑥이며 이른 봄풀 한 삼태기를 캐 오게 해서 넣고 풀이 흔한 여름에도 한 번 정도는 익혀서 먹였다. 그러면서 늘 소는 우리 집에서 제일 일을 많이 하는 으뜸 일꾼이라고 하셨다.

어쩌면 내 수필의 시작도 쇠죽 끓이는 아궁이 앞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책이라곤 오직 교육부에서 산골 어린이들에게 독서 권장의 목적으로 주는 ‘그림 없는 그림책’ 한 권이 전부였다. 그 책에는 달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미운 오리 새끼 백조 이야기 등 안데르센의 동화가 실려 있었는데 나는 몽당비를 깔고 아궁이 앞에 앉아 달님이 들려준 이야기 속의 삽화를 그려 보거나 좋은 문장을 옮겨 적어 보는 일이었다. 쇠죽이 한소끔 끓으면 솥 밑바닥의 재료들을 여물 주걱으로 한 번 뒤집어 주어야 한다. 이제 그 큰 무쇠 솥에도 빈자리가 좀 생겼다. 대야에 물을 담아 데워서 발을 씻어도 좋고 여물 바가지에 감자나 고구마를 넣어서 익히면 그것도 먹을 만하다. 여물 냄새가 좀 나긴 해도 아궁이에서 구워 먹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다.

알불만을 아궁이 앞쪽으로 모아 빈 달걀 껍데기에 쌀을 씻어 넣고 밥을 해 먹어도 재미나고 칼국수를 하는 날에 반죽을 조금 얻어 와서 구워 먹어도 별미다. 가끔은 어머니가 미처 부엌에서 익히지 못한 된장찌개 뚝배기나 간 갈치를 구우라고 석쇠를 넘겨줄 때도 있다. 잉걸불을 모아 노릇노릇하게 갈치를 굽던 아궁이, 그 아궁이에서 가족의 단란한 한 끼 식사가 준비되었다면 과장일까.

다 끓인 쇠죽솥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는 온 집 안에 감돌고 아궁이 불꽃보다 붉은 저녁놀은 산을 다 태워 버릴 듯 능선 너머로 스러진다. 소의 긴 눈썹 위로 엷은 어둠이 내리면 사랑방엔 호롱불이 밝혀지고 아궁이 숯불이 화로에 담겨 윗목에 놓인다. 쇠죽을 먹는 워낭 소리는 평화롭게 초가를 감싸고 이따금 골바람이 불어가는 저녁 동그란 상 위로 방금 아궁이에서 꺼내 온 된장 뚝배기는 여태 보글보글 끓는다. 상 위에는 된장 뚝배기와 김치 콩잎이 전부였지만 또 하나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듬성듬성 놓인 찬그릇 사이 조용히 내려앉은 평화를 그때는 너무 어려서 보지 못했다. 그 겨울 저녁의 밥상 이후로 어디서도 그렇게 평화로운 저녁을 먹어 본 기억이 없다. 외롭거나 무의미하거나 거래가 함께하는 그런 저녁상 끝엔 언제나 그 겨울 저녁이 그리웠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 겨울 저녁의 평화는 쇠죽솥 아궁이에 불 지피던 순간부터 예비된 게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고향의 겨울로 돌아가 다시 쇠죽을 끓이고 싶다. 이제 그 일이 그저 귀찮고 힘겨운 일상이 아니라는 걸 알 나이가 되었다. 쇠죽을 끓이는 동작 하나하나는 그저 가축의 먹을 것을 준비하는 노동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함께 작두에 여물을 써는 일은 지극히 아름다운 춤이요 워낭 소리를 들으며 쇠죽을 구유에 퍼다 놓는 일은 평화의 노래를 짓는 일이었다. 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어린 소녀가 저녁 한때 평화를 구하는 소박한 기도 같은 거였다.

저울추

이 필 영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세계적인 휴양지들이 소개되고 연인들의 포옹이 감미로운 영화에 잠시 눈길이 멈춘다. 사랑도 나이에 비례하는가, 이미 나에게는 설렘이 없어선지 이내 시들하다. 다시 돌린 채널에서 여든의 남편이 치매에 걸린 반신불수 아내의 발을 애바르게 닦아 주는 장면이 시선을 끈다.

그들의 신혼 시절, 남편은 헌헌장부였고 아내는 봄 버들 같은 몸매를 가진 새댁이었을 것이다.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문에서 시부모의 눈치를 보며 출근하는 신랑을 배웅했을 아내의 애틋한 눈길을 남편은 잊지 않고 있는가. 나무토막 같은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남편이 눈시울을 붉힌다.

여든이면 평생을 함께한 지어미라 할지라도 영육이 피폐해진 병객을 돌보기에는 힘이 부친다. 그렇다고 치매 시설에 맡겨 버리기에는 살아온 세월이 허망하다. 누워 있을망정 아내가 몇 마디의 대화만 가능해도 남편에게는 천금 같은 위안이 될 터이지만 치매는 그 모든 것을 앗아 가버렸다.

자식에게 맡길 수도 없고 선뜻 돌보겠다는 말도 하지 않아 끝까지 아내를 돌보고 싶지만 참으로 막막하다는 노인의 젖은 눈길에 소금밭 같은 쓰라림이 묻어 있다. 뇌졸중과 치매는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이다. 장수촌을 소개하며 ‘웰빙’을 외치지만 정작 노인들은 오래 사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다고 한다.

“바깥양반이 고맙구먼.”

TV를 함께 본 어머니의 표정이 갑자기 적막감을 띤다. 어머니의 마음속에도 모든 노인들이 우려하는 막연한 불안이 내재해 있을 것이다. 팔만 움직일 수 있을 뿐, 혼자서는 돌아눕지도 못하는 몸이다. 깊은 밤 멀뚱하게 눈만 뜨고 홀로 깨어 있는 모습을 보면 몹시 애틋하다. 캄캄한 밤이 오죽 지루할까. 궁여지책으로 밤새도록 불을 밝혀 놓는다. 때로는 당신의 처지를 자식에게 짐을 안기는 여생이라고, 이런 어미도 오래 살기를 바라느냐고 묻는다. 내 어머니도 여느 부모들처럼 자식을 위해 애간장을 태우며 살아온 한평생이었기에 자식의 마음속을 살피는 어머니가 안쓰럽다.

고령 사회로 진입하면서 급격히 부상되는 실버산업이 노년의 삶들을 불안과 자포자기로 내몰고 있다고 한다. 도시와 인접한 산기슭에는 어김없이 요양병원이 들어서 있고 불과 몇 년 사이에 지병을 가진 노인들이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수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실버산업의 무한 경쟁은 부모와 자식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게 할지도 모른다. 대가족 속에서 많은 형제와 자란 장년층마저 부모와의 동거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핵가족에서 성장한 세대는 고령 사회의 문제를 전적으로 정부 정책에 의존하려고 할 것이다. 집에서 봉양한다는 생각자체가 특별한 발상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애타는 마음마저 없어질지도 모른다. 시대적인 추세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보면 호화스러운 요양시설의 조건이 효의 잣대가 되는 씁쓸한 미래가 가족의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을 것이다.

요양 시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환희의 순간보다 고통의 세월을 더 감내했을 부모 세대의 노년이 감당해야 하는 오늘의 세태는 애면글면 오직 자식만을 위해서 살아온 지난 삶을 허망하게 만들어 버렸다. 요양병원의 어느 의사는 간병인의 손에만 맡겨진 노인들의 여생을 안타까워했다. 그들이 겪는 외로움과 절망감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또 하나의 병이라고, 가족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당부했다.

아이들과의 행복한 웃음 속에, 친구들과 담소하는 즐거움 뒤로, 남편과 아내, 내 아이들만 오붓하게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요양 시설에 맡겨진 부모의 얼굴이 떠올려지지 않는다면 자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출근길, 정류장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던 중년 남자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낙엽을 하나 주워 올린다. 한껏 멋을 부린 처녀는 붉은 단풍 아래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오종종 뒤섞여서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은 낙엽을 한 움큼 허공으로 날리며 까르르 웃는다. 느릿한 걸음으로 운동을 하는 노인은 어깨에 내려앉은 낙엽을 무심히 털어낸다. 고운 어린아이와 노인의 노쇠한 얼굴, 사람의 한 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서 처연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낙엽이 뚝뚝 내려앉는 단풍 길을 배경으로 멀어져 갔을 때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비감하고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으로 어우러진 사람살이의 진경(眞境)을 보는 듯했다. 누가 원하지 않으랴, 한 폭의 그림 같은 황혼의 삶을. 사람이기에 품게 되는 마지막 염원이다.

홀로 존재하지 못하는 삶의 그물망은 부모 자식 간이라도 천칭의 추와 같은 균형을 필요로 한다. 내게만 할당하고 싶은 시간과 부모에게 부여해야 할 시간의 무게 중심은 애매하다. 나를 위주로 저울추가 움직이면 부모가 외롭고 부모에게로 저울추가 기울면 내가 불편하다. 한쪽이 너무 무거우면 엉덩이를 슬쩍 들어 주는 시소게임의 지혜만이 해법이다. 부모와 자녀의 중심에 내가 있다. 그 두 쪽의 균형을 이루어 주는 천칭의 추는 결국 ‘나’의 몫이다.

사진과 추억

임 도 순

‘사진은 영혼을 비추어 내는 생명이며 기억의 거울이다.’ 삶의 자취에 따르는 기억을 환기시키는 영상의 기록이며 위대한 재산이라 하겠다. 사진(寫眞)은 한자 그대로 ‘참 모습을 박은 것’이다. 컬러 사진은 그것의 진면목이다.

사진 기술은 근대 100년에 눈부신 발전으로 카메라와 디지털 영상으로 생활 속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은 연출보다 자연스런 영상 표현을 선호한다.

몇 년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 일본 사진작가의 지상사진전(紙上寫眞展)에서 한 작품을 찾기 위하여 외국의 정글 지대에서 일 개월 동안을 헤맨다는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셔터를 눌러 현상 선별하는 버릇을 경계한다.

며칠 전 TV에서 소개한 인물 사진의 명가(名家)인 ‘오찌다’ 씨는 일본 오사카에서 5대(代)째 사진 기술자다. 한순간의 마음과 감정을 사로잡기 위하여 의상, 소도구, 제품 개발은 촬영 기록의 신선한 유혹이라 한다.

사진은 현상의 재현을 창조하는 예술이다.

사진은 과거의 환원으로 하여 현재의 가능이며 생명의 정점에서 반비례하여 사위어 가는 자신의 모습은 뒷면에 서 있는 그늘을 의식한다. 시간과 진행의 부등식(不等式)은 착란 현상을 일으킨다. ‘렌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인생 역전(人生逆戰)의 증거물로 시간을 초월한 타임머신이다.

어린이의 돌이나 기념사진은 피사체의 목적의식에 따라 연출한다. 어린애의 주의 집중을 위하여 어른이 손뼉을 치면 아이가 토끼처럼 말똥한 눈으로 바라보는 찰나를 기다리며 애쓸 때 ‘찰칵’ 하는 셔터의 기억은 잊지 못할 매력이다.

내 생애에 돌 사진이라면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딸을 너무 많이 낳아 친정 어머니께서 조언을 했다. “딸을 너무 위천(받들다)하면 딸이 지리다(성함)”는 것이었다. 제례로 출산을 관장하는 삼신할머니를 박대하라는 뜻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나도 모르게 은연중 그 말을 믿은 모양이다. 딸을 선호한 것도 아니고 박대하지도 못한 어버이다.

기어이 출산의 축복을 점지한 행운의 돌 사진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돌잔치로 출생의 기쁨을 환영하지 못했다.

다음 타자의 적중을 꿈꾸는 어미의 원시적 야성(野性)이 응어리진다. 출생 후 카메라 사진은 때마다 찍었지만 돌 기념사진을 남겨 주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다.

신통하게도 세 살배기가 이미 동생의 출산을 감지한 듯 “엄마 배 속에 뭐가 있지?” 물으면 느닷없이 인지(둘째손가락)를 내보인다. 고추를 암시하듯 하여 웃음보가 터지곤 했다. 마침내 넷째 딸의 꼭지를 떼고 세 살 터울로 남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딸 막내로 더 귀여움을 샀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것이 없다.”는 속담같이 자식은 하나같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제 막내아들이 장성하여 장가들고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다. 손자의 돌잔치를 호텔에서 베풀었다. 그날 돌 사진 기념 촬영을 미리 마치고 사진첩이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결혼식 전 예비 신부가 결혼 예복을 입고 여러 장면을 찍는 결혼 사진첩같이 말이다.

돌 사진을 구경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

부모의 사랑놀이에 아이가 겪었을 노고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찬탄에 앞서 “옛날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혼이 달아난다고 여겼단다.” 했더니 아들의 대답이 뜬금없다. “요즘 돌찬치는 모두 이렇게 합니다.” 한다. 격세지정이라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할 말을 잊고 묵묵부답이다.

‘어차피 인생은 선택이 시작’이라 했던가?

세월

임 만 빈

시간은 지우개다. 개성적 모습을 하나하나 지워 보편적 모습으로 변형시키다가 마지막에는 모두 없앤다. 존재까지도.

“신부 입장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들리자 그가 딸의 손을 잡고 주례석 쪽을 향해 걸어갔다. 대부분의 살이 찐 고등학교 동기들과는 달리 그는 깡마른 체구였다. 희끗희끗한 머리털이 나이가 적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신랑이 주례석 앞 단상에서 내려와 신부를 맞이했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한 번 신랑의 등을 치고는 딸을 신랑에게 넘겨주었다.

그 친구와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올랐다. 시골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D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친척 집에서 하숙을 하다가 자취를 했다. 열일곱 살이었던 그때,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고독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내 사춘기에 대해 내가 치러야 할 대가였지만, 그때는 원인 모를 반항과 방황으로 흔들렸다. 그때, 그가 다가왔다. 그의 집에서 묵으면서 같이 학교에 다니자는 제안을 했다. 친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방을 썼고 같이 학교를 오갔다. 친구 부모님의 자상한 돌봄의 덕택으로 나는 방황을 접고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야, 나는 말이다. 어머니에게 대학 등록금 대신 택시를 하나 사 달라고 헐란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기간인 4년이나 6년간 택시를 몰면 부자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무엇을 하려고 대학을 가지?” 결국 그는 그 말을 부모님에게 하지는 못했다.

친구 부모님의 꿈은 그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도 의사가 되려고는 했다. 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후반까지는 말이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고등학교의 초청으로 선배들이 학교에 왔다. 후배들이 대학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자기들이 다니는 대학과 학과를 소개했다. 철학과에 다니던 한 선배가 자기 과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하고 자랑했다. 이튿날 친구는 나에게 선언했다. 철학과로 진학해서 교수가 되겠다고. 이과 공부를 집어치우고 문과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수학Ⅱ를 할 때 수학Ⅰ을 했고 화학이나 생물을 공부할 때 독일어를 공부했다. 이과 수업 시간에 문과 책을 펴 놓고 공부하는 것은 학교 당국에 금방 들통이 났다. 그는 S대학교 의과대학을 갈 유능한 학생이 아니던가. 그 사실은 즉시 그의 부모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하루 종일 부모님으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부모님의 눈물을 본 듯도 했다. 우리 방으로 돌아온 그는 무척 가슴을 아파했다. 그 밤, 그는 말없이 가출을 했다. 그리고 1주일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었는지에 대하여 나도 그의 부모님도 묻지 않았다. 덧붙여 그가 문과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하여 학교도 부모님도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우리는 각각 다른 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는 S대학 철학과를 갔고 나는 지방 대학 의과대학으로 진학했다.

그 후에 우리들은 자주 만나지 못했다. 소식은 가끔 한 번씩 들었다. 철학과에 들어간 그는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방황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철학과 학문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에 실망한다고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호감을 가졌던 여자 친구가 그가 철학과에 다닌다는 이유로 등을 돌린 후에는 한동안 학교에 출석도 하지 않고 술에 절어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철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영문과에 편입해서 학교에 다니다가 공군 장교 시험을 쳐서 입대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다음 그에 대한 소식은 뜸했다. 나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다. 원주의 후송병원에 근무하던 1975년 어느 날, 그로부터 어느 농원 야외 잔디밭에서 결혼한다는 청첩을 받았다. 그때로서는 파격적인 야외 결혼식이었다. 아내와 함께 결혼식에 참석했다. 날씨가 다행스럽게 좋아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다. 축하한다는 말을 그에게 전하고 그의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다음날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누가 나를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누가 나를 찾아왔나?’ 의문을 가진 채 후송병원 후문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신혼여행을 갔어야 할 친구 부부가 서 있었다. 어이가 없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네가 갑자기 보고 싶어 들렀다”라고 대답했다. 나의 단칸 살림방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의 갑작스런 출현에 아내도 무척 놀랐다.

결혼식이 끝나자 고등학교 동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몇 명은 얼굴과 이름이 기억되었지만, 어떤 동기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음료수와 맥주를 마시는 중간에 그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러 우리들에게 왔다. 그의 딸의 결혼과 그의 결혼이 머릿속에 중첩되어 그에게 물었다.

“그래, 너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나한테 왔었잖아. 그때 나도 단칸방에서 신혼 살림을 하고 있어서 너희들을 재워 줄 수가 없었잖아. 어디에서 잤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는데 너희들은 어디에서 잤지?”

“야, 말도 마라. 그래서 내가 아내와 함께 여관을 찾아갔지. 그런데 방이 없잖아. 할 수 없이 주인에게 사정해서 여관 손님들한테 돈을 받는 수부를 빌려서 잠을 잤다.”

그때 그들을 어떻게 해서 보냈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다. 여관까지 따라가서 방을 구해 준 것 같기도 한데 주인 방에서 신혼 둘째 밤을 보냈다고 말한다. 그의 모습이 무척 천진스럽고 익살스럽다. 흰 머리카락이 무척 눈에 띈다.

그는 부모가 그렇게 원하였던 의사도 되지 않았고,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어 했던 철학과 교수도 되지 못하였다. 그때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결혼식을 야외에서 했고, 신혼여행도 강원도 소도시로 왔었다. 그렇게 일상에서 일탈을 추구했던 그였는데 나이가 들자 그녀의 딸은 평범한 결혼 절차에 따라 결혼시키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정상적인 생활 궤도를 항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쳤던 그의 마음도 힘을 잃은 듯했다. 30년의 세월은 이십대의 판판했던 피부도 쭈글쭈글하게 만들고 삐쭉삐쭉 빛나던 이지(理智)도 둥글게 만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나의 애창곡 〈아, 목동아〉

장 효 은

국어 시간에 〈별〉을 공부하였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셨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 둘 노래를 부르자 교실 전체가 〈아, 목동아〉를 불렀다. 나는 노래를 몰랐고, 그냥 듣고만 있었다. 짝꿍에게 물었다.

“이 노래도 모르나?” “응.”

나는 당연한 듯 말했다가 혼자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서 가르쳐 달라는 소리도 못 하였다. 그러다 몇 주 후에 음악 교실에 가서 음악책에 있는 그 노래를 배웠다. 교실에 돌아와 자꾸 흥얼거리니까 영어로 적은 〈대니 보이〉를 내밀었다. 짝꿍은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남편 졸업 20주년 동창 모임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였다. 다른 동기생보다 조금은 멋스런 남자가 나와서 색소폰을 불었다. 〈대니 보이〉였다. 감미로운 선율에 푹 빠져서 모두들 기침 소리도 내지 않았고 앙코르를 요청하였다. 그때 그 시절 악기를 다룰 줄 안다면 대단해 보였고 상당한 수준이었다. 식을 마치고 만찬 시간엔 칭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회자에게 물어보니 벌써 갔다는 것이다. 자신이 회관을 운영하는데 악기 다루는 악사들이 걸핏하면 제기고 고집을 부려 속을 썩이다가 자신이 배웠단다. 지금은 자기의 타임이 되어 갔다는 것이다. 너무 아쉬웠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엘 콘도 파사〉라든지 〈브리지 오브 트러블드 워터〉를 청하여 듣고 싶었는데…….

그다음 해에는 그는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코미디언을 초청하여 만담으로 시간을 채웠다. 사회자에게 알아보니 그 사람은 장사가 잘되지 않아 문을 닫았고, 요사이는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하였다. 아쉬움과 미련이 오래 남았다.

삼성병원 지하 1층 핵의학실 앞에 남편과 나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을 통하여 들려오는 멜로디는 〈대니 보이〉였다. 맑고 깨끗한 음질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복도에 조용한 음악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은 표정이고, 악단의 연주에 심취해서 마음을 빼앗길 만한 여유가 없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워낙 좋아하는 곡이었기에 의자에 앉아 착잡한 가슴으로 마음 갈피갈피 음악이 쟁여 자꾸자꾸 가라앉아 가는 심정이 되었다.

한 번의 곡이 끝났다. 다시 또 같은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호명되어 핵의학실로 들어가 대구에서 가져간 영상 필름을 제출하였고, 설명을 듣고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무표정으로 있었다

세 번째 또 그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참 이상하였다. 어째서 세 번이나 연달아 내보내고 있는가. 간호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물었다.

“어째서 같은 음악이 세 번이나 나옵니까?”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간호원이 웃었다.

“나의 애창곡이라서 잘 들었어요.”

“맞아요, 평소 이 노래를 좋아하였는데 마침 라디오에서 나오길래 녹음 준비가 안되어 몇 소절 놓쳐 녹음한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다시 빠진 소절을 처음부터 녹음한다고 그랬고, 세 번째는 완전히 녹음된 것 확인한다고 세 번 거푸…….”

의자로 돌아와 가만히 앉았다.

〈아, 목동아〉 구절 중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다. 남편이 놀라 쳐다본다.

“왜 우느냐?” “그냥.”

그 말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일까. 음악을 듣고 운다고 하려니 남편이 이해를 해 줄까. 내가 너무 사치스럽지 않은가.

낮게낮게 호소하듯이 복도 바닥에까지 굴러다니는 음악을 밟으며, 나는 여지껏 참았던 눈물보가 터진 것처럼 쉬지 않고 나오려 해서 일어서서 화장실을 다녀왔다. 내 눈자위는 계속 붉어 있었고, 우리는 손을 잡고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식구들이 각자의 볼일로 집을 나가고 혼자 있을 때,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나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절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TV에서 나오는 발랄하고 팡팡 뛰는 댄스곡을 따라 부르면 가사와 동작을 따라잡을 수 없다. 점차 발라드곡으로 넘어와 내 노래의 맨 끝 〈대니 보이〉까지 오면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흐른다. 눈물을 닦고 일어서서 오늘 노래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나의 망중한을 마감하며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

다른 일거리를 찾아 분위기를 바꾼다.

영정과의 약속

전 상 준

오래 전부터 석가탄신일을 기다렸다. 지난해 가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사십구재 때 모시던 영정을 찾아올 생각이다. 벌써 찾아왔어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재를 마친 지 다섯 달이나 지났다.

작은 암자에 신자들로 북적인다. 부처님을 모셔 놓은 방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스피크를 통해 들려오는 스님의 염불 소리가 낭랑하다. 중생들을 열반과 해탈로 인도하기 위한 독경이 길다. 법당에 들지 못한 사람들이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다. 새벽에 내린 비로 경내 마당이 질벅거린다. 앉을 자리도 없고 서 있기도 불편하다. 그래도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표정들이 엄숙하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원을 빌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법요회가 끝나자 점심 공양이다. 방은 먼저 온 신자들 차지다. 마당에는 뒤에 온 사람들이 그릇에 먹을 것을 들고 식사를 한다. 자연스럽게 서로 아는 사람끼리 몇 무리로 모둠이 만들어진다. 자리가 불편하고 음식이 고르게 배분되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다. 웃음 띤 얼굴에 표정들이 평화롭다.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디에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는 차가 문제다. 암자 진입로까지 승용차가 겹겹이다. 법회를 마치고 일찍 갈 생각은 진작 포기했다. 입구의 차부터 차례대로 빠져야 갈 수 있다. 걸어 다닐 때보다 차 타고 다닐 일이 많아지고부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짐을 느낀다. 어머니 영정만 해도 그렇다. 별로 무게도 없는 것을 부피가 좀 크다는 이유로 아내는 몇 차례 암자를 들르고도 내가 차를 가져올 때 갖고 간다면서 미루어 온 상태다.

보살에게 어머니 영정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뒤편 창고에 있단다. 날씨 탓인가 창고는 좀 어두웠고 냉기가 가득했다. 구석진 곳에 먼지를 덮어쓰고 비스듬히 놓여 있다. 아내가 쳐다보면서 중얼거린다. “외롭게 혼자 계시는구나.” 사진을 번쩍 쳐들고 손으로 먼지를 훔친다. 갑자기 가슴이 찡하고 눈에서 눈물이 솟는다. 그렇다. 얼마나 외롭고 적적했을까? 재를 마친 후로 한 번도 영정을 본 일이 없다. 재를 위해 법당에 모셔 놓았을 때는 조화로 테두리를 장식하고 검은 천으로 리본도 달고 있었는데.

이틀 전 어버이날 산소를 찾았다. 봉분에 뗏장을 입히긴 했으나 아직까지 붉은 흙이 드러나 있어 쓸쓸하고 초라했다. 그래도 잔디가 파릇파릇 싹을 내밀고 있었다. 맨손으로 잔디를 쓰다듬으며 병상 생활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자유롭게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곁에 아버지의 산소가 함께 있다. 망자와 산 사람과 거리가 너무 멀어 38년 만에 상봉이다. 아버지는 원칙을 준수하고 엄숙하게 살다 가신 분이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나 어머니도 꽤 지조가 높았다. 혼자뿐인 아들에게도 해 줄 것은 해 주고 요구할 것은 상당히 엄하게 요구했다. 덕분에 내가 신의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영정 속 어머니는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있다. 표정이 맑고 고요하다. 암자의 법당에 모신 부처님 모양 웃음 띤 모습이 평화롭다. 차 뒷좌석에 정성껏 모시고 왔다. 지난해까지 계시던 어머니를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비록 병상에서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어머니일지라도 계실 때가 몹시 그립다.

영정을 앞에 놓고 이야기한다. “이틀 전 당신의 손자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와 하루 묵고 갔습니다.” 어머니는 아흔아홉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4개월만 더 사셨으면 증손자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조물주가 준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혼자 많은 농사를 짓느라 새벽 미명부터 저녁 서쪽 하늘의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일을 했다. 자식이 행여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까? 공부시키는 데 돈이 모자라지는 않을까? 당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오신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영정 속 어머니의 눈이 나를 아직 어린아이로 보고 있는 듯하다. 내 죽을 때까지 당신의 얼굴과 이름을 욕되게 살지 않겠다고 감히 다시 한 번 약속을 해 본다.

터

정 상 규

돌과 돌의 틈새를 이용하여 만든 절이 있다. 일명 ‘돌구멍절’이라 불리는 중암암이다.

은해사 말사인 중암암은 팔공산 자락의 바윗돌이 어우러지고 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심을 가지지 않고는 부처님에게 다가서기가 어렵다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함인지 절에 이르는 길부터가 만만치 않다. 거대한 바위들이 뒤엉키면서 생긴 좁은 틈, 그것이 길이다. 중암암을 가려면 그 돌 틈을 통과해야 하고, 돌 틈을 통과하려면 체격이 왜소한 사람이라도 가재처럼 옆으로 걸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돌구멍절 근처에서 상상을 불허하는 작은 소나무를 만났다. 바로 바위 위에 서 있는 소나무다. 왜 하필이면 돌 위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는지 알 수가 없다. 반죽한 밀가루를 홍두깨로 밀어 놓은 듯 둥글넓적한 반석 가운데쯤에 꽂힌 듯 서 있는 나무가 신기하기만 하다. 물 없는 곳에서 나무가 산다는 것은 공기 없는 곳에서 사람이 사는 것과 같지 않은가. 먼지까지 합쳐 봤자 한 줌도 되지 않는 흙을 움켜쥔 채 뿌리를 돌 속 깊이 박고 서 있다. 물을 찾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단단한 돌 속을 파고들었을까. 그 뿌리가 흘린 피와 땀이 눈으로 본 듯 선하다. 처절한 생존경쟁이다. 그래서 불가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라고 한 것이 아닐까.

애련한 감정이 들어 그를 어루만져 본다. 그는 몸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은 양의 솔잎만을 남긴 채 낮은 키를 유지하면서도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늠름하게 서 있다.

씨 뿌리는 사람에 비유한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신은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어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기름진 땅과 돌밭, 가시덤불을 택할 수 있도록 했다. 행복에 대한 자유를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돌 위에 삶의 둥지를 틀고 있는 저 소나무는 왜 하필 저 척박한 곳을 선택했을까. 태어난 곳은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는 장소란 걸 몰랐을까. 그러나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의연하게 살아내고 있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예쁜 옷을 입고 봄의 향연을 벌여도 혹하지 않는다. 산새가 울어도,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혀도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더위와 추위 따위에 초연해진 지는 이미 오래다. 겉멋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다. 오직 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욕심 버리고 물기 찾아 팔을 뻗는 그에게선 오히려 기품이 느껴진다.

직물 공장 사장 아들인 친구 K의 모습이 떠오른다. 소위 좋은 터에 태어난 셈이다. 찢어진 고무신조차도 아끼기 위해 어머니께서 실로 꿰매어 주시던 시절, 그는 발목까지 올라가는 붉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황톳길이 뽀얀 먼지를 몰고 다니던 신작로는 요즘처럼 장마철이 찾아오면 질퍽한 흙탕으로 변했다. 고무신을 신고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없었다. 흙이 찰떡처럼 변하여 고무신 바닥에 척척 달라붙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신이라도 벗겨지는 날이면 발과 양말은 진흙 범벅으로 변했다. 운이 좋은 날이라도 집에 돌아오면, 짚이나 막대기 등으로 신발 밑바닥에 붙어 있는 진흙을 파내야 했다. 물 고인 곳은 지나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장화 신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꿈속에서 장화를 신고 온 동네를 돌아다녀 보는 경험까지도 했으니까 말이다. 고등학교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속을 태울 때, 친구 K는 오토바이 경주에 참여했다. 그런 것을 보니 처음부터 나무가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리면 쑥쑥 자라듯이, 인간 사회에서도 탄탄하게 기반을 잡은 집에서 태어나면 쉽고 편안하게 뿌리내릴 확률이 월등히 높을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일들이 낡은 흑백 사진같이 희미하게 빛바래져 가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그를 만났다. 나이보다 십 년이나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의 신발에 눈이 갔다.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 세월이지만 내 잠재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 그가 신었던 장화가 그 친구보다 더 선명하게 저장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구두는 물에 젖은 것을 그대로 신은 것처럼 광기도 없고 구겨져 있었다. 그 순간 오랜 세월 내 속에 존재하고 있던 그 무엇이 산산조각 나 버린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그의 장화는 단순한 장화가 아니었다. 부러움이었고 꿈이었고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쉬웠다. 전류처럼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야릇한 생각, 어쩌면 마음 한가운데 늘 간직하고 있던, 원하던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허허로움 같은 것이기도 하리라.

선술집에 들렀다. K는 화재로 직물 공장을 모두 태우고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주식 투자로 자신의 전 재산뿐만 아니라 친척 집에까지도 손실을 끼쳤다는 이야기를 했다. 드라마 같은 삶을 산 그의 얼굴에서 패기 있던 옛 모습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지만 휘몰아치는 비바람에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언제나 훌륭한 터에 자리 잡고 사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작은 시련이라도 찾아오면 사회를 탓하고 정치를 탓하며 조상까지 들먹거린다. 그도 모자라면 온통 세상이 자기를 외면한다며 불만 덩어리를 키우거나,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자해를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지금 이 시간에도 방황하는 노숙자나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의연하게 살아가는 그 나무를 생각해 볼 일이다. 하루하루 절박한 삶을 살아가지만 불평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있는 그 나무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허약하고 얼마나 허영투성이인지…….

마부작침(磨斧作針)이란 말이 실감난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것같이 아무리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작지만 큰 그 소나무를 보고 배운다.

물려받은 터에서보다 ‘어려움을 이기고 스스로 만들어 가는 터’에서 훨씬 더 견실한 삶을 가꿀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저 소나무가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세월이 흐를수록 뿌리는 더욱더 땅 밖으로 불거져 나오고 가지는 땅과 수평으로 길게 눕겠지만, 그 어떤 풍상도 이겨낼 위풍당당한 만년송이 되리라.

세 가지 히

정 휘 창

희가 아니고 히다. 희라면 기쁠 희라는 한자가 생각나지만, 히는 나의 방 벽에 걸려 있는 세 낱말의 말꼬리다. 내가 늘 간직하는 다짐이니 좌우명인 셈이다.

첫째의 히는 ‘똑똑히’다.

무슨 일을 할 때 그 목표나 목적을 똑똑히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재미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라면 신명나는 대로 멋지게 행하지만 일을 위하는 행위라면 목적이 있어야 한다.

큰 뜻을 가슴에 품고 별을 쳐다보라는 말이 아니다. 눈앞에 다가올 일에 대한 목적이다.

남이 장에 가니 거름 지고 간다는 속담이 있다. 목적 없이 행하는 일을 비웃고 우습게 여기는 말이다. 거름을 지고 가더라도 팔기 위함이라든지 어느 식물을 가꾸기라면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목적의식을 가지라는 것은 사람이 사는 데 무엇을 생각하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그 까닭을 의식하자 함이다.

다음은 ‘찬찬히’다.

천천히와는 좀 다른 말이다. 침착하게, 덤벙대지 말고, 무슨 일이든 그 앞뒤를 생각하고 부지런히 함이 찬찬히다. 나의 찬찬히는 우선 성내지 말자이다. 사람도 동물이니 사노라면 성낼 일이 생긴다.

백인(百忍)은 옛 선비들이 잘 썼던 말이다. 백인당(百忍堂)이라는 아호나 당호를 흔히 볼 수 있다. 참고 참고 또 참자고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여긴다. 무슨 일에든 차분차분 대처할 것이지 참는 것은 최선이 아니다. 참을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성내지 않아 참을 것이 없는 흰백의 백인(白忍)이라야 된다.

다음으로 나의 찬찬히는 자연의 이법에 따름이다. 자연은 배신이 없다. 무리를 하지 말자고 한다. 무리는 이법에 어긋남이다. 사람도 자연 속의 한 동물인데 과학으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자연을 바르게 알고 이용함이 과학이다. 절로 절로! 자연의 이치에 거슬림 없음이 나의 찬찬함이다.

세 번째는 ‘꾸준히’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 목표를 똑똑히 정하고 찬찬히 나아갈 때 중도에서 그만둠이 없어야 한다.

가다가 보면 소도 보고 말도 있다. 온갖 일이 닥치고 숱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좋은 일이 있으니 안 좋을 수도 있다. 어려움과 쉬움이 가고 온다. 좋은 일에 우쭐대지 말고 누릴 것이고 어려운 일은 차분히, 찬찬히 풀어서 기쁨으로 돌려야 한다.

꾸준히는 쉬지 않음이 아니다. 나아가기 위한 힘을 기르기 위해 쉼이 있어야 한다.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욕심이란 지나침이다. 나와 내 둘레에는 욕심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 욕심 때문에 문화가 발달되고 개인도 향상된다고 잘못 알고 있다. 개인을 위한 욕심은 야망이고 야망은 반드시 탈이 생기게 된다.

젊은이여 큰 뜻을 가지라는 외침은 속된 욕망보다 한 차원 높이 중생을 위한 뜻을 가지라는 말로 알아야 한다.

‘똑똑히

찬찬히

꾸준히’

나의 성격으로 선택한 나의 길이다. 벽에 걸린 세 낱말을 다시 바라보고 책으로 눈을 돌린다.

(2011. 11. 5)

두 할머니

조 경 숙

소란스런 소리에 잠이 깼다. 밤새도록 뒤척이다 겨우 든 잠이라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같은 병실을 쓸 할머니와 보호자였다. 일이나 끝내고 수술하면 될 일을 막무가내 입원시켰다는 할머니의 불만과 ‘미련 곰탱이’라고 나무라는 할아버지의 안타까움이었다.

아무려면 아픈 몸을 치유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게 있을까. 나는 병이 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뭉클뭉클 쏟아지던 핏덩이를 볼 때면 금방이라도 저승사자가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할머니는 무슨 일이기에 그럴까. 혹 몸에 칼을 댄다니 무섭고 두려워서 그러시나. 행여 잘못될까 겁이 나 조금이라도 날짜를 늦추고 싶었을까. 할머니의 호소는 끝이 없다.

“인제 그만 하지. 아픈 사람만 있는 병실에서 이 무슨 무례요.”

먼저 입원을 한 김씨 할머니가 돌아누우며 혀를 찼다. 할머니는 곧 장마가 오니 그전에 꿀을 떠야 한다는 것이다. 그 꿀은 큰손자 대학 등록금 밑천이니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느냐고 한다. 짜증을 누그러뜨린 김씨 할머니가 아들, 며느리는 무엇 하고 큰손자 대학 등록금 걱정이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모든 게 자기 탓이라 한다. 다섯 아들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해 지금도 형편이 어렵단다.

할머니는 논농사, 밭농사에 가축도 먹이고 벌도 치는 부지런한 분이었다. 조금이라도 값을 더 받으려고 이고 지고 도회지로 농산물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배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었을 때는 돈이 발목을 잡았다. 얼마를 모았다 하면 큰아들에게 일이 생겨 주머니를 털어야 했고, 다시 돈이 모이면 작은아들에게 사고가 났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배 속에 혹이 수박만큼 자랐다. 산모처럼 부푼 배를 안고도 아직 일 타령이니 할아버지와 옥신각신이었던 것이다.

대학을 못 나온 게 어찌 부모 탓일까. 공부에 마음이 있으면 자기가 벌어서 갈 수 있고, 대학을 나오지 못해도 열심히 일하면 밥 먹고 사는 게 어려울 리가 없다며 김씨 할머니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며칠 후, 할머니의 성화에 할아버지는 꿀을 채취하러 시골로 갔다. 화장실 출입조차 힘든 상황이라 간병인을 구할까 했으나 씨도 먹히지 않았다. 온종일 기운 없이 출입문만 바라보던 할머니의 목소리를 한 뼘이나 올라가게 하는 것은 오직 아들의 전화였다. 바빠서 못 가 죄송하다는 말에 “돈 나올 보퉁이 죽을 보퉁이라. 한 푼 벌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데 비싼 차비 들여서 올 것 없다. 어미는 괜찮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착한 아들을 오히려 불효자로 만든다고 내가 놀리면 흐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잠시 생기를 찾은 할머니는 나와 김씨 할머니께 꿀을 사라고 권했다. 농산물도 주문하면 언제든지 갖다주겠다고 한다.

궁기가 흐르는 시골 할머니에 비해 김씨 할머니는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아온 분 같다. 온몸에 흐르는 도도함이 삶의 이력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병환으로 푸석하기는 하나 나이가 무색하게 고운 얼굴은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보태져 냉기마저 흘렀다. 지인인 담당 의사가 오면 자신의 상태보다는 아들 자랑이 먼저였다.

남들은 바리바리 돈 싸 들고 외국에 공부하러 가지만 자기 아들은 머리가 좋아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한 이야기. 실력을 알아본 외국 대학에서 붙잡고 놔주지 않아 눌러앉게 된 이야기. 여러 번 들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그러나 자랑은 어쩐지 병상에 누운 노모를 찾아오지 않는 아들의 불효를 덮어 주려는 안간힘으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늙으면 돈이 효도한다는 말이 있다. 요 밑에다 돈을 넣어 놓고 아들, 며느리가 병구완 올 때마다 꺼내 주면 돈 때문에 자주 온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씨 할머니의 아들은 남의 나라 자식들 가르치느라 바쁜 탓인지, 시골 할머니 다섯 아들은 어머니 말씀을 잘 받드느라고 그런지 내가 퇴원할 때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휴대전화를 가슴에 얹고 잠든 할머니의 굵은 손마디에도, 김씨 할머니의 빨간 매니큐어 칠한 손톱에도 몇 날 며칠 동안 아들 대신 햇살만 잠시 머물다 갔을 뿐이다.

그 찻집

조 낭 희

그곳은 월악산 기슭에 있었다. 소식이 끊어진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먼 길을 달려왔지만 퇴색된 목조 건물만 늦가을을 배경으로 쓸쓸하다. 오래된 유럽풍 가구와 진한 커피 향이 우리를 맞던 곳, 기억은 흔들리지 않고 선명한데 반겨 주는 이가 없다. 찻집은 오래 전 문을 닫은 듯 무표정하다. 실연을 당한 연인의 피폐한 영혼처럼 모든 것을 망각한 듯 침묵에 싸여 있었다.

몇 해 전 가을, 인적이 드문 숲 속의 찻집을 중년 부부가 지키고 있었다. 흰 자작나무 수피처럼 세련된 도시풍이 묻어나던 사람들이었다. 지적이면서도 온화한 주인의 이미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오랜 연인처럼 정겨워 보였다. 저무는 가을 풍경과 클래식이 흐느끼고 있는 어두운 실내는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어느 달력의 사진을 연상케 하는 가슴 시린 삶터와 그들의 철학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무심했고, 우리 역시 찻집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후 나는 자주 그 찻집을 그리워했다. 서서히 숲의 일원으로 동화되어 갈 그들을 떠올리면 복잡한 내 도시의 삶이 너무나 비천하게 느껴지곤 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선택을 무모한 일탈이나 철없는 사치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열정과 도전은 아름답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숲으로 향하는 꿈을 키워 왔던가. 하지만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것은 내 꿈이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절박하거나 간절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삶이 머뭇거림이나 주저함으로 점철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것이 마치 삶의 겸손한 태도라도 되는 것처럼……. 때문에 나는 새로운 변화를 위한 결단 앞에서의 비장미를 한없이 동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찻집만 덩그러니 남겨 두고 그들은 바람처럼 떠나 버렸다. 문명의 이기와 인간관계에서 오는 복잡함이 향수처럼 그리웠을까? 아니면 현실적인 문제를 감당하지 못해 찻집과의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걸까? 지금쯤 삶을 지탱하기 위해 어디에선가 또 다른 문을 힘겹게 두드리고 있으리라. 그들은 때때로 처마 밑에서 허브가 꽃을 피워 대던 호젓한 찻집의 평화로움을 그리워하거나, 고혹적인 몸짓으로 실내를 밝히던 붉은 제라늄을 기억하며 아픔을 달랠 것이다.

찾는 이 없는 적막한 숲속을 바람이 간헐적으로 헤적인다. 늦가을 햇살 속에서 마구 자란 잡풀도 초췌하다. 분위기에 취해 일어설 줄 몰랐던 작은 테이블에도 먼지가 쌓였으리라. 주인 없는 찻집은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부재가 주는 공허함 속에서 나는 자질구레한 인연들을 떠올린다. 길거나 짧게, 아니면 강렬하거나 은은하게, 램프의 불빛처럼 내 삶의 부분을 밝혔던 수많은 인연들, 엄숙하고 긴장했던 순간조차도 지나고 보면 모두 새털처럼 가볍다.

소식이 끊어진 인연은 결코 마음의 두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나은 인연으로 키우지 못하고 쓸쓸한 사진처럼 남아 있음이 가슴 저리다. 더구나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인연의 늪 앞에서 우리의 가슴은 자주 시려 온다. 인연의 끝을 예감할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내적인 거리 두기를 서두르기도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그 흔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화사한 벚꽃이나 제철에 만난 갓김치, 혹은 낯선 타인의 콧날 따위에서도 되살아나는 것이다.

누군가의 가슴속에 머무르는 일은 존재로서의 의미를 부여받는 일이다. 돌아보면 찰나와 같았고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있다. 좀 더 이해하지 못했고 좀 더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할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인연은 아름답다. 인연이 낳은 추억들은 빗줄기가 내리는 낡은 영상이거나, 소음을 동반한 채 말려 올라가는 흑백 텔레비전 화면처럼 우리의 가슴을 젖게 한다.

지금 이 시간 내 곁에 누군가가 함께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눈빛만으로 위로받을 수 있고, 너무나 편해서 서로의 소중함을 가끔씩 잊고 소원해지기도 하는, 그러면서도 지나친 배려가 오히려 섭섭함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가만히 곁에 있는 친구의 손을 잡아 본다. 수십 년 만나 온 친구지만 투명한 햇살과 청렴한 바람처럼 다가온다. 영혼이 열리는 느낌이다.

찻집을 뒤로하고 걸어 나오는데 덤불 속에서 바람이 바스락거린다. 무언가를 두고 온 듯한 마음에 돌아보았다. 지붕 위로 순수한 늦가을 햇살이 쏟아지고 솔숲의 향기가 찾아든다. 고독한 찻집은 결코 왜소하거나 궁핍해 보이지 않았다. 그림과 같은 아름다움을 침묵으로 토해 내고 있었다.

호국원에 눈이 내리다

조 명 래

새해 들어 첫 출근일입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습니다. 차창으로 달려드는 눈송이들의 모습이 아주 장관입니다. 흔들리며 달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으니 꿈결처럼 선배님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그동안 마음의 빚을 갚지 못해 참으로 송구스러웠습니다만 오늘에사 다 하지 못했던 숙제를 하게 됩니다.

도착한 곳은 ‘국립영천호국원’입니다. 사무실에서 받아 든 쪽지에 적혀 있는 ‘249216’번을 되뇌며 눈앞 가득 늘어선 빗돌을 향해서 걸음을 옮깁니다. 급한 마음에 경사진 언덕으로 서둘러 오르니 숨이 턱 밑까지 차 오릅니다. 줄지어 도열해 있는 표지석들과 눈을 맞추었습니다. 백설이 금잔디를 덮고 세상을 덮고 있었지만 난 마침내 찾았습니다. 빗돌에는 ‘육군 상병 김문상지묘’가 선명합니다.

맞았습니다. 선배님의 이름 석 자가 분명합니다. 말이 없는 빗돌에 손을 얹었습니다.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내립니다. ‘제가 왔습니다…’ 여러 번 반복하며 준비해 온 인사말의 첫마디 이후 목이 막히고 맙니다. 선배님, 지상은 모처럼 덮인 눈으로 편안합니다만, 그곳도 평온하지요? 후배를 유난히 아끼던 선배님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선배님은 대한민국의 학도병이었습니다. 그때가 중학교 4학년 때라 했지요. 전쟁 발발 나흘째인 6월 29일에 “펜 대신 총을 달라”는 혈서를 써 들고, 65연대 본부로 가서 입대시켜 달라고 떼를 써서 학도병이 되었다던 선배님의 소년 같던 웃음이 떠오릅니다. 8월 29일 다부동에서 쏜 적군의 박격포탄 7발이 신천동 푸른다리에 떨어지자 소개 명령이 내려졌고, 부산으로 이전해 가는 육군본부를 따라갔다고 미안해하셨지요. “동료 학도병들은 안강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했는데 나만 살아 미안하다”고 하셨던 말씀까지만 기억하겠습니다. 눈송이가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더 이상은 안되겠습니다.

눈밭에도 겨울바람은 찹니다. 두 동강 난 비운의 천안함을 기억합니다. 마흔여섯 명의 젊은 생명을 삼킨 그 바다는 오늘도 북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효녀 심청이가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를 건너온 포탄이 백성의 가슴을 찢었고, 연평도의 평화를 찢었습니다. 낙동강을 피로 물들였던 동족상잔의 흔적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는데 아직도 부족하단 말입니까? 조국을 사랑했던 선배님의 영혼이 오늘도 바람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눈이 옵니다. 사뿐사뿐 내리는 서설이 아니라 아예 폭설입니다. 그날 안강 전투에는 하늘 가득 총탄이 쏟아졌다던데, 오늘은 눈송이가 하늘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지상으로 사뿐히 내려온 눈송이가 울타리로 세워진 무궁화 마른 꽃대궁에 내려앉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 강산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선배님, 편히 잠드십시오.

씨를 뿌리고

조 병 렬

새싹이 돋았다. 겨우내 놀린 밭에 씨앗을 뿌려 놓고 물도 비료도 주지 못했다. 오로지 생명체의 힘만 믿었다. 반신반의했던 나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새싹이 소복이 돋아났다. 참으로 신기했다. 좁쌀만 하던 상추 잎이 일주일이 더 지나니 콩알 크기로, 또 한 주일이 되니 동전만큼 자랐다. 축복과 희망의 메시지라도 받은 듯이 기뻤다.

새싹 너머로 쌍둥이 외손녀의 모습도 보였다. 아이들이 태어난 지 달 반이 지났다. 밭에서 자라는 새싹처럼 볼 때마다 다르다. 벌써 나를 알아보기라도 하듯이 쳐다보며 웃는 것 같다. 딸이 낳은 아이라고 생각하니 놀랍기만 하다. 내 품에 안겨 숨 쉬고 있는 아이에게서 생명의 고귀함을 느낀다.

난생처음 스스로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렸다. 전부터 틈이 나면 채소나 과수를 가꾸고 싶었다. 어릴 적 농촌에서 경험했던 수확의 기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 심은 대추 밭 관리도 남의 손에 맡겨 둔 형편이면서, 올봄에 또 큰 용기를 내었다. 단감, 호두, 매실나무 등을 심었다. 특별한 재배 지식이 없는 나는 주변에서 권하는 대로 가장 손쉬운 나무들을 골랐다. 혹시나 뿌리를 내리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한 달이 지나니 마른 나뭇가지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았다.

나는 지금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다.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며칠 후에는 청정한 푸성귀들을 우리 가족의 밥상에 올릴 것이다. 상추 쌈밥에다가 쑥갓 한 잎을 얹으면 그 향기가 더욱 입맛을 돋우지 않을까? 머잖아 가지나물과 풋고추, 토마토로 밥상을 꾸미고, 호박과 수박도 경쟁하듯이 커 갈 것이다. 두 이랑이나 심어 둔 찰옥수수가 익으면 포대에 한가득 채울 수 있으리라.

한두 해 지나면 엄나무나 헛개나무를 몇 줄기 베어다가 토실한 씨암탉과 함께 푹 고아내면 이보다 더한 몸보신이 또 어디 있을까? 생각만 해도 온몸에 힘이 솟아나는 느낌이다. 몇 해 뒤엔 단감이 붉게 익고, 청매실이 주렁주렁 열려 우리 가족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벗들을 불러 모아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눌 것이다. 매실주가 익었다고 서로 초청하는 즐거움도 누리고 싶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생명체의 성장은 기쁨이요 희망이다. 일년생 푸성귀에도 풍성한 수확이 있을 것이고, 다년생 약초나 과수에서는 더 큰 희망을 거두게 될 것이다. 뿌린 만큼 거둔다고 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씨를 뿌려 가꾸지 않고서 어찌 결실을 꿈꿀 것이며, 정성과 노력으로 돌보지 않고서 어찌 아이의 아름다운 성장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생명은 축복 속에서 탄생한다. 생명만큼 고귀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정성과 사랑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날의 행복을 꿈꾸면서 잡초도 뽑아야 하고, 안전하게 자라도록 받침대도 세워 주어야 한다. 나는 요즘 힘차게 자라는 새싹들을 보면서 방긋 웃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주례 단상(斷想)

조 재 현

얼마 전에 기독교인인 어느 인척의 교회 혼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꽤나 크고 이름 있는 교회였다. 교회 의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축의금만 전하고 되돌아 나오는 것이 보통인데 이날만은 그럴 처지가 못 되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윽고 목사의 주례가 시작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 한 대를 뽑아 여자를 만드셨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된다.”고 했다. 주례사가 끝날 때까지 이 ‘복종’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아무리 성경의 계율이라 하더라도 조금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의 입장에서야 여성들의 인권이야 어떻든 간에 무조건 고분고분만 해 준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뿐만 아니라 날로 높아 가는 이 나라의 이혼율도 덩달아 감소할 것이니 일석이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이와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으니 그 목사님이나 남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쉬운 일이라고 해야 될까 싶다.

따지고 보니 그동안 나도 제법 주례를 섰던가 싶다. 나의 주례 대상자들은 친인척을 비롯한 평범한 친구나 지인들의 자녀들이다. 이들에게 들려주는 주례사의 핵심은 부부 행로에서 극복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객관적 당위성)를 강조할 뿐이다. 덧붙여 “우리의 전통 부부 윤리관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내의 덕목(德目)이라”고 들려줄 뿐, 그것을 꼭 따라야 된다고 말한 적은 없다. 우리 고유의 지선(至善)들이 시대 변화에서 그만큼 떠밀려났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를 주례로 세운 그 부부들이 내가 아는 바로는 그 나름의 터전에다 화목의 꽃을 피우며 오순도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두고 나의 주례사 덕분이라고 말한다면 웃어도 한참 웃을 일이다.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몇 토막의 말들이 긴장된 신랑 신부들의 뇌리에 어찌 각인되겠으며, 비록 각인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다는 것이 또한 쉽겠는가? 다만 전통 유풍대로 살아온 그 부모들의 습속이 그랬듯이 그들 역시 한 번 부부는 영원한 부부라는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신랑 신부 한 쌍이 있다. 지난해 가을의 일이다. 신랑의 혼주는 심덕 좋은 마당발로서 오랫동안 교육 기관과 거래한 성공한 사업가다. 그런 그는 주위에 지덕을 겸비한 명망가들이 많이 있을 터임에도 굳이 나에게 주례를 서 달라며 사성까지 부탁했다. 사성과 이에 따르는 예간(禮柬)은 흔쾌히 써 주면서 주례만은 고사했지만, 그의 진정성을 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예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놓고 나를 초청했다. 예비 신랑 신부가 인사도 드릴 겸 당일의 주례사로써는 채울 수 없는 부부 행로에 대한 귀감을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모두들 주례는 인연이 닿는 명망가를 세우려고 하지만, 그 주례사는 형식으로 치부하며 챙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 이들의 초청을 부끄러움과 감명의 뒤섞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이날 내가 받은 과분한 예우에 대한 보답은 위선을 덧칠한 삶의 경험담에 불과했으니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혼례를 마친 며칠 뒤였다. 혼주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영식(令息)과 함께 정성 넘치는 폐백을 마련해서 인사를 온 것이다. 요즈음의 염량세태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 혼주의 행신이 참으로 돋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추석 전에는 그로부터 참으로 반가운 전화가 걸려 왔다. 쌍둥이 손자를 얻었다는 것이다. 입이 귀에 걸릴 것 같은 기쁨을 쏟아내며 손자들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다. 나도 친손자를 본 것같이 기뻤다. 그도 그럴 것이 외동인 그 쌍둥이 아빠가 어릴 때 백혈병에 걸려 엄청난 시련을 겪은 끝에 겨우 생명은 건졌지만, 생식 기능은 확실치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랬는데 마침 아기의 엄마가 대학병원의 미생물학 전공의여서 곧바로 남편을 치료하여 회복시켰다고 했다. 그런 끝에 쌍둥이까지 태어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갑절의 기쁨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 행운은 혼주가 평소에 쌓아 올린 값진 인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나는 곧장 교분을 가진 명성 있는 작명가에게 부탁하여 이름을 짓게 해 주었더니 그 갚음의 표시로 또 두 번이나 찾아왔다. 더구나 작명을 받았던 추석 직전에는 값비싼 한우 등심 상자를 들고 부자가 함께 방문하였다. 이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겠지만, 나에게 베푼 과례의 정리(情理)는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종덕(種德)의 표상임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나의 심정을 감지한 그는 “모두가 주례님의 덕분이 아닙니까.”라며 덕담을 잊지 아니했다.

사람마다 길흉화복의 근원에 대한 시각이 신앙과 무관치 않듯이, 혼례 당사자들의 주례 선택도 이를 비롯한 사사로운 인연을 함께 고려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나 역시도 이런 사조(思潮)에 종속되어 선택되었으니 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축복과 행운을 빌어 주어야 마땅하리라. 그 덤으로 얻는 것은 부푼 꿈을 싣고 비상하는 원앙들의 모습을 보는 보람이다. 그것만으로도 족한데, 쌍둥이 할아버지 가족 같은 축복의 환상(環象)을 만나게 되니 더욱 보람이 아니랴! 이들의 가정에 늘 행복이 가득하기를.

가죽나물

하 정 숙

우리 집 장독대 옆에 서 있던 가죽나무에 새순이 돋을 때면 아버지 밥상에 가죽나물 무침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집이 넓지는 않았지만 마당에 작은 우물도 자리 잡고 있었다. 우물 옆 장독대에 그늘을 드리워 주는 포도나무도 아버지께서 때맞춰 가지치기를 하여 잘 자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우물 옆에 노랗게 피던 그 꽃들은 나중에 철이 들어 황매화인 것을 알았다.

그 집에 봄이 오면 아버지의 밥상에도 봄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계셨지만 아버지께서 드시는 반찬을 장만하시는 것은 늘 할머니 차지였다. 그중에 아버지께서 유난히 좋아하시던 가죽나물을 정갈하게 무쳐서 아버지 밥상에 가지런히 놓는 것은 할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 표현이었다. 아버지의 밥상에는 왠지 더 맛있는 반찬이 있는 것 같아서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가 남기신 반찬을 기다리던 나였지만 그 나물만은 절대 욕심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왜 그런 나물을 좋아하시는지 의아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가죽나물 하나만 가지고도 정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시는 것 같았다.

가죽나무의 순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면 우리 집에 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봄에 나는 새순 중 가장 맛있는 것 중에 속한다는 가죽나무 순인데 나는 이 나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죽나무의 향이 좋다고 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그 냄새가 싫었다. 왠지 비릿한 그 냄새가 역겹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그런데 몇 해 전 친정 제사에 들렀을 때 올케가 만든 가죽나물을 남편이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을 보았다. 연신 입맛을 다시며 먹는 것을 보고 올케는 얼마 남지 않은 가죽나물을 모두 담아 주었다. 집에 와서도 냄새를 맡기 싫어 얼른 접시에 덜어 내놓고 돌아서곤 했는데 남편은 그 옛날 아버지께서 맛있게 밥을 드시듯 가죽나물을 반찬으로 해서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남편은 그동안은 내가 가죽나물 반찬을 하지 않아서 해 달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짭짤한 맛이 일품이라는 남편의 반응이 의아했는데 그 후로도 가죽나무에 새순이 돋을 때쯤이면 가죽나물 타령을 하여서 올케에게 부탁해서 얻어 오곤 하기를 몇 해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올봄에 장을 보던 중 가죽나무 잎이 눈에 들어와 판매하시는 분께 장만하는 법을 여쭈고 얼마를 사서 장만했더니 남편이 무척 좋아하였다. 처음에는 손질하는 방법이 어색해서 나물에 물이 자꾸 생기기도 했지만 올케 언니에게 묻기도 하여 그 다음번에는 제법 모양새를 갖추었다. 맛깔스럽게 먹는 남편을 보며 내가 싫어한다고 하여 그동안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아버지께서 그렇게 좋아하던 나물을 남편이 좋아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이젠 가죽나물 손질하는 법도 많이 익숙해졌다. 새순을 손질하여 소금에 약간 절인 후, 씻을 때는 가죽나물 특유의 냄새가 배지 않도록 살살 달래듯 헹군다. 물기를 알맞게 뺀 후 마늘, 깨소금, 진간장을 섞은 고추장 양념에 조물조물 버무리면 제법 모양이 난다. 통에 찹찹하게 담고 통깨를 솔솔 뿌리면 가죽나물에 깨눈이 내린 것같이 보인다.

가죽나물 무침으로 밥 한 그릇을 맛있게 잡수시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급 부반장이 되어 임명장을 태극기처럼 휘날리며 대문을 들어서던 날, 돌아가셨다. 3월이었으나 음력으로는 2월이었다. 아직 가죽나무에 새순이 돋지 않을 때였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슬픔보다는 부반장이 된 것을 아버지께 자랑하지 못한 것이 더 속이 상했던 철부지였다.

할머니, 어머니, 고모, 삼촌 등이 계셔서 어린 내게는 슬픔이 그렇게 와 닿지 않았는지 모른다. 아들을 먼저 보낸 그해 봄부터 할머니는 가죽나물을 무치지도, 말려서 부각을 만들지도, 고추장 단지에 박아서 장아찌를 만들지도 않으셨다. 그 후로도 가죽나무는 봄이면 어김없이 새순을 피웠지만 우리 가족은 아무도 그 가죽나무의 순을 따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 나물을 남편이 아버지처럼 밥상에서 찾는다. 아주 오래 전, 아버지께서 맡으시던 그 향기를 남편이 찾는다. 시공간을 한 번도 같이한 적이 없는 장인과 사위인데도 이렇게 음식으로나마 이어지는 것일까. 비릿한 냄새 때문에 선뜻 만지지도 못했던 나물을 손질하며 세월 속에 잠자는 아버지를 불러 본다. 자줏빛 가죽나물 사이사이로 아버지의 봄이 사르르 스며든다.

가죽나무의 연한 새순이 아버지의 세월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래서일까? 그때의 아버지보다 훨씬 어른이 되었는데도 나는 오늘 아버지가 정말 보고 싶다.

잘 놉니다·11

— 책가방이 무겁다

강 찬 중

맏손녀 선영이는 벌써 4학년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가방도 점점 무거워진다. 체구가 작은 편이어서 그 무거운 걸 메고 다니면 어깨를 짓눌러 성장에 지장을 줄 것 같아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학교에서만 보는 책은 사물함에 두고 다니라고 하면 그렇게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매양 그대로이다. 일주일 중에 화요일은 차를 가지고 가서 바로 학원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는데 금요일은 시간이 맞지 않아 학원에서 배우는 책을 학교에까지 가져가야 하므로 부담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늦은 6시! 학원 차가 아이들을 내려 주는 은행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무거운 책가방은 양 어깨에 메고, 물병은 오른쪽에서 왼쪽 어깨 아래로 늘어뜨리고, 오른손에는 대여섯 권이 든 학원 교재 가방을 들고, 왼손에는 방과 후 학교에서 무용할 때 소용되는 신과 옷과 소품이 든 가방을 들고 온다. 그 어린것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지고 오는 모습이 너무도 안쓰럽다. 얼른 쫓아가서 책가방과 손에 든 가방을 받아 든다.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어떻게 하든지 책가방 무게를 줄이도록 에미한테도 여러 번 얘기했는데 달라지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한단다.

어느 날은 학원 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나갔더니 오늘은 학원 가방뿐이다. 내가 받으려 하였더니 오늘은 무겁지 않다며 기어코 주지 않고 들고 온다. 지금까지는 무거운 책가방과 다른 가방들을 늘 할아버지가 받아서 들고 왔으니 오늘만이라도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마음인가 보다. 생각이 자라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이제 다 키웠나 싶다.

일주일에 한두 번 학교에 데리러 가면 차는 학교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된단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규칙이 정해진 모양이다. 늘 교문에서 200〜300m쯤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두고 친구들과 함께 교문을 걸어 나와 차를 탄다. 어느 날은 “선영아, 다른 사람들은 차를 몰고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가는데 나도 그러면 안 될까?” 했더니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한다. 학교에서 정한 규칙이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한다고 한다. 작은 것이지만 누구나 다 같이 지켜 준다면 이 세상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리라.

오늘은 학년이 바뀌고 임원 선거가 있는 날이었나 보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아비와 에미한테는 다 얘기하는지는 몰라도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다. 그 학교에서는 지금까지 개학 바로 다음 날, 임원 즉 학반의 회장 부회장(2) 선거를 한단다. 아마도 임원선거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 결과를 물어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1부회장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회장에 출마하지 왜 그랬어?” 했더니 “우리 반은 남자가 여자보다 한 사람이 더 많거든. 그래서 남학생은 남자에게, 여학생은 여자에게 투표를 해서 그 한 표 차로 제1부회장이 되었다.” 한다 4학년인데도 벌써 성별을 의식한다니 웃음이 나왔다. 임원은 어느 것을 맡든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길 해 주었다. 일상에서 말수가 적은 것,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것 등은 에미를 닮은 것 같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생각이 자라는 모습이 보인다. 그게 할아비의 작은 소망이고 기쁨인 것을……. 오늘도 우리 선영이 파이팅!

고독의 위안

견 일 영

천 개가 넘는 섬이 있다는 큰 호수, 숲속의 호수(Lake of the Woods)에 갔다. 호수는 그 이름보다 더 아름다웠다. 호수 안에 산재해 있는 많은 섬들은 숲으로 덮여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놓았다. 유람선도 많지만 그 호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비행기도 관광객을 태우고 떠다녔다. 그러나 캐노라에 있는 그곳은 아주 멀었다. 캐나다 토론토나 밴쿠버에서 2시간을 비행기로 위니펙까지 와서, 거기서 승용차로 3시간쯤 와야 하는 곳이다.

호수를 유람하려면 큰 배를 타고 두 시간을 돌아야 하는데, 수없이 많은 섬 사이를 지나간다. 각기 모양이 다른 작은 섬들은 나무가 우거져 있고, 화려한 별장이 호수 물에 발을 담그고 제 모습을 물 그림으로 드리워 놓고 있다.

띄엄띄엄 보이는 별장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질 않는다.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말이나 휴가 때만 와서 생활하는 것 같았다. 그 넓은 호수를 다 돌 때까지 한 사람도 보질 못했다. 나는 그 집들을 보면서 괜한 걱정을 했다. 이 넓고 외딴 호수 가운데 외롭고 무서워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들은 고독을 즐기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일까. 아니면 고독으로부터 위안을 받으러 오는 것일까. 더 먼 곳으로, 더 돈이 많이 드는 곳으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으로, 이 큰 호수 가운데까지 찾아와 살고 있는 사연이 궁금했다. 아마 그들은 철저하게 고립되고, 완전하게 외로워지고 싶었던 것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고독한 존재다. 가장 가까운 부모와도 헤어져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져야 한다. 우리는 고독이라는 열차를 타고 행선지도 모르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고독은 많은 사람과 떨어져 있어 외로운 것이 아니고, 내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 사이의 소통이 끊어진 상태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모임이 13개나 된다. 매주 만나는 모임,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모임, 2달에 한 번 만나는 모임도 있다. 내용은 동문 모임, 스포츠 모임, 문학동인회 모임, 옛 직장 모임, 등산 모임 등 색깔도 다양하다. 달력에는 모임 일자 밑에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빽빽이 적혀 있다. 달력을 들여다보면 외로워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외롭다. 그 고독, 외로움이 바쁜 내 모임 사이로 연신 찾아온다. 고독의 신이 나를 괴롭히는가. 내가 외로움을 즐기는가.

퇴직을 하고 한동안 증심사라는 절에 들어가 외부와 단절된 시간을 가져 보기도 했다. 글 쓰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 보려 했지만 외로움이 불편을 낳고, 그것은 왁자지껄한 저자판으로 나를 끌고 나왔다. 글이 더 잘 씌어지지도 않았다. 기발한 시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다만 외로움 속에서 내 마음만 쥐어짜는 고통만 따랐다. 고립된 그 생활은 고진감래(苦盡甘來)도 아니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도 아니었다. 고독은 고독을 낳고, 고독을 위한 고독의 시간이 더 많아졌다. 고독은 생산성을 오히려 떨어뜨렸다.

나를 감싸고 있는 이 고독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고독이 나를 위로할 때가 많다. 옆에서 부추기거나 실속 없는 위로가 더 귀찮고 고통스러웠다.

돈이 많아야, 명예가 높아야, 대중이 나를 에워싸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 영광 뒤에 찾아오는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독할 줄 모르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루소는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고 했다.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엄습해 오는 고독을 이겨내기가 더 힘드는 것 같다.

고독은 낙원 같은 섬이다. 남과는 무언의 계약이 있고, 그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거운 부담을 진다. 그러나 홀로 있는 나의 고독은 무한정의 자유가 있다. 아무도 나에게 책임을 묻거나 의무를 따지지 않는다.

내 방은 귀신이 나오는 방이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온 방 안에 책과 자료들을 늘어놓고, 청소도 잘 하지 않으니 아내가 지은 방 이름이다. 나는 여기가 참 좋다. 내 혼자만의 생각, 공상, 연상, 상상을 마음대로 하면서 하룻밤에 기와집을 열두 채도 더 짓는다.

고독의 철학은 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관심이나 호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자유는 여기서 잉태한다. 이 자유가 나를 위로하고 때로는 희열을 안겨 준다.

고독은 격리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유, 능력, 재미를 말한다. 인생은 고해다. 나는 지금도 고독을 통해 그 고해에서 위로를 받고 있다.

완행열차

고 윤 자

어머니는 저 뒤에서 쫓아오신다. 종종걸음 치면서 가슴을 몇 번씩 손으로 쓸어내리신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차마 말 못 하시고, 어머니는 연신 먼저 가라며 손을 내젓는다.

전에도 숨이 차고 가슴이 뻐개질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시지만, 속도를 넘어서 보려는 어머니의 시도에 나는 번번이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같다. 어떡하든지 상황을 초월해 보려는 어머니의 노력에, 넘겨주고 건너뛰는 여유 한 번 없이, 인생의 시계는 가슴에 견디기 힘든 통증을 가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그런 시도를 저지하고 있다.

‘딱 삼등 완행열차네, 왜 좀 더 빨리 다리를 움직여 나를 따라오지 못하실까.’

젊음의 오기에 빠져 있던 나는, 어머니의 늙음과 뒤처짐을 한 번도 감싸 안지 못하고, 그때마다 완행이라고 타박을 주었다. 그때 나는 너무 젊었고 철이 없었다. 그래서 역마다 쉬고 가야만 하는 삼등 열차를 참아 주지 못했다. 나도 뒤를 따라 그 길을 가게 될 줄을 아셨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나를 다 받아들이셨다.

완행열차는 느리다.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역마다 쉬어 간다. 급행과 특급열차의 시대인 지금은 차라리 ‘따돌림’의 열차가 되어 있다. 차례차례로 앞지르는 빠른 열차를, 그저 바라보고 기다려 주는 열차일 뿐이다.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왜 패배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변화가 눈부신 현세에서는 속도가 삶의 적응과 도태의 지렛대가 되어 가고 있다. 길고 지루한 인생 경기에서, 결국엔 승자를 만들어내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 지랄 같은 속도다.

완행열차는 과거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새로운 세대에 진입하지 못해서,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는 낙오자이다. 낙오자들은 앞을 서기보다는, 그 세대에 너무 뒤처짐 당하는 것만은 피하려고 애쓴다. 팍팍한 현실에 적응하기보다는, 젊고 활동적이었던 과거를 회상하길 좋아한다.

그들도 한때는 급행으로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마르고 앙상하고 노후되었지만, 프랑스의 TGV나 RER의 무한 질주를 소유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강변한다. 누구도 그가 한때 지녔던 금송아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하지만 자신은 그 시절을 그만의 것으로 여기며 뿌듯해한다.

급행으로 달릴 때는 모든 일이 급했다. 명예도 급하고, 재물도 급하고, 자신에 대한 욕망이 바로 손에 쥐어질 것만 같아서 급했다. 자신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앞서서 달아나는 형체 없는 욕구 때문에, 늘 숨차고 힘겨웠다. 뒤에서 천천히 쫓아오는 완행열차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느리고 비능률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속도가 더 빠른 열차가 나오는 동안, 자기도 점점 노후화하고 어쩔 수 없이 완행열차가 되어 뒤로 밀릴 수 있다는 사실은 계산에 없었다. 자신은 선택되어 제조되었으며, 열등해서 뒤쫓아 오는 열차와는 전혀 다른 부류라는 우월감으로 우쭐댔다.

완행열차는 열차 여행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뭔가 푸근하고 인정이 넘친다. 눈앞에서 천천히 흐르는 풍경, 소박한 행상과 여유로운 역무원의 웃음이 있다. 스프링이 튀어나온 의자, 어둠침침한 전등,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누운 사람, 가축을 들고 탄 손님의 자루 속에선 돼지 울음소리가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입석 좌석 구분이 없어서 개찰구가 열리면, 너나없이 뛰어서 먼저 도착한 사람에게 자리가 주어지기도 했다. 가는 내내 선풍기는, 가뜩이나 초라한 아버지의 숱 없는 머리칼을 이리로 저리로 나부끼게 했다. 그때의 완행열차는 서민들의 애환을 가득 싣고 달렸다.

KTX나 급행열차 속에서는 조용하게 소곤대는 말씨거나 아예 침묵만 허용된다. 간혹 커피를 홀로 마시는 낭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할 수 없는 차디찬 교양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인생의 한고비를 넘긴 아픔이 있어, 침묵이나 교양이 별것이 아님을 미리 깨닫고 있다.

‘사생활 침해라고……, 삶은 머리만으로는 살 수 없는 거야.’

계란과 호두과자와 고향에 들고 갈 시끄러운 인생사가 있는 곳에는, 그런 생각은 웃기는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고통을 넘나드는 그들의 삶이었기에 앞서 가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 넉넉함이 있다.

이제 삶을 통해서 속도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두르지 않는다.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며 시간 속을 헤매 보기도 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끝내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황급하게 화장실을 찾고 있는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도 젊었을 때는 어머니의 시어머니를 위해서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그때는 어머니도 지금 볼일을 봐도 되고 조금 있다 봐도 급하지 않았다. 속도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이 주연이었던 시대를 보내고, 조연으로 남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신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어진 작은 배역마저도 감사하게 받아들일 날들을 위해, 젊음과 무지의 힘을 빼고 있는 것이다. 더 빠른 급행열차가 지나가면 양보하느라 멈추고 또 멈추어도, 그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도록 겸허하게 낮춘다. 아직도 열차라는 자긍심을 잃지 않기 위해, 완행열차는 열심히 달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혹시 피로하고 지친 영혼이 찾아 주지 않을까. 그들을 위해 아직도 마음껏 달리고 싶은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속도를 자랑하다 사고를 내기도 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다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 젊은 혈기의 급행열차를 늘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혹시 그들의 만용으로 기차가 달릴 수 없을 때, 느리고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고 참여하고 싶은 꿈이 있다. 용솟음치는 비상이 노인을 함락시킬 수 없듯이, 그 어떤 추락도 노인을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갈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대피하는 감정의 회오리조차도, 노인의 삶을 비켜 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크나큰 충격을 흡수할 두꺼운 해면 층이 형성되어 있기에,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급히 가느라 거쳐야 할 것을 놓쳐 버리는 급행열차가 더 이상 부럽지 않다. 목표에 늦게 도달한다고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차창 너머 논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삶을 제대로 느껴 볼 수 없는 삭막함은 가라. 누구네가 어디 땅을 부쳐 먹고살고 있고, 올해 같은 흉년에 몇 섬을 거둘 수 있는지, 일일이 궁금한 것이 삼등 열차이다. 완행열차는 느린 삶의 미덕을 가르친다. 달리는 차창으로 달려드는 한 줄기 바람에도 감사하게 되는, 낮은 자리의 삶이 그들의 것이다.

이제 나는 인생의 간이역에서, 첫사랑의 그대처럼 더디게 다가오는 완행열차를, 고운 자태의 은사시나무가 되어 기다리고 있다.

거리(距離)

공 진 영

요즘에 와서 우리 부부는 아침 산책 길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생겼다. 그분들을 만나면 마치 정답던 고향 이웃을 만난 것같이 반갑고 흐뭇하다. 어쩌다 시간이 어긋나 못 만나는 날이면, 소중한 물건이라도 잃어버린 것만 같아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쉬워한다.

그분들이란, 두류산 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산책객이다. 그들 내외는 시침 방향으로 도는데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돈다. 그러니 하루에 한 번은 만나게 되고, 더러는 두 번을 만나게 되는 날도 있다.

연세가 80은 넘어 보이는 노부부인데 옷차림이며 거동하는 모습이 표가 나게 촌스러워, 인파 속에서도 쉽게 눈에 뜨인다. 사철을 가리지 않고 아래위 빛바랜 검은 추리닝과 운동화를 고집하고 다닌다. 게다가 내외가 꼭 같이 노란색 운동모를 쓰고 있어, 보고는 웃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노리(老羸)를 못 이겨 자식 집에 합가한 분들인가 싶다. 아직도 가까이 다가서면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날 것만 같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분들의 치기 어린 외모보다도 걸어가는 모습에 있다. 남편은 앞에 서고 아내는 뒤를 따르는데, 두 사람은 정확히 두 걸음의 거리를 유지한다. 조금만 가까우면 앞사람의 뒤꿈치를 건드릴 것 같고, 좀 더 멀면 남이 끼어들 것만 같은, 지나침(過)도 모자람(不及)도 없는 알맞은 거리, 마치 자로 재어 꺾쇠로 고정시켜 놓은 듯하다. 하루 이틀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 보아도 한결같다. 마치 부부라면 지켜야 할 질서의 표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내 되는 분이 바람을 맞았는지,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인다. 그 보조에 맞추어 걷는 남편의 인내심과 절제력이 돋보인다. 보폭을 좁히고 속도를 줄이며, 앞서 걸으면서도 뒤를 더 환하게 보며 천천히 걷는 모습, 멀리서 바라보면 움직임이 정지된 것 같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마치 산그늘이 강물을 건너는 것 같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알맞은 거리와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너무 가까우면 채신머리없어 보이고, 너무 멀면 남보다 못하다고 지탄을 받는다.

우리네 어른들은 부부간 거리를 너무 멀리하고 살았으며 그것이 미덕인 양 여겼었다. 이를테면, 부부가 나들이를 할 때 남편은 빈손인 채 두루막 자락을 펄렁거리며 앞장서 훨훨 걸어가는가 하면, 아내는 아이를 들쳐 업고 한 손으론 보따리를 받쳐 이고 멀찌감치 뒤처져서 허우적거리며 따라가는 것이 그들의 풍속도였다. 그런데 요즘의 부부는 그렇지가 않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낑낑거리며 걸어갈라치면, 아내는 손가방을 팔에 걸고, 한 손으론 남편의 팔에 매달리듯 하고 붙어 걷는다. 너무 가까운 것 같다.

이상적인 부부 관계는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이의 관심사가 되어 왔나 보다. 옛날 진(晋)나라 구계(臼季)는 농부인 극결(沕缺) 부부의 아름다운 거동을 보고 상경여빈(相敬如賓)이라 하여 극찬을 했다고 한다. 부부가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 한다 함은, 남녀가 유별이니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격에 어울리는 예절을 갖춤으로써 원만한 부부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리라.

오늘 아침에도 노부부는 평소와 다름없이, 두 걸음의 거리를 두고 바늘 따라 실 가듯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내자가 보이지 않아 돌아보니 두 걸음을 뒤처져서 따라온다. 눈길이 마주치자 겸연쩍게 웃었다.

[조명래]

국장님! 수필집 옮기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 노력과 수고를 해봐서 그런지 느낌이 옵니다. 팎!

[최상대]

영남수필. 이렇게 훌륭한 글의 교본이 되고 있음을 실감하는군요. 나중 내 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