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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제목입니다. 오늘의 시대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20대 시절 손때가 닳도록 지니고 다녔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함께 ‘악령’도 내 삶의 한 영역에서 같이 어울려 있던 작품입니다. 두 작품을 읽어가던 시절, 난 이미 복음주의 기독교의 선교단체에서 청교도적 신앙의 정수를 훈련하고 있었지만 늘 마음엔 기독교의 기본정신과 함께 러시아정교와 그 러시아 메시아니즘의 신앙적 대망이 움트던 상황이었고 박정희 독재정권의 말기적 현상에 치를 떨어가던 무렵입니다. 아울러 흔히 언론을 통해 보도되던 기독인들의 조찬기도회는 무엇이며 분신자살한 노동자 전태일의 소문이 소문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대학의 지성들이 군대의 총칼에 무릎을 꿇고 끌려가던 무렵이기도 합니다. 침묵과 항거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들이 지하 운동하던 동료들에게서 흘러나와 신앙이란 무엇인가의 해결점을 찾지 못해 대안을 꿈꾸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어법으로 표현된 바울의 신학적 접근이 과연 그 시대에 옳았던가? 오히려 그 어법에서 역전되어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된 복음서의 원시 예수운동의 본질을 찾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갓 알아가기 시작했던 복음주의의 힘과 영향력은 시대상황에서 많은 회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박정희 피살로 인한 대통령 유고와 권력을 다시 장악한 군사깡패들. 그리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오자마자 밀어닥친 제주도 일원을 제외한 전국에 내려진 군사계엄령. 5.18 광주사태. 진정으로 성경을 읽고 정의를 배워가던 젊은 20대 초반의 학생들에게 도덕군자 같은 복음주의 신앙을 그 당시의 현실에 대한 진정한 답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미 언론을 장악한 신군부는 복음주의 기독교 목회자들을 동원했고 ‘CCC’, ‘IVF’ ‘예수전도단’ ‘한사랑 선교회’ 등등의 대학생 복음단체들을 직간접적으로 관리해 갔던 때입니다. 그래도 믿음의 힘과 인내에 기댄 것은 거대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의 뜻을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나에겐 어쩌면 새로운 예수 메시아운동처럼 매력적 주제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만났습니다.
내가 거했던 곳 그리고 청춘을 바치고 결혼까지 했던 곳 아이가 태어났고 자라나는 과정에서 참 많이 힘들었던 곳 산꼭대기 평창동의 산길을 올라가기도 힘들었던 가파르게 올라야 했던 그 등산로 옆에 있던 집이 생각나고 산 아래의 마을에선 야릇한 소문이 겹겹이 들려오던 마을. 그리고 간간히 정가의 가족들 이야기가 야사처럼 흩어지던 무렵 사람들은 정녕 메시아의 핵심을 가졌다고 자부심을 갖기에 앞서 이단이라는 말로 당할 그 험난한 미래를 극복할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던 때였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메시아가 왔으니-정명석 스스로 얼마나 직간접적으로 빈번히 자신이 예수의 재림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는지 구름같이 둘러선 증인들이 많습니다.- 그 대망의 메시아운동의 실현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습니다. 신군부의 쿠데타로 인한 새로운 국가건설을 해야 할 상황처럼 그렇게 대비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틈만 나면 이야기 하던 인물이 바로 자신의 큰 형입니다. 정 명석은 자기 큰 형이 자신의 사명을 알아보면 기독교 전도는 끝난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큰 형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증거를 못했다고 제자들을 심하게 야단도 쳤으며, 어떻게든 제자들은 과도할 정도로 성결교단의 목사 정 ㅇㅅ에게 말씀을 가르치거나 잘 대해주어 정명석의 세례요한 역할을 하게 하려고 무진 애쓰기도 했습니다. 정 명석에겐 첨부터 자신의 큰 형이 기독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그대로 그 무렵의 제이엠에스 회원들에게 전이됩니다.
바로 그 두 사람입니다.
정ㅇㅅ과 정명석.
둘은 형제지간입니다. 둘은 애증관계에 있었습니다. 큰 형으로서 그리고 동생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둘의 입장은 상반되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이해한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에 대한 이해에 이르면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인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 집니다. 제이엠에스 신앙에 여전히 경도되어 있는 사람들도 이 갈릴리 마을에 방문하는 것 요즘 자주 목도됩니다. 그들에게 내가 갖는 연민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한 곳의 문자에 빠지면 전체의 정신을 망실할 위험성을 그들은 언제나 노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부분을 매우 치밀하게 자신의 입장으로 이해하지만 그 부분이 말하는 것은 전체의 핵심에서 많이 벗어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숲은 보지만 나무를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나 숲 전체가 주는 조망을 놓치는 인간의 약점을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바른 예수를 이해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지금 제이엠에스 빠져 있는 분들도 그러하거니와 그 제이엠에스를 만들어 간 보수 근본주의 신화적 언어에 노출되어 알레르기 증세를 보이는 어린 기독교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나름대로의 자신의 마음으로 마음대로 예수를 해석하고 예수를 만났다고 하고 마음대로 자신의 마음을 신화의 세상에 번지게 했던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그 못지않게 쌍벽을 이루는 역작 ‘악령’ 등에 나오는 음산한 분위기는 신앙이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가를 20세기를 거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폭로해 주고 있습니다. 두 작품에서 말해주는 이야기의 핵심은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독후감이 각각 다르게 드러나겠지만 나의 이미지에 지금도 그려지는 것은 20대에 읽어내려 갔던 러시아정교의 신비적 권위, 신화 및 신앙의 순결한 열정 그리고 그에 대한 이성적 회의로 뒤범벅된 혼돈의 세상이었습니다.
그 작품에 등장하던 형제들 간의 갈등과 애증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의 제이엠에스 내부의 혼돈이 겹쳐지는 것은 비단 나 자신만의 인상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아버지 표도르와 배다른 네 형제 드미뜨리(미짜), 이반, 알료사 그리고 이복동생 스메르짜꼬프 등이 연결된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야기의 전개는 종교의 권위로 상징되던 조시마 장로의 죽음과 그에 따른 신앙의 본질문제 그리고 대심문관과 재림예수의 이야기를 꺼낸 이반의 대서사시의 전개 등으로 기독교 역사철학의 조망을 한 눈에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작품 ‘악령’에 나오는 키릴로프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전개에는 오늘의 한국사회와 무관하지 않고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아까운 생명의 주인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그 인생의 막다른 벽을 느끼게 합니다. 분명 이 세상은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른 사회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나사렛 예수님처럼 더 가치 있게 존재해야 할 사람들 대신에 없어져야 할 사람들이 악착같이 살아남아 더 많은 악을 생산하는 이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는 그 사건을 통해 깊은 통찰과 개혁의 정신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는 나 자신의 결단과 실행 그리고 이 세상의 지배구조에 대한 거룩한 거절에 달려있음을 고백합니다. 그 고백의 한 가운데는 정령 ‘악령’이라는 상징 언어로 드러나는 불의의 세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첫 페이지에 인용된 구절은, 거라사의 광인에 접신된 악령이 빠져나와 데가볼리 마을의 돼지떼에 집단으로 몰려가 바닷가에서 몰살당하는 광란의 질주가 던지는 충격으로 그 소설의 전반적 전개의 틀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가복음서 제 오 장을 다시 읽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누가기자는 갈릴리 맞은편에 있는 ‘거라사’ 라고 언급하여, 그 지역의 위치를 알리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다 동일하게 언급하는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는 편집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각각의 공동체가 언급하는 분위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초의 복음자료로서 등장한 마가의 이야기가 가장 리얼하게 그려지고 있어 마가 공동체의 상황설정을 그대로 따릅니다. 여기선 제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한 미친 사람의 상황을 꺼내면서 그 원인을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악령은 분명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존재 앞에 설설 깁니다. 악령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상황포착을 통해 그 악령은 이미 존재하는 세력이고 어딘가에 붙어살지 않으면 안 되는 더러운 세력임을 알립니다. 하늘 사람, 권능의 사람 예수의 존재를 무서워하는 악령의 본체는 군대귀신이라는 말로 드러납니다. 수많은 악한 세력의 무리 더구나 로마의 병정의 군단을 말하면서 군대조직으로 대표되는 집단성입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마저도 그 세력을 이 세상에서 온전히 몰아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겨우 그들의 소원대로 돼지 떼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절정에 이릅니다. 더러움과 게걸스러운 짐승의 상징 돼지 떼에게 다시 집단으로 들어가 몰살하게 하는 그 악령의 이야기는 무척 상징적입니다. 그리고 그 돼지라는 물질적 풍요의 대상이 대비하는 사회분위기는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는 수많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을 말하며 나의 존재를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악한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갈릴리의 예수께서 그것을 확실하게 몰아내고 있습니다.
확실합니다. 악당이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살인자가 버젓이 살아 움직이는 세상. 나의 존엄한 주체를 노예상황으로 몰아가는 악령의 세상입니다. 남의 귀중한 처자의 순결을 빼앗고도 메시아노릇을 당당하게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한 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짓밟으면서 죽음으로 몰아가는 정치와 법의 교묘한 제도가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악한 영이 사로잡아 버린 한 생명을 통해 악령이 주도해 가는 세상을 어떻게 제도해 가는가의 문제는 모두의 현실적 대응의 과제입니다. 분명 제이엠에스는 제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현존입니다. 음란의 영과 탐욕의 영과 거짓의 영이 생명을 장악하고 점령해 간 곳이기에 더욱 더 경계해야 할 곳입니다. 사로잡힌 자들은 점령군이 시키는 대로 그 문화의 주체가 말하는 대로 그 악한 영이 조정하는 대로 그들의 문화에 순응하며 그저 춤추고 노래하고 행동할 따름입니다. 장악해 버린 세력이 주도하는 대로 그 신학의 신화가 그리는 대로 그려지고 호흡할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악령의 존재는 가히 치명적입니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 악의 주체에게 정신을 뺏겨 버린 곳이기에 그러합니다. 그 축소된 세상이 바로 젬스의 구조입니다.
그러나 갈릴리의 예수는 악령을 쫒아냈습니다. 거짓을 쫒아냈고 음란의 더러움을 단호히 꾸짖고 배격했으며 탐욕의 세력들과 대결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점령군을 몰아내고 바른 정신의 인간성을 회복하게 했습니다. 세를 모아 정치적 도구로 삼지 않았고 존엄한 생명의 가치를 수단으로 도구화하지 않았습니다. 소외되어 약하고 병든 자에게 한 없이 자비하신 사랑의 힘을 불어넣었으며 위선자들을 가차 없이 질타해 갔습니다. 불의에 대항한 예언자의 정신을 회복한 하늘의 아들이었습니다.
체인에 감겨 무덤사이를 방황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알 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간의 리얼한 모습에서 오늘 삶의 군상을 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악령의 소유물로 전락하게 한 구조적 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갈릴리의 예언자 예수는 지금 우리들에게 단호하게 외치시는 것입니다. 아니 그 배후에 있는 악령에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Come out of this man, you evil spirit"
-마가복음 5:8-
내가 체인에 감겨있을 때 오직 두 가지 예수만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한 없이 연약하신 예수님 그래서 실패한 메시아의 이미지로서의 예수님, 하여 부활의 능력으로 도래하신 보혜사 성신의 하느님의 역사로 탈바꿈되신 교회안의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에 근거한 재림의 현현으로서의 대림소망의 예수님. 더하여 십일조 꼭 하고 주일성수 하는 자에게 복을 몽땅 내려주시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으로 가장하여 들어온 축복신앙. 목사에게 절대로 대들면 저주받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처럼 내려져 온 신앙. 그 체인을 풀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알고 보니 모두가 다 체인에 감겨 자신의 정체성으로 살아내지 못한 허상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른 예수상에 대한 학습이 필요한 때입니다.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과연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나에게 어떤 존재로 살려내야 할 가치의 핵심인가? 내가 이 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민족이라는 민족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고조선 시대의 인물은 예수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실행의 현장을 제공하지 못했는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의 삶을 통해 아니면 딸각발이 조선조의 선비들을 통해 예수의 유훈을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어쩌면 이 땅 이름 없는 보통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내 이웃의 삶 속에서 발현되는 그 소중한 가치가 예수의 예언자적 전통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봉하마을의 촌부로 살아가기로 작정했던 전직 대통령 노무현님의 삶을 통해서도 예수의 정신은 보였으리라.
내가 거한 공동체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내 실존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성찰-역사해석과 당연히 결부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땅의 신앙인들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과는 상관없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정통하면서도 나의 혈육으로 전개되어온 유구한 민족사의 정신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조선상고사를 다시 보아야 할 것이며 바이칼호반까지 연결되는 한민족 상고사의 역사인식을 통해 이미 하늘의 맥이 닿아있던 토착화 신학의 배경으로까지 전진해 가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공부하고 학습하는 것이며 제거하고 쫒아내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과 악한 것과 음란한 것을 제거하여 생명의 찬가를 부르고 감사의 예를 올리는 거룩한 행진이 되어야 할 그 무엇의 힘입니다.
이제 고착된 노예인식의 사슬을 벗어버리고, 아예 끊어 버리고 실재하는 악령의 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갈릴리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와 악령의 구조적 악과 대항하는 소중한 예언자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명의 진정한 탐험가Explorer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05.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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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곳은 메모리얼 데이입니다. 국가 유공자들을 위한 현충일입니다. 참으로 올 현충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더욱 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고 노무현님의 명복을 빌며, 그분을 사지로 몰아간 국가구조적 악의 세력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출애급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제이엠에스에 빌붙어 사는 악령을 생각했습니다.
정명석형 정ㅇㅅ씨 얘기가 나오니(저는 그가 젬스와 연결되기 전에 탈퇴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어머니와의 일화가 떠오르네요. 85년 가을인가 봅니다. 그때도 교회는 아직 가난을 면치 못했던 때였고, 어느날 저녁 저를 포함한 직장부 리더들 네명이 정명석과 미팅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집으로 갔더니 외출을 했다는데 늦어져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한 삼십분 정도 지났는데, 갑자기 그 어머니가 우리가 있는 방으로 뛰어들어와 의논할게 있다는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 아들이 밤마다 여자들 여럿과 성관계를 갖는 것 같은데, 이런 일이 길게가면 꼬리를 잡혀 감옥이라도 갈 것 같다면서, 그야말로 공포에 가까운 걱정거리로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게 주제였죠. 그 말의 느낌으로 보아 그집 매일밤 열기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란한듯 했고, "우리 역시도 고민하는 문제'라며, 딱히 결론이 서질않아, 그 엄마를 포함 다섯이 예수님께 기도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죠. 그 엄마 울며불며 통성기도하시고..^^..진짜 가슴 답답한 밤이었어요. 그 다음해에 우린 모두 탈퇴했고, 87년인가..호산나에서 젬스를 몇차례 갔었는데, 그새 들어와 자리잡은 그 가족들 가관이 아니더군요. 누구보다도 그 엄마, 벤츠인가 탓는데, 뒷자석에서 얼마나 폼을 잡는지.. 사람 돈이 몰리면서, 시골사람들 정신 없어진거죠. 지금 그 형, 원하는게 뭐겠어요? 엠에스들 등치는 것 밖에.
청성님 아니면 들을 수 없던 귀한 자료이군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는 자들에게 알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정인*목사는 삼선교무렵부터 왔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영동지하실에서 공개강연회 강사로 왔다가 김경천으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전초질문을 받고 분개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선생의 말 외에 다른 말을 믿는 자들은 마귀의 말을 믿는 자들입니다."(09.5.20.수, 말씀). 정씨 자신의 말? 더 이상의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메시야가 아니고, [신. 그 자체]입니다. 이 말이 전하는 자들의 오타이기를 바랍니다.
정씨는 정신과 분석이 필요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한 번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타는 분명 아닙니다.
오타 아닙니다. 그런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흑백논리의 이분법 세상에 자리잡고 있으니 수시로 자신이외의 타자를 도구로 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첨부터 그 신화의 세상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계속 멈춘 자입니다. 악령의 소굴이 되어버린 것은 틀림없습니다.
곰곰히 생각하는 글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청성님 댓글을 보니 아~ 이것도 진짜인가요? 머리가 ...
청성님만의 자료가 이것 말고도 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저같은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일들도 있었더군요. 하여튼 영원한 거짓은 없습니다.
초창기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청성님처럼 핵심 여성분이 아니라면 접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정명석의 이중적인 성행각인 것 같습니다. 정명석 어머니 황길* 씨도 이미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군요. 그걸 그 당시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83년 전도되 신입 일년 정도 지나고 조금 있다보니, 섭리사 영적역사 다 좋은데, 성적으론 뭔가 찜찜하고 문제가 있다는 감이 잡히던데요. 그래서, 순진무구 주변의 동료들부터, 예수님 할아버지를 만나도 지킬건 지켜야 한다고 주장, 단도리 시작했죠. 실은, 정명석의 (그당시 선생) 인성인격 차원으로 볼때 일어남직한, 인간적 오류라는 판단있었고, 예수님 뜻으로 알고 당한 선배들 참 안쓰럽기도 했어요. 본래 심성 신앙좋은 그들, 요상하게 변질되더군요. 또한, 신데렐라컴프렉스 철딱서니 심란한 자매들도 많았죠. 86년 우리 나간후 정명석이 애인들에게 갸들 그런 관계하지 않아 쉽게 나갔다고 했다는 설 바람결에 들렸죠. 옛날얘기.
기왕 수다가 나왔으니, 혹시 있을지 모르는, 85년에 그런 문제알고 왜 86년 니들끼리만 탈퇴했냐는 오해에 대한 해명. 요한님 등 옛동료들 기억하시겠지만, 그당시 선생과 싸우고 욕먹는 대상, 온엠에스들 지탄 이년정도 받다 나왔죠. 열심히 활동하던 멀쩡한 사람들이 어느때부턴가 영들려? 모두 존경, 귀히여기는 메시아, 하찮게보고 대드는 문제엠에스 된거고, 결론은, 그 스러지던 곳에서 한동안 왕따, 웃음거리로 사탄 취급 받다, 진 빠지고 구제불능 진단도 나오고..더 머물 조건 없어 떠났고, 사실상 쫏겨난거죠. 힘들었고, 섭리가 망한다는 생각에 안타까왔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어린맘, 젊은날 황당한 객기 꽤나 부렸구나..극성..하죠.
방금 한 회원으로부터 <수정된!! 30개론> 받았 걸랑요! 계시가 바뀌어요! 지난 (5.24)주 설교. 한가한? 예수님, 정 씨 "바쁜" 줄 모르고, 지구방문하셨다, 헛탕 쳤다는 기록!!! 적어도 예수님 보다는 윗 자리-권세입니다! 확실히 ...
스웨덴보리의 영감을 받았는가 봅니다. 아니면 그 집단 무의식의 한 가운데서 스스로 중얼거리는 것도 같고요. 그의 의식세계에선 그는 자신이 재림예수임은 틀림없습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영화가 갑자기 생각납니다.
드러나는 악령은 그래도 좀 쉬운편입니다. 제일로 힘든게 악령의 주체가 가장 존경하는 예수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요즘 포장술이 뛰어나서 내용이 별로라도 포장만 그럴듯하면 가격이 수십배, 수백배로 달라집니다. 더구나 내용이 없기 때문에 포장에만 신경 쓸 수 밖에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두 얼굴의 한 인격체 정인*과 정명석의 모습은 포장이 그럴듯한 것이었지만 가해자들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치도 없었던 형제들의 모습입니다. 그 이하의 범ㅆ이나 용ㅆ 이나 모두가 다 국화빵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