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고개> 그 후
khan 이정식
201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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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고개 언덕을 홀로 넘자니...
2017년 2월 말, 작은 소포 하나가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뜯어보니 『바우고개 언덕을 홀로 넘자니』라는 제목의 책이다. 가곡 <바위고개>의 1절 가사의 첫 줄과 같은데 ‘혼자’가 ‘홀로’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 찬란했던 백란영의 한평생’이란 부제가 달려있다.
문득 몇 달전 <바위고개>와 관련해 거창에 산다는 이이화란 분과 전화 통화를 한 기억이 났다. 이이화씨가 내게 전화를 한 이유는 인터넷에서 <바위고개>에 관한 나의 글을 보았는데, 그것을 앞으로 출판할 책에 실어도 좋겠는지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비록 내 글이긴 해도 그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꺼릴 일도 아니어서 선뜻 ‘좋다’고 승낙을 하고, 그후 <바위고개>가 들어있는 나의 첫 번 가곡책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도 그 분께 보내드렸다.
이이화씨가 내게 보내 준 『바우고개 언덕을 홀로 넘자니』는 가곡 <바위고개>의 작사자가 남편 이서향의 작품이라는 것을 뒤늦게 밝힌 백란영(1917~2015) 여사 추모문집이었다. 백 여사 본인의 글과 지인, 제자들의 추모의 글이 실려있다. 그 가운데 내가 청주대학교 신방과 객원교수 시절인 2011년 청주의 <충청매일>에 실었던 <바위고개(1)>도 실려있었다. “왜 (1)만 실었을까”하고 (2)를 찾아보았으나 인터넷 속에 <바위고개(2)>는 없었다. (2)는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 속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바위고개>의 원래 제목은 <바우고개>였다.
기록을 위하여 <바위고개>(1)의 대체적인 내용과 『바우고개 언덕을 홀로 넘자니』에 실려있는 백란영 여사의 글 가운데 <바위고개>와 관련된 주요 대목을 간추려 싣는다.
바위고개(1)
‘바위고개’는 어디에 있는 고개인가?
지난(2011년) 4월, ‘이정식 가곡 에세이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의 원고를 마무리 하면서, 책꽂이에 있던 『한국가곡전사』(韓國歌曲全史, 금성출판사 발행, 1967)를 다시 꺼내보았다. 44년을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악보집이다.
이 악보집은 처음엔 네모진 단단한 통속에 5장의 가곡 레코드와 함께 들어있던 것이다. 유니버살레코오드사에서 LP판으로 제작한 레코드의 표지에는 그때까지 흔히 보던 고즈넉한 우리네 농촌풍경을 담은 그림들이 실려있어 가곡이 지닌 의미(서정성, 향토성)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가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의 <봉숭아>를 비롯해 그 때까지의 유명 가곡 68곡이 들어있다.
레코드는 이사를 다니면서 없어졌지만, 짙은 곤색 하드커버로 만들어진 악보집은 조금 낡고 색깔만 약간 바랬을 뿐 아직 건재하다. 한 질로 된 그 레코드와 악보집은 선친(고 이경성)께서 노래를 좋아하던 내게 선물로 사주신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인 1967년이었다. 그 음반과 악보집은 나의 가곡 선생이었다. 그 가곡들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이번에 낸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에 쓴 것이다. 물론 그 후에 나온 가곡들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가곡전사』를 한 장 한 장 들쳐보다가 <바위고개>에서 잠시 멈췄다. 다른 노래에는 모두 작사자와 작곡자가 나와 있는데, 이 노래엔 작사자의 이름은 없고 ‘이흥렬 작곡’이라고 작곡자 이름만 나와 있다. 왜 작사자 이름이 빠져있을까?
바위고개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임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임이 즐겨 즐겨 꺽어 주던 꽃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임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10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한때 최고의 인기가곡 중 하나였던 ‘바위고개’는 지금 이흥렬(李興烈, 1909~1980) 작사 작곡으로 되어있다. 시중에 나와있는 악보집에는 모두 그렇게 나와있다. 가곡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젊은 층이 아니라면 가곡 <바위고개>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누구나 부르기 쉬운 부드러운 멜로디에다 정감어린 가사 때문일 것이다.
고려대, 숙명여대 교수와 숙명여대 음대학장을 지낸 이흥렬은 <바위고개>외에도 <어머니의 마음> <꽃구름 속에> <코스모스를 노래함> 등 가곡과 동요 <섬집아기>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다. 그는 그의 곡들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서정적 선율로 인해 ‘한국의 슈베르트’라고도 불렸다. <바위고개>는 1934년 발행된 『이흥렬 작곡집』 속에 들어있다. 이 작곡집 속의 제목은 <바우고개>다.
이흥렬은 생전에 “바위고개는 어디에 있는 고개인가?”하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그때마다 늘, “바위고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고개이며,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의 온 국토가 바위고개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상 <바위고개(1)>에서, 충청매일, 2011.6.2)
다음은 2001년 『이문회우』에 실린 백란영 여사의 글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월북연출가 이서향과 <바우고개> 작사
내 나이 이미 여든 여섯, 앞으로 살아갈 미래보다 지난 세월을 추억하는 일이 더 많은 사람이다.
내가 인제대의 모태인 백병원의 설립자, 백인제 박사의 맏딸로 태어나 말 못할 세상 고초를 겪고도 무사히 오늘까지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경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내 남편 이서향(李曙鄕, 본명은 이영수李榮秀, 1915~ ?)을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아려온다. 그는 공산주의자였던지 누구한테 속아서였던지 결혼 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낳고 6.25때 월북해, 거기서 곧 숙청당한 유명한 연출가였다. 단 1분간도 재미없는 시간은 안가지겠다고 그토록 행복하게 살기를 갈망했던 사람이 경직된 북한체제 아래서 어떻게 재미나게 살 수 있었겠는가?
열여덟 살 어린 나이로 <매일신보>에 희곡이 일등 당선됐다고 자랑하던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얼굴이 어제런 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진)
중학교 2학년 때 친구하고 같이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지은 시 <바우고개>를 훗날 그 친구(이흥렬)가 작곡해 줬다며 새색시인 내게 그걸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던지, 우리 둘이 함께 부르기도 몇 번이던가! [주: 이흥렬은 이서향 보다 여섯 살 위로 고향(함경남도 원산) 선배이자 사제시간이었다. 백 여사는 두 사람 사이를 친구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 아무리 서럽고 억울해도 그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도 없었던 시절, 어린 중학생이 쓴 노래가 온 민족의 심금을 울리는 애창곡이 되어 지금도 불리고 있건만, 그 작사자는 세상에 밝혀지지도 못한 채 이제는 죽어서 다시 자기 노래를 불러볼 수도 없고 들어볼 수도 없게 되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는 이북으로 간 죗값 치고도 비운의 예술가이다. 월북작가의 작품이라면 금지곡이 되었던 때야 작곡을 한 그의 친구가 자기 작사라고 한 걸 이해하지만, 남북의 예술가들이 왕래하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알려지고 있는 데는 내 책임이 크다. 내가 빨갱이 마누라라고 3개월이나 옥살이를 한 뒤로부터는 세상일에 대한 피해의식이 나를 그런 일에 발 벗고 나서지 못하게 한 탓이다. 다 내가 못나서려니 싶다가도 이런 억울한 일도 있나 싶어 잠 안오는 밤이면 회한에 사무친다.
며칠 전 우연히 국문학자 안숙원 교수와 얘기하던 중, 이 노래의 작사자가 내 남편 이서향이라는 사실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또 다른 사람이 이것을 증명해줄 수 있겠느냐고 묻기에 “내 동서가 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안 교수가 돌아간 후, 나는 동서에게 전화를 걸어 새삼 옛 일을 확인했다.
내 시동생이자 그 동서의 남편은 작고한 음악가 이호섭 교수인데, 그는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 출신으로 중앙대학에서 40년을 가르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이다. 그가 작곡한 노래 가운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옛날은 가고 없어도>라는 노래가 있고 그밖에도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호섭 교수는 내 남편 서향과 너무나 닮아서 친구들도 때
대로 형을 동생으로, 혹은 동생을 형으로 잘못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는 일이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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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향은 몹시 거만하고 자신만만했다. 나는 그가 연출하는 연극 연습장에 갔다가 연기가 마음에 안든다고 나이도 자기보다 많은 여배우 전옥(강효실의 어머니, 인기배우 최민수의 외할머니)의 뺨을 치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의 후배 연출가 이해랑 씨 같은 사람도 남편의 가방을 들고 대문에만 섰다가 모시고 가곤 했지, 방안으로 돌어온 일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북에서 연극인들을 잘 대우해주고 생활도 훨씬 여유있게 살게 해 주리라고 믿었던지, 극단을 끌고 월북한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의 실정을 잘 알지도 못한 채, 예술에 대한 혈기만 넘쳐 그곳에서 잘 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홀려 북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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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발랄한 신여성인 나는 친구처럼 그렇게 부러울 것 없이 5년을 살았다. 서로를 완전히 믿고 절대로 그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 이서향은 6.25 2년전인 1948년 ‘남북협상’ 때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미모의 여배우와 함께 월북해 이후 북한에서 국립예술극장 총장 등을 역임했으나 1959년 복고주의 종파분자로 분류되어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람이란 연약해서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닌 것을 어이하랴. 일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남편이 내가 만류하는 것도 듣지 않고 이북으로 가는 바람에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때의 내겐 하나님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었고, 반공으로 서슬 퍼런 우리나라에서 내 처지가 처지인 만큼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한사람이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한 마리 작은 새라도 제 둥지에 돌려보낼 수 있다면 결코 헛되이 산 게 아닐 것”이라고 고백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내가 애송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천년만년 살 것 같이 나를 이용하고 속이던 내 주위 사람들도 다 가고 이젠 나만 남아 구순을 바라보며 호젓한 내 방에서 이렇게 시를 읊기도 하니, 다만 범사에 감사할 뿐이다. (『이문회우』 다섯째호, 2001년 11월호)
(위 사진: '바우고개 언덕을 홀로 넘자니' 174쪽 사진. 2002년 서울 종로 이문학회 마루에서 백난영 여사, 사진_이승혁)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박사(1898년 평북 정주 출생, 1950년 6.25 때 납북)의 맏딸이었던 백난영 여사는 경기여고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온 당시의 인텔리 여성으로 해방 후 미 군정시절에는 통역으로도 일했다. 6.25 후에는 숙명여고에서 영어교사를 했고 숙명여대에서 강사도 했다. 만년에는 경남 김해시의 인제대 생활관에서 살면서 자문교수로 해외입양아교포 모국유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백란영 여사는 2015년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바우고개 언덕을 홀로 넘자니』는 백 여사 사후, 인문학 책 만들기에 힘쓰고 있는 이이화(필명 이산)씨가 엮어 낸 책이다. 백 여사도 글 속에서 작곡가 이흥렬 선생을 비난하지 않았지만, 나의 첫 번 가곡책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에서도 말한 바대로 이흥렬 선생이 이 노래를 이흥렬 작사 작곡으로 바꾼 것은 월북자의 작품을 사용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노래를 살리기 위한 어쩔수 없는 임기응변적 조치였을 것이다.
나의 두번째 가곡책 『가곡의 탄생』의 <선구자>에서도 조두남 선생이 작사가 윤해영의 존재를 모른다고 한 것은 “윤해영이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좀 더 이해하면서 문제를 봐야할 것 같다.
예술작품 곳곳에도 이처럼 우리 현대사의 아품이 배어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위고개>의 작사자 문제도 모든 정황들이 대체로 밝혀졌으므로 언젠가 바로잡힐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