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여호와 그가 네 앞서 건너가사(신31장)
1.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생
모세는 많은 것을 말했지만 그래도 또 무엇인가 더 말해야 할 것이 있다는 부담을 가졌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볼 때는 항상 염려하는 마음이 있어 한 말을 하고 또 하게 된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자녀들이 어리고 불안하기 때문에 말을 했어도 염려가 되어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과 똑같은 이치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백성이 어떤 백성이며 그들의 성질이 어떠하고 체질이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말을 해도 시원치 않아 계속해서 말하고 또 말하는 노인이 되었다.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신31:2)”라고 하였는데 백이십 세는 노아와 홍수 이후에 사람에게 정한 수명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 다 살았다’는 뜻이다. 내가 할 일이 다 끝났고 더 이상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제한을 주시고, 공간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필요한 것과는 다르다.
나는 백삼십 살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백이십 살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과 생각 속에서 백삼십 살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우리보다 먼저 무엇을 정해 놓고 우리를 선택하신다.
하나님의 생각은 절대적이지만 우리의 생각은 근거가 없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창조하신 분으로 우리를 위한 확실한 근거와 계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태어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 근거를 둘 수가 없고, 내가 아무리 옳은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이 옳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허망한 데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근거 있다고 생각하므로 문제가 있다. 우리는 목적도 없고 목표도 없기 때문에 계획하는 것 자체가 합당치 않다. 우리는 계획할 자가 아니라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자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의 결정을 신뢰하고 따라야 하지 절대로 내 생각이나 결정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을 신뢰하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두 번째로는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이렇게 할 자도 아니고, 저렇게 할 자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저러 해야 된다고 결정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런 결정도 할 수가 없다. 자기가 결정을 해 놓고 그것을 가지고 서로 부딪쳐서 싸운다. 사실 우리의 생각은 뜬구름처럼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선택만이 우리의 운명이고, 하나님의 결정만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정해진 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조용해진다.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시끄럽다. 내가 무엇을 할 자로 알고 계획할 자인 줄 알면 시끄럽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로 생각하고 내 뜻대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요란해진다.
이렇듯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인생은 정해진 길을 가게 됨으로 요동할 것도, 설렐 것도 없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은 인생에게 정해진 길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였다. 이렇게 못박아 놓으면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불편해한다. 그런데 왜 그 자리에 못을 박아 놓았는가? 모든 것을 거기서부터 출발하라는 뜻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아무데서나 출발하고 싶지만 나를 창조하고 선택하고 목적을 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정해 놓으신 못박은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가닥이 풀리고 헝클어졌던 인생이 정리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또 알아도 깨달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이 복잡해지고 세상이 복잡하다. 우리는 백이십 세로 정해진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깨닫고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길을 만들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을 가는 것뿐이다.
2. 앞서 가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신31:3).”
여기서 우리는 앞서 가신 이가 있다는 것과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희가 가기 전에 먼저 갈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가 맨 먼저 가시고, 그 다음에 여호수아가 가고, 그리고 너희가 갈 것이라는 말이다.
‘여호와’라는 이름과 ‘여호수아’라는 이름과 ‘예수’라는 이름은 같은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다. 구약의 여호수아는 신약의 예수다. 즉, 히브리 음으로 여호수아는 헬라 음으로 예수다. 우리보다 앞서 가는 분이 있다. 여호수아, 예수는 ‘구원자’란 뜻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우리 앞에 간다는 말이다.
내가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할 자가 먼저 간다. 그래서 너는 강하고 담대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앞서 가실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다.
내 앞서 가신 자가 있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지만 내 앞서 가신 자가 없고 나 혼자 간다면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건너가니까 나도 배를 타고 건너간다. 어떤 사람이 헤엄치고 가니까 나도 헤엄치고 가는 것이다. 한 번도 배를 본 일도 없고, 배 타고 건너간 이를 본 사람도 없으면 배를 타고 갈 수가 없다. 내 앞서 간 자가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담대해진다.
인생을 앞서 가신 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 안심이 되지만 내 앞서 가신 분이 안 보이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기 앞에 가는 자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는 아주 중요하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가고 있는 사람, 내가 지금 강을 건너야 하는데 나보다 먼저 강을 건넌 자가 있느냐 없느냐를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도 강을 건너간 일이 없다면 막막하고 캄캄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강을 건너고 있고, 이미 건너가서 강 저편에서 나를 오라고 하는 것이 발견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만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었으면 당연하게 내 앞에 가는 자가 보였을 것이다. 생명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다. 사람이 생명 안에 거한다면 자존심이 없다. 생명 안에는 자존심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선악으로 자라면서 생명은 시들게 되고 자존심만 커갔다. 눈이 흐려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영이 혼미해져서 앞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신뢰하게 되어 혼자 무엇을 해보겠다고 발버둥 치게 된다. 내가 어디로 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걸어간 길이다.
남이 산 대로 사는 것이지 내가 별다른 인생을 살 수 없다. 내가 새로운 무엇을 연구하여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도서에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전1:9).”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 앞에 누군가가 가고 있다. 아담이 우리 앞에 갈 때 우리는 아담의 결국을 잘 보아야 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어떻게 갔는지 자세히 보아야 한다. 내 앞서 간 자가 그렇게 가면 나도 그렇게 가는 것이지 다르게 가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아담의 결국을 보면서 ‘저렇게 가면 망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스스로 깨닫기는 어렵고 앞서 간 사람을 보면 쉽게 그 길을 알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보다 먼저 잘못된 길을 가면 그것을 보고 그렇게 하면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코 본 것 없이 아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담의 길도 그리스도의 길도 사실은 다 내 앞에서 누가 가는 것을 보고 알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 여호수아가 가고, 우리의 구원자가 가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내가 구원의 길로 가야 할 그 길을 가는 자가 있어 우리는 그것을 보고 따라간다. 그 길로 가면 영생의 길이고, 사는 길이란 것을 알고 그곳으로 간다.
그런데 이것을 안 보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도 빈말만 하게 된다. 앞에 것을 안 보고 자기 생각만 계속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증을 듣는 이유는 그 사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간증은 안 듣고 자기 생각만 하고 있다가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간증하러 나온다. 그러면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다.
앞에 간 사람을 보고 깨달아서 말을 하면 연결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소리를 한다. 내가 맨 처음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 나보다 먼저 사람들이 갔고, 또 가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가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서 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우리 앞에 가는 것을 보아야 한다.
여호수아는 백전백승의 장군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라서 전쟁하였으나 그가 직접 전쟁을 하지 않았고 항상 여호수아가 하였다. 모세가 팔을 들고 있을 때 여호수아는 아말렉을 진멸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격이라면 여호수아는 군대장관 격이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어떻게 승리하는가를 보았고, 얼마나 승리하는 장군인가를 보았다. 그 승리하는 장군이 그들 앞에 간다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너희 앞서 갔다는 말은, 광야에서 38년 오는 동안 너희는 여호수아가 어떠한 장수인가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너희 눈에 확실하게 보였던 장군이 너희 앞서 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앞에 간다고 하는 말과 같다. 병 고치는 것도, 방언하는 것도, 예언하는 것도 다 너희가 보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할 길을 그가 먼저 가셨다는 것이다.
그가 가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간 것을 너희가 확실히 안다면, 그가 우리 앞에 간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실패했다고 보면 도저히 우리는 그리로 못 간다. 그런데 예수님을 볼 때 인생의 완전한 성공자라는 것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도 주저할 것도 없이 강하고 담대해질 것이다. 예수를 아는 것이 우리를 담대하게 한다.
예수를 아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갖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요17:3).”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모르고 신앙생활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혹자는 예수를 모르면서도 아는 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열심을 내서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남이 하는 대로 금식기도, 철야기도를 하려고 한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분명히 봤으면 담대해지고 안심할 것인데 예수님이 어디로 가신 줄을 모르고 자기의 열심을 내려고 하니까 아무리 해도 불안하다.
사람은 결국 선악과를 먹고 자기의 생각과 지식에 빠짐으로써 자기 앞에 가는 자를 못 보게 되었고, 그 영이 혼미해져서 귀는 어둡게 되었고 눈은 흐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들을 것을 못 듣고 볼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등이 굽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선악과를 먹으면 우리에게 지식이 생겨서 자신의 생각 속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앞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은 자기 생각 안에서 돌기 때문에 두려워진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지만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일수록 두려움이 많다.
우리가 만약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었더라면 전혀 두려움도 없고, 떨 것도 없을 것인데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두려움과 떨림이 생기게 되었다.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맨 처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고, 아담은 “내가 두려워 숨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지식이 들어왔기 때문에 두려워졌다는 뜻이다.
앞서 가는 자가 안 보이고 자기 생각이 먼저 들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고, 자연히 나무 뒤에 숨게 되었다. 사람이 두려우면 자꾸 무엇인가 자기를 방어하려고 노력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생명 안에 거한다면 자기 방어를 할 필요도 없고 두렵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변명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면 요동하지 않고 안정되게 된다.
너희 앞에 백전백승하는 여호수아가 먼저 가니까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그 뒤만 따라가라는 것이다. 여호수아에게는 너 앞서 여호와께서 가시니까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가신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갈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보고 가는 것이지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보고, 우리도 그 길로 가는 것이다. 그분이 고속도로를 서울서 부산까지 닦아 놓았다면, 우리가 가면 다 부산으로 간다. 엘란트라를 타고 가든지, 티코를 타고 가든지 무엇을 타고 가도 부산으로 간다. 사람마다 차가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달리는 속력이 다 다르지만 길이 한 길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다 부산으로 간다.
그런데 그 길이 어디에 나 있느냐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7).” 하였다. 이 말은 “나는 경부고속도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부산으로 올 자가 없다”는 말과 같다.
예수님 자신은 우리 앞서 가시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만일 아버지 우편으로 갔으면 우리도 아버지 우편으로 가고, 그가 지옥으로 갔으면 우리도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길이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이다.
우리 앞서 가는 자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히 알지 못하면 따라갈 수가 없다. 이 길이 확실히 부산으로 뚫렸는지, 안 뚫렸는지를 모르면 우리는 길을 갈 수 없다. 길은 부산으로 통해 있지만 부산은 보이지 않는다. 길에는 부산이란 것이 없다.
그래서 가다가 멈추고, 뒤돌아보고, 가다가 유턴하고, 그러다 보면 동서남북을 구별하지 못하고 오던 길로 계속 돌아가면서도 자기는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마음은 더욱 바쁘다.
우리가 그 길을 확실히 안다면 천천히 가도 갈 수 있지만 그 길을 모르고 가니까 바쁘고 인생이 복잡하다. 그러므로 앞서 가는 여호수아를 아는 것과 우리의 길 되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 앞에 가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 우리 앞에 가는 여호수아를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승리자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승리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여호수아가 승리자라고 하면 그것은 쉽다. 여호수아가 전쟁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이다.
3. 영광의 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예수가 하늘에 오르셨다고 하면 우리는 알기 쉽다. 예수가 하늘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나면 하늘이 어딘가에 대한 개념이 생긴다. 전에 우리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우리에게 하늘에 대한 개념이 애매하고 모호하였다.
저 푸른 곳이 하늘인지? 아니면 그 위에 또 하늘이 있는지? 도대체 하늘이 어딘가를 몰랐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고 할 때 하늘이 바로 예수님이 도달하신 곳으로 알아지는 것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이 어디인가? 예수님이 도착하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우편이고, 예수님이 완성되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고 알게 되었다. 우리의 개념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 되었다. 예수가 없으면 이 모든 것은 모호해져서 아무리 하늘이 어디라고 말하고, 하나님 보좌를 이야기해도 추상적이고 애매하다.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인간 가운데 가장 존귀한 영광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사람이 최고의 존귀한 영광을 받은 한 자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보좌이다. 전혀 다른 개념이다. 우리가 어디서 영광스럽고, 어디서 정금처럼 빛나고 유리 같고, 어디에 보석 같은 성이 있고, 어디에 진주 같은 문이 있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그 인격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명백한데 사람들은 어떤 공간이라고 속여 놓았다. 그래서 모두 자기 생각 속에서 어디론가 가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31장 4절에는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하였다. 우리의 대장 되시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물리치고, 모든 것을 승리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가는 것이다. 우리도 주 예수님이 가신 것을 자세히 보고 꼭 그 길로 가야 한다.
4. 영원하신 그리스도
바울이 말한 대로 무엇을 하든지 내게서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고(빌1:20 참조), 무엇을 해도 그리스도가 안 나타나면 실패한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실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고,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목표이다.
어찌하든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서 존귀하게 된 그리스도가 영원히 전파될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영원히 승리할 것이고 영광 받으실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도, 다음 세대도, 또 말하고 말하기 때문에 사람은 다 죽지만 그분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주님의 어떠하심이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증거되어 ‘주님이 저렇게 영광스럽구나!’를 알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큰 복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나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릇이 된다는 것은 더없는 영광이다.
어차피 우리는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갈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리스도만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것이다. 이천 년 전에 부활했고 또 그 이후로도 부활하신 분은 그리스도뿐이다. 그리스도 아닌 것은 어느 하나도 부활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만 영원히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그리스도만 영원한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복을 주고 구체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 앞에 이런 본이 있고 그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