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혜공주[敬惠公主][1435~1473] - 조선 제 5 대 문종대왕의 적 1 녀
![](https://t1.daumcdn.net/cfile/cafe/137C81374E33CE9117)
부군 : 영양위 정종
문종의 부마 영양위 정종(鄭悰) (?~1461 세조 7)
경기 고양시 관산 소재 영양위 신도비공은 정도공(易)의 손자이고 참판공(忠敬)의 외 아드님이다.
1450년(세종 32년)에 문종의 따님 경혜공주와 혼인하여 영양위에 봉하여지고 단종 초기에 형조판서가 되어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55년(단종 3년)에 금성대군 사건에 관련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 해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 하여 경기도 양근에 양이 되었으나 1456년(세조 2년)에 사육신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다시 수원, 통진을 거쳐 전라도 광주에 안치되었으나 1461년 승려 성탄 등과 역모를 하였다 하여 사사 되고, 배위 경혜공주도 단종의 누이라 하여 관비가 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관비로 전라도 감영에 도착하였는데 전라감사가 하대함으로 경혜공주께서 감영 단상에 올라가 감사에게 “네 이놈들 내가 누구냐”하시며 호통을 친 관계로 실제 관비로서가 아닌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관계로 영양위 선조님께서 유배 중에도 부부가 함께 동거할 수 있게 되어 아드님을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미(眉)자 수(壽)자 이시다.
그 후 한명회 등 반대세력에서 영양위 자손을 죽이라고 계속해서 상소하여 세조께서 특사를 현지 광주에 보내 아들이면 사사하라고 하였는데 세조비 정희왕후가 특사를 불러 아들이면 여복을 입혀 데려오라 하여 입궁하게 되었는데 미수 선조께서 일곱 살때 세조에게 아들임이 밝혀져 정희왕후가 그간 사실을 이실직고 하였더니 세조께서 맨발바닥으로 뜰에까지 내려가 미수 선조님을 얼싸안고 울으시면서 기뻐하였다 한다. 하고 眉壽라는 이름을 작명까지 해주었다.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에 아드님 해평부원군(眉壽)이 정국공신에 오름으로써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 영양위의 관작이 회복되어 증(贈) 순충적덕 보조공신 영의정 영양부원군에 추봉되고 영조 때 헌민의 시호가 내려졌다. 영월 장릉의 배식단사, 공주 계룡산의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5C59514E33D7ED07)
영양위의 위패가 봉안된 장릉 배식단사
자녀 :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 (1456~1512)
호는 우재(愚齋), 시호는 소평(昭平)이다. 영양위(鄭悰)의 유배지 광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정종이 사사(賜死)된 후 유배지에서 경혜공주와 함께 세조의 부름을 받고 정희왕후의 보살핌으로 잠저(潛邸) 때의 성종과 생활 하였다.
성종 초에 돈령부직장(敦寧府直長), 형조정랑 등을 지내면서 죄인의 자식으로 벼슬을 한다하여 서거정 신숙주 등으로 부터 많은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무마로 무사히 넘겼다.
선전관, 승지, 충청․경기․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504년(연산군 10년) 참찬 겸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506년 우찬성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저서로 《한중계치(閑中啓齒)》가 있다.
성종(成宗)에게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시양자(侍養子)를 청하여 특별히 이를 허락받고 친자식과 다름없이 늘 어머님이라 부르며 받들어 모셨다.
정순왕후는 해평부원군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노후에 병이 깊어지자 성종의 허락을 받아 노비와 재산을 해평부원군의 아드님 해림군(承休)에게 물려주고 82살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나니 대를 이은 부자(父子)의 효성스런 봉양에 모두가 칭찬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7C30374E33CE9218)
현덕왕후 권씨 소생입니다.
왕세자 향(문종)의 딸로 평창 군주(平昌郡主: 세자의 적녀에게 주어지는 작호 - 정2품)에 봉해졌다가 문종이 즉위한 후에 경혜공주로 책봉되었습니다.
1450년(세종 32) 해주 정씨 참판 정충경의 아들인 영양위 종에게 출가하여 아들 1명과 딸1명을 낳았습니다.
남편 정종이 수양대군의 제거를 도모한 금성대군과 친교가 있었다 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을때 함께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습니다.
당시 순천부사였던 여자신(呂自新)이 경혜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자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라고 호령하여 부리지 못하였다합니다.
이후 서울로 소환되었고 경혜공주와 아들 아들 정미수(鄭眉壽)는 잠저의 성종을 시중하였습니다.
귀양지에서 아들 해평부원군(眉壽) 정미수를 낳았으며 6년 간 갖은 고초를 겪었다.
성종 4년(147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39세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782A374E33CE921E)
경혜공주의 졸기
성종 4년 계사(1473) 12월 30일(병술)
경혜 공주가 졸하다
소재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마을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8D3544E33D4541F)
![](https://t1.daumcdn.net/cfile/cafe/207BC5544E33D4542A)
사진 출처 : 해주정씨 대종회
대자골마을에 경혜공주의 묘와 정종의 묘가 각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봉분은 경혜공주의 것만 남아 있다.
묘갈은 높이 122cm, 폭 43cm이며 앞면에 '조선국 경혜공주지묘(朝鮮國 敬惠公主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은 심하게 훼손되어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봉분 주변으로 상석, 혼유석, 묘비,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 등 여러 석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문인석은 높이 176cm로 조선시대 초기 양식을 보여준다. 정종의 묘는 경혜공주 묘 오른쪽에 있으며 봉분 없이 묘비만 존재한다.
성종 5년 갑오(1474) 1월1일 (정해)
호조에 명하여 경혜 공주에게 부의로 재물을 내리도록 하다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여 경혜 공주(敬惠公主)에게 부의(賻儀)로 쌀·콩 아울러 70석(碩), 정포(正布) 50필, 종이 1백권, 석회(石灰) 60석, 촉랍(燭蠟) 30근을 내려 주게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처음에 정종(鄭悰)이 주살(誅殺)되니, 공주(公主)는 머리를 깎고 여승(女僧)이 되었는데,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세조(世祖)가 불쌍히 여겨 노비[藏獲]를 돌려주고,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집을 지어서 주게 하였다. 아들 정미수(鄭眉壽)는 나이 16세로 공주가 병이 위독해지면 약이(藥餌)를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옷은 띠를 풀지 않았으며, 똥을 맛보기까지 하면서 병을 보살폈다.” 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0194374E33CE9216)
참고문헌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첫댓글 경혜공주도 당찬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