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5일
새벽3시경 배의 율동이 약해졌다.
파도를 타고 나가는 리듬도 달라졌다.
속도계를 보니 5노트대로 속력이 떨어졌다.
현창을 밀고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마스트 등 불빛만 보일뿐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척에 배전의 모습도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축범을 해제시켜 속도를 높여야 안 되겠나!’
‘밤에 뭐하러! 속도가 5노트나 되는데 내일아침에 하지!’
조금씩 속도를 더 내도록 하는 게 모여서 나중에는 그 차이가 크게 된다.
특히 장거리 항해 때에는. 이런 걸 생각하면 늘 작은 갈등에 놓이게 된다.
돛을 올릴 것이냐 말 것이냐?
날이 새기 얼마 전이었다.
AIS시스템을 통해 12마일쯤 뒤쪽에 상선한척이 포착되었다.
선명은 포어스탈 디아만테(Forestal Diamante)이었는데
12노트의 속도로 진행 중이었다. 인트레피드가 297도로 나아가고 있는데
그 배는 283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배의 진행방향을 인트레피드의 선수에 맞추어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배를 항로를 계속 지켜보았지만 전혀 침로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포어스탈 디아만테! 포어스탈 디아만테! 여기는 범선 인트레피드!’
몇 번 포어스탈 디아만테를 부르니 대답이 들려왔다.
‘인트레피드! 여기는 포어스탈 디아만테!’
무전을 통해서 그 배가 우리배의 선수로 통과해 갈 것인지
선미 쪽을 통과해갈 것인지 물었다.
다행히 뒤쪽으로 통과해가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코스를 약간 변경하여 인트레피드의 선미쪽으로 맟추었다.
포어스탈 디아만테호는 일본 선적의 배로 남미쪽과 동북아시아를 오가는 배라고 하였다.
일본인이 타고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선장을 포함해서
필리핀 선원만 20명이라고 하였다.
선주는 일본인이지만 관리는 한국인이라고 하며 서툰 발음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그 배는 일본 도착일은 4월3일이었다.
‘12노트로 한 달이면 일본까지 간단 말인가?
그럼 나도 6노트로 계속가면 2달 만에 갈수 있단 말이네!’
대략 계산을 대어 보니 정확히 직선코스로 계속 6노트만 유지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바람을 찾아 둘러가고 있으니
실제 진행속도는 4-5노트가 고작이다.
중간에 바람이 약해질 것을 감안하면 정말 잘 가야 3개월 안에 갈수 있을 것이다.
일출이 없는 흐린 아침이었다.
날이 밝자 주 돛을 전부 펼쳐 올렸다.
속력이 6노트가까이 올라갔다.
그러나 점점 바람이 약해지고 있어 가끔은 풍력발전기가 돌아가지 않는다.
오전 10시경 콕핏에 앉아 윈드베인(배 뒤쪽에 달린 바람을 이용한 자동조타기)에
밧줄을 살펴보니 금속부분과 연결된 끝쪽이 밧줄이 헤어졌다.
조타를 오토파일럿으로 바꾼뒤 끝부분을 좀더 늘여서
매듭을 하고 낡은 부분은 끊어내었다.
대서양을 항해할때였다. 라스팔마스를 출발해서 강풍을 뒤에 업고
달리고 있을때 윈드베인 끝부분이 끊어지는 바람에 배가
저절로 돌아가버렸고 그 때문에 앞쪽 보조 돛이 포어스테이에
꼬여서 애를 먹은 적이 있다. 그런 험악한 경험이 있기에
미리 점검하고 보강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출발하고서부터 내내 그 밧줄만 쳐다보면
‘저걸 손봐야 하는데!’하는 마음에 부담이 늘 있었다.
그런 일을 하고 나니 흐뭇하다.
밧줄이 꺽이는 부분에 설치되어 있는 도르래에도
기름을 쳐주니 삑삑 거리던 소리도 나지 않는다.
다시 조타를 윈드베인에 맡겨놓고 오토파일럿 스위치를 껐다.
배는 평속 5.5노트정도의 속도로 매끄럽게 달려 나가고 있다.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계속되는 바람에 4-5미터에 달하는
긴 너울파도가 끊임없이 달려온다.
너울파도위에 생긴 거친 파도라야 1.5미터 정도이다.
그때였다. 아침나절에 내려놓았던 트롤링 낚시의 고무줄이 팽팽하게 늘어나 있었다.
‘어! 뭐가 걸렸나?’
얼른 줄을 잡아채고 보니 묵직하게 느껴지는 저항감, 드디어 고기가 걸려 들었다.
줄을 서서히 당기면서 감당하기 힘들면 배를 풍상으로 돌려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그런대로 잘 끌려왔다.
낚시 줄은 배의 후미를 따라 오면서 좌우로 크게 왔다갔다했다.
얼마 후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은빗비늘을 번쩍이며 마지막 발버둥을 치려한다.
다랑어였다. 녀석이 공기를 한번 들이켜 힘이
못 쓰는 순간 번쩍 들어 콕핏으로 끌어올렸다.
살이 통통하게 찐 다랑어는 길이가 53센티에 무게는 3킬로그램 가량 되어 보였다.
눈은 500원짜리 동전만한데 그 속에 맑고 검은 눈동자는 구슬만했다.
물기를 머금은 몸뚱아리는 은빛과 검은 빛이 뒤섞여 번쩍였다.
녀석은 팽귄 같이 작은 날개를 두 개 가지고 있었다.
잡아먹기에 너무 아름다운 녀석의 머리통은 15센티 가량 되었다.
녀석의 눈을 가리고 목을 잘라 두동강을 내었다.
‘미안하구나!’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을 땐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데
내 손으로 직접 살생을 하고 먹으려니 늘 그런 마음이 생긴다.
머리 부분은 바다로 돌려보내고 몸체는 다시 두 등분하여
비닐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끼니마다 생선반찬을 먹어도 삼사일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트롤링낚시를 걷어 넣었다. 오후로 넘어가면서 몇 일간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걷혀 가는 게 보였다.
구름 띠가 남동쪽에서부터 벗겨지기 시작하여
저녁 무렵이 되자 파란하늘이 완전하게 들어났다.
햇빛을 받은 바닷물색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퍼시픽블루라는 연청색물빛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붉은 노을이 서녁 하늘을 물들였고
곧이어 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가자 고향 앞으로!’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봄이 오면 돌아온다던 그 친구는 돌아올 줄 모르~~네!’
술친구들의 한탄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서둘러라! 인트레피드! 속도를 높여라!’
3월6일(일)
바람이 점점 약해져 자정무렵에는 속력이 4노트대로 떨어졌다.
벨러스트킬의 복원력이 바람의 미는 압력보다 강해지기
시작하여 배가 좌우로 크게 롤링을 하기 시작했다.
선수를 30도가량 풍상(바람이 불어오는쪽)으로 돌려 거이 서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속도도 좋아지고 롤링도 없어졌지만 배는 원래 항로와 점점 사이가 벌어졌다.
새벽 2시경 별들이 하나둘 빛을 잃어가더니 3시경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은 것이었다.
잠시 후 바람이 슬슬 살아나기 시작하여 돛을 힘차게 밀기 시작했다.
속도가 좋아졌다. 코스를 다시 원래대로 변경하였다.
날이 샐 무렵 구름들이 걷히면서 남동쪽에서부터
파란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름이 있을 때가 바람이 잘 불어주어서 하늘이 걷혀 가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다.
아침식사는 어제께 해놓은 식은 밥과 조개통조림을 넣고
끓인 미역국 그리고 다랑어 구이를 준비했다.
늘 흔들리는 배안에서도 음식만은 잘 만들어 먹는 편이다.
음식이 좀 부실할 때는 요트를 타고가다 침몰당해
오랫동안 구명정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연명한 표류기를 읽곤한다.
그러자면 아무리 초라한 음식일 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내가 언제든 마실 수 있는 물마저도 그들에게는 간절한 생명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한낮에는 바람이 좀 약해져서 가끔 뒤뚱거리기도 했지만
속력이 약간씩 붙을 땐 부드럽게 파도를 타고 넘는데
조용하기까지 해서 비행기 안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 피트 상공에서 시속 천 킬로의 속력으로 달리는 비행기 안에서
속도감을 느낄 수 없듯이 마치 그냥 멈춘듯한 느낌이 들어서 속도계를 보았다.
5.7노트였다. 속도가 5노트 이하로 떨어질 땐 제네커를
올리려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 참았다.
오후4시가 넘어가면서 하늘의 구름 량이 늘었고
바람도 제대로 불어주어 속력이 6노트대로 회복되었다.
제네커를 올렸다면 배가 미친듯이 달려 나가 마음에 부담이 꽤나 되었을 것이다.
제네커를 올리지 않기를 잘한 것이다.
오후4시30분 남위30도 서경81도35분을 북서진하여 통과하였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래야 남쪽으로 225마일 떨어진
칠레령 아레잔드로 셀키크(Alejandro Selkirk)섬인데
여전히 제비갈매기와 또 다른 물새도 보였다.
갈매기는 육지 쪽에서 보는 살이 통통하게 찐 그런 갈매기와는
다르게 날렵했고 작은 물새는 검은 색 몸에 꼬리부분에 흰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작은 물새는 나는 모습이 나비와 비슷했는데 날면서
꼬리로 물을 탁탁 치면서 계속 날개 짓을 해 대었다.
바다와 장단을 맞추며 노는 것처럼 느껴졌다.
3월7일(월)
밤 동안 바람이 약해졌다가 멈칫하더니
아침이 되어서는 바람이 동남동으로 바뀌었다.
돛의 바람을 반대방향으로 받도록 하였다.
속력이 4노트대로 떨어졌다.
9시경. 파란 하늘빛에 반사되어 물색도 밝은 파아란 색으로 바뀌었다.
바람이 더욱 약해져서 속력이 3노트로 떨어졌다.
제네커를 올리려고 로프(헬려드와 시트)을 확인해보니
헬려드가 지난번에 안쪽 보조돛을 올릴때 감겨올라가 있었다.
그냥 사용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만약에 문제가 생기고
혹 그때가 기상이 좋지 않을때라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어
제네커헬려드(헬려드란 돛을 올리는줄)가 꼬인 곳을 바로 해야했다.
아래쪽에서 매듭을 다 풀어 줄이 쉽게 당겨 올라오도록 해놓고 마스트를 타고 올라갔다.
배가 좌우앞뒤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지만 올라갈수록
그 흔들림의 거리가 커져서 거머리처럼 마스트에 찰싹
달라붙어서 올라가는데도 진땀이 났다.
좌우 롤링도 롤링이지만 파도를 살짝 타고 넘을 땐 말 등에 탄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의 실수도 큰 사고와 연결되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손잡이와
발판을 디뎌서 마스트꼭대기에 가까스로 올라가 꼬였던 줄을 바로 해놓고 내려왔다.
미리 제노아(큰 보조돛)를 내려놓고 제네커가 올라가면서 한 번에
잘 펼쳐질 수 있도록 세팅해놓은 다음 헬려드를 당겨 제네커를 끌어올렸다.
그런 다음 커버를 벗기는 줄을 당겨 올리니 형형색색
아름다운 제네커가 한 번에 활짝 펼쳐졌다.
미풍이었지만 속력이 5노트이상으로 올라갔다.
‘아자! 전속항진이다!’
15센티 오징어 한 마리가 갑판위에 올라와 있어 씻어서 말려두었다.
‘웬 횡재!’
한낮에는 바람이 더 약해져서 속력이 가끔 3노트대로 떨어졌다.
선실안에 가만히 있어도 열기가 느껴졌다.
온도계의 수온주가 29도까지 올라가 있었다.
하늘이 변하면 바다도 변했다.
바다는 파란 잉크를 물에 부어놓은 것 같이 온통 짙은 파랑색으로 변했다.
해질녁이 다되어가자 바람이 더 약해지면서 앞쪽으로 돌아섰다.
제네커를 내리고 엔진을 가동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서쪽하늘엔 초승달이 방긋 웃고 있었다. 그
리고 밤에는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3월8일(화)
일출과 함께 아침이 시작되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북풍이었다.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항해로 속력이 5노트정도 나왔다.
출발 후 처음으로 비구름이 레이더에 잡혔다.
그 비구름은 우현쪽 4마일쯤 밖에 있었는데 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비구름을 제외한 다른 하늘은 흐리지만 밝은 날이었다.
육지 그러니까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까지의 거리가 450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 두 마리씩 보였던 새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식사로 볶음밥을 만들었다.
감자와 당근을 넣고 볶다가 양파와 밥을 같이 섞었다.
그리고 토마토를 썰어 넣고 토마토 케찹을 뿌렸다.
완성된 볶음밥을 접시에 담고 계란프라이를 하나해서 그 위에 얹었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고 맛도 좋았다.
점심때는 쇠고기와 감자, 양파, 마늘을 넣고 국을 끓였다.
그리고 다랑어 구이를 해서 식은 밥과 함께 먹었다.
바람이 완전히 사라져 수면이 거울같이 변했다.
이젠 육지와의 거리가 너무멀어서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검은 물새 한 쌍과 제비갈매기 한 마리가 배 주위를 맴돌며 따라왔다.
‘아니! 쟤들은 밤에는 어떻하지! 잠을 자려면 바다에 앉아야 할 터인데
그러면 물고기들이 가만 놔둘까? 얘들아! 잘 때 배위에서 자!’
3월9일(수) 남태평양에서 받은 특별한 선물
아침은 현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여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치위로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배 위로는 구름한 점 없는데 멀리 낮은 구름들이 주변을 빙둘러 포위하고 있었다.
동녘하늘에는 일출을 예고하는 듯 구름들이 붉게 물들어 있다.
잠시 후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한 점의 강렬한 빛,
그러나 이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실체는 이글거리는 태양이었다.
순식간에 태양은 구름위에 올라섰고 그 모습을 더 이상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바람은 없었다. 바다색은 청색 잉크를 부어놓은 듯했다.
7시경 12마일쯤 떨어진 곳에 남동쪽으로 18노트의
속도로 항해하고 있는 상선한척을 발견했다.
선명은 모닝 케서린(Morning Catherine)으로 목적지는
칠레 산 안토니오(San Antonio:칠레의수도 산티아고 부근의 항구도시)였다.
선박의 왕래가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무전을 한번 해볼까하다 그만 두었다.
나만큼 저들은 사람이나 배가 반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모닝케서린호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인트레피드-마산, 인트레피드-마산, 디스이즈 모닝케서린’
우리 배의 원래선명은 인트레피드인데 한국선박이나
한국인 항해사들이 보면 알게 하려고 선명 옆에 인트레피드의
선적지인 마산을 추가로 입력해놓았다.
‘디스이즈 인트레피드, 고 어헤드’
‘체널 공육’
‘으-응! 공육이라고 이건 한국말인데!’
반가운 마음에 후딱 대답을 하였다.
‘무전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체널 09번으로 부탁합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모닝케스린호는 선주는 일본이지만
운영사는 한국 부산의 동진해운이라고 하였다.
부산과 울산을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칠레 산 안토니오로
향하고 있는 자동차 운반선이라고 하였다.
선장 김광남씨(52세)는 제주서귀포가 고향으로 해양고를 나왔다고 했다.
1등 항해사, 2등 항해사, 기관장등 항해 팀은 모두 한국인이고
나머지 미얀마선원들이라고 하였다.
‘인트레피드는 몇 명이 탑승하고 있습니까?’ 모닝케스린호의 선장이 물어왔다.
‘아~예! 지금 혼자 항해하고 있습니다.’
‘아이구 그래요, 외롭겠습니다.’
‘견딜만 합니다.’
‘어떤 연유로 혼자서 그런 장거리 항해를 하고 있습니까?’
나는 인트레피드의 지금까지 항적과 항해이유에 대해서 대강 설명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배는 점점 멀어져서 12마일이든 선박간의 거리가 16마일이 되었다.
‘조금만 빨리 알았으면 배를 좀 접근해서 김치라도 좀 떨어뜨려 주고 갈것인데 말입니다.’
‘선장님!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아직 한국음식이 조금 남아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레이더를 좀 봐야겠습니다.’
잠깐 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무전이 날라왔다.
‘지금 배를 그쪽으로 돌려 갈테니 인트레피드도 이쪽으로
배를 돌려서 내려오십시오, 도저히 그냥 못가겠습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뱃머리를 돌리겠습니다.’
나는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선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외벽에 ‘EUKOR'이라고 크게 써 붙인 초대형 자동차 운반선이었다.
‘저! 저! 저! 저리 큰 배로 김치를 가져다 주려고 배를 돌려오다니!’
나는 갑판으로 나아가 다가오는 모닝케서린호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단언컨대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한국인 뿐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정이 있는 나라이다.
그 순간 한국사람이라는게 너무나 가슴 뿌듯했다.
모닝케서린호는 북서쪽으로 인트레피드는 남동쪽으로
서로의 항로와 반대편으로 교차하여 두 선박 모두 좌현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다시 원래의 항로로 돌아섰다.
그런 과정에 김광남선장께서 선교로 나와 사진을 찍었고
미얀마 선원들이 선미에서 김치가 들어있는 스티로폴박스를 물에 떨어뜨렸다.
배는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바다에 떨어진 김치를 찾아
모닝케서린호가 만들어 놓은 물길을 따라갔다.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모닝케서린호와는 몇 백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박스가 떨어진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북서쪽으로 가고 있는데 모닝케서린호로부터 무전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쪽이 아닙니다. 스타보드쪽으로 30도쯤 방향을 돌려서 가십시오,
그러면 검은 비닐봉투에 싸여진 스티로폴 박스가 보일 겁니다.’
김광남 선장께서 모닝케서린호의 선교에서 망원경으로
이쪽을 보면서 물에 떠있는 박스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
금방 박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배를 박스쪽으로 접근하여 보트훅크를 이용해 건져 올렸다.
두 겹의 검은 비닐봉지 싸여진 박스 안에는 배추김치가 4킬로,
갓김치가 1킬로, 창란젖 500그램, 깻잎김치 500그램,
참치통조림4개, 450그램짜리 고추장2개가 들어있었다.
‘이리도 골고루 챙겨주시다니!’
냉장고에 보관되어있던 4킬로쯤 되는 묵은 김치를 꺼내었다.
말이 김치지 얼었다 녹았다를 수십 번, 상온에 노출된 적도 여러번 된 골동품이다.
김치가 생각날 때 한 두 개만 집어먹으면 김치생각이 싹 달아난다.
묵은 김치를 꺼낸 자리에 얼떨결에 새로 보급 받은 김치와 반찬을 넣었다.
마침 아침식사전이어서 갓김치와 배추김치를 조금씩 덜어내어 식은 밥과 함께 먹었다.
싱싱한 배추와 갓에 풀먹인듯한 양념이 입에 척척 달라붙는다.
‘김치와 반찬이 배에서 먹는거라 짭짤합니다. 너무 많이 잡숫지마세요.’
모닝케서린호 김광남 선장께서 당부한말이 생각나지 않는게
아니지만 손으로 쭉쭉 찢어 먹는 김치 맛에 정신이 혼미해서 아무생각이 없었다.
‘나는 좋다마는 잠깐 동안이지만 자동차운반선을 김치운반선으로
만들었다고 저 선장님 회사에서 혼나는 것은 아닐까?’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갇혀서 북풍, 혹은 북서풍이 허너적거린다.
기상정보에 의하면 3-4일 동안은 제대로 된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한다.
가능한 한 가장 적게 엔진을 사용하는 상태에서 흘러가는 조금의
바람이라도 받기 위해 돛을 올려 나아갔다.
연료만 많이 있다면 조용한 바다에서 전력 걱정없이 콩닥콩닥
거리를 줄여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문제는 연료여서
조금이라도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좋아지면 엔진을 중지 하곤 한다.
그러나 잠시일 뿐 전체적으로 바람의 방향이 좋지 않다.
오후5시경 서풍이 제법 강해져서 선수를 북서쪽으로 해서
바람을 거슬러 평속 3.8노트의 속도로 올라갔다.
얼마 후 해가 지고 석양이 붉게 물든 다음 밤이 찾아왔다.
달님이 점점 커가고 나타나는 곳도 조금씩 높아진다.
계속해서 커진 달은 10일쯤 후엔 만삭이 될 것이다.
배가 수면을 가르고 나아감에 따라 물속에는 수많은 야광충이 반짝거렸다
첫댓글 야광충을 아는사람이 낚시꾼과 배를 타본사람들 일겁니다...그것도 야한 밤에........즐감하였습니다.....
꿈일련지 실현일지는 몰라도 태평양 항해는 꼼곰하게 읽고 있습니다.....
건승하세요....
참치 머리가 특별 요리인데 아깝네. 참치요리집가면 특별한 손님에게만 줍니다. 맞도 일품이고....
너무너무 재미있는 글 ~~
잘 읽었습니다.
망망대해에서의 김치선물 주신 모닝케서린호 선장님 !!
정말 대단하십니다.
맛나게 드셨겠네요. ㅎㅎ
바다 사나이들만 보여줄 수 있는 멋진 모습입니다.
아.. 감동이..
저는 외국나가면 한국인과 중국인과는 말섞지 않게되더라구요.
반성해야겠습니다.
한국인의 정이 생각나는 글이었습니다..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