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베리야> –유호민
단락장 나누기와 줄거리
1 단락장: 마지막 가족여행. 가족들은 여행에서 아버지의 치매증상을 눈치 챈다. 치매진단 후 가족들은 그해 아버지 생신에 ‘쪼꼬’라 불리는 강아지를 선물한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강아지를 돌보는 대신 화분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다.
2 단락장: 화단에 핀 부겐빌레아아의 이름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언니와 조카와 나누게 된다. 딸들에게 소련 정치가 베리야에 대해 얘기해 주던 아버지는 한때 훌륭한 항공우주공학 교수였으며 광범위한 관심사를 가진 유명한 작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치매 병세가 점점 진행되어 종국엔 손주들과 딸들의 이름마저 잊어버리게 된다.
3 단락장: 어머니의 죽음 후 아버지 앞으로 남겨진 보험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의 오래된 팬이라는 보험사 직원을 만남. 남편의 반응에 서운함을 느끼던 나는 홧김에 김이삭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와 낮에 나눈 대화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 언니가 아는 아시모프라는 SF작가에 대해 알지 못한다.
4 단락장: 보험금으로 언니의 옆집으로 이사를 한 아버지. 화단을 정리하며 다시 부겐빌레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촌 숙희는 더운 지방에 사는 붉은 베리야가 어째서 한 겨울에 꽃을 피우는지 궁금해 한다. 나는 이전에 화분과 선풍기를 들여놓는 일을 두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각각 다른 기준을 제시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취미나 관심사가 전혀 달랐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한때 아버지를 더 닮았다고 인정받는 언니에게서 자신이 열등감을 느꼈던 사실을 기억한다.
5 단락장: 60대 초반 장 요양사의 등장. 아버지는 장 요양사에게 오백만원을 주겠다고 말하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초코의 죽음 이후 잇다른 아버지의 죽음.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요양사. 49재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다시 부겐빌레아가 화제에 오른다. 언니는 부겐빌레아의 붉은 부분이 꽃받침이며 꽃술처럼 하얀 것이 실상은 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때 뜻밖의 장 요양사의 방문을 받는다. 그녀는 생전의 아버지와의 추억을 얘기하며 어린 시절 내가 어머니에게 선물한 장난감 다이아 반지를 내놓는다. 나는 그것을 진품이라 생각하며 건넨 아버지와 진품처럼 여기며 받았을 장 요양사를 떠올리며 꽃이든 꽃받침이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던 조카의 말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다른 꽃들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한 겨울에 꽃을 피우는 붉은 베리야처럼 어떤 이들은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자신만의 꽃을 피우며 살아간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것이 초코로 불리든 쪼꼬로 불리든 초코들로 불리든 상관없는 것이라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느낀 점과 그 이유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가끔 본질을 벗어난 과열된 관심이나 논쟁들을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투덜대게 되는 말. 하지만 작가는 거칠게 구시렁거리지 않고 붉은 베리야를 통해 아주 우아하게 이야기한다. 꽃이든 꽃받침이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그 안에 담긴 본질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그러면 가짜 다이아 반지가 진짜로 둔갑해버리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어떤 이름도 본질을 담고 있는 건 아니라고. 그걸 깨닫게 되면 多不有時가 더블유 씨로 읽히든, 부겐빌레아이든 붉은 베리야든, 초코가 쪼꼬로 불리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순간이 온다고. 마지막 단락장, 깨달음에 다다른 화자는 내내 나직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그런 걸 보면 소설은 정말 마지막 한 문장을 쓰기위해 달리는 거라는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앞장에서 쌓아올린 철 모르고 핀 붉은 베리야와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화자, 다불유시 같은 다소 오리무중이던 에피소드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꽃과 꽃받침에 대한 이야기, 장 요양사의 반지와 마지막 문장이 한 줄에 꿰어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러게, 뭣이 중헌디,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아마 교수인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화자도 마지막 순간에선 자신을 옭아맨 통념과 기준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부분과 이유
단연 마지막 장이 가장 돋보였지만, 아버지와 장 요양사가 대화를 나누던 장면도 좋았다. 어눌한 발음으로 오백만원을 너에게 주겠다고, 이 집에서 갖고 싶은 건 다 가져도 된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진심이 느껴졌다. 한때 훌륭한 교수로 존경받았지만 남은 삶을 요양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아버지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라서야 무언가를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이제 교수도 유명한 과학자도 아닌 그는 오직 치매환자로 요양사를 만났을 뿐이다. 장 요양사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추행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았던 예쁜 치매환자였고, 아버지에게 장 요양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 자신의 마지막을 정성스럽게 돌봐주는,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고마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i> -허성환
단락장 나누기와 줄거리
1단락- 아내와 임신 12주차 초음파 검사를 확인하고 있는 주인공. 아내는 어느 날 아기를 가졌다는 말과 동시에 내게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아내는 의자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고 말한다. 아내는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에게는 의자가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방산시장에서 납품 일을 하는 나는 의자에 앉아 쉴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현장에서 의자가 있어봐야 무의미하다고만 생각한다.
2단락- 24주차 정기검진. 나와 아내는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아내는 소설쓰기에 필요한 걸 묻는 내게 나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퇴근하는 길에 목공소에 들렀지만 마땅한 나무를 찾지 못한다. 나는 목공소 사장의 작은 앉은뱅이 의자의 다양한 쓰임새를 눈여겨보게 된다.
4단락- 사장은 에어컨 설치비용을 아끼기 위해 나와 막내에게 그 일을 대신하게 한다. 추락의 위험이 있는 그 일을 전문기사가 아닌 자신들에게 시키는 것에 막내는 투덜대지만 나는 그 일을 별 말없이 수행한다. 생활비와 월세를 마련하려면 나는 막내처럼 할 수가 없다. 일을 마치고 난 나는 우연히 가로등 아래 놓인 나무판자를 발견한다. 나는 그 나무판자를 아내에게 건네준다.
5단락- 다시 방산 시장. 사장은 창고비용을 줄이기 위해 화자와 막내에게 물건을 옮기라고 지시한다. 사람을 더 구해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는다. 막내는 이삿짐센터에서도 맡지 않겠다는 일을 자신들에게 전가하는 사장의 행태에 분노한다. 남편에서 아버지가 된 나는 그래도 기계처럼 몸을 놀려 일을 할 뿐이다. 그러다가 박스를 놓쳐 막내가 부상을 당하게 된다. 다음날 정기검진에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던 나는 3평과 4평을 합쳐 14평처럼 쓸 수 있을 거라고 말하던 아내와 결혼할 당시를 떠올린다.
6단락- 부상당한 막내의 손가락이 괴사가 왔다. 일을 그만두겠다는 막내에게 새 직장을 구하기까지의 여력이 없는 나는 그냥 남겠다고 말한다. 나는 고졸인 막내가 결국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임을 확신한다. 심지어 사장은 어려운 경기를 핑계로 사람을 자르겠다고 말한다. 녹초가 된 나는 돌아와 아내의 볼록한 배를 만지며 다시 한 번 힘을 내기로 다짐한다.
7단락장- 막내가 결근을 하고 나는 물량을 혼자서 소화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며칠간의 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나는 결국 종합상가의 화장실로 향한다. 나는 다른 방산시장의 노동자들처럼 화장실 비밀의자에 앉아서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본다. 나는 마찬가지로 의지가 없던 곳에서 일하던 일용직 아버지를 떠올리며 훗날 아이에게 자신의 직업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를 고민한다. 마지막 산전 검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소설의 초고를 완성했다고 말한다. 마침내 확인한 아내의 작은 공간에서 나는 소설이 아닌 아주 작고 귀여운 나무의자를 발견하게 된다.
느낀 점과 이유
읽는 내내 마음이 뭉클했다.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아버지가 된다는 기쁨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힘을 내려는 젊은 가장의 고군분투가 안쓰러웠고, 그런 남편에게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에게는 의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아내의 마음이 어여뻤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서로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고 싶어 했던 가난한 부부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초음파를 확인하며 뱃속의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만큼 가장의 무게가 더해지는 현실이 잔인하게 느껴지면서도 그것이 다만 비관으로 흐르지 않았던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아마도 그건 열렬한 사랑의 씨앗이었던 아이를 향한 아버지의 부성과 희망이 엿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제목을 굳이 소문자 i로 쓴 이유도 그것이 곧 태어날 작고 소중한 아이를 상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i>의 형상이 그의 고단한 노동현장을 잊지 말라는 듯 직립으로 서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았던 부분과 이유
좋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장과 방산시장 노동자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좋았다. 의자가 필요하다는 아내의 말에 어차피 쉴 시간이 없어서 한 번도 의자의 필요성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남자와 화장실 비밀의자에서나 잠시 앉을 수 있는 노동자의 삶이 눈앞의 현실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또 아내가 3평과 4평을 합쳐서 7평이 아니라 14평처럼 쓸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그런 아내가 없었다면 이 소설이 너무 암담했을 것 같아서 그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는 소설의 초고를 완성했다는 아내의 공간에서 소설이 아닌 작고 귀여운 의자를 발견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역시, 소설도 이러해야 하는 거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결말이었다. 소설이 대단한 무언가를 품고 있지 않아도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작은 자리라도 마련해줄 수 있다면 충분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하자면> -김영은
단락장 나누기와 줄거리
1단락장- 우리 모두 형우다. 피켓을 든 너는 내게 시위 참여를 제안한다. 형우는 노후된 기계에 팔이 잘려 쇼크사로 죽었다. 너는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고 있으며 자주 SNS에 노동현실과 스쿨미투 같은 사회문제에 소신을 밝히며 지지를 얻고 있다.
2단락장- 졸업전시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너에게 형우 소식을 들었던 때를 떠올린다.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나와 너는 여름방학에 대기업 휴대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나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부모의 이혼을 쿨하게 받아들이는 너의 모습이 좋아했었다. 어느 날 너는 옆방 이모와 말다툼을 벌이고 나는 그런 너에게 무조건적으로 맞장구를 친다.
3단락장- 퇴근후 기숙사 앞 정자에서 맥주를 마시던 너와 나는 형우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형우는 그녀들에게 누님들이라고 부르며 대학생인 그녀들에게 사회생활을 강조한다. 어차피 떠날 그녀들은 형우의 말을 개의치 않는다.
4단락장- 시위 현장에서 나는 너와 만난다. 우리 모두 형우다라고 외치는 너를 보며 나는 형우가 이제 더는 형우가 아니게 된 기분을 느낀다. 나는 형우와 공장에서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자주 정자에서 맥주를 마시며 어울렸던 어느 날, 너는 형우와 말다툼을 벌였다. 너는 형우에게 고졸새끼 주제에, 라고 말하며 그의 사상을 맹비난한다. 너는 그 길로 내게 말도 없이 혼자서 공장을 떠나버렸다. 너는 훗날 그날의 일을 불함리함에 저항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 혼자 남은 나와 정자에서 맥주를 마시던 형우는 너를 무책임한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5단락- 다시 광화문의 시위 현장. 그날 나는 형우에게 추행을 당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따라가길 멈추고 대열에서 이탈한다. 다른 시위현장과 뒤섞인 채 나는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지 못한다. 함께 병원에 가자는 네가 이조차 SNS에 올릴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자 나는 뿌리치고 혼자 택시에 오른다. 나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시위에 온 것일까를 생각한다.
느낀 점과 이유
다 알면서도 말하기 불편한 것들이 있다. 사실 우리 다 그런 거 알잖아, 하면서 모르는 척 말하기 싫은 것들이 있다.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으면 의도를 의심받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글들은 이상하게 읽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두렵다. 나도 모르게 어느 한쪽으로 판단해 버릴까봐, 혹은 이도저도 아닌 양비론에 빠져 버릴까봐. 나이가 들면 세상이 더 명료해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더 불분명하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으로 변한다는데, 내가 그렇게 조금씩 비겁해지는 건가 싶기도 하고, 갈수록 의식이 부족한 온정주의자 같다고 스스로 느끼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이 엄청난 용기를 낸 이야기 같았다. 조금이라도 예민한 문제에 대의를 거스르는 듯한 말을 하자면, 꼬투리 잡히기 쉬운 세상이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피해자이지만 무조건적으로 옹호해 줄 수 없는 형우도, 계급의식을 채 벗어던지지 못한 네가 부르짖는 정의가 신기루 같다고 느끼는 것도 말을 하자면 너무 조심스럽다. 그래도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작은 틈을 발견한 것만 같았고, 그것이 너무 빽빽해 빈틈없이 느껴지는 어느 공간 속에서 숨통을 좀 트이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좋았던 부분과 이유
형우와 정자에서 마지막 기억이 선명해서 좋았다. 형우가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지 못하며,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나’가 시위현장에서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던 장면과 겹쳐졌다. 그리고 결국 그 불쾌한 기억이 형우만이 남긴 감각이 아님을, 너와 나의 것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은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 모두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니까. 팸플릿 속에 쓰인 형우의 짧은 생애를 바라보며 문장과 문장 사이를 멀게 느끼는 부분이나, 형우가 더 이상 형우가 아니라 정의 연대 시민과 같은 모호한 단어로 느껴졌다는 문장도 좋았다. 그럼에도 형우를 추모하러 왔다는 ‘나’의 말이 진심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형우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노동자가 아닌 건 아니고,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석해하는 이들의 마음이 진심이 아닌 것도 아니니까.
합평작
<밥의 그릇>
팀장과 사원이 식사 시간과 회식 문화에 갈등을 보이는 부분이 재밌었다. 문장이 위트 있고, 읽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그 차이와 갈등이라는 게 다소 뻔했다. 팀장이 정말로 밥심만을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지나온 세월에 설령 그것이 아주 중요한 조직문화였다고 해도 그가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게 다가 아닐 것이다. 밥에 가려져 말하지 못한 진심이 좀 더 드러나면 좋겠다.
<원감>
조금 더 구체적인 언어로 쓰면 좋겠다. 소설보다는 에세이로 읽었는데,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이어지던 도입부에 비해 꿈을 꾸고 가르치던 장애인청년의 집에 전화를 거는 구체적인 서술이 훨씬 와 닿았다. 분량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에피소드가 원감이라는 주제와 맞닿기까지 헐겁고 성기게 짜인 것 같아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