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놀이]시인 송수권의 낚시예찬
입력2004.01.15. 오후 4:54
호이징가는 놀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린이의 놀이는 놀이 자체가 목적이지만 어른에게 있어서는 놀이를 통한 교육이 목적이라고. 그러니까 놀이에 목적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예술의 발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이다.
나의 놀이에도 목적은 없다. 단순히 낚시에 미쳐 있는 것은 하나의 놀이에 불과할 뿐이다. 옥타비오 파스가 ‘활과 리라’에서 자살하지 않는 방법은 연애와 시(詩), 그리고 엑스터시(열정)라고 말했는데 낚시는 담배와 함께 나에게 열정에 불과할 뿐이다. 하루에 담배 2갑 이상의 흡연은 습관이겠지만 낚시 또한 습관적인 놀이다.
도대체 낚시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까 싶은 것이다. 낚시에 맛을 들인 것은 애인 하나를 꿰차고 세상을 피해 섬학교로 달아났던 때부터다. 1968년 3월이었다. 세상을 피해 달아난 곳이 초도(草島)라는 섬이었고, 나는 벌써 서른을 훌쩍 넘어버린, 그녀와는 열 두살 터울로 띠 동갑이었다. 아직도 그곳은 초분 풍습이 있었고, 석유호롱불을 켰으며, 당시는 해상교통이 좋지 않아 여수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데도 꼬박 여덟시간이 걸렸다. 그곳에서 무려 6년을 주저앉았으며 셋째 딸을 낳았을 때 그 섬을 떠났다.
“여보, 우린 그 섬에서 살았을 때가 그래도 가장 행복했지! 당신은 바닷가에 나가 매일 미역과 돌김을 뜯었고, 나는 낚싯대를 둘러메고 이 섬 저 섬에 나가 낚시에 한 세월 좋게 보냈었는데….”
그때부터 나의 광적인 낚시병은 지금껏 떨쳐 버리지 못했다. 5·18이 나던 해 광주여고에 입성을 해서 옆구리에 백씨 형사를 달고다니면서도, 아니 하룻밤 새벽에 서광여중으로 쫓기면서도 그 극기의 고통을 낚시로 견뎠다. 장성호가 수문을 열 때 그곳에 낚싯배를 띄워 준 것도 아내였고, 미친 놈이라고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기도 했다. 물위의 ‘포장마차’라는 제목으로 지금도 나의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 갈피에는 그 배가 떠 있다.
배가 떠 있는 이유는 이렇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천하없어도 장성호, 다도댐, 광주호쯤 나갔다 와야 1주일이 편안하게 넘어가는데 하룻밤은 밤낚시를 하던 중 심한 복통이 일어났다. 후진 산속 물가인지라 겨우겨우 기어서 댐 아래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가 공중전화를 쓸 수 있었고, 놀란 가족들이 한밤중에 차를 몰고 왔다.
“이러다간 늬네 아빠 물귀신 되겠다. 오잉!”
놀란 아내가 그래서 아예 장성호에다 배를 띄웠다. 이것만으로도 나의 낚시벽은 흡족하지 않아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 한 달은 ‘낚시의 달’로 달력에 먹칠이 되었다. 초도라는 망망대해 속의 이름없는 섬들을 고깔모자처럼 뒤집어쓰고 살았기 때문에 담수호 낚시는 답답한 터였다. 그래서 으레 방학 때마다 가는 곳은 서귀포 바다였다.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거리에 있으니 좀 편리하랴! 그 바닷가엔 칼호텔이나 하얏트호텔보다 전망이 더 좋은 여류시인이 살고 있는 돌할망 움막집이 있었다. 바다가 뒤집어져 시끄럽게 울면 베개를 문턱에 베고 누워 파도소리를 듣는 것도 가슴 후련하다. 움막집 앞에는 10분 거리도 안되는 바닷속에 범섬이 떠 있어 벵에돔(구리)이 우글거린다. 그뿐 아니라 흘림낚시만 던져도 다랑어와 농어떼가 줄줄이 올라온다. 서귀포 앞바다엔 이런 섬이 세 개가 떠있는데 나는 이 섬들을 ‘고깔모자 삼형제’라 부른다. 그리고 우이도(소섬)는 말고라도 산방산 밑쪽의 형제섬, 더 북쪽(북제주)으로 돌면 차귀도도 있다. 또 ‘가파도 그만 말아도 그만’이라는 가파도와 마라도의 끝섬도 있다. 대개 이런 섬들에서 낚싯대에 둥근 달을 걸어 놓고 빈둥대고 있으면 천하가 다 내것이다. 제주에 가서 값비싼 다금바리회를 사 먹다니 그건 미친 짓이다. 그 돈으로 낚싯대를 사거나 아니면 어촌마을 또는 중문단지의 성천포구에 들러 배를 빌려타고 출조만 하면 다랑어(히라시)는 줄줄이 올라오니 그 몇 배의 맛을 챙길 수가 있다. 제주 3바리 중 최고급이 다금바리인데 사계리에 가면 진미식당이 있다. 고르바초프가 왔을 때 다금바리 몸체를 26부위로 떠내어 유명해진 집이다.
제주 바람바다, 동해 난바다가 싫어 이곳 대학으로 오기 전에 나의 서재 ‘어초장(漁樵莊)’은 변산반도 채석강가에 있었다. 낙산일출(落山日出), 월명낙조(月明落照)란 말도 있지만 낙산사의 일출보다는 서해낙조, 그보다는 격포의 채석강 낙조가 좋았고 그 낙조 속에 낚싯대를 걸고 싶어서였다. 저녁 노을이 밥 퍼 먹는 수저통에까지 기어들어 변산시대(3년간)에 거하면서 낸 아홉번째 시집의 이름이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인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국토의 3대 정신을 대(竹)의 정신, 황토의 정신, 뻘의 정신이라 규정하고 그 뻘의 정신을 파먹기 위해서 1995년 8월 과감히 명퇴를 하고 나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 여자도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가 좋고 /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 하여튼 뻘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소 소리보단 / 땅을 메다치는 징소리가 좋아요. // 하늘로는 가지마… / 하늘로는 가지마… / 캄캄하게 저물며 뒤늦게 오는 땅울음 / 그 징소리가 좋아요. // 저물다가 저물다가 하늘로는 못가고 / 저승까진 죽어갔다가 / 밤길에 쏘내기 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가 좋아요. // 〉
‘뻘물’이란 시지만 사실 뻘을 밟고 뻘물이 튀지 않은 삶은 얼마나 싱거운 삶이던가! 그래서 노을과 뻘을 반죽하는 그 바다를 나는 ‘만다라의 바다’라 불렀고, 이곳에서 황혼이야말로 천지창조의 시간이라 불렀다. 이 시간에 마그마같은 저녁 해를 낚싯대에 걸어놓는 일이야말로 생성의 바다 시원의 바다인 것인다. 5년전, ‘남도의 맛과 멋’을 펴냈을 때 나는 이 바다를 가로막는 새만금둑이야말로 만고불역의 죄라고 썼던 것이다.
그리고 2001년도엔 순천대학교에 봉직하면서 어초장 간판을 지금의 섬진강 화개장터 앞 백사장이 질펀하고 대숲바람이 맑은 강가로 옮겼다. ‘지리산 뻐꾹새’(1978)에서 섬진강을 노래한 지 31년 만의 일이다. 이곳 또한 어초장에서 내려다 보면 모래밭가에 최상의 낚시터가 있는 곳이다. ‘만다라의 바다’와는 달리 강노을은 은은한 수줍음이 있는 것이다.
그 강 노을이 사위면 지리산 처녀같은 조각달이 낚싯대에 앉아 엉덩이를 까놓고 거름보시로 오줌을 누고, 불땀을 놓는 삶이야말로 촌로(村老)의 삶이 아니겠는가.
〈송수권·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