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제2의 작전
회의를 마치고 회장실을 나온 박영준의 마음은 어수
선했다. 지난 밤의 일로 침통해 있으리라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 박노걸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
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지난 밤 석혜리가 어떻게 요리를 해놨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저것들을 잘 감시해야겠다" 고 어금니를 갈아물던
박노걸은 이미 아니었다.
결국 오랜 시간 계획하고 주도면밀하게 실행에 옮겼
던 일은 깨끗하게 실패한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계획은 절대로 성공
할 수 없다는 것을 재삼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른 방도라면 무슨?'
한참 동안 그에 관한 생각으로 골몰해 있던 박영준
은 일단 일본 출장을 위한 준비부터 서두르기로 했
다. 박영준은 총무부에서 갖다 놓은 각 항공회사의
운항 스케쥴을 폈다. 꼼꼼한 채크 끝에 서울과 도꾜
간에 왕복편이 가장 빈번하게 있는 날이 월요일과 금
요일이란 것을 알았다. 그는 총무부에 서울 도꾜간
왕복권을 사되 금요일 아침 가장 이른 시간으로 좌석
을 예약하도록 지시했다. 그런 다음 사무실을 나온
그는 곧바로 소공동에 있는 여행사 중 한 곳엘 들렀
다. 박영준은 그 곳에서 도꾜를 경유, 미국으로 향하
는 NWA를 택해 서울 호눌룰루간의 편도권을 한 장 샀
다.
비행기표를 패스포트 깊숙이 집어넣고 시계를 보니
정오가 거의 다되어 있었다. 박영준은 전화로 서유란
을 불러냈다. 점심을 같이 하자는것이었다.
"언제 뗘나시게요?"
일식집 하네다의 2층 별실에서 박영준과 마주앉은
유란이 물었다.
"매주 월요일에 갈 생각입니다."
"며칠이나 걸리시죠?"
"한 1주일?"
"퍽 오래 걸리시네요."
"타협이 잘 안 되면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지요."
"지난번 말씀하시던 일에 대한 결론이 아직 안 내려
졌나요?"
"돈이 얽힌 문제란 언제나 그렇죠."
"액수가 큰 모양이지요?"
유란은 무심결인 듯 가볍게 물었다.
"말해 봐야 서여사께서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우리
가 일본서 사들이는 가격의 2%인데 내가 가서 할
일은 그 것을 그 쪽 회사 측이 부담해주도록 교섭하
는 일입니다."
"아니 그럼, 저쪽에서 그 만큼 더 얹어서 청구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문제지요. 우리는 이미 저 쪽과 5년 거치
10년 분할상환이라는 조건으로 차관하기로 합의했는
데 거기서 다시 2%를 깎아 달래야하고."
"2% 정도야 깎을 수 있지 않겠어요?"
"문제는 거기서부터입니다. 즉 깎는 데까지 합의하
면 그 다음 그 깎은 분만큼의 돈을 미리 현금으로 줄
수 없겠느냐고 교섭을 해야 하니 될 법이나 한 얘깁
니까? 외상으로 물건 가져가면서 값 깎고, 그 깎은
것만큼 도로 내놓으라는 교섭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겁니다."
박영준은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 같았지만, 유란으로
서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깎는 것까지는 자신이 있지만, 그 이상은 아무래도
좀 무리일 것 같아서."
"2%라면, 백원짜리라면 2원인데 거래 행위에 그
만큼의 융통성도 없겠어요?"
말끝을 흐리는 영준을 주시하며 유란은 생각나는 대
로 말했다.
"물론 그렇지만 전체 금액이 2억 달러 정도라
면 1%만 계산해도 우리 돈으로 얼맙니까?"
불쑥 흘러나오는 박영준의 말을 듣는 순간 유란은
바로 그것이었다.
깨달았다. 김주식 상무가 그렇게도 알고 싶어하던
부분. 그것이 너무나 쉽게 얻어졌다는 생각과 함
께 유란은 웬지 소름 같은 것이 끼쳐옴을 느껐다. 그
녀는 머리 속으로 재빨리 그 액수를 환율로 계산해
보았다. 그녀는 그 숫자의 엄청남에 다시 한번 오한
같은 걸 느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엉겁결에 말해 버렸지만, 사실은
나도 며칠 전에야 아버지한테 들어서 알게 된 겁니
다. 서여사는 절대로 아는 척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누구에게 아는 척하겠어요. 제게 묻는 사람도
없겠지만 저는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는걸요. 특히 숫
자 따위는."
"회사 안에서도 워낙 극비사항이란 의미죠, 뭐, 서
여사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영준은 멋적은 듯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회사의 기밀
을 함부로 발설해버린 데 대해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식당을 나와 유란만을 회사로 먼저 들여 보낸 박영
준은 명동 입구에 있는 M백화점엘 들러 샘소나이트
상표가 붙은 서류 가방과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색이 진하게 든 안경 한 개를 샀다. 그 다음 곧바로
남대문시장으로 갔다. 북적대는 시장 골목을 몇 바퀴
뒤진 끝에 미용재료상들이 몰려 있는 곳을 찾아 자신
의 머리 스타일과 전혀 다른 가발 두 개를 샀다.
그날 오후 김주식은 유란의 연락을 받고 급히 약속
장소로 나갔다. 1주일에 두 번으로 약속된 정기적인
만남 이외에 유란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온건 처음이
었다. 뭔가 있으리라는 그의 기대는 적중했다.
그녀의 보고 중 박영준이 이시다 상사와의 최종협의
를 위해 다음주 금요일 일본으로 떠난다는 동향도 중
요했지만, 그보다는 한화정밀이 차관도입할 플랜트
가격 중 2%를 이시다측이 추가 부담토록 협의할 것이
라는 부분은 뜻밖에 건진 중요한 핵이었다.
긴급한 일이라는 연락을 받은 한화정밀의 정성국 회
장은 다음날 아침일찍 김주식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들였다.
"만일 박영준이 이시다에서 그것을 얻어내지 못한다
해도 박회장이 그까짓 정도를 못 내놓겠나. 그
친구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 손 안 대고 코를 풀려
는 심사니까 그렇지."
김주식의 보고를 들은 정성국이 시큰둥하게 내쏘았
다.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더욱 서둘러야 합니다. 맥파
든은 조금 싸고 상환기간이 2년 더 긴 대신 일체의
추가부담을 안 하겠다는 입장이고 보면,우리도 자체
자금으로 밀어넣을 준비는 해야잖습니까. 저쪽의 볼
륨을 안 이상 플랜트 가격과는 상관없이 저쪽보다 두
껍게 듬뿍 양념을 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을 테니까
요."
정성국의 잔뜩 찌푸린 얼굴쯤 개의찮는 듯 김주식은
의기양양했다.
"물론 같은 값으로야 안 되겠지. 더욱이 저것들은
인간관계라는 잇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
는다면 저 쪽보다 월등하다고 생각될 만큼 내놔야 할
테니. 바로 그 점이 문제야!"
"어쨌든 마지막 방해공작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고,
또 계획서 제출 기한을 연기한다거나 하는 일도 명분
상 있을 수 없을 테니, 미리 준비하는일만 남았
군요."
"말이야 쉽지! 우리로서는 큰 돈인데 당장 그것을
어떻게 꾸려내느냐말야. 저 쪽에서야 그럴 필요도 없
겠지만 요구해 놓고 그 돈까지 융자받을 수 있도록
협조해 줄 테니 가만 앉아 은행에서 찾아 저 쪽으로
넘기기만하면 그만이지만."
"저 아래 사둔 물건을 잡히든지 일부 처분을 해서라
도 준비는 해야 합니다. 그것도 될수록 빨리."
"그러다 안 되는 날이면 되살릴 수도 없고 자칫하면
적잖은 돈이 푼돈으로 부스러져 버릴 텐데 그게
또 하루 아침에 팔리나?"
정성국은 아무래도 찜찜한 얼굴이었다.
"두어 달만 잡는다면 제값으로 팔리지 않을까요? 돈
이야 당장 그것도 선불로야 요구하겠습니까?"
김주식의 설명을 듣던 정성국은 짜증스러운 듯 금방
붙여 물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거칠게 쏘아
붙였다.
"자넨 어찌 그리 어벙한가? 세상에 정치자금을 나중
에 받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일이 다 된 연후에야
안 줘도 강제로 내놓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쯤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인데. 미리 갖다 내놓고 이것을
거두어주시고 저 일을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을."
"미리 준단 말씁입니까?"
"그뿐인가'성금입니다'하고 조건 없이 주는 척
하고, 받는 쪽도 조건 없이 받는 척하는 게 그런 돈
이야. 사전에 갖다 바치고도 낭패 보는 사람들이 얼
마나 많은데 영수증 없는 돈이란 다 그런 거야."
"결국 모험이군요. 지금까지의 예로 봐서는 사후에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경쟁도 없는 작은 일들이니까 그저 사례비조
로 주는 거고, 이건 그래도 이름부터가 자금 아
닌가. 이런 건 흔한 것도 아니고 일이 안 됐을
경우라도 되돌려 받을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는 거
지."
"흔한 경우는 아니라지만 기초 설비에 불과한 작은
것인데 이런 것에까지 혀를 대다니."
김주식은 앞뒤 생각 없이 의기양양했던 자신이 멋적
은 듯 중얼중얼 혀를찼다.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자네는 시키는 일이
나 해. 돈도 물이나 마찬가지야. 파이프가 있어야 대
주지. 내 생각에는 이번 일은 위에서 지시한 것
이 아니라 중간의 아전들이 제 몫을 챙기려는 걸 거
야. 그러니 방법은 그 놈을 끌어들여 먼저 자갈부터
물리는 거야!"
"제 하는 일은 문제가 없습니다."
김주식은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제부씨! 이번 일로 나간 돈이 도대체 얼만지나 아
세요?"
이때 소파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털이 긴 강아
지를 쓰다듬고 앉아있던 오정숙이 마치 부하 직원을
나무라듯 불쑥 내뱉었다. 그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푸시시 흩어진 머리 그대로 실내의만 걸친 차림이었
다.
"쓴 만큼 이상으로 일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
의 극비계획서를 95% 손에 넣는다는 것이 말처럼 그
렇게 쉬운 일인 줄 아세요?"
김주식이 다소 차가운 어조로 힐난하듯 말했다.
"여자 하나 잘 걸어 넣어 힘 안 들이고 재미봐 가면
서 효과 백%다 이 말이시군! 호호호."
위압적인 김주식의 반격을 농으로 들려 버리려는 듯
오정숙이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그 말 속에 역시
가시가 섞여 있음을 세 사람 모두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주식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정성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일에 있어 실질적인 최고
결재는 오정숙이 한다는 것이 기정사실인 만큼, 그녀
가 참견을 시작하면 정성국은 언제나 멍청한 표정으
로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제부씨는 이특본지 뭔지 하는 그 힘께나 쓴
다는 사람을 우리 울타리 속으로 몰아오는 것만 책임
지세요. 나중 문제는 걱정하시지 말구요."
김주식은 속으로는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겉으로는
부드럽게 웃음까지 띄우고,
"처형 실력이야 제가 알지 않습니까. 제 맡은 일쯤
틀림없이 해낼 테니 큰 걱정 마세요."
말을 마친 김주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식사를
하고 함께 나가자는 정성국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김주식은 돌을 쌓아 만든 장중한 아치형대문을 총총
히 나섰다. 김주식은 그 길로 중앙전신전화국으로 직
행하여 광주의 창룡이 최기태에게 사흘 안으로 상경
하라는 전보를 쳤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김주
식은 오후 3시가 조금지난 것을 보고 빌딩 지하에 있
는 이발소로 내려갔다.
말이 이발소지 좁은 복도 양쪽으로 이발용 의자가
하나씩 들어 있는작은 방들이 줄지어 있는 그 곳은
마치 미니 호텔 같았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쾌적
한 분위기 속에 이발과 면도가 진행되는 동안 안마를
전문으로 하는 아가씨가 따로 붙어 온 몸을 주물러
주는 것이다. 복도 끝으로 난 비상구는 밖으로 통하
는 것이 아니었다. 비상구 밖에는 고급스런 분위기의
샤워장과 휴게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김주식은 이발을 하는 동안 안마사의 부드러운 손끝
이 깨워내는 관능의 자극을 느긋하게 즐기며 머리 속
으로는 미스 심을 생각했다. 아내나 유란에게선 느끼
지 못했던 청순한 탄력을 지닌 그녀에의 갈망이 줄곧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 경우 그는 이미 50
을 넘긴 자신의 나이쯤 생각밖으로 던져 버리기 일쑤
였다.
이발용 의자에 길게 누운 그는 자신의 몸에서 솟구
치듯 일어나는 욕망을 만족스럽게 느꼈다. 샤워장으
로 옮겨간 그는 시중드는 핫팬티 아가씨의 팽팽한 볼
륨에 더 한층 자극을 받았다. 그럴수록 시간은 더욱
더디게 가는것 같았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
이 말끔한 모습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이발소를
나선 김주식은 곧장 주차장으로 갔다. 운전기사를 미
리 퇴근시켜 둔 그는 직접 운전대에 앉았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멀찍이 S신문사 앞에서 만나
자고 한 약속대로 미스 심은 이미 나와 있었다. 자주
빛 롱코트 차림에 풍성하고 긴 머리를 어깨 뒤로 흘
려 넘긴 미스 심은 여행사 제복을 입었을 때보다는
나이 들어보였으나 처녀다운 매력은 훨씬 돋보였다.
저무는 태평로 거리를 뒤로 하고 차는 31 고가도
로로 올라갔다. 퇴근시간이 덜 된 탓인지 길은 한가
했다. 워커힐까지 30분이 채 못 걸렸다.
일곱시부터 가야금 홀에서 시작되는 쇼시간은 아직
멀었다. 그들은 커피숍에서 우선 차부터 한 잔씩 마
셨다.
"미스 심, 금년에 몇이더라?"
"나이만 많이 먹었어요."
가벼운 화장기가 결코 희다고 할 수 없는 그녀의 얼
굴에 매끗하고 매력적인 음영을 짓고 있었다.
"스물다섯?"
"그만만 됐으면 좋게요!"
"아니, 그럼 그보다 더 먹었단 말이야?"
김주식의 되물음에 미스 심은 흘기듯 눈을 치뜨며
웃기만 했다.
"그렇다고 서른이 된 것은 아니겠지?"
"그 중간쯤 됐어요."
"어쨌든 좋은 때야! 내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프로
포즈를 할 텐데."
"어머, 큰일날 말씀을 다 하시네. 이쁜 사모님게서
들으셨으면 큰일나시려고."
"사모님인지 뭔지 서로 따로 따로 논지 이미 오
래 됐어."
"그만큼 서로 믿는다는 증거겠지요."
"그보다는 무관심이라고 해야 맞겠지."
"사모님과는 연애를 하셨던가요?"
"이제 그 얘긴 그만 하자구. 늙은이 얘기보다 미스
심 같은 예쁜 아가씨 연애담이 훨씬 듣기 좋잖아."
"전 연애 같은 거 몰라요."
"아니, 이렇게 멋진 아가씨를 그냥 두다니 아
니, 멋지니까 감히 넘겨다 보지들을 못하는 건가?"
김주식은 농담처럼 말을 흘리면서도 눈빛만은 뭔가
를 탐색하듯 번들거렸다.
"요즘 젊은 남자들 믿을 수가 있어야죠."
그런 김주식을 곁눈으로 슬쩍 살피며 미스 심이 웃
었다.
"젊은 여자들은 어떻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버리고 남자들은 여자들을 못쓰
게 만든다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미스 심은 외국 여행은 안 하나?"
김주식이 거기서 이야기 방향을 바꿨다.
"아직은 못나가 봤어요. 해외 관광단을 보낼 때는
언제나 남자 직원들이 인솔하거든요. 그것도 대개는
과장이나 부장급 등 높은 사람들이 가는 것이 보통이
구요. 설사 저보고 인솔해서 갔다 오라고 하더라도
외국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지요."
"그렇겠군! 하는 일은 어때? 재미있나?"
"재미라기보다 처음에는 그도 저도 모르고 다녔
는데 갈수록 힘이들어요."
"주로 일본 사람들이지?"
"네, 그래요."
"그 친구들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퍽 개방적이 되어 미스 심 같은 예쁜 아가씨들은 더
러 유혹도 받을 텐데!"
"개방적인 정도가 아니에요. 별의별 소리들을 다 하
고, 그 중에는 돌아간 뒤에도 끈질기게 편지를
하거나 두 번 세 번 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대드는 사람은 없나?"
"왜 없겠어요. 지방 관광을 갔을 경우 밤에 호텔 방
문을 두드리는 건 고사하고 막무가내로 쳐들어오는
사람도 있는걸요."
"하하, 그럴 테지! 나라도 미스 심이라면 한 번쯤
치근덕거려 볼 텐데."
"아이 상무님두!"
웃는 김주식을 따라 미스 심도 웃음을 터뜨렸다.
"선물 공세도 많겠지?"
"그럼요. 소포로 부쳐오는 사람, 쇼핑을 나가면 이
것 저것 사서 안겨주는 사람도 많아요."
"내가 들으니 안내원 중에서는 그런 부수입이 더 많
은 사람도 있다면서? 또 그 사람들이 여행경비를 뽑
기 위해 갖고 들어온 물건을 중개해 주고 구전을 먹
는 일도 심심찮게 있다던데."
"거의 그래요. 시계나 카메라, 반지 등 고가품을 팔
아 달라는 사람도많아요."
"그럴 땐 어떻게 하나?"
"여행사나 호텔 주변에는 그런 물건만 사겠다고 돈
싸들고 기다리는 직업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직접 사서 팔면 장사가 될 텐데."
"회사에서는 중개도 못하게 하는걸요. 잘못 되면 회
사 망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물건은 값이 쌀 테니까 장사꾼들이 덤빌 만하
겠지?"
"잘은 모르지만 어떤 물건은 곱절도 더 남길 수 있
다나 봐요."
"값싸고 좋은 물건이 있으면 내게도 소개해 줘. 뜻
밖에 횡재라도 할지아나."
김주식이 반농담인양 자연스럽게 하는 말을 미스 심
은 머리 속에 새겨놓았다.
스테이크를 곁들인 가야금홀의 디너쇼는 화려했다.
식사를 마치고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외국인들에 의
한 쇼에 잠시 정신을 팔고 앉았던 미스 심은 문득 한
쪽 무릎 위에 올려지는 야릇한 감촉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에 의자를 가깝게 붙여 앉은
김주식의 손이 그녀의 무릎 위에 얹혀 있었다. 순간
움찔했으나 몸을 빼거나 손을 밀어낼 용기가 나지 않
았다. 그대로 모르는 체 놔둬 보기로 했다. 그녀로서
는 처음 당하는 일이 아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만나본 거의 모든 남자들이 다방이나 야
외, 특히 극장 같은곳에서는 으레 그랬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 그 이상으로까지 끌고가는 사람은 없
었다. 김주식도 시선은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라
에 가까운 남녀들의 율동에 쏠리고 있었다. 동양인에
비해 한결 큰 체구의 남녀들이어선지 힘과 볼륨이 넘
치는 춤이 육감적이었다.
김주식의 손은 가볍게 주무르듯 움직였다. 그 손은
차츰 두 다리가 뻗어난 곳으로 이동했다. 미스 심의
모아쥔 두 손 위에 그의 손이 와 닿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피하거나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식은 땀에 젖은 듯 차가운 느낌의 그의
손이 그녀의 두 손을 감싸듯 부드럽게 감겨왔다. 그
와 함께 야릇한 감각이 그녀의 전신을 간지르듯 천쳔
히 파묻혀 왔다.
그의 손이 천천히 모아쥔 두 손바닥 사이를 헤집었
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윽고 펴진 손바닥 사
이로 그의 손이 깊숙이 들어왔다. 미스 심은 어쩔 수
없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다이나믹한 댄서들의
율동이 차츰 시선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함을 느꼈다.
귀 밑이 화끈거리면서 숨이 가빠지는 자신을 어떻게
주체해야 하나 곤혹스러움을 느끼는데 무대의 막이
내려지고 있었다.
번역하여 깨끗하게 타자된 일어 편지와 함께 강석현
은 미스 심으로부터 지난 밤 김주식과 만났던 얘기를
빠짐없이 들었다.
일어 편지는 수첩 속에 기록해 두었던 도꾜 주소를
적어 안베겐지 앞으로 발송됐다. 죽은 마쓰모도의 사
진을 동봉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편지를 부친 강석현은 늦어도 2주 정도만 기다리면
무슨 소식이 있으리라는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