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문명과 단군조선
민족은 수 천년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통합과 분리의 생활에서 이질감을 극복하고 상호 동화되어 의사소통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무리가 발전하여 형성된다.
민족은 얼굴의 생김새, 피부색, 언어, 생활방식등 공통된 모습으로 이어왔고, 문자가 만들어지고 언어가 통일되면서 더욱 확실하게 굳어졌다.
동북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문자가 매개체 되어 하나의 민족으로 고착화되는 과정을 중국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한민족은 요하강 유역에서 무리를 형성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하며 토착세력과 융화 확대되었고 한글이 만들어지면서 대륙의 민족들과 분별되었다.
※ 원시인류는 무리생활을 하였고 이웃한 종족과 연대갈등을 격으면서 상호교배에 의한 우수한 혈통으로 발전 진화한 것이 현생인류이다.
초기 고대국가는 부족국가 연맹체 수준이고 지리적 여건에 따라 제한된 지역에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문명의 발전으로 이동이 확대되고 청동기 철기가 만들어지면서 정복활동을 통한 민족의 구성도 확대되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생기게 되고 규범이 만들어져 고대국가가 형성된다.
최초의 고대국가는 BC 3000년 경으로 단군조선의 성립시기와 비슷하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환국 배달국은 인간의 무리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족국가 이전의 석기시대 이다.
요하문명의 주체세력도 발해연안과 황하유역 만주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토착세력과 경쟁하였고,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하였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 토기, 비파형 청동검, 옥기류등 민족의 원형질 유물들이 만주와 요하강유역, 발해만 연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민족의 이동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요하문명의 유물 유적을 보면 빗살무늬토기, 피라미드식 적석총, 치가 있는 석성, 비파형동검등 이런 것들은 중원에서 발견된적이 없는 한민족 문화의 상징들이다.
한민족의 고대국가는 삼국시대 이전 역사의 불확실한 요소들이 많아 논쟁을 이어오고 있다.
단군조선의 실체를 밝히고 부여와 고구려 백제의 연결 고리를 밝혀야 한다.
요하문명과 단군조선의 관계를 밝히는 과정은 역사전쟁이다.
환국-배달-조선-부여(북부여,졸본부여,동부여,서부여)
중국은 상(은)나라 이전 하나라가 있었고, 삼황 오제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삼황 --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 헌원씨,
오제 -- 소호 금천씨, 전욱 고양씨, 제곡 고신씨,
제요 도당씨, 제순 유우씨
황하문명으로 한족의 역사를 설명하던 중국은 대륙역사의 출발점을 요하문명으로 수정하고 동이족을 대륙역사에 포함시켜 고구려 발해, 북방민족 까지 중국의 고대사로 쓰기 시작했다.
요하문명의 주체를 중국의 고대민족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것이 "동북공정"이다
삼국유사 제왕운기에 단군조선을 중국 요임금과 결부시켜 기술해 놓았다.
삼국유사 <위서>에는 요임금과 같은 해, <고기>에는 요임금 즉위 50년(경인년)으로 되어 있으며, 제왕운기에서는 요임금과 나란히 무진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밝혀놓았다.
대다수의 역사자료들은 이러한 견해와 비슷하지만 주목할 점은, 많은 역사자료에서 단군의 건국기년을 무진년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건국연대는 다양한 자료들에 의해 다르지만, 건국기년의 간지만은 모두 일치하는 것은 그것이 독자적인 고유한 전승으로 전해져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북아시아의 뿌리 환국
환국-배달국-조선-부여-삼국~남북국시대
남북국(고려/발해,요,금,~조선/청)~
-삼황오제-하-상-주-춘국-진-한-삼국-5호16국~
한민족은 환국의 적통 배달 조선으로 이어지고,
하화족은 환국 배달국의 제후국이 성장한 역사다.
환단고기는 요하문명의 주체를 환국 배달국 조선의 역사로 설명한다.
단군조선의 직할통치 지역 진한(진조선)을 만주(헤이룽장성~지린성)로 설명하고,
부단군(제후)이 다스리는 지역 변한(번조선)을 요하강유역(랴오닝성~북경)으로 설명한다.
한반도는 마한(막조선)으로 분류하고 한나라에 패한 준왕의 세력이 이주한 곳으로 설명한다.
분명한건 문명지를 외곽으로 할 수는 없다.
민족의 이동방항을 요하 홍산문명에서 쏭화강 유역, 만주, 한반도에 정착하는 흔적을 찿아야 한다.
평양시에 있는 황대성, 대성구역 청암동 토성 아래성, 남포시 온천군 성현리 토성 아래성,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 토성 아래성 등은 기원전 30세기 초에 평양일대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명백히 실증해준다. 특히 청암동 토성 아래성을 중심으로 100여리를 사이에 두고 동 서 남 요충지 마다 성곽이 축조돼 있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고대국가의 수도가 있었음을 실증해준다. 여기에서 아래성이라고 표현된 것들은 고구려 성곽의 아래쪽에 단군조선의 성곽 유적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성들을 살펴보면 단군조선 시기의 성곽위에 고구려 시대의 성곽이 축조되었기 때문에 과거에는 단순히 고구려 성곽으로만 알려졌었다.
북한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 성곽유적, 고인돌 유적들이 단군조선의 유물이고 더구나 연대가 기원전 30세기 초의 유물이라면 단군조선의 건국지로 유력하다. 사실관계가 궁금하다.
황대성은 단군조선 초기의 대표적 산성이다. 이 성에서 특히 괄목할만한 것은 성벽 위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흙과 돌로 쌓은 황대성은 300m 정도 남아 있는데 성벽의 축조형식으로 보아 타원형 성곽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하부 너비는 10m이고, 상부 너비는 5m, 높이는 1m 정도이며 배수구도 발견되었다. 고인돌은 황대성보다 후대의 무덤으로, 폐성된 황대성 성벽 위에 조성된 북방식(오덕형)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의 연대를 알아볼 수 있는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대성 고인돌과 유사한 구빈리 고인돌과 용곡리 4호의 측정연대를 바탕으로 황대성의 연대를 추정하면 기원전 3,000년 경에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은허" 유적을 발굴한 고고학자 푸쓰녠(부사년)은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망한 뒤에 동북으로 돌아갔다고 단정했다. 요하문명 세력이 은나라를 세우고 황하유역에 이르기까지 번성하다가 주나라에게 망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는 설명이다.
요하문명은 은나라 선대의 유물이고, 동이족 문명이며 환국 배달국의 유물이다.
환국 배달국은 남북으로 (은/조선) 뻗어갔고, 수백년후 주나라 무왕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요하강 유역으로 돌아온 은나라 세력으로 인하여 단군조선은 요하강 유역, 쏭화강 유역의 분할 통치가 시작되고 요하강은 중원세력과 북방세력의 싸움터로 전락한다.
은나라는 bc1046년 주왕의 폭정으로 민심을 잃고 주나라 무왕에게 망하고, 주나라는 bc770년 서융의 침입으로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다. 동주시대 부터 제후들의 힘이 강성하여 서로 경쟁하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를 격고 bc 221년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한다. 진시황은 외세의 침입을 막기위하여 발해연안 부터 내륙으로 장성을 쌓기 시작한다. 그 장성 외곽이 단군조선과의 경계이다.
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혼란기를 격고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다.
단군조선은 서역에서 유입된 철기로 무장한 한나라의 침입으로 요하땅을 잃고, 만주 한반도로 이주한다.
요하땅에는 한4군이 설치되고 만주에서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여 한4군과 충돌한다.
한나라에 요서 요동땅을 잃고 단군조선이 쇄퇴하자 만주에는 여러 나라로 분화된다. 부여가 흥망하고 고구려가 강성하여 한4군을 퇴치하고 단군조선의 영토를 차지한다.
한반도는 백제와 신라가 경쟁하게 된다.
마한(馬韓)
한반도의 구석기 유적을 고증하고 영상강유역에 존재했던 주체세력을 밝히는 과정은 마한과 신라 가야 뿐만아니라 일본의 고대사 를 밝히는 중요한 과제다.
끊임없는 인류의 이동역사로 한반도에 도착한 구석기인들은 정착과 이동을 반복하였고, 빙하기에 북방의 인류가 남하하면서 한반도에도 생존의 경쟁이 시작된다. 전쟁과 연대를 통하여 수많은 연맹체를 형성하고 점차 마한을 대표하는 국가가 출연하다.
한반도의 지배세력은 고조선, 부여의 멸망에 따른 유민의 이동역사와 함께 한다.
북방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전쟁은 시작되고 철기문명에 고조선은 멸망한다. 전쟁에서 접한 철기기술을 터득하고 발전시켜 다시 일어난 세력이 부여 이고, 고구려 백제 신라 로 발전한다.
번조선 준왕이 한나라에 패망하고 한반도로 이주하여 한왕이 되었다는 기록으로도 한반도에는 아직 부족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증명한다.
(● 신나라(AD7~26년) 왕망 세력은 후한 광무제에게 멸망하고 한반도 남부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왕망세력중에는 김일제 후손이 함께했다. 신라문무왕비에 자신들을 김일제 후손으로 표기하였다. 경주의 옛 지명이 금성 이었는데, 나주의 옛 지명 또한 금성 이었다는게 의미심장하다. 김일제 후손들은 나주에 머무르다 경주로 이주하여 신라 김씨왕조로 발전하고, 왕망의 후손은 영상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다 백제에게 복속되고, 일부 세력은 바다건너 왜 로 이어진다.
나주시 복암리 낭돈마을 유적과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신나라 화폐가 발견되어 이를 증빙하고, 영산강유역의 대표적 유물 인 옹관묘는 중국 전한시대 발해만유역 허베이성 지역에서 발견되어 신나라 왕망의 세력이 정착하고 남긴 유적으로 추론한다)
(● AD14년에 발행한 신나라 화폐 화천을 1925년 평양 대동강변, 1928년 제주 신지항 동굴에서 발견한다.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고려무역선을 발견하였는데 28톤의 화폐 중에 화천도 발견되었고, 1992년 김해 패총에서, 2003년 나주시 낭돈마을 생활유적에서, 해남 패총에서, 2016년 광주광역시 도로공사 중에 화천꾸러미 까지 발견되었다. 역사학계는 신나라와 무역의 증표로 추측하지만, 신나라의 짧은 역사를 생각하면 불가한 일이다. 역사왜곡에 앞장섰던 일제에 의한 한반도 낙랑군과 임나일본부 설을 만들기 위한 공작일수 있다.)
백제가 성장하여 마한을 정복하지만, 영산강유역의 지배세력과 연대하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상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여타지역과 분별되는 독자적인 것으로 5~6세기 까지 그들만의 문명을 이어졌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한다.
백제부흥운동 핵심세력이 사비성 서북부 였고, 남부지역은 저항의 흔적이 불확실하고, 왕건의 후삼국통일 과정에서도 왕건은 나주지역 토호세력과 연대하는 것으로도 백제와 영산강유역 과는 많은 이질감을 추론한다.
옹관묘가 영상강유역과 일본에서 다수 발견되어 임나일본부 를 증명하는 것으로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지만 문명적으로 대륙과 한반도가 일본 보다 앞서기 때문에 불가한 주장이고 오히려 한반도 세력이 건너가 성장한 것이 왜(倭) 임을 고증하는 것이다.
왜(倭)
한반도 남쪽의 토착세력은 북방세력에 쫒기어 바다건너 왜"로 이주한다. 목지국도 3세기 후반 강국으로 성장한 백제에게 마한 연맹체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쫒기어 왜"로 넘어간다. 후일 왜"를 통일한 야마토정권의 주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세력으로 보인다.
4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여년 가야지역을 식민지로 두었고, 백제·신라까지 보호국으로 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은 문명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에가미[江上波夫]교수의 기마민족국가설은 3세기경 북아시아에서 활동하던 기마민이 부여·고구려를 거쳐 가야에 정착하다가 4세기 초 낙랑군이 멸망하고 백제·신라가 강성하여 압력을 받게 되자 바다를 건너 북구주로 이동하였다. 4세기 말, 다시 기나이[畿內] 지방으로 진출하여 장차 일본열도를 통일하게 될 국가의 모체를 형성하였다.
천황족(天皇族)이란 가야 출신이며, 천손강림(天孫降臨)이란 가야에서 북구주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북아시아와 가야·야마토 지방에서 출토되는 무기·마구(馬具) 등 고고학적 출토품의 유사성이 크고, 5세기경 중국문헌 등을 참고로 할 때 실증된다고 하였다.
4세기 중반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왜국으로 불렸지만, 야마토왕의 권력에 집중돼있는 야마토 왕국이 부족국가들을 이끌고 있던 연맹국가였다. 야마토 왕조는 탁순국에 사신 시마노스구데를 파견하였다가 백제가 왜와 통교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시마노스구데는 근초고왕에게 부하 니하야를 파견하였다. 근초고왕은 니하야를 반갑게 맞이하여 오색의 채견 1필, 각궁의 화살, 철정 40매를 선물로 안겨 돌려보냈다.
백제는 한자와 불교 선진문명을 전하여 왜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고 왕실의 사람을 왜에 보내어 신뢰관계를 높여 혈맹의 관계로 발전한다.
한반도 철기는 기원전 5세기(bc400년) 중국의 철기문화가 도입되면서 조금씩 나타나고, 위만조선(bc197), 부여가 건국되던 기원전 2세기 초의 주조틀이 발굴되어 본격적인 철기 생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철기 문화와 다른 독자적인 단조 철기가 생산되고, 한사군(bc108)이 설치되던 2세기 말 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대규모의 철 생산 유적이 발견되고, 중국 일본으로 철을 수출하기도 했다. 철의 수출은 삼국시대 초기까지 이어졌고 일본으로 전래되어 일본에서 철기문화를 일으킨다. 고대 일본의 철검과 한국 철검의 동위원소 비율이 같아 둘다 같은 공법으로 제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통일
천년을 이어온 한민족의 삼국도 통일의 기운이 움튼다. 고구려는 한나라 이후 삼국시대, 5호16국의 분열시대를 거처 수나라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쟁을 치루었고, 결국 수 당과의 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손실하여 쇄퇴하고, 백제는 성왕 의자왕에 이르러 잠시 부흥하지만 당나라의 도움으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다.
신라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동안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등 지배세력이 여러번 교체된다. 그 뒤바뀌는 시기와 고조선 부여 대륙세력의 변화를 찾아보면 어떤 세력 인지 추측할수 있다.
가야에게 까지 공격을 당하여 고구려의 도움을 받았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스스로 약함을 인지하고 끊임없는 혁신의 결과다. 요하문명을 꽃피운 단군조선은 철기문명에 멸망하고, 오백년 사직 조선도 신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망하게 된다.
단군조선 부터 조선까지 어느시대도 나라가 태만하고 혁신하지 못하여 망하였다.
백제 패망
백제가 패망하는 삼국사기 기록이다.
당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좌위장군 유백영과 우무위 장군 풍사귀와 좌효위 장군 방효공 등과 함께 군사 1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자,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高宗>詔: 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左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 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 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번 우리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나라 군사들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할지를 몰랐다.
王聞之, 會群臣, 問戰守之宜.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新羅>人恃大國之援, 故有輕我之心, 若見<唐>人失利, 則必疑懼, 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 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新羅>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其師老. 先使偏師, 擊<羅>軍, 折其銳氣, 然後, 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 而保國矣." 王猶豫, 不知所從.
이 때 좌평 흥수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기벌포)과 탄현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명의 군사와 한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時, 佐平<興首>得罪, 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與<新羅>共謀 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 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 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에 따랐다.
於時, 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 之中, 怨君而不愛國,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 ·離網之魚也." 王然之.
왕은 또한 당나라와 신라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 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 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 竟敗, < 伯>死之. 於是, 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 이 웅진어귀가 어디일까? 유인궤의 구원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부흥군은 웅진강 어귀"에 목책을 만들어 싸우다가 1만여명 전사자를 내고 임존성으로 물러났다 하였고, 백강해전이 일어난 장소를 "웅진강구"로 기록하고 있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 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王師乘潮, 銜尾進, 鼓而 . <定方>將步·騎, 直 眞都城{其都城} , 一舍止. 我軍悉衆拒之, 又敗, 死者萬餘人. <唐>兵乘勝薄城.
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마침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孝>, 走北鄙.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定方>圍其城. 王次子<泰>, 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子<文思>, 謂王子<隆>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遂率左右, 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定方>令士超堞, 立<唐>旗幟, <泰>窘迫, 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좌위 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유민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 至是, 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 各統州縣. 擢渠長, 爲都督·刺史·縣令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以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
소정방이 포로들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고 용서하여 주었다. 왕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금자광록대부위위경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 호, 진 숙보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자 융을 사가경으로 임명하였다.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사망하자 유인궤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定方>以所 見上, 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孫皓>·<陳叔寶>墓側, 幷爲竪碑. 授<隆>司稼卿. <文度>濟海卒, 以<劉仁軌>代之.
무왕의 조카 복신은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 때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거점으로~
<武王>從子<福信>, 嘗將兵, 乃與浮屠<道琛>, 據<周留城~
백제구국운동
나라를 잃고 백성이 도륙당하자 백제의 장수들이 분개하여 구국운동이 시작되었다.
흑치상지는 왕성이 함락되자 항복하였지만, 왕과 백성이 당하는 비참함을 보고 풍달군(임존성)으로 도망처 봉기하였고, 남잠(南岑부여금정산).정현(貞峴대전흑석동)에서 나당군에 저항하고,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는 좌평 정무(佐平 正武),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서는 달솔 여자진(達率餘自進)이 궐기하여 부흥운동이 시작된다.
임존성은 복신(福信) 도침(道琛)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유민을 규합하여 나당군에 항전하는 부흥군의 구심점이 되었다.
백제는 왕성만이 함락당하였을뿐 모든곳은 백제 그대로였다.
남잠(南岑), 정현성(貞峴城) 등지에서 신라군을 공격했고, 정무(正武)의 병력이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 당군을 깨트리며 부흥군에 합세하였다.
남잠(南岑)은 사비성에서 지척의 거리이고, 나당군의 외곽 경비와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 정무가 이끄는 항전군도 사비와 지척인 청양 부근이고 보면 나당군의 사비 외곽 경비부대 와의 접전이었을 것으로 본다. 비록 작은 승리였지만 부흥군의 사기가 높아지고 지원군이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본격적인 부흥군의 전투는 660년 8월 26일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군의 임존성 공격이다. 소정방은 공격에 실패하고 당으로 급히 돌아간다. 임존성전투에서 부흥군의 승리는 다른 지역의 백제성에 영향을 주었고, 이 때 임존성 이하 200여성이 부흥군에 호응하여 상호 연대하게 되었다. 나당군은 단지 작은 목책만을 깨트렸을 뿐이다. 부흥군이 갖고있던 무기들은 죽창과 몽둥이 뿐이었는데, 신라군의 병장기를 뺏어 군비까지 갖추게 되었다.
※ 위 200여성의 합류에 대하여 어디까지 인지 불명확하다. 백제 서북부에 존재하는 성들인지 백제 전역에 있는 성들인지 적시하지 않았다.
복신은 임존성전투 이후 수 많은 의병과 부흥군의 연합을 이끌어 내어 부흥군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한다. 사비성를 중심으로 서북부를 모두 부흥군에 의해 장악하기에 이른다. 특히 서부는 매우 견고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고, 복신은 나당군을 몰아내는데 자신감을 갖게 된다.
소정방은 임존성전투에서 죽음으로 맞써 싸우는 부흥군을 진압하지 못하고 단지 소책만을 깨트리고 급히 당으로 돌아간다. 들불처럼 일어난 백제유민들의 성난 민심을 보고 부흥군을 감당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의자왕 부여융 신하들을 압송하여 당으로 돌아간 것이다.
복신은 660년 10월에 좌평 귀지 등을 왜에 보내어 당나라가 의자왕 등 군신을 잡아갔음을 알리고 왜군의 출병과 함께 왕자 풍을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하여 귀국을 요청한다.
※ 부여 풍은 662년 5월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나당군의 공격을 물리친 백제부흥군은 9월 23일 사비 남령 등 사비 부근의 네 곳에 성을 쌓고 곧 사비성을 포위하고 나당군을 공격하였으니, 이때 20여 성이 부흥군에 호응하고 있다. 나당군은 사비성만을 고수하고 있을 뿐, 여타지역은 나당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당 고종이 웅진도독으로 파견한 좌위중랑장 왕문도가 9월 28일 삼년산성에서 조서를 전한후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당시 삼년산성에서 머물고 있었던 무열왕은 백제부흥군의 공격으로부터 나당군을 구하고자 10월 9일 친히 태자와 모든 군병을 이끌고 회군하여 10월 18일에 중도에서 이례성을 함락시키니, 백제부흥군에 호응하던 20여 성이 다시 항복하고 말았다. 무열왕은 계속하여 사비 남령의 목책(10월 30일)과 왕흥사 잠성(11월 5일)을 공격 함락시켜 사비성의 나당군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661년 초에 백제부흥군은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재차 사비성 공격에 나섰으며, 당은 부임직후에 병사한 왕문도를 대신하여 유인궤를 파견, 신라군과 같이 당군을 구원하게 하였다.
왕문도의 후임으로 부임하게 된 유인궤는, 백제 토벌 시에 청주자사로 출병하게 되어 바다 건너 군량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시일을 어겨 義府로부터 독촉을 받았고, 또한 풍랑을 만나 선박을 잃고 많은 익사자를 내는 바람에 백의종군을 하던 중이었다(自治通鑑 唐紀 高宗中之上). 웅진도독으로 부임한 왕문도가 삼년산성에서 급사하게 되고, 사비성의 군진에 머무르고 있는 당군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유인궤를 임시직인 검교대방주자사로 삼아 구원케 하였던 것이다.
유인궤의 도착 시점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유인궤군과 신라군의 구원으로 도침 등이 사비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선 것이 661년 3월이라는 것이니, 이 때에는 유인궤가 이미 도착하여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유인궤가 “지름길로 신라군을 출동시켰다.”는 신라군이 출병하고있는 것이 661년 2월인 것을 보면 유인궤는 늦어도 661년 2월중에는 도착하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인궤는 소정방의 백제원정 당시 군량운송의 책무로 백제에 도착하였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여 백의종군 상태로 당군에 머무르고 있다가 갑자스런 왕문도의 죽음으로 후임을 맡았을 수도 있다. 위급한 상황에서 유인원 장군이 있음에도 멀리 당에서 후임을 보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위 내용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이다.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임명하여,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군사를 보내 유 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인궤가 기뻐하며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당나라 책력과 묘휘를 요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대당의 정삭을 해외에 반포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개의 목책을 세워 그들을 방어하였다. 인궤가 신라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들어와 강을 저지선으로 삼으니,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가 당나라 용삭 원년 3월이었다.
王文度>之衆, 便道發<新羅>兵, 以救<仁願>. <仁軌>喜曰: "天將富貴此翁矣." 請<唐>曆及廟諱而行, 曰: "吾欲掃平東夷, 頒大<唐>正朔於海表." <仁軌>御軍嚴整, 轉鬪而前. <福信>等, 立兩柵於<熊津江>口, 以拒之. <仁軌>與<新羅>兵合擊之, 我軍退走入柵, 阻水橋狹, 墮溺及戰死者萬餘人. <福信>等乃釋都城之圍, 退保<任存城>, <新羅>人以粮盡引還. 時, <龍朔>元年三月也.
※ 복신의 부흥군은 유인궤군의 진입을 막으려 웅진강 어귀에 목책을 세우고 방어하였지만 유인궤가 이끄는 나당군에 크게 패한다. 이 때 웅진강어귀는 사비성 가까이 금강으로 상륙하는 상황이 아니다. 백강을 통과한 소정방의 당군을 저지하기 위해 의자왕이 백제군을 주둔시킨 곳도 웅진어귀였다. 661년 3월 웅진강 전투 이후 부흥군이 사비성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후퇴하고 신라군은 식량이 다하여 돌아갔다 기록하고, 또다른 기록은 3월 초부터 한달 넘게 신라군이 사비성을 압박하는 두량윤성을 공격하다 패하여 후퇴하던 도중 부흥군의 추격을 받아 대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 부흥군은 본진을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이동한다. 부흥군은 불어나는 유민 지원군으로 임존성에서는 더이상 머무르기 힘들게 되어, 넓고 안전한 산악지역(중부)으로 옮겨간 것이다.
8년(661) 봄 2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 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良圖), 아찬 충상 등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다.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 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과 욱천(旭川)을 남천 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 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 위 글은 유인궤와 함께 웅진강어귀의 부흥군을 진압하고 사비성에 합류하기 위한 출병이고,
아래 글은 웅진강 전투 이후 계속해서 부흥군을 진압하는 기록이다.
3월 5일에 도중에 이르러 품일이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성(豆良尹城) 남쪽에서 군영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인이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바라보고 갑자기 나와 생각지도 않게 치니 우리 군사는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와서 주둔하면서 두량윤성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그러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고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돌이켰다.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이 먼저 가고 하주(下州)의 군사는 맨 뒤에 가게 되었는데,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군을 만나 싸워 패하여 물러났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짐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上州)와 낭당(郎幢)은 각산(角山)에서 적을 만나 진격하여 이기고,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 2천명을 목베었다. 왕은 군대가 패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금순(金純), 진흠(眞欽),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러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서 패하였으므로 벌을 논하였는데, 각기 차등있게 하였다.
※ 신라군이 공격하였다는 두량윤성(두량이성)의 장소 또한 주류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장소이다.
사비성을 압박하는 부흥군을 공격하였다면 당연히 사비성 가까이에서 두량이성을 찿아야 한다. 그런데 신라군이 도주하면서 부흥군의 추격에 막대한 피해를 당한 곳을 빈골양으로 기록하고 있고, 학계는 빈골양을 지금의 태인으로 고증하고 있어 수 많은 억측을 낳게한다. 더구나 상주(上州)와 낭당(郎幢)의 신라군은 각산(角山)에서 적을 만났으나 진격하여 이기고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 2천명을 목베었다"고 기록하여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으로 남는다. 여기에 나오는 각산은 청양의 칠갑산으로 보이는데, 남쪽의 빈골양(태인)과 북쪽의 각산(청양)은 서로 먼 거리여서 고사(고부)에서 퇴각하는 신라군으로 보기 힘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는 신라군이 가시헤진에 이르고, 퇴각하는 신라군이 가소천에 도착하여 되돌아갔다는 기록은 더더욱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으로 남게 된다.
이후, 당군은 동쪽지방을 침략하는 백제부흥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웅진의 당군 1천명이 출병하였으나 대패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삼국사기 권22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7월 26일조)고 한다. 웅진의 당군은 유인궤군이다. 이들은 원군으로 도착하여 사비성의 위기를 해소시킨 후에 웅진성으로 들어가 지키고 있다가 백제부흥군이 신라로부터의 군량공급선인 웅진도(신라에서 웅진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여 고립상태에 빠지자 이를 해소시키기 위하여 출병하였다가 전멸하게 된 것이다. 이를 볼때 유인원군은 사비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유인궤군은 웅진성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부흥군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은 유인궤는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당의 계속된 청병으로 신라는 김흠 등을 보내어 백제부흥군의 중심 거점인 주류성을 치게 하여 부흥군을 분산시켜 웅진성의 외롭고 위태로움을 해소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복신에게 대패하여 돌아오니 남방의 모든 성이 복신에게 귀속하게 되었으며, 김흠이 돌아온 이후 신라군은 감히 다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신라군의 피해상황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 내용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이다.
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인원의 군사와 합쳐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표문을 올려 신라와 협력하여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신라왕 춘추가 당나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에게 군사를 주어 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에 이르자 복신이 그와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김흠이 갈령도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쳤는데, 풍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하였다.
<仁軌>以衆小{少} , 與<仁願>合軍, 休息士卒, 上表, 請合<新羅>圖之. <羅>王<春秋>奉詔, 遣其將<金欽>, 將兵救<仁軌>等, 至<古泗>. <福信>邀擊, 敗之. <欽>自<葛嶺道>遁還, <新羅>不敢復出. 尋而<福信>殺<道琛>, 幷其還{衆} . <풍>不能制, 但主祭而已.
※ 유인궤의 당군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병한 김흠의 신라군을 패퇴시키자 백제 남방의 모든 성들이 복신의 부흥군에 귀속되었다는 기록 또한 많은 억측을 낳게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으로 인해 주류성이 금강 남쪽(부안)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남방의 셩들이 복신에게 호응한 것은 주류성의 위치 보다는 전쟁의 승패가 부흥군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 유인궤가 사비성에 도착한 661년 3월 부터, 문무왕이 즉위하여 고구려 원정길에 오르는 661년 6월 까지 4개월 사이의 전투 내용을 정리하면,
3월 5일~4월 19일, 신라군 두량윤성 공격 실패, 후퇴하다 부흥군에 크게 패함, 품일 등 문책당함.
4월~6월 무무왕 즉위 고구려 원정, 유인궤 군사의 웅진성 동쪽 부흥군 공격 실패 천여명 살상당함,
유인궤의 계속되는 청병에도 전염병이 돌아 출정하지 못하던 신라군은 김흠 등을 주류성으로 출정하다 고사"에서 복신에게 패하여 돌아감, 이후 감히 다시 출정하지 못함.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량윤성의 부흥군을 공격하다 패한 사건과 주류성으로 출병하다 패한 사건을 함축하여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고서의 내용이 제각각 다르게 기록하여 사건을 세세하게 고증해야 한다. 일부 학자는 임실의 성미산성을 각산으로 설명한다.
백제부흥군은 승리에 편승하여 다시 웅진부성을 포위하고 웅진도를 차단하게 되니, 웅진성 안에 소금과 된장이 떨어지고 신라는 즉시 장정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어 그들의 괴롭고 고달픔을 구하였다.
이와 같이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도침은 영군장군, 복신은 상잠장군을 일컬으며 백제 유민들을 모아들여 그 세력이 더욱 커지게 되었고, 유인궤에게 사자를 보낼 정도로 여유를 갖게 되었으며, 답서를 가지고 온 유인궤의 사자를 관직이 낮다고 하여 홀대하여 돌려보내고 있다.(구당서 동이열전 백제조)
661년 6월에는 무열왕의 뒤를 이어 문무왕이 즉위하였으며, 당이 소정방 등으로 고구려를 치도록 하면서 신라로 하여금 고구려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수송토록 하였다. 이에 신라군은 문무왕의 친정하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하는 대군단을 편성하여 출정하게 되었다.(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조)
신라군이 고구려로 향하는 도중에 남천주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유인원도 군대를 거느리고 사비에서 뱃길로 출발하여 남천주에서 합세하게 되었다. 이때 전위대의 사자가 와서 옹산성(대전 계족산성 추정)에 백제부흥군이 있어 앞으로 바로 나가는 것이 불가함을 알리고, 또한 웅진에서도 사자가 와서 웅진부성의 외롭고 위태로움을 알리게 되니, 웅진의 당군을 구하기 위하여 9월 25일 옹산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 유인원이 사비에서 뱃길로 출발하여 남천주에서 합세하였다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부여에서 이천까지 뱃길로 어떻게 갔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고, 이후 유인원은 옹산성 전투에 함께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고, 이천까지 갔던 신라군이 옹산성(대전) 부흥군 때문에 회군하여 부흥군과 처절하게 싸웠다고 해석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옹산성전투는 백제부흥운동사 전 과정을 통하여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옹산성의 백제부흥군은 신라의 대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수천명의 희생 끝에 3일 만인 9월 27일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 신라의 문무왕은 직접 높은 곳에 올라 눈물겨운 말로 격려하였다고 하니, 그 치열함을 엿볼 수 있다. 이때 옹산성을 함락시킨 신라의 품일장군은 계속하여 우술성을 공격하여 1천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달솔 조복 등의 항복(661년 9월 27일)을 받아내고 웅진도를 개통시키고 있다.
한편, 옹산성 전투에 합세하였던 유인원군은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지 않고 웅진성으로 들어가 유인궤군과 합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당군이 합군하여 수성에 유리한 웅진성에 머물며 지키게 되었지만, 당 고종은 유인궤에게 칙서를 내려 평양의 군사를 회군시켰으므로 한 성을 홀로 고수하기가 어려우니 신라에 가서 군영에 머무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즉시 바다를 건너 돌아오라고 칙명하였다. 그러자 장수와 사졸들은 모두 서쪽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유인궤가 부하들을 설득시켜 그대로 머물고 있다.(구당서 열전 유인궤조)
662년 5월에 왜에 머물러 있던 왕자 풍이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백제왕통을 잇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일본서기 천지천황 원년조). 그러나 풍왕의 옹립 후 얼마되지 않아 백제부흥군 내부에는 662년 7월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그 병마를 합하여 그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는데도 풍왕은 다만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구당서열전 유인궤조 및 동이열전 백제조)고 하여 심각한 내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당군은 고구려 공격으로 여력이 없었으니 이를 기회로 하여 백제부흥군은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대전방면을 장악하여 신라로부터의 양도를 끊어 웅진부성을 고립시키고 있다. 이때 풍왕과 복신은 유인원 등이 진수하고 있는 웅진성이 외로운데다가 원군이 없음을 보고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겠느냐 마땅히 보내드리고 전송하겠다(자치통감당기 고종 용삭 2년 7월조)하고 있어 매우 자만심에 빠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도침 살해 등 내분을 이용하여 나당군은 곧 백제부흥군을 공격하였으니, 구당서에는 662년 7월에 유인원·유인궤 등이 웅진부성을 진수하던 군사들을 이끌고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무리들을 대파하여 지라성·윤성·사정·대산 등 4성책을 함락시키고,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구당서동이열전 백제조) 그 후 계속하여 유인궤는 신라군을 이끌고 진현성을 함락시키고 드디어 신라의 군량 운송로를 개통하게 된다.
이와 같이 백제부흥군이 웅진 동쪽 대전지방에 해당하는 지라성·윤성·사정·대산 등 4성책과 진현성에 군사들을 증파하여 지키고 있었던 것은 옹산성 전투의 패배 이후 군량 저지에 실패하였던 신라의 군량 운송로인 ‘웅진도’를 다시 차단하여 웅진부성의 당군을 고립시키려는 의도에서 였다.
이어서 신라는 8월에 백제부흥군이 내사지성(월평동산성 등 대전 유성일대에 있던 백제의 성 추정)에 모여 지키고 있어 근심걱정이 됨으로 흠순 등 19장군을 보내어 이를 토벌하여 깨뜨렸다(삼국사기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2년 8월조)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내사지성 한 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흠순 등 19장군이나 파견하게 된 것은 내사지성을 방어하는 백제부흥군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웅진부성에 대한 신라의 군량수송로가 다시 차단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662년 12월에 풍왕과 좌평 복신 등이 왜장 狹井連·朴市田來津과 의논하여 "이 주유(주류성)는 토지가 척박하여 농사와 양잠할 땅이 아니라 여기에 오래 있으면 백성이 기근이 들 것"이라 하여, 피성으로 옮기고 있다. 피성으로 옮기는 이유는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이라 생각되는데, 이때 朴市田來津이 피성은 적이 있는 곳에서 하루밤에 갈 수 있는 거리라 너무 가깝고, 주유는 산험에 가리워 있어서 모든 것이 방어하기에 적합하다고 하여 옮기지 말 것을 건의하였으나, 듣지 않고 피성으로 도읍하였다(일본서기 천지천황 원년 12월 병술조)고 하고 있다. 그러나 663년 2월에 신라의 흠순과 천존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제의 남방 여러 성인 거열성·거물성·사평성·덕안성 등을 쳐서 함락시키자 다시 주류성으로 옮기고 말았다.(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 2월조)
웅진강의 동쪽과 남쪽에서 연이은 패배로 웅진강 남서쪽으로 몰리게된 불리한 상황하에서 백제부흥군의 지도층에는 다시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복신이 이미 병권을 모두 장악하여 풍왕과 서로 시기하여 사이가 나빴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주도권 쟁탈 싸움이 벌어진 듯하다. 663년 6월에 풍왕이 복신을 살해하기에 이르니 백제부흥군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사기는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웅진부성의 당군에는 지원군인 우위위장군 손인사의 7천군이 663년 6~7월 합세하여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이때에 부여융이 백제 유민을 위무하고 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해 손인사의 증원군의 일원으로 백제에 도착하였다. 이는 당이 전통적인 이이제이 (以夷制夷政策)정책으로 백제부흥군을 양분시켜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니, 결국 임존성을 근거로 하여 활약하던 흑치상지가 당에 항복하여 부여융과 행동을 같이하게 되어 백제부흥군은 크게 약화되었다.
백제부흥군에 내분이 있었음을 간파한 나당군은 수륙양면으로 주류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신라는 문무왕이 친히 김유신 등 28장군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정벌하기 위한 군병이 출발하여 웅진주에서 유인원의 군대와 합세하고 있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모여 의논하여, 주류성 공격로상에 있는 수륙요충의 가림성을 피하여 주류성을 먼저 공격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손인사와 유인원 및 문무왕은 육군을 거느리고 진격하고, 유인궤·두상·부여융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한편, 백제부흥군에는 廬原君臣등 1만여의 왜국 원군이 오게 되었으며, 풍왕은 8월 13일에 이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백사로 나가게 되었다. 바로 이 날에 웅진에서 출발한 나당군이 주류성에 도착하고 있으며, 8월 17일에는 백제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을 포위하고 당의 전선 170척은 백강(백촌강)에 진을 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백강구에 도달한 왜의 선단은 ‘인궤가 백강구에서 왜군과 만나다.’(구당서 열전 유인궤조)의 기사와 같이 백강구 밖에 진을 설치하여 백강구를 사이로 당나라 수군과 대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왜의 선단이 백강구밖에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당 수군이 금강하구를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백강어구에 진을 설치하여 기다리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당군은7월17일 웅진성을 출발하여 8월 13일에 주류성어 도착한다. 한달여 시간이 소요 된 원인은 무엇일까? 나당군은 가림성을 피하여 나아갔지만 도중에 부흥군의 저항을 받았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 마지막 부분 당수군이 금강하구를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라는 해석은 옳지않다. 백강해전을 벌인 당수군은 애시당초 백강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백강구가 어디인지 찿아야 한다. 상식적으로 금강의 부여와 공주 사이 어디에도 그 많은 배들이 정박할 장소는 없다.
8월 27~28일 양일간에 있었던 백강구전투는 모두 왜 선단의 선공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백강구 안으로 진입하려는 왜 선단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28일에는 왜 선단이 기상을 살피지 않고 백강으로 진입하자 당 수군은 좌우로 나뉘어 화공으로 협공하고, 마침 강의 흐름은 썰물로 바뀌어 급하게 흐르니, 왜 선단은 뱃머리를 돌리지도 못하고 궤멸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일본서기 천지천황 2년 8월 임오삭조)
※바로 앞 단락에서 당수군이 금강하구를 빠져나오기 전에 왜수군이 먼저 백강구에 도착하여 있었다는 설명과는 대치대는 글이다. 당수군은 처음부터 백강구에 정박하고 있었다. 또한 백강해전 당시 기상을 살피지 못하여 왜수군이 참패하였다는 기상은 밀물썰물의 관계가 아니다. 당수군의 배가 더 크고 무거웠을 것으로 보고있다.
8월 28일 백강해전에서 왜의 원군이 4차례 전투에서 모두 패하고 화공에 의하여 400여척의 전선이 불태워지자 풍왕은 9월 1일에 고구려로 도망하고, 9월 8일에는 결국 주류성도 함락되었다.
신라군은 임존성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는 지수신군을 10월 22일부터 공격하였으나 실패한 후 11월 4일에 ‘설리정’으로 군사를 돌이켜 논공행상을 하면서 머물러 군영을 지키고 있던 당군에게도 의복을 지어 나누어주고 있다.(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 그런데 신라군이 군사를 돌이켜 온 ‘설리정’은 바로 현재의 서천군 관내이니, 이것은 바로 서천군 관내에 있는 백제부흥군의 주성인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이곳에 설리정을 설치하고 있는 것으로, 이와 같은 예는 문무왕 11년 대당전쟁시 사비성 일대를 확보한 신라가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다.
※ 신라군이 군사를 물리어 주둔한 설리정이 지금의 서천일까?
설리정의 위치 또한 주류성 찾기의 핵심 내용이다.
지수신은 임존성에서 끝까지 항거하여 10월 22일부터 11월 4일까지 공격하는 신라군을 잘 격퇴하였으나 결국은 항장 흑치상지에게 함락되고 지수신도 고구려로 도망하니(구당서열전 유인궤조) 백제유민의 4년간에 걸친 부흥운동은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664년 3월 사비산성에서 백제 유민들이 당군에 항거했다가 진압된 사건도 있다.
※ 664년 3월에 백제유민들이 당군에 항거하였다는 사비산성은 어디에 있는 산성인지 궁금하다.
백제부흥군의 4년간에 걸친 항쟁은 비록 무뮈로 끝났지만, 당군의 활동 범위를 사비 및 웅진으로 제한시킴으로써 당이 웅진도독부 등 5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고지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좌절케 하였으며, 남북으로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당의 의도를 수년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백강해전(백촌강 전투)
주류성의 함락과 함께 백강해전은 부흥군의 운명을 결정한 중요한 사건이다. 백촌강 전투, 기벌포 전투로 기록하고 있어 주류성과 마찬가지로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금강하구 동진강하구 아산만 등으로 압축되지만 주류성이 밝혀져야 풀리는 수수께기 장소이다.
일본서기의 백촌강전투 기록이다.
백촌강 전투는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졌다.
唐의 軍將339)이 戰船 170척을 거느리고 白村江에 늘어섰다. 戊申 日本의 수군340)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唐의 수군과 만나 싸웠는데, 日本이 불리하여 물러났다. 唐은 굳게 진을 치고 지켰다.
己酉 日本의 장수들이 百濟王과 더불어 날씨를 살피지 않고 서로 우리들이 선두를 다투어 싸운다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 하였다. 다시 日本의 어지러운 隊伍와 中軍의 군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唐의 군대를 쳤다. 唐의 선박들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日本의) 官軍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朴市田來津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 때 百濟王 豊璋이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高麗로 도망했다.
위 짧은 글에서 1300여년 전의 해전을 묘사함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의문시 되는 내용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不觀氣象)"의 내용이다. 이 내용을 연기군의 김재붕 선생은 날씨가 좋지 않은데 전투를 서둘렀다고 생각하고, 부안 동진강설의 전영래 교수는 이 내용을 밀물과 써물의 시간을 고려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왜 전선들은 썰물에 해수가 빠져나가자 갯벌에 빠졌고, 당군은 좌우에서 왜 전함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전선을 불태우자 왜 수군들이 물에 뛰어들어 빠져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또다른 주장은 전영래 교수의 밀물썰물의 시간을 고려치 않았다는 생각에는 공감하지만, 썰물에 왜 전선이 갯벌에 빠졌다는 내용에서는 다른 의견이다. 한두척의 배도 아니고 왜 전함 400척, 당군 전함 170척의 대격돌에서 어떻게 왜 수군만 갯벌에 빠질 수는 없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당나라의 전선은 왜 전선에 비하여 규모가 아주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물이 빠져서 강바닥에 배가 걸리는 상황에서는 적은 규모의 왜 전선 보다 대형인 당 수군이 더 불리해야 함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오는 백강구를 강의 폭이 좁고 깊이가 얕은 동진강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금강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이전 군산과 장항 사이 금강하구와 서해의 합류부분은 지금도 썰물 때면 상류에서 빠져나오는 물로 물소용돌이와 거품이 일어 배들의 항해가 쉽지 않다. 이러한 썰물 때의 세찬 물기둥 때문에 바다쪽에서 강구쪽으로 공격하던 소형의 왜전선은 조종이 어려워 뱃머리도 돌릴 수 없었고, 반면에 대형 전선인 당수군은 썰물의 영향을 최대한 적게 받는 강안의 좌우로 붙어 왜수군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 위 글처럼 바닷물이 만조 후 썰물이 되면 물의 흐름이 빠르게 바뀌게 되는지 의문이다. 더욱이 금강하구는 엄청 크고 넓은 곳으로 소용돌이가 생길 만큼 물살이 빠르다는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고 단지 썰물의 물살 조차 헤처나가지 못하는 배라면 일본에서 한반도 서해까지 올 수도 없다. 뱃머리도 돌리지 못한 것은 배들이 서로 뒤엉켜버렸기 때문이다.
400척의 배를 4열 전후10m 좌우5m 간격은 1000m×20m의 공간을 이루는 대형이다.
밀물썰물의 조수, 갯뻘 때문도 아니다. 기록처럼 거친 풍랑 같은 기상 때문이다. 이미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당수군은 날씨의 영향을 피한 이후에 만신창이 되버린 왜수군의 선단을 협공하여 불태우고 도망하는 왜병을 도살한 것이다.
백강해전은 당 수군이 정박해 있는 장소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위험에 처한 사비 웅진성의 당군을 구원하러 왔다면, 백제 전역을 부흥군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당군이 타고돌아갈 배를 부흥군 수중의 위험한 장소에 상륙 정박하였을까?
당군의 백제상륙을 1차 소정방, 2차 유인궤, 3차 손인사 상륙으로 구분하여 보면 1차 상륙과 2, 3차 상륙지점은 서로 다를 수도 있다. 1차 소정방의 상륙은 백제 사비성을 목표로 빠르게 사비성으로 진격하는 것이 주목적 이었고, 2~3차 상륙은 부흥군의 세력에 패하여 사비 웅진성에 고립된 당군을 구원하기 위한 상륙으로 안전한 신라지역으로 상륙, 신라군과 함께 부흥군을 공격하며 사비 웅진성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유인궤의 지원군을 저지하기 위해 부흥군은 웅진강 어귀에 목책을 만들어 싸웠지만 1만여명 전사자를 내고 패하여 왕성을 포위하던 부흥군은 임존성으로 후퇴한다.
※ 이 웅진강 어귀를 어디로 보야야 할까?
백강해전이 일어난 장소를 백강, 백촌강, 백강구, 웅진강구 기벌포 등으로 기록하는 만큼 어디인지 밝혀져야 한다. 부흥군이 자유롭게 목책을 쌓아 대비할 장소는 부흥군의 영역이다.
3차 손인사의 구원 파병은 나 당군의 고구려 정복 실패 후, 당고종은 유인궤에게 백제에 머물지 말고 신라로 피하던지 본국으로 철군하라 할 정도로 부흥군이 위협하던 시기로, 유인궤가 백제에 남아있겠다고 하자 손인사를 보내어 당군을 구원토록 한 것인데 부흥군의 품안으로 상륙 정박하였을지 의문이다.
부흥군이 피성으로 왕성을 옮긴것은 불어나는 유민들로 인하여 산악지역의 척박한 곳에 장기간 머무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일본의 지원군이 머무를 공간은 결코 주류성이 아니다. 일본 지원군이 머무르고자 한 곳은 부흥군이 왕성으로 삼았던 피성이 아닐까..?
부여풍은 왜의 지원군을 피성에 주둔하게 하여 서북부의 안정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부흥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가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당군의 배들이 정박되어 있고, 당군이 타고 돌아갈 배들을 쳐부수어 당군의 사기를 꺾고 나당군과 장기전으로 전쟁을 이끌려는 의도로 백강해전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백강, 백촌강(백강구)을 다른 지명으로 보면 가능성이 높다. 구당서, 삼국사기, 일본서기의 기록들은 후대에 백제 지리에 어두운 사가들에 의해 전해지는 3년간의 전투내용을 함축 기록한 것으로 많은 부분 오기하였을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
백제부흥의 역사에 종말을 내린 전투는 백강해전이다. 그런데 그 당시 수군의 존재가 의아스럽다. 당나라 수군도 왜의 수군도 모두 병사를 수송하여 왔던 배들일뿐 해전을 위한 수군은 아니다. 그러한 배들을 가지고 바다에서 어떻게 전투를 하였을지 의아스럽다. 더구나 왜수군의 배에는 백제부흥군을 위한 많은 병기와 식량, 병사를 태우고 온 배들이다. 당연히 어느 장소에서라도 상륙하여 병사와 군수품을 하선시키는게 급선무였을 텐데 그런 기록은 없고 단지 해전의 기록만 보인다.
주류성(周留城)
백제부흥운동은 백제 전역에서 전개되었지만 임존성과 주류성을 중심으로 나당군에 맞 싸운 백제 민초들의 항쟁이었다. 그런데 그 중심이 되었던 부흥군의 성지 주류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되지 않고있다.
이병도의 "한산 건지산성" 설
와세다大 쓰다 쇼키치(津田左右吉)교수의 "주류성=한산 백촌강=금강" 주장을 李丙燾(이병도)와 東京帝大 이케우치(池內宏) 교수의 지지를 받아 定說視(정설시)되었다.
李丙燾는 쓰다교수의 "백촌강=금강" 說을 그대로 따르되, 주류성은 "한산의 乾芝山城(건지산성)"이라고 보완, 쓰다說은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통설이 되어 국정 교과서에 실렸왔다.
李丙燾의 "주류성=한산의 건지산성" 說에 가루베(輕部慈恩) 박사는 건지산성이 百濟城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성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였고, 1998년 학계에서도 발굴조사를 통해 건지산성은 백제산성이 아니라 고려산성임을 확인하여 이병도의 "주류성=한산" 說은 부정되었다.
오다 쇼코(小田省吾)의 "부안 우금산성" 설
쓰다說 이후, 1933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관 오다 쇼코(小田省吾)씨는 쓰다 교수의 "주류성=한산, 백촌강=금강" 說이 문헌기록과 어긋난다면서 주류성은 부안군 변산반도에 있는 位金岩山城(위금암산성)이고, 백촌강은 東津江(동진강)이라는 說을 내놓았다.
京城帝大 이마니시(今西龍) 교수도 오다說에 동조하고, 원광대학 全榮來 교수는 광복 이후 지금까지 오다說을 계승해 오고 있다.
박성흥의 "홍성 장곡학산산성" 설
大東地志 기록 무시한 일본 학자들
古山子 金正浩가 지은 大東地志의 洪州牧條, 그 앞머리에서 "洪州牧本百濟周留城"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제1의 지도·지리학자 古山子 金正浩가 지은 大東地志 洪州牧(홍주목:지금의 홍성군) 條에서 "洪州牧本百濟周留城"(홍주목본백제주류성/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이라기록하였다. 城池項(성지항)에는 洪州邑城(홍주읍성)을 주류성 이라고 쓰여 있다.
日本書紀에서 주류성 기록을 살펴보면 平地의 석축성인 홍주읍성은 주류성으로 볼 수 없다. 이에 의문과 흥미를 갖게 되어 연구 끝에 주류성은 洪州邑城이 아니라 홍성군 長谷面 山城里에 있는 두루山城, 즉 洪城郡誌에 쓰여 있는 鶴城山城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또한 史書의 비교연구와 현지답사를 통해 백강은 牙山灣(아산만)이고, 孫仁師(손인사)가 唐兵 7000명을 거느리고 상륙한 지점은 無限川이 아산만으로 유입되는 지점에 위치한 아산군 仙掌港(선장항)으로 확신한 것이다.
박성흥씨 논문 주류성考는 1990년 발표한 것이다.
주류성은 일제시대 이병도에 의해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의 건지산성으로 오랫동안 인정되었다가 건지산성의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산성으로 판명되어 미궁의 역사로 남아있다.
전라북도 부안의 우금산성, 충청남도 홍성의 장곡산성, 연기의 운주산성등 여러곳에서 주류성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주변에 훌륭한 농지를 가지고 있는 똑같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우금산성이 주류성으로 굳혀가고 있지만 주류성 고서의 기록을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아직 공인되지 않고 있다.
부흥운동은 백제 서부인 흑치상지가 도망하여 임존산에서 봉기하여 시작되었고 고서에도 강 서쪽에서 부흥운동이 시작되었음을 기록하였다. 또한 부흥운동의 시작과 종말을 맞이한 장소도 강 서쪽에 있는 임존산성이다. 부흥군의 지지기반 까지 백제 서부의 백성들이다.
부흥운동이 확산되면서 부흥군은 중부지역으로 이동하고 장기전으로 전개되면서 다시 피성으로 부흥군은 이동하게 된다. 부흥군이 주둔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주류성의 특징들을 기록하였다.
일본서기에 주류성은 겨울 12월 丙戌 초하루 百濟王 豊璋, 그 신하 佐平 福信 등은 狹井連[이름은 빠져 있다] 朴市田來津과 논하기를, 이 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다. 이에 朴市田來津이 혼자 나아가 避城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어 서로 매우 가까워 위험하다, 州柔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하였다.
주류성은 웅진 사비성과 하룻밤 사이 공격이 가능하고 금강과 가까우며 농토와 멀리 떨어진 산악지형의 토질이 척박한 돌이 많은 곳이다.
우금산성 장곡산성 운주산성 기타 주류성으로 주장되는 어느곳도 위 내용을 설명하지 못하면 주류성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흑치상지가 백제구국을 봉기하자 10여일만에 3만의 지원군이 몰려왔다. 그중에는 상당부분 피난하여 온 백제유민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지원군과 몰려드는 유민들로 인하여 더이상 비좁은 임존성에서 머무르기 힘들게 되고 부흥군 지도부는 유민을 데리고 "중부"로 들어간 것이다.
부흥군이 들어간 "중부"가 주류성이다.
부흥군이 임존에서 중부로 이동하는 기록이다.
仍圖反逆 卽有僞僧道琛 僞杆率 鬼室福信 出自閭巷 僞其魁首 招集狂狡 保據任存 峰屯謂起 彌山滿谷 假名盜位 單軍 &579;城坡邑 漸入中部 -당유인원기공비
거듭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즉 가짜 승려 도침과 가짜 간솔 귀실 복신이 있어 스스로 민중에서 나와 거짓으로 그 괴수가 되어서는 미친 듯이 날뛰는 자들을 불러 모아 임존에 보를 쌓고 웅거하니 벌떼처럼 진을 치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마침내 산곡에 가득하였다. 이름을 빌리고 품위를 훔쳐 단마로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깨뜨리고 고을을 공파하여 점차 중부로 들어갔다.
임존성에서 가까운 산악지역, 험준한 산악지형의 드넓고 돌이 많아 척박한 땅, 임존성과 웅진 사비성 사이에 위치한 산악지역으로 이동한 것을 중부로 들어간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주류성은 수많은 유민들과 함께하고 지원군을 훈련시켜 외곽의 전장터로 보냈던 부흥군의 왕성이었다. 주류성은 상상하기 힘든 넓은 공간이다. 또한 백제유민들이 생계를 위한 농사지을 척박한 토질의 농지가 존재해야만 한다.
어떤 실체가 있는 특정산성은 주류성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해 주는 부분이다.
홍주목과 공주목 사이의 산악지역에서 부흥군은 새로운 왕성을 만들어 피난하여 오는 유민들을 보호하고 지원군을 훈련하여 산악지역 외곽의 백제산성으로 보내어 나당군과 대치하였다. 백제의 서쪽 홍성 예산은 부흥군의 핵심 지지기반 이었다.
김정호는 이러한 주류성의 특성으로 주류성을 홍주목으로 기록한 것이다.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와 무량사"가 있는 드넓은 장소가 주류성으로 보인다.
사진은 무량사 입구 오른쪽 돌들로 가득한 산자락의 모습이다. 반교리도 "돌 반 흙 반"으로 표현될 만큼 돌이 많은 곳이다.
유홍준교수의 주말쉼터가 있는 곳이다.
반교리 마을의 돌담 모습이다.
마을 텃밭에서 나온 돌들로 돌담을 만들었다고 한다.
周留城은 새로운 왕성으로 부흥군과 유민들이 산악지형의 넓은 공간/둘레(周)에 머무른(留) 지역(城)을 표현한 것이지 어떤 실체가 있는 산성이 아니다.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진압하기 위한 출병하는 상황과 백강 해전에서 왜군을 섬멸하여 부흥운동이 막을 내리는 과정을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내용이다.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合先擊之." <仁軌>曰: "兵法 "避實擊虛."<加林> 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 <百濟>巢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 <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 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 帥水軍及粮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 <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 ,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 >脫身而走, 不知所在, 或云奔<高句麗>,
어떤 자가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고 말하니, 인궤가 대답하였다."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 인원과 신라왕 김 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 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 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이때 왕 부여 풍은 탈출하여 도주하였으므로 거처를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당 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나당수륙군이 웅진에서 출병하여 주류성으로 진격하는 길목에 가림성이 존재하고, 백강에서 수군의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는 과정을 합세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나당군이 백강에서 합류하여 주류성으로 진격하였다, 하고 다시 백강 어귀에서 왜군을 만나 네번 싸워 모두 이기고 4백척을 불사르었다는 기록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 과정을 함축하여 기록하면서 기록자의 오기로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백강과 백강어귀는 서로 다른 장소 일 수도 있다. 백강/백촌강 해전의 당나라 수군은 다른 장소에 정박한 수군으로 보이며, 웅진에서 출발한 병력이 아니다. 웅진강 어디에도 그 많은 배를 정박시킬 장소는 없다.
우금산성이 주류성 이었다면 신라군이 굳이 우회하여 먼길을 돌아 웅진까지 가서 출병할 이유가 없고, 백강에서 수륙군이 합류하였다는 기록 또한 설명하기 어렵다.
※ 동진강을 백강으로 설명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주류성은 험준한 산악지형에 있었고, 금강과 가까우며, 하룻밤에도 사비성 공격이 가능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부흥군의 최후
신라의 날랜 기병들이 당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깨트리니 주류성이 담력을 상실하여 드디어 곧 항복하였다.
남방이 이미 평정되자 군대를 돌려 북벌을 하는데 임존 한 성이 고집하고 명민하지 못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양군이 힘을 합하여 함께 한 성을 쳤으나 굳게 지키고 저항하므로 공격하였으나 어찌 못하고 신라가 군사를 돌이켜 돌아가고자 한 즉 사대부가 이르기를 「칙령에 의한다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는 서로 회맹하라고 하였으니 임존 한 성이 비록 항복하지 않았으나 함께 서로 맹서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 하였다. 신라로서는 칙령대로 한다면 이미 평정한 후 에야 함께 서로 회맹하라고 했는데 임존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니 이미 평정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新羅驍騎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卽降下 南方己定 回軍北伐 任存一城 執迷下降 兩軍兵力 攻打一城 固守据捍 不能打得 新羅卽欲回還 杜大夫云 準勒卽己後 共相盟會 任存一城 雖未降下 卽可共相盟誓 新羅以僞準勅 卽平己後 共相盟會 任存未降 不可以爲 卽平)
주류성을 공격하는데 신라의 날쌘 기병이 선두에서 주류성의 목책을 뛰어넘어 공격하자 부흥군이 스스로 나와 항복하였다는 기록이다. 즉 주류성은 석축된 견고한 산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기록이다.
부흥군은 임존성에서 갑자기 주류성(중부)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주류성은 산악지형에 목책으로 급조한 산성이었다.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임존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나당군은 궁금증을 낳게한다. 나당군은 8월 17일 주류성에 도착 9월 7일 진압하고, 10월 21일 부터 11월 4일 까지 임존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설리정으로 군사를 물리어 논공행상을 한다. 주류성 함락 후 임존성 공격까지 한달보름의 시간을 소비한 이유를 찿아야 한다.
전영래 이도학 교수는 부안 우금산성에서 출발하여 걸린 시간으로 설명하며, 임존성과 가까운 홍성 장곡,학산성에서는 필요이상으로 지체되어 주류성으로 볼 수 없다는 논쟁이다.
주류성은 산악지역에 방대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당군은 산악지역으로 몰려든 백제유민들을 해산시키고, 바로 인접한 장곡 학산산성 등의 산악지역 외곽의 백제산성 까지 해산시키는데 한달여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보인다.
나당군은 임존성 공격에 실패하고 11월 4일 설리정으로 철수한다. 임존성 부흥군의 마지막 항전은 나당군에 항복한 흑치상지에게 함락당하고, 지순신은 처자를 죽이고 고구려로 도망치며 백제부흥운동은 막을 내린다.
피성(避城)
避城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古連旦涇이 흐르고 동남쪽으로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 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朴市田來津이 혼자 나아가 避城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어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라고 간하였지만, 끝내 백제왕은 避城에 도읍하였다.
피성의 지리적 특징을 기록한 것으로 "서북으로 고련단경이 흐르고 동남쪽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의 제방이 있다"는 기록을 김제성산은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김제 벽골제 제방과 원평천으로 설명하지만 방향도 다르다. 피성의 동남쪽 제방은 어느곳에서 공격하는 적군을 방어하기에 좋다고 한 것일까? 나당군의 진압군은 부여에서 처들어 오는데 말이다.
부흥군은 식량문제로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이전하였는데, 우금산성에서 아주 가까운 고부지역이 백제의 중방성 이었다면, 굳이 더 훌륭한 백제의 지방수도를 버리고 아무런 방어대책이 없는 김제 성산을 택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농지 때문이라 해도 두 지역사이 고부, 태인,, 김제의 옥토 또한 이전해도 그 땅이다. 방어에 유리한 요새지역을 버리고 평지로 이전할 이유도 없다.
김제 성산의 "피성"설은 고서에 기록된 피성의 어떠한 내용도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삼국사기" 지리지에 ‘古四州는 본래 古沙夫里로 5현이 있는데,…辟城縣(벽성현)은 본래 辟骨(벽골)이다.(삼국사기 권37 잡지 6 지리4 백제)…’라고 하여, "일본서기"에 수록된 避城(피성)은 ‘辟城’의 오기로 설명한다. 더구나 토질이 척박하다는 주류성의 여러 기록들 또한 우금산성이 설명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피성의 김제 설 또한 재고 되어야 한다.
김제 성산이 피성 이었는지 발굴조사(2018년)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어떠한 조사도 이루어 지지 않았고 추정할 뿐이라는 고백글도 있었다.
단, 부안 고부지역이 중방성 지역으로 여기에서도 상당한 부흥운동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피성은 당진(고덕,합덕)에서 찿아야 한다.
서북쪽 고련단경은 가야산 계곡의 물줄기 이고, 남동쪽 깊고 큰 제방은 아산만으로 흐르는 삽교천 무한천으로 설명되고 더욱이 가까운 적은 아산만 유역의 신라군으로 보인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 이라는 설명은 목지국의 생활터전 이었던 지금의 예당평야를 가리키는 것이다.
2년 봄 2월 乙酉 초하루 丙戌 百濟가 達率 金受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新羅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安德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避城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州柔에 돌아와 살았으니, 田來津이 헤아린 바와 같았다.
신라에게 백제 남쪽 4주를 빼앗기고 덕안성 등의 주요 지역을 점령당하자 부흥군은 피성이 적군과 너무 가까워져 위험하게 되자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갔다는 해석은 옳지않다. 학계는 이같은 해석으로 피성을 덕안성(논산)과 가까운 김제 성산으로 확증하고, 한자 避城(피성)은 ‘辟城’의 오기로 판단된다는 추측으로 설명한다. 피성은 처음부터 적군과 하룻밤의 거리에 있었다. 부흥군은 신라군의 총 공세에 전황이 불리하자 적군과 가까운 피성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방어에 유리한 주류성으로 돌아간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적과 하룻밤 사이의 가까운 거리" 기록은 김제 성산이 피성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