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둥이의 길, 경운기와 점삼이 성(중)](782) ㅡ 서울로 도망친 점삼이 성
ㅡ소병화 6년 후 작가ㅡ
모내기는 마치고 뜬모를 거의 다 심어낸 늦은 봄과 초여름 사이의 어느날 점삼이 성이 보이지 않았다. '점삼이 성'이 사라지자 잠시 당분간 기분이 좋았다. 늘상 나를 괴롭히?던 형이 사라졌으니 속이 잠시 시원했다. 점삼이 성의 다른 별명은 '찔벅이'였다. 가만히 있는 동생을 매번 '찔벅찔벅' 건드려서 기어코 울리는 버릇이 있었다. (* '찔벅찔벅'이란 말은 '집적대다'의 전라도 고장말이다. 상대를 약을 올리면서 건드는 형상을 말한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2학기에 조례초등학교에서 해룡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되었다. 제10대 해룡면장에 부임하는 52살의 아버지는 형들과 누나들은 그대로 순천에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고향집으로 되돌아가는 아버지는 당신 부부만 있기에는 짭짭하다고 하시면서 막둥이에게 오토바이로 학교를 태워다 주겠다고 유혹을 해서 고향집으로 막둥이만 데리고 들어가셨다. 오토바이를 매일 탈 수 있다는 강렬한 유혹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점삼이 성의 괴롭(찔벅찔벅)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짭짭이란 말은 어떤 대상이나 일이 못마땅할 때 씁쓰레하게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내다라는 뜻이다. '심심하다'의 전라도 고장말이다. 우리 고장에서는 무언가 입이 궁금할 때 입을 다실 때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활용하여 무료하거나 심심하다는 넓은 의미로 쓰여졌으리라 필자가 자의로 해석한다.)
점삼이 성의 찔벅거림은 매우 다양했다. 3년 터울이 있는데도 형은 꼭 막둥이를 데리고 놀기를 좋아했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나를 보면 불러서 기어코 함케하는 놀이에 꼭 끼워 넣었다. 조례초등학교 정문 앞에 바로 집이 붙어 있었으니 방과 후에는 그 큰 운동장은 거의 우리마을 형들의 차지였다. 형들과 함께 방과 후의 시간을 보낸 덕분에 자연스럽게 생긴 민첩함은 내가 그 형들 사이에서 버티기 위한 필살기였다. 문제는 형의 타박이었다. 내가 하기 싫다고 하는 축구를 자기 팀에 넣어서 같이하다가 조금의 실수라도 있으면 타박을 했다. 그게 다 너를 키워주기 위한 거라면서 늘 괴롭?혔다. 심지어 하고 싶지 않은 복싱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다.
점삼이 성이 6학년 때, 조례초등학교 후문 쪽에 이발소를 차린 김상모 형님이 동네 아이들에게 복싱을 가르쳤다. 그 1세대가 당시 순천공고를 다니던 둘째 형인 소병균과 중학교 3학년이던 상비마을의 김계수 형이었다. 바로 이어서 2세대가 점삼이 성과 그또래 형들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형들이 조례저수지 수문에서 내려와 똥섬까지 이르는 냇가에 얼음을 깨고 냉수마찰을 하는 훈련을 할 때부터 합류하였다.
워낙 운동신경이 뛰어난 점삼이 성은 발군의 실력으로 기대를 모았다.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나에게 글러브를 끼워주고는 마음껏 때려보라고 했다. 신이 나서 글러브를 끼고서 형의 얼굴을 가격해 보았지만 어깨만 빠지도록 아팠지 결국 한 대도 얼굴에 주먹을 맞혀보지 못한 나는 분에 못이겨 울음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나도 어느덧 제법 스탭 좀 밟고 스파링을 할 때 쯤, 5학년 2학기 시작하기 전 여름방학에 전학을 갔다.
1973년, 초등학교 3학년 첫눈이 오던 날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 추운 겨울인 1974년 1월1일에 큰형이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해에 겨울이 큰형이 군에서 제대를 하고 진도개를 데리고 돌아왔다. 당시 태권도 4단이던 큰형은 순천시 방범대장을 하면서 순천경찰서와 맛닿아 있는 상무관의 태권도 사범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큰형은 복싱이 깡패들이나 하는 운동이라면서 점삼이 성과 나를 태권도장으로 데리고 다녔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조례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씩 뛰고, 구령대 계단을 오르내리며 심지어 얼음을 깨고 들어가 냉수마찰을 하면서 줄넘기만 반복적으로 시키는 복싱보다는 태귄도를 배우는 것이 좋았다. 어린 마음에 나의 영웅인 큰형이 경찰관들을 한 구령으로 태권도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으쓱했다. 또한 조례초등학교 앞에서 동방여객 버스를 타고 순천경찰서 근처에서 내리는 그 과정이 너무 좋았을 뿐만 아니라 교실 바닥보다 훨씬 굵은 송판으로 잇대어진 상무관 바닥을 맨발로 걷는 촉감이 너무 좋았다. 한쪽에 깔려 있는 매트에서 구르며 유단자들을 가리치는 큰형의 모습을 보면서 지내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큰형이 광양삼거리에서 장대다리 사이에 있었던 사진기 가게 2층에 신혼 살림을 나가고서 부터는 점삼이 성의 찔벅거림의 덫에 다시 빠져 들었다. 매일 새벽에 몰래 일어나 복싱을 다니던 점삼이 성은 이제 큰 형이 집에 없게 되자 막둥이를 다시 끌고 다녔다. 태권도를 빨간띠를 딴 4학년 가을 쯤부터 큰 형과 아버지의 다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태귄도장을 내어 달라는 큰형과 우체국에 취직해서 살아라는 아버지와 충돌은 자주 집안의 검은구름을 몰고 왔다.
제법 스텝 좀 밟고 1년 위의 선배들과 스파링에서 밀리지 않을 정도의 복싱 수준에 올랐다. 점삼이 성을 한 번 때려보기 위해 더욱 열심히 했던 복싱은 전학을 가는 바람에 계속하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전 복싱 국가대표 허영모가 내가 떠난 후에 상모형님에게 발탁되어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수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그 이전 내가 복싱을 이발소 상모형님께 배우던 시절에는 1세대가 소병균, 김계수였고, 2세대가 소병란을 축으로 한 또래들이었다. 점삼이 성은 권투 장학생을 뽑는 금당고등학교 보다는 '타진감자'라는 별명을 지닌 삼산중학교 교감선생님의 추천으로 전남체육고등학교로 진로의 방향을 잡았다.
1975년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추석에 재일동포추석고향방문단에 포함되어 한국을 나오신 큰아버지의 귀환은 우리 집안의 큰 폭풍을 몰고오는 계기가 되었다. 조총련에 포함되어 경제생활을 하시던 큰아버지의 귀국으로 아버지는 다음해 여름에 면장직을 내어 놓았고, 큰형은 다니던 우체국을 그만 두고 형수님의 고향인 대전의 피혁공장으로 취직을 하여 떠났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큰형의 충돌은 깊어졌고, 큰형이 엄마의 설득에 밀려 대전으로 떠나면서 집안의 어두운 그림자는 짙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아버지의 병증의 시작이 나는 이사건이라고 판단한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1년 반동안의 면장일을 보다가 낙오된 그 느낌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광주에 있는 전남체육고등학교로 쫓아 올라가서 점삼이 성을 자퇴를 시키고 집으로 끌고 내려와 농사를 짓게 한 것은 아직도 이해를 하기 힘들다. 점삼이 성이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매우 애매한 입장이 되었다. 그 때까지 성이라는 용어를 써 보지 않은채, '벵란아!'로 불렀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 입 밖으로 성이라는 말이 떨어지지가 않아서 매우 불편했다.
그러나 봄이 되어 나는 학교를 가고 점삼이 성이 집에 남아 쎄가 나오게 농사일을 하는 것을 겪어보고는 이내 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버의 병증이 이미 그 때부터 심하게 있었던 것으로 이제야 알겠다. 이제 겨우 16살의 아이에게 마을에서 최초의 경운기를 사다 놓고 그 큰 농사일을 맡기는 무모한 일이 가당키나 한가? 코피가 터지면서 농사일을 하던 점삼이 성이 모내기를 다 마쳐놓고, 경운기를 깨끗하게 정비를 마쳐 놓고는 서울로 편지 한 장 남겨두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의 병증이 심해지자 가족들은 산산히 흩어졌고, 시골 집에는 오로지 나와 엄마만이 큰 집을 지키게 되었다.
끝없이 나를 찔벅거리는 점삼이 성이 사라진 이후 아버지의 병증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불행한 중학교 시절은 소년의 기억에서 몇가지 이외에는 사라지고 없다. 기억의 소환에 응하지 못하는 시절이 나의 수호신 점삼이 성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함께 사라지고 없으니 참 묘한 생각이 든다.
청소년기의 우여곡절속에 점삼이 성과의 추억도 빠져 있었다. 막둥이 수호신으로 내가 있는 어느 곳, 언제든지 지켜주던 행복한 추억마져 사라졌었다. [경운기] 글을 옮겨쓰기 하다가 나의 어린시절 수호신, '점삼이 성'을 소환하였다.
서울로 도망쳤던 점삼이 성이 피땀으로 모아둔 돈을 막둥이 첫등록금으로 내어놓고 대학을 다니게 해주었다.
2019.1.1. 소병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