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드 인 캐나다
영설
연은 꿈을 꾸지도 않았으나 발을 헛디디듯 구르고서 잠에서 깨어났다. 엄마의 숨소리가 일정 데시벨을 넘어 연의 무의식 속으로 침범하면 늘 그런 식으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다 이내 흐느끼며 꿈속에서 나오지 않는 말을 내뱉으려 하는지 입술이 떨려왔다. 연은 익숙하단 듯 두 손으로 엄마의 뺨을 쓸고서 얼굴을 돌려주었다. 엄마는 연의 손등 위로 본인의 손을 얹고서 숨을 골랐다. 나일까, 동생일까, 아빠일까. 이번엔 누가 엄마의 꿈에서 다쳤을까. 꿈에서조차 누군갈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엄마를 보며 연은 찬 바람을 맞은 양 심장이 찌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꿈일 뿐이니 괜찮다고 다독이고 나서야 의식하지 못했던 진동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연은 조심히 손을 뻗고서 바닥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손에 걸리는 익숙한 물체를 들고서 불빛이 새지 않도록 명치 부근에 바짝 대고서 전원 버튼을 눌렀다. 턱을 당겨 시간만 확인하고 바로 끄려 했으나, 흰 글씨로 쓰인 03:05 아래로 확인하지 않은 알림이 보였다. ‘연아, 한국은 늦은 시간일 텐데 미안. 괜찮은….’ 잘린 문장이었다. 연은 천천히 목을 돌려 옆에서 다시 곤히 잠이 든 엄마를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알림창을 클릭했다.
「연아, 한국은 늦은 시간일 텐데 연락을 보내서 미안. 괜찮은 곳을 찾은 것 같아서 말해주려고. 경사가 별로 높진 않은데, 네가 좋아할 만한 경치일 거야. 무엇보다 벌레가 없더라고. (완전 중요하지?) 여기는 생전에 언제든 미리 예약을 해둘 수가 있대. 같이 보낸 사진 한 번 보고 연락 줘.」
연은 사진을 누르고서 액정 너머 미지의 현장을 주시하였다. 옅은 초록이 만연한 언덕에 심어진 나무들이 정갈해 보였다. 언덕 아래로는 고딕 양식의 성당과 붉은 지붕으로 통일된 낮은 가옥들이 한 곳에 모인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연은 머물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의 장소였다. 욕심이 지나치다는 죄책감과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동경이 뒤섞여 한숨으로 뱉어졌다. 연은 당장에 답장을 하지 못한 채 엄마의 옆에 다시 몸을 뉘였다.
“그랬더니 오늘은 주아가 처음으로 애벌레를 딱 마주 보더니 한 번 쓰윽 만져보는 거야.”
“음, 주아가 그랬어?”
아침 식사를 하며 연과 엄마가 나눈 대화에 새벽의 일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엄마의 반 아이들 얘기를 나누었다. 요즘 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 과학 수업 과정 중 ‘배추흰나비 한살이 관찰’ 실험을 통해 달라진 아이들의 모습에 놀라워하는 듯 보였다. 애벌레를 무서워하던 주아가 그것이 배추흰나비가 되기 위해 겪어오는 단계들을 공부하고서 내본 용기. 엄마는 아이들이 가지는 용기의 순간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했고, 그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눈앞의 딸은 육체가 묻힐 나무를 찾아서 곧 캐나다로 탐방을 갈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연은 자기의 용기도 엄마가 인정해줄 날이 올지 생각하다 조용히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
나무 아래 뼛가루를 뿌림으로써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 연이 그런 장례 방식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삼촌의 장례식날이었다. 심혈관질환으로 예기치 못하게 돌아가신 삼촌은 유서 한 장 남길 수조차 없었다. 집안의 막내를 잃었다는 황망함에 잠긴 장례식장에서 고모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한테 수목장으로 안장되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어.”
“뭐, 수목장? 문서로 작성했어? 구술 뿐인거야?”
몸에 수분이 다 빠져나간 듯한 아빠가 야윈 얼굴로 물었다.
“아니, 말뿐이라도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밝혔어.”
“녹음해놓은 건 있고?”
“녹음해놓아도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게 지금 의미가 있어?”
갈등의 물꼬가 보이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큰아버지는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감은 채, 안돼, 딱 두 글자로 상황을 눌러버렸다.
“우리 집안 대대로 어른들도 그렇고 사촌의 팔촌까지 다 매장 안치로 잘 모셔 왔는데, 그리고 뼛가루 심은 나무가 시들어 죽어버리면 어떡할 건데?”
“요즘은 대부분 추모목으로 소나무나 잣나무처럼 잘 시들지 않는 나무들을 쓰기도 하고, 관리도 잘 해줘서···.”
“안된다고 했어. 그만 얘기해.”
제대로 논리가 오가지도 못한 토론은 한쪽의 일방적인 단절로 끝이 났다. 울분이 섞인 눈물을 떨어뜨리지도 못하고 삼키려는 고모를 향해, 그리고 장례식장의 모든 가족들이 들리도록 낮게 읊조린 큰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연의 기억에도 선명히 남았다.
“다 불교인 집안에서 꼭 저랑 지 누나만 교회를 나가더니 죽고도 속을 썩여.”
그 상황을 통해 어린 연은 지금까지 사람이 죽으면 다 무덤으로 가는 줄만 알았던 자신의 지식이 틀렸다는 점을 깨달았으며, 종교도 유전인 건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천주교인 친구의 세례명에 이끌려서 한때 일부러 친구를 만난다는 명목으로 성당 앞을 기웃거렸던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연은 고민했다. 그리고서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에 고모를 만났을 때, 고모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가장 보편적인 장례 방식과는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장례 방식에 마음이 꽂힐 수도 있다는 것. 가족을 따라 절에 가다가도 자기 마음은 교회로 향할 수도 있음을 이해하는 순간이 연에게도 온 것이다.
그러나 연은 때때로 본인이 그렇게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에게 이해 받을 수는 없다는 사실도 체감하게 되었다. 퀴어 영화에 대한 리뷰를 블로그에 올렸을 때,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을 썼을 때, 누군가는 꼭 연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왔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은 대부분 자신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연은 왜가 붙은 질문들에 왜를 한 번 더 붙임으로써 되묻고 싶었다.
이유도 없이 추궁해오는 모든 말을 그러건 말건 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연에게 있어 유일한 방지턱은 엄마였다. 연의 엄마는 걱정이 심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연이 어렸을 땐 친구가 많지 않으면 어떡할지 걱정했고, 가벼운 신체 활동에도 딸이 다칠까 안절부절 했으며, 집 밖을 돌아다니다 길을 잃진 않을까 속을 태웠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연은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하였으며, 하는 운동마다 재능을 보여 체육대회의 전 종목을 뛰는 유일한 아이였고, 가끔은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 투어를 즐겨야 직성이 풀리는 별남을 소유하고 있었다.
연의 엄마는 자신이 생각하는 안전과 안정의 기준에서 연이 조금이라도 벗어날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러다 우리 아이가 뉴스 속의 저런 사건들에 휘말리면 어쩌지. 엄마가 하는 모든 걱정의 근본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연은 생각했다. 엄마가 걱정하는 범위의 폭이 넓어질수록 연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엄마에게 드러내는 폭은 조금씩 계속 좁아졌다. 성인이 되고서는 더욱 철저하고 치밀하게 자신을 숨기고 엄마가 원하던 모습을 만들어낸 연은 그 모습 뒤에서 일탈을 행했다.
그맘때쯤 연은 SNS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가 생겼다. 와인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SNS에서 와인 추천 글을 찾다가 발견한 사람이었다. 팔로워가 몇 명 없는데도 매일 하나씩 와인 추천 글을 올리는 정성도 눈에 들어왔지만, 무엇보다 연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사람이 가끔씩 함께 찍어 올리는 풍경 사진이었다. 외국인들로 가득 찬 와인바의 사진, 나팔 부는 천사 동상이 있는 광장의 분수대 등등 외국 마을에서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글과 사진들에 어느새 연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곧이어 그 사람도 연의 일상글에 흔적을 남겨오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먼저 보낸 것은 연이었고, 알고 보니 나이가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일상을 응원해오던 팬으로써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가람이라고 말해주었다. 연은 가람의 계정 이름이기도 한 ‘소피아’로 그녀를 알아오다, 생각보다 정겨운 순우리말 이름에 친근함을 느꼈다. 연과 가람의 일상 사진이 다른 결을 보이듯 실제로 두 사람이 처한 상황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을 만큼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가람은 방목형 부모 아래서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크게 뭐가 되고 싶다거나 해보고 싶은 게 없었다고 했다. 사회적 통념이 말하는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만족감을 얻는다는 가람이, 연은 신기했다. 그러나 가람의 바람과 달리 그녀의 부모는 자식이 좀 더 독창적으로 살길 바라며 일찍이 가람에게 독립을 권유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쩌다 보니 캐나다에서 소믈리에 일을 하고 있어.」
「와, 부럽다.」
「나도 네가 부러워.」
이후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다 불쑥 가람이 제안을 해왔다.
「근데 우리 그거 금지어로 정하자, 부럽다는 거.」
「왜?」
「한 번 부럽다고 말하면 계속해서 서로 부러워만 할 것 같아.」
그것도 그렇다고 연은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광장 뒤편의 엔틱한 가로수를 따라 이어진 고즈넉한 골목으로 출근하는 가람의 삶에 대한 상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가람은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술을 음미했을 것이고, 심지어는 풀 향 와인까지도 마셔봤을 것이다. 연은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향이 입안을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연은 가람과 달리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집과 학교,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죽집이 일상의 전부였다. 매번 같은 시간에 104번 버스를 탐으로써 일과를 시작했다. 버스 기사님은 물론이고, 자주 오는 택시 기사님들의 얼굴까지 익숙했다. 동네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데에 20분 남짓 걸리는 동네를 연은 20년 넘게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늘 보던 친구들이 함께 다음 학교로 진학을 했고 사람도, 공간도 큰 변화 없이 언제나의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에 입학하게 됐으므로 졸업할 때까지도 가정의 틀 안에서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말만 들어도 숨 막히지?」
「나한텐 네 일상이 오히려 새로워 보여. 넌 어떻게 살아보고 싶어?」
「난 조금 더 역동적인 상황들과 번화로운 배경에서 살아보고 싶어.」
연은 엄마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유서를 써오기 시작했다. 연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적층되어 그녀의 배경과 세월을 넘을 것 같이 꽉 차버리고, 그걸 내뱉을 수 있는 문은 좁다래서 진심은 늘 발화되지 못한 채 끼어버렸다. 아무도 몰라야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밝혀지길 바라는 것들이 많았다. 따라서 일기보다는 유서에 가까웠다. 하지만 연은 자신이 이런 생각들을 한다고 해서 죽음을 희망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에게 가장 먼저 일러둬야 했다. 모든 문장은 유서 안에 내뱉음으로써 더 무사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장치가 되는 것뿐이야, 그치? 섬유유연제를 사고서 받았던 비누 향이 나는 하늘색 일기장은 그렇게 연의 유서장으로 제 역할을 시작했다. 그날의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난 후 연은 종이에 얼굴을 대고서 눈을 감고 깊이 향을 마시며 내일은 소망하는 삶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게 해달라고 조용히 기도했다. 엄마는 딸이 잘못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딸은 자신의 생명이 다한 뒤에야 생명을 가지게 될 이야기를 써오고 있다는 점이 죄책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연을 연답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너희 삼촌은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고모는 연이 성인이 된 후 다시 찾아가 삼촌에 대해 물었을 때 그렇게 설명했다. 삼촌은 죽을 때만큼은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했다. 뼛가루가 토양 깊숙한 곳에 흩뿌려져 진흙에 섞이고 뿌리에 달라붙어 양분이 될 때까지만 세상에 남다가 이후엔 더이상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고서 누군가의 꿈에 무섭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하고 싶다고.
“제사도 치르지 말아 달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제사를 안 지내는 건 오빠들이 용납을 못 할 거라고 했더니 어차피 일은 누나랑 형수님들이 다 할 텐데 자기는 그렇게 해서 차려진 밥 편하게 못 먹을 거라 그랬는데. 그럼 자기가 오빠들한테 그렇게 말해주고 가든가, 나쁜 것···.”
고모와 삼촌은 연이 드라마 작가가 꿈이라고 했을 때 유일하게 돈벌이에 대해 운운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대신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반짝이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이런 것도 소재가 될 수 있다면 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멋지게 써달라고 당부하곤 했다.
“우리 엄마 오늘 왜 이렇게 한껏 차려입으셨을까?”
“엄마 오늘 학부모참관수업 있는 날이라서 나름 좀 신경 썼는데 괜찮아? 이제 애들이 키운 애벌레도 거의 다 번데기로 돼서 슬슬 관찰 영상 찍은 거 편집도 해야 하고 바쁘네.”
“오, 이제 나비가 될 날도 얼마 안 남았네. 엄마, 근데 만약에 번데기가 탈피를 못 하면 어떻게 돼?”
“껍데기 안에서 죽지 않을까? 어우, 야, 부정 타겠다. 나무 잡고 퉤퉤퉤. 너도 얼른 해. 그거 죽으면 애들 얼마나 실망하겠어.”
“참나, 그게 뭐야. 이상해···. 나무 잡고 퉤퉤퉤.”
“그러니까 적절한 시기에 어떻게든 껍데기를 벗어주길 바라야지.”
연은 서서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한 번은 저지를 것 같은 일이었고 지금 하지 않는다면 언제 또 마음을 먹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정말 캐나다로 오겠다고? 혼자?」
「응, 어차피 한 번은 혼자서 여행해보고 싶었어. 네가 있으니까 좀 덜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 네가 알아봤던 그곳, 보러 가고 싶어 나.」
「어머니는? 허락해주셨어?」
「말도 안 꺼냈지. 혼자 캐나다에 다녀올 거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절대 갈 수 없게 될 거야. 아빠는 여권을 찢을 거고 엄마는 몇 날 며칠을 앓아누울 거거든. 여권이야 다시 발급 받으면 되지만 난 엄마가 애처롭게 느껴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럼 어쩔 계획이야?」
「고모한테 부탁했어. 고모 집에서 3일만 묵는 걸로 동조해달라 했더니 처음엔 반대하셨는데, 내가 여행 계획을 출국부터 입국까지 PPT로 20장을 만들어서 발표하니까 두손 두발 다 드셨어.」
「우와 미쳤다 미쳤어. 넌 진짜 뭘 해도 되겠다.」
「어쩔 수 없어. 내가 외박할 때 엄마가 연락을 그나마 덜 하는 게 고모 집일 때거든. 엄마랑 고모는 그렇게 친하지도 않아서 나만 연락 잘하면 고모한테 따로 연락 가는 일도 없을 테고. 고모 집에서 밥 먹는 사진, 누워있는 사진, 고모랑 TV 보는 사진까지 다 미리 찍어뒀어.」
「이렇게까지 치밀할 줄이야.」
빈틈없는 보호막을 뚫기 위해서는 더 빈틈없는 첩보 기술이 필요한 셈이었다. 연은 그러한 스릴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은 스케일이 장대해졌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더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계획을 완벽에 가깝게 수정해나갔다. 실수 없이 단번에 껍질을 벗어야할 시기가 되었다.
캐나다로 출국하기 전날은 미친 듯이 심장이 떨렸고, 떠나는 날은 오히려 평온했다. 연은 왕복 150만 원짜리 항공권을 들고서 비행기에 올랐다. 대학을 다니며 학점보다도 공모전에 열중했던지라 몇몇 공모전에서 우수상 내지는 장려상을 받으며 모은 상금으로 200만원 남짓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거기에 알바로 모은 돈 30만 원과 고모의 용돈 30만 원으로 꽤 배 곪지 않을 정도의 여행 자금이 충당될 수 있었다.
「엄마, 나 고모 집 도착했어요. 좀 잘게요.」
고모 집 소파에서 찍어둔 사진과 함께 거짓 보고를 전송한 후 연은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 기내를 얼핏 둘러봤을 때 한국인보다도 외국인이 더 많은 듯했다. 다시금 올라오는 긴장감을 누르려 미리 다운 받아온 영화 <Maudie>를 재생했다. 캐나다 화가 모드 루이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선 그녀의 실제 작품들이 등장했다. 작가의 그림들은 마치 크레파스로 그린 듯 선명하고도 사랑스러웠고 총천연색의 색들이 살아 움직일 듯 강렬했다. 연은 영화를 보며 그림 속의 그곳들이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 예상하는 데에 긴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15시간 후에 자신이 직접 보게 될 풍광이기도 했다.
몬트리얼 공항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한국의 공항과 별다를 것이 없었으므로 연이 그곳을 처음 밟는 발걸음은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다. 몬트리얼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간은 저녁이 되어 노을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었다. 연은 서둘러 기차를 타고 퀘벡으로 향해야 했다. 기차에서 다시금 캡쳐해 둔 지도를 확인한 후 내린 연의 눈앞으로, 가람과의 채팅을 통해 상상만 해오던 세인트로렌스 강의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연은 자신이 그곳에 서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자 숨을 천천히 고르며 강의 흐름을 따라 눈으로 그 모든 불빛과 색을 담았다. 정리되지 못한 문장들이 연의 안에서 맴돌았다. 숙소로 돌아가면 유서장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은 문장들이었다. 연은 떼어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강을 등지고서 광장으로 향했다. 저마다 다른 인연들과 모여 앉아 밤의 담화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분수대를 크게 돈 연은 말로만 수없이 들어온 광장 뒤편의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쁘띠 샹플랭 스트릿’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기자기한 상점과 음식점들이 색색의 외형을 띄며 팔레트에 나열된 물감들처럼 조화를 이루었다. 모드 루이스의 그림들이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연은 그중에서도 계단 아래 길목의 모퉁이에 자리잡은 청록색 지붕 와인바의 문을 열었다.
“Bienvenue! 어서오세요.”
연과 대척점의 인생을 살아온 비밀 친구, 가람이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대면한 날부터 가람이 일하는 와인바에서 와인을 꽤 많이 마셨고, 둘 다 그리 취하진 않았지만 가람은 연을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다음날 두 사람은 다시 만나 가람이 알아보았던 장소로 함께 이동했다. 사진 속에서 보았던 성당이 노트르담 성당이라는 점과 수목장이 공원의 일부였다는 점에 연은 또 한 번 놀랐다. 심은 지 한두 해 정도밖에 안된 듯한 어린 묘목과 계절을 수없이 겪었을 듯한 나무가 한 줄에 함께 서있었다. 연이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담는 동안 가람은 산미가 있는 커피를 두어 모금 마시고는 언덕에 누워 연을 응시했다.
“너는 수목장을 원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
“수목장···. 죽어서 무덤이나 건물 안에 남는 것보다 나무 아래 묻히는 게 더 좋아서. 나무로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잖아. 사람으로 산 세월보다 더 오래 나무로 남을 수 있다는 것도 좋고. 원래도 꽃보다는 나무를 더 좋아하긴 했어.”
“너랑 대화할수록 뭔가 네 일상글 속에 들어와있는 것 같아.”
가람에게 처음 말하는 생각이었지만 가람에겐 연이 원래 그런 사람처럼 느껴질거라는 생각에 왠지 묘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기에 다 털어놓을 수 있었는데, 오히려 다 털어놓은 탓에 가까운 관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 사람이었다. 연은 자신이 지금까지 써온 유서를 누군가에게 부탁해야한다면 그 사람은 가람이 될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 되어버렸다.
캐나다에서의 일은 하룻밤의 꿈처럼 남아버리고, 집에 돌아온 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마였다. 평소와 같은 태도의 엄마를 보며 연은 안심했다.
“엄마는 이번 주에 뭐했어?”
“엊그제는 애들이 드디어 번데기가 부화하여 하얗고 보드라운 날개를 펼치는 걸 봤어. 그런데 몇몇 애들은 자기 나비가 사라졌다는 거야. 분명 화요일에 알을 깨고 나오는 걸 봤는데, 수요일에 사라졌대. 그래서 같이 찾아달라길래 교실에서도 찾아보고 운동장에서도 찾아보고 그렇게 따라가 주다가 학교 뒤뜰 정원까지 가게 됐는데, 거기에 있었거든. 근데 문제는 갓 태어난 배추흰나비 수십 마리가 거기에 있었던 거야.”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은 들꽃 위에서 펄 가루 날리듯이 꽃 사이로 사라졌다가 날아올랐다 춤을 추는 나비 떼의 모습을 떠올렸다.
“애들은 각자 자기가 키운 나비를 알아보려고 자세히 보는데 당연히 그 많고 비슷비슷한 나비들 중에서 자기 나비는 찾을 수가 없지. 아이들이 이름도 붙여주고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나비였는데, 자연으로 가니까 그저 생태계의 일원일 뿐이었던 거야.”
연은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살짝 잠기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연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는데 엄마아빠도 너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열심히 키워왔어도 네가 진짜 가지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는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연이 너를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제일 몰랐어.”
연은 일이 잘못 되었음을 직감했다.
“딸아. 네가 고모 집에 갔던 게 아닌 거 알고 있어. 근데 네가 말해주기 전까지 물어보진 않을게.”
“엄마, 그게···.”
“만약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이름과 같은 얼굴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과연 그 사이에서 서로를 찾을 수 있을까. 엄마는 너를 꼭 찾고 싶어. 어렵겠지만, 연이 너를 이해해볼게.”
엄마에게 들켰다는 사실은 연에게 죄책감이나 공포로 다가오지 않았다.
“다음번엔 엄마랑도 같이 가자, 네가 가고 싶은 곳들.”
오히려 후련했다. 연은 언젠가 자신의 유서장이 쓸모를 잃을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안고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단편 쓴다 해놓고 제일 늦게 지각 제출해버린 저... 진짜 담에는 꼭 1등 노려볼게요... 죄송함다유😭 역대급 용두사미가 된 소설이지만 일본 여행 중에 틈틈이 열심히 마무리 했으니 양심 없이 용서를 바래봅니다.. 우리 사방토 작가님들 작년 한 해도 너무너무너무 수고했고 올해는 다들 더 잘 될거여요 호홍 다들 합평날까지 건강만 하기!!!!!!!!!
첫댓글 왜 마지막 단락 읽는데 눈물이 나죠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