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오늘 무엇을 깨닫습니까? Date 2014.4.13 Text Hsh 14,9
(14)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1. 지금 세계의 대부분 나라들의 경기가 매우 나쁩니다. 세상살이가 어렵자 ‘우선 내부터 살고보자’는 심리가 강해지고, 그런 원인으로 선거를 치르는 나라마다 보수 우경세력들이 정권을 잡는 비율이 많이 높습니다. 우리나라라고, 부산이라고 별 수 없지요. 우리 집이라고 평안할 리 없습니다. 오죽이나 사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면 자식을 때려서 죽이는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이런 불안한 세상 속에서 심령이 평안할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어디입니까? 이 찬송 가사에 답이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그 크신 팔에 안기세~”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 마귀 손 못 대고 환란 풍파 없도다~” 아멘! 우리 심령이 안식을 얻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어디라구요? 네~ 주님 품입니다.
오늘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에 주님의 품으로 찾아오신 여러분, 오늘과 금주 고난주간 동안에 더 깊이 주님 품속으로 파고드시고 그 품에서 참 안식을 누리는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2. 오늘 저는 설교를 하는 성경구절을 딱 한 절 선택했습니다. 사실은 읽어야 하는 구절이 너무 길어서 다 읽기엔 시간이 많이 들까봐 그래서 한 절만 읽었습니다. 이 14,9 한 절 말씀은 호세아 전체의 결론이기 때문에 호세아 1장부터의 이야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9절을 보면,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문구에서 말하는 ‘이런 일’은 결론적으로 1장과 2장에 나오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1장과 2장에는 무슨 일이 소개되어 있습니까? 선지자 호세아가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등 세 자녀를 낳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처음 결혼할 때부터 ‘음란한 여인’인줄 알고 결혼하였으며, 결혼생활 중에도 옛 음란한 성품을 버리지 못하는 바람난 주부였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나몰라라 하고 가출을 하여 창녀촌에 가 있는 것을 속전을 내고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해야 할 정도로 타락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가장 기막힌 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에 일부러 이런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1,2 말씀이지요? 같이 한 번 보실까요?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이것은 호세아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활동을 한참 하고 있던 어느 날에 하나님께 받은 명령이 아닙니다. 처음 선지자로 부름을 받던 그 날에 받은 명령입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한 번 아내가 못된 사기꾼의 덫에 걸려 미혹에 빠지는 일을 겪는 것도 얼마나 극복하기 어려운 일입니까? 또한 그런 여인을 데려다가 좋은 사람 만들라는 것도 아닙니다.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는 명령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음란한 자녀가 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인지 남의 자식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자녀를 말합니다. 바람둥이 마누라가 낳은 아이인데 그게 내 씨인지 남의 씨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 자녀라는 애기거든요.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런 여자와 결혼하여 그런 자녀를 낳거든 그를 사랑하여 새사람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바람이 나서 도망간 마누라를 찾고 보니 창녀촌에 있습니다.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댓가로 지불하고 아내를 찾아와서는 그 여자를 다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3,2) 월 하라고요? 네~ ‘사랑해라’ ‘사랑해라’ 2,2에서 하나님께서는 “...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거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즉 새 사람으로 만들라는 명령도 내려졌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보내는 하나의 사랑의 메시지로 사용하고자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입술로 말씀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의 입술로 삼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또한 호세아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정말 ‘그 하나님에 그 선지자’라 할 수 있겠지요?
같은 부산 지역에 계시던 번영로교회의 박문순 감독님 얘기입니다. 그분을 그 교회 성도들은 ‘성자’라고 부른답니다. 왜냐? 그 사모님이 젊은 시절부터 중병에 걸렸는데 은퇴하시기까지 사모님의 병수발을 들어가며 목회를 하시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랍니다. 은퇴하신 후에 사모님이 먼저 돌아가셨지요. 그 정도의 일 가지고도 ‘성자’라고 할 정도라면 호세아의 일생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는지, 얼마나 거룩한 길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호세아의 말 몇 마디가 아닌 그의 인생 전부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너, 범죄한 인생들아 네가 비록 범죄하였을지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남의 자식인지 내 자식인지 판단이 서지 않지만 그래도 널 사랑하여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리라.”
3.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 이야기를 상기하십시오. 왜 예수님께서는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남겨둔 시점에서, 시비 거리로 삼을 수 있는 작은 실수 하나라도 찾아내려는 숱하게 많은 감시의 눈길이 있음을 알고도 주님께서는 전통적으로 왕이나 하는 행차를 요란하고 벅적지근하게 치르셨을까요? 도저히 그 꼴을 못 보겠어서 제발 이제 그런 행동 좀 하지 말라는 충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봐라는 듯이 왕에게나 하는 군중들의 환호, 자기들 옷을 벗어 길에 깔아드리는 행동을 제지하지 않으셨습니다. 되레 더 뜨겁게 영접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행하신 일련의 행동들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런 파격적인 행동에 대하여 100% 만족할만한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종려주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최상급 형용사를 동원한 메시지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는 모든 것, 말씀하시고 싶은 모든 것, 표현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신 것이 이 종려주일의 퍼포먼스인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 표적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에게, 이 이상 더 어떤 방법으로, 이 이상 더 얼마나 많이, 이 이상 더 어느 정도나 깊이 있게 나를 너희에게 설명해 달라는 것이냐며 반문하시는 것이 바로 이 종려주일 퍼포먼스입니다.
첫째, 당신은 왕이시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하시고 계십니다. 나귀 새끼(슥9,9), 종려나무 가지(레23,40:유월절 명절 상징;왕상7,36:성전 장식;시92,12:번성의 상징;개선장군 환영장 사용), 옷을 벗어 길에 까는 것, 군중들의 ‘호산나! 호산나!’(우리를 구하소서!)라는 환호성 등은 모두 왕에게만 행하는 행동들입니다. 특히 일반적인 왕이 아닌 전설적인 왕, 고래로부터 기대하고 있던 바로 그 왕이 나라고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유일하시고 영원한 구원자로 영접해야 합니다.(사43,11)
둘째, 주님의 사역은 사람을 통로로 삼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아무도 타지 않았던 나귀 새끼를 제공한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거절하거나 비아냥거리며 테러를 가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영접하여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아이들의 환호성을 꼭 필요한 것이어서 만일 이들이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돌들을 동원해서라도 환호성을 지르게 하겠다고 하신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역에 어떤 모양으로든 동참하라고 하시는 당부를 외면하지 말고 기쁘게 ‘주여 나를 쓰소서!’라고 내놓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회개하여 마음의 빗장을 풀고,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모하며, 믿는 마음으로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면 진리에 이르지만, 그 반대가 되면 밝은 한낮에도 햇벛 한 줄기조차 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퍼포먼스로 인하여 예수를 죽이려든 대제사장, 바리새인등의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그 결심을 굳혔다고 했습니다.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던 자기의 견해와 입장을 고집하던 가룟 유다는 결국 그 두터운 어둠의 장막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실망을 하여 에수님을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4. 오늘 읽은 성경 본문 후반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호세아의 일생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깨달아지는 사람들에게는 행할 길이요 삶의 이정표이며 인생의 나침반이 되지만, 거부하는 자세로 마음에 빗장을 걸어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로만 여길 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종려주일 퍼포먼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종려주일에 무엇을 깨닫습니까? 마음의 눈을 감고, 주님을 외면하며, 자신의 방식과 맞지 않는다며 주님의 방식을 불신하고 또 실망하는 자리로 이끄는 것들만 찾아내고 쫓아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그 도(道의) 길로 간다면’ 다급한 처지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비상구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단순한 비상구가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 허접한 쓰레기 같던 인생을 명품 인생으로 업그레이드하여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0살도 되기 전에 부모님을 여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은 그를 몹시 미워하였습니다.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었는데 결혼한자 13년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습니다. 재혼하여 두 부인에게서 2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10명은 어려서 죽었습니다. 남은 자녀 속에는 20살이 넘어서 잃은 아들도 있고 정신박약아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노년이 되어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고 뇌출혈로 쓰려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인생도 다 있나 싶은 생각도 충분히 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방법을 고수했습니다. 신앙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믿음과 정신이 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습니다. 그가 만난 숱한 역경들은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받은 고난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무거운 불후의 명작이 되어 탄생되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하의 이야기입니다.
<기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신 주님의 종려주일 퍼포먼스에서 나는 무엇을 깨닫고 있습니까? 살을 찢는 고난의 삶 속에서도 그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일관되게 지켜 나가 고난을 불후의 명작을 만드는 밑거름으로 삼는 지혜를 깨닫게 하옵소서. 사르밧에 풍족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겠지만 하필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남은 양식을 요구하시는 주님께 순종했던 깨달음이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