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분황사탑을 살펴보면, 이 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 석탑으로 분황사 경내에 있으며, 국보 제 30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한국 전탑의 선구적인 작품이고 한다. 석탑 기단의 한 변은 약13m, 높이는 1.06m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 하였는데,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 물개를, 내륙을 향한 곳에는 사자가 지키고 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탑신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약간 좁다. 벽돌같은 돌은 회흑색의 안산암으로 1층 탑신의 사방에 감실을 두고 문을 내었다. 감실 입구에 각기 둘씩의 금강역사를 세웠는데 그 입체감이 뚜렸하다. 이제까지 분황사 석탑의 귀퉁(모퉁이)에는 4마리의 4사자 또는 물개 2마리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6마리의 석사자가 있었던 것으로 현재 2마리는 국립경주박물관 입구에서 좌측 정원에 2구가 있는데 규모가 적은 편이며 형태도 지금의 4마리 사자와는 차이를 뚜렸이 보이고 있다. 분황사가 선덕여왕때인 634년 창건시 이 석탑도 세운 것으로 추정되나 4마리든 6마리든 암튼 사자는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주변에 있던 다른 왕릉(헌덕왕릉)으로부터 옮겨온 것으로 보고 있다. 탑의 높이도 기존에는 3층, 5층,7층, 9층이니 여러 가지 설도 제기 되었으나, 90년대 삼성문화재단에서 탑재들을 종합하여 분석 한 결과 원래는 9층임이 확인되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석탑과 비교해 볼 때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은 전탑과 동일한 양식으로 상하에 모두 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옥개받침(층급받침)은 1. 2층은 6단, 3층은 5단인데, 낙수면 역시 1. 2층이 각각 10단이고, 3층은 방추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어리석은 중(愚僧)이 이를 개축하려다 또 허물어뜨렸다고 한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때에 복원된 것이다. 이때 수리당시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고, 각종 옥류와 패류, 금은제 바늘과 침통, 가위 등과 함께 고려시대에 사용하였던 〈숭녕통보〉와〈상평오수〉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함과 사리장엄구에서 나온 각종 공양품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제 금강역사상에 대해 살펴보면 분황사 금강역사상은 현존하는 금강역사상 가운데 조성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이다. 분황사 성립과 같은 시기에 이 금강역사상이 조성되었다고 본다면 이 상들은 7세기 중엽 신라의 통일 이전에 완성됐다. 8구의 상이 모두 무기를 들지 않고 권법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6구의 상이 X자형의 천의를 입고있는 古代의 금강역사이다. 중국의 경우 X자형의 천의를 입은 금강역사의 모습이 용문의 북위시대 굴-빈양중동, 연화동 등과 공현 석굴에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X자형의 천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북위시대 양식이 잔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의 밑으로 드러나는 근육의 표현과 볼륨있는 양감의 표현, 어린이 같은 신체의 비례는 北齊.周의 양식을 보여준다. 북제시대 불비상에 조성된 금강역사의 동작과 양감도 분황사 금강역사상에서는 보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