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술잔
웅묘아, 그는 진심으로 심랑을 좋아했다. 때문에 심랑의 아픈 마음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이때 웅사 교오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 심 상공께서 이곳에 온 것은 개방의 초청장을 받았기 때문이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이곳에 들렸는데 어제 저녁에야 비로소 이 일을 알게
되었소. 무림계에 이처럼 큰일이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어떻게 그냥
지날 수 있겠소? 그래서 비록 초청은 받지 않았지만 구경삼아 한 번 와 본
것이오?"
교오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구경삼아 와보다니오? 개방의 이번 일에 심 상공과 같은 인물이 왔다는
것은 개방인들의 체면을 크게 세워주는 일이 아니겠소? 동생, 그렇지
않소?"
화사고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쩌면 심 상공께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을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교오
오빠일 거예요. 인의장에서 헤어진 후에 오빠는 언제나 심 상공 생각을
가슴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어요."
심랑은 교오와 화사고를 번갈아 쳐다보앗다. 그들은 서로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심랑은 술잔을 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진심으로 두 분에게 축하를 드려야겠군요?"
화사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교오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소. 동생, 우리 심 상공과 건배합시다."
심랑은 건배하고 나서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나는 비로소 교오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이며, 가장
총명한 남자임을 알았소?"
"내가 어디가 총명하다는 거요?"
화사고가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이 당신이 총명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다른 얼굴이 예쁜 여자를
찾지 않고 저를, 저를 찾았다는 얘기일 거예요. 사실, 당신이 나처럼
못생긴 여자를 찾았다는 것은 당신이 상당히 멍청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데?"
교오가 화사고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교오의 일생 중 가장 현명한 일을 한 것은 바로 당신을 찾아냈다는
사실이오. 현명한 남자만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오.
당신은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수십 배나 더 아름다운 여자요. 심 상공은
자타가 공인하는 총명한 사람이오. 내가 보건데, 심 상공이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당신을 칭찬하는 말일 것이오?"
화사고도 교오를 따스한 눈길로 쳐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들처럼, 총명한 사람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
되겠군요?"
웅묘아는 웅사 교오와 같은 무림계의 호걸이 어떻게 화사고와 같이 못생긴
여자를 좋아하게 됐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비로소
교오가 화사고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교오는
이미 화사고가 다른 여인들과는 다른 훌륭한 점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일거일동, 일언일소는 모두 부드럽고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행동에는 일점의 가식도 없었으며, 조금의 교태도 없었다. 그녀는
비록 남자들처럼 호방하였으나 여자의 세심한 마음과 지혜로움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어떤 사람도 그녀 앞에서는 아주 편안한 마음과 솔직한
심정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그러한 여자였던 것이다.
마치 깨끗한 물이 세속의 때에 끼어든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그러한 여자였다.
그러나 주칠칠은 파도와 같이 수시로 변하는 여자였다. 한 남자가 그녀의
잔잔한 파도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파도를 일으켜 그
남자를 갈갈이, 산산히 부숴버리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여자였다.
이때, 화사고가 눈길을 심랑에게 돌리며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 심 상공께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심
상공과 같이 계시던 그 아름다운 아가씨가 다시 심 상공께 걱정거리를
만들어 드린 모양이군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화사고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상공과 같은 남자는 비록 마음에 걱정거리가 있어도 말씀을 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심 상공을 이해하는 친구분들이 이렇게
많은데, 만약 걱정거리가 있으시면 속시원히 털어놓고 말씀 하세요?"
화사고는 심랑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먼저 심랑의
마음에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랑은 화사고 이 여자는
평범하지 않은 여자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는 다시 술잔을 들고
교오와 화사고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시 두 분께 제가 술 한 잔 올려도 될까요?"
이때, 갑자기 웃음소리와 더불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에 계신 공자께서 주량이 대단하신가 보구려. 노부가 공자께 술 몇
잔을 권해도 되겠소?"
그 말소리는 웅장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았으며,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웃음소리 속에서도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심랑은 고개를 돌렸다. 그 말소리는 바로 혼자서 일곱, 여덟 개의 술병을
놓고 일곱,여덟 개의 술잔에 술을 따라서 술맛을 음미하는 노인에게서
들려왔다.
사실 심랑은 이층으로 올라올 때 그 노인을 보았다.
그리고는 이 사람의 표정과 행동에서 기괴한 면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으나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신비스러움과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심랑은 이러한
사람일수록 그 내력이 매우 신비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은근히 이 노인이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마치
심랑의 속을 엿본듯 자신을 부르고 있지 않은가! 심랑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저를 이렇게 많이 생각해주시다니, 제가 어찌 말씀대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노인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건너 오시는 게 어떻겠소?"
심랑이 말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웅묘아가 얼굴에 불평의 기색을 드러내며 낮은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저 늙은이 대단한 기세로군. 심 형, 내가 심 형과 같이 가도록 하겠소."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노인이 앉아있는 탁자쪽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 노인의 눈은 심랑만 바라볼 뿐, 웅묘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노인이 천천히 말했다.
"일어서서 맞아들이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그의 웃음이 약간 기괴하게 변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이어서 말했다.
"왜냐하면 이 노부에게는 일어서서 공자를 맞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오. 이점 널리 양해 바라오."
웅묘아가 얼굴에 짜증스런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이유란 말이오?"
그러나 노인은 웅묘아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갑자기 장삼 자락을
들어올렸다. 장삼을 들어올리자 훌렁거리는 바짓 가랑이가 동시에 좌우로
너풀거렸다. 그는 두 다리가 없었던 것이다.
노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웅묘아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무슨 이유인지 노부가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보셨으리라고
생각하오?"
웅묘아는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우물쭈물 말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노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 만족하셨소?"
"제가 경솔하게 군 점 제발......."
노인이 차갑게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이미 만족하셨으면 옆으로 좀 물러서 주시겠소? 노부가 귀하를 청한
기억은 없는데. 또 귀하께서 내 맞은 편에 같이 앉는다고 해도 상당히
무료하리라고 생각하오."
웅묘아는 곤혹스러운 듯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화도 내지 못하고 쫓겨날 때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군요. 이런 일은 내가 평생 한 번도 당해보지 못했던 일이오. 제가
앉지 못한다면 한쪽에 가만히 서 있는 건 괜찮겠지요?"
"귀하가 가만히 서 있겠다면 나 또한 어쩔 수가 있겠소?"
그는 더이상 웅묘아를 쳐다보지 않고 눈길을 심랑에게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면서 한 손을 들어
심랑에게 앉도록 권했다.
심랑이 포권을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웅묘아는 같이 앉을 수도 그렇다고 그 패거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서 엉거주춤 심랑의 옆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점원을 불러서 일곱 개의 술잔을 가져오게 하더니 심랑의 앞에
나란히 놓도록 하였다. 노인은 매우 즐거운 듯 얼굴에는 시종 온화한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상공께서 그렇게 술을 좋아하시니 술에 대해서 잘 아시겠구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를 구할 수도 없는데, 술에 취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소이까?"
박인이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하하! 훌륭하오. 정말 훌륭한 말이오."
말을 마친 노인은 술병 하나를 들어 심랑의 제일 왼쪽에 놓여있는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맑은 청색의 창백한 색을 띤 술은 마치 노인의
얼굴색과 흡사했다.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귀하가 술을 아는 이상, 먼저 이 술을 한 잔 권하고 싶소."
심랑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술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무슨 술인지 맛으로 알아내실 수 있겠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술은 부드러우면서 굳은 맛이 있고, 순한 듯하지만 매우 독한 기운을
띠고 있으니 마치 이른 봄의 북풍과 엄동설한의 차가운 바람이 같이 섞여
있는 듯하군요. 술 중에서 가장 독한 대국주와 죽엽청(竹葉靑)을 혼합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까?"
노인이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맞히셨소. 과연 상공께서는 술에 대해 잘 알고 계시군요. 죽엽청과
대취주의 성격은 비록 완전히 다르지만, 이 둘을 혼합해서 마시면 또 다른
특별한 맛이 있는 법이오."
"그러나 어르신의 그 뛰어난 손재주로 잘 배합하지 않았다면, 술 맛이
이렇게 좋을 수는 없겠지요?"
노인이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상공께 솔직히 말씀드리면 노부는 일생 동안 술에 많은 공을 들였소.
그런데 오늘 비로소 상공과 같은 사람을 만나서 내 그 동안의 노력이
약간의 보답을 받는 듯하구려."
웅묘아가 그의 이러한 말을 듣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십니까? 두 가지의 술을 한 잔에 따라 붓는
것은 세 살짜리 어린애들도 전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자랑을 늘어 놓으시는거죠?"
그러나 노인은 그 말을 못 들은 듯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조차 띠며 말했다.
"술을 모르는 얼간이들은 다만 두 종류의 술을 섞어 놓는 것은 상당히
쉽다고 생각하지요. 그런 얼간이들은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술들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떠한 술과 어떠한 술을 혼합해야만 비로소
신비한 맛을 내는지에 대해서는 꿈에도 알지 못하지요?"
웅묘아는 얼간이 소리를 듣자 가슴 가득 분통이 차올랐으나, 그 자리에서
발작을 할 수는 없었다. 심랑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문장은 하늘이 만들고, 우연한 기회에 글재주
많은 사람이 그 문장을 얻게 된다더니만, 어르신의 술의 조제 기법은
틀림없이 이러한 이치겠구려?"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그렇소. 어설프게 글자만 늘어 놓는다고 어떻게 아름다운 문장이
나올 수 있겠소? 고수와 평범한 사람이 지은 글은 그 차이가 한두 마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요. 문장이 이러하듯이 술 역시 마찬가지요.
글자는 반드시 고수들이 늘어 놓아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문장이 되듯이,
술 역시 마찬가지로 고수들이 조제해야만 비로소 신비한 맛을 낼수가 있게
되는거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제가 다시 한 번 어르신께서 조제하신 술을 맛 볼 수
있습니까?"
말이 끝나자 마자 노인은 얼른 두번째 술병을 들어 심랑의 왼쪽에서
두번째 놓여있는 잔에 반 잔쯤 따랐다. 그 술은 호박색을 띠고 있었으며,
그 속에 또 은은한 파란색이 동시에 비춰 보였다. 그 색은 바로 노인의
눈빛색과 비슷하였다. 심랑이 술잔을 들어 마신 다음 또 찬탄하면서
말했다.
"좋은 술이군요. 이 술은 혹시 강남여아홍을 주로 하고, 모태(茅台)와
죽엽청(竹葉靑)을 보(輔)로 한 다음 다시 몇 방울의 하약주(河藥酒)를
떨어뜨려서 조제한 게 아닌지요?"
노인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맞히셨소. 노부가 이 술을 조제하는 데에는 아주 많은 심혈을
기울였소이다. 그래 서 이 술에게 당 노부인(唐虜婦人)의
살수간(撒手間)이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심랑이 얼른 그 말을 받아서 웃으면서 말했다.
"술맛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름 또한 적절하게 붙이신 것 같군요. 이
술은 마실 때 시원하여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데, 마시고 난 다음에는
마치 불구덩이가 위 속으로 들어간 듯하니 그 맛은 확실히 당씨 일가의
암기에 맞았을 때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인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술을 조제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아름다운 색을 내야 한다는
점이오. 아름다운 색을 내기 위해서는 술과 술의 비율이 약간만 달라도
실패하게 되지요. 만약 이 술에 여아홍을 한 방울만 더 떨어뜨렸다면, 이
술은 당장 당 노부인의 발싸개라고 이름을 바꿔야 했을 거요. 그렇게 되면
마시지 못하게 되겠지요."
두 사람은 서로 의기투합한 듯 마주보고 크게 웃어제꼈다. 그 노인은
심랑의 세번째 잔에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웅묘아는 더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어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슬며시 교오 등이 앉아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교오가 웃으며 말했다.
"형씨께서 결국 돌아오시고 말았군요?"
웅묘아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원래 기분이 좋기 위해서 마시는 것 아닙니까?
저렇게 복잡하고 신경을 쓰면서 술을 마시게 된다면 차라리 그런 술은 안
마시느니만 같지 못합니다."
교오가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사내 대장부는 한 대접, 한 대접 벌컥벌컥 술을 마셔야
시원한 법이오."
"교 형께서 저를 그렇게 알아주실 줄은 생각도 못했군요. 자, 우리 한 잔
건배 합시다."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 둘은 입으로는 술을
마시면서 눈은 여전히 슬쩍슬쩍 심랑과 그 노인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부러워하는 기색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화사고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당신들 두 사람은 저 늙은이의 병 속에 든 술을 마시고 싶은 모양이죠?"
교오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누가 그 술을 마시고 싶다고 그랬소?"
화사고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으니까 마시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는거겠죠?"
교오가 말했다.
"바로 맞혔소. 마실 수 없는 술은 영원히 맛이 없는 법이오?"
웅묘아가 웃음을 띠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심 형은 확실히 복이 많은 사람이오. 그 사람은 여복이 많을 뿐만 아니라
먹을 복도 남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오."
화사고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심 상공이 그렇게 쉽게 저 술을 받아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셔서는 오산이에요?"
웅묘아가 눈을 껌벅거리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오?"
"심 상공이 저 몇 잔의 술을 마시는 데는 아주 많은 기력이 소모되고
있어요."
웅묘아는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말했다.
"아니, 저 노인이 심 형의 맞은 편에 앉아서 술잔에 술을 따라 놓으면, 심
형은 손을 뻗어서 술잔을 집어들고 목을 뒤로 젖히고 입 속으로 부어 넣을
뿐인데 무슨 기력이 소모된다는 거요?"
"다른 사람이 심 상공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기 때문에 기력이 소모되고
있다는 거예요?"
웅묘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갈수록 모르겠군요?"
교오가 말했다.
"웅 형께서만 모르실 뿐 아니라 나도 모르겠소?"
화사고가 웃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저들 두 사람을 자세히 살펴 보세요?"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웅묘아와 교오는 이미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순간 심랑은 다섯번째 잔을 비우고 여섯번째 잔을 집어 들고
있었다. 화사고가 말했다.
"지금 심 상공께서 술잔을 들었죠?"
웅묘아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소."
화사고가 말했다.
"지금은요?"
"지금은 저 늙은이가 술병을 들어 올렸소."
"음, 계속 자세히 보세요."
"지금, 저 늙은이가 술병을 천천히 술잔 쪽으로 옮기고 있소."
"지금은 저 늙은이의 술병의 입구가 심랑이 들고 있는 술잔에 닿았소?"
교오가 말했다.
"지금은 천천히 술을 따르고 있소."
화사고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아직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교오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무슨, 무슨 이상한 점이 있다는 말이오?"
웅묘아가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그렇군. 저 늙은이의 동작이 아주 천천히 이루어질 뿐 아니라, 술을
따르는 건 더 천천히 따르고 있소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동안
저 늙은이는 심 형이 들고 있는 잔에 아직 술을 반도 따르지 못했소."
화사고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왜 술을 저렇게 천천히 따르고 있는지 당신은
알아내셨어요?"
한참을 쳐다보고 있던 웅묘아가 다시 말했다.
"저 늙은이가 술을 따르는 손은 비록 아주 침착하지만, 그 옷깃은 바람에
나부끼듯 펄럭거리고 있소. 마치 술병을 든 그 팔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처럼 말이오?"
교오가 말했다.
"그렇군요. 저 늙은이가 입고 있는 옷은 가죽 옷이라서 상당히 두껍고
무거울 텐데 웬만한 바람에는 옷깃이 저렇게 펄럭이지 않을 텐데 어떻게
된일인지 모르겠군요. 혹시 그의 팔이 심하게 떨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혹시?"
웅묘아가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저들이 전신의 기력을 다해서 술을 따르고 받고 있단
말인가요?"
화사고가 말했다.
"다시 한 번 심 상공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웅묘아가 말했다.
"심랑은 여전히 웃고 있소. 그 웃음은 상당히 씁쓸한 웃음이오. 그리고
그의 옷깃도 약간 떨리고 있소. 아니! 교 형! 심 형이 들고 있는 술잔을
보시오!"
교오도 실성한 기색으로 말했다.
"심 형이 들고 있는 술잔이 이가 빠진 듯한데......?"
웅묘아가 말했다.
"그 술잔은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한 것이었소. 그런데 지금, 저 늙은이가
들고 있는 술병에 눌려서 이가 빠진거요. 그리고 다시 저 술병을 보시오?"
교오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 늙은이가 들고 있는 술병의 입구가 이미 헤어져 있소."
화사고가 웃으면서 말했다.
"잘 보셨어요. 두 분께서는 이미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셨겠죠? 저들 두
사람은 겉으로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 술을 마시는 듯하지만, 사실상
암암리에 서로의 내력을 겨루기 시작한 거예요."
웅묘아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저 늙은이가 저처럼 심오한 내력을 가진 늙은이일 줄은 생각지 못했군요.
심랑과 내력을 겨룰 정도로 강한 내력을 가졌다니 확실히 생각 밖이오?"
교오가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보건데, 심 상공이 약간 우세한 듯하군요?"
웅묘아가 맞장구를 쳤다.
"당연히 심 상공이 우세하겠지요. 그렇지만 심 형으로 하여금 저렇게 많은
기력을 소모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의 내력 또한 강호에 몇 되지 않을
거요?"
교오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오."
웅묘아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할수록 저 늙은이가 이상한 생각이 드오. 무공이 저처럼
높은데, 사람은 병신이고 또 우리가 도대체 그의 내력을 알아볼 수 없으니
말이오?"
교오가 말했다.
"보건데, 저 늙은이와 심 상공 사이에는 틀림없이 깊은 원한 관계 비슷한
게 있는 것 같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나자 마자 내력으로
저렇게 겨루겠소?"
웅묘아가 말했다.
"그렇군요...... 음, 아니, 그렇지 않은 것 같소. 만약 저 노인이 심랑과
무슨 원한관계가 있다면 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도리어 얼굴에 계속
미소를 띠고 있는 거요?"
교오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음, 그 말도 맞는 것 같소."
그들이 다시 심랑과 그 노인쪽을 쳐다봤을 때, 마침내 술병과 술잔이
떨어져 나갔다. 심랑은 태연한 자세로 잔에 가득 부어진 술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술이오."
노인은 '텅' 하는 소리가 나게 손에 들었던 술병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그 술병의 밑부분은 부서져 밑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노인 역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좋은 술이겠지요. 노부가 조제한 술은 뒤로 갈수록 그 맛이 더욱
특이하지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일곱번째 술은 틀림없이 더 대단하겠구려."
"대단한지 대단하지 않은지는 한 번 마셔보면 알게 될거요."
말을 마친 노인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일곱번째 술병을 집어들어 천천히
심랑 앞으로 내밀었다.
심랑도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띤채, 일곱번째 잔을 들어 천천히 술병
쪽으로 내밀었다.
웅묘아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저 늙은이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자기 자신의 내력이
심랑보다 못한 것을 알면서 왜 하필 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심랑의 손이 번쩍 뒤집히는가 싶더니
새끼 손가락으로 술잔을 손바닥쪽으로 굽히고 식지, 모지, 중지 세
손가락으로 그 노인의 손에 잡혀있던 술병의 목 부분을 잡아, 노인의
손에서 술병을 천천히 빼앗아왔다. 노인은 여전히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웃으면서 말했다.
"상공께서 직접 술을 따르고 싶으신 거요?"
심랑은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옆에 있던 문을 열고 술을 창
밖으로 쏟아버렸다. 그러자 노인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면서 말했다.
"상공, 도대체 무슨 짓이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르신의 이 일곱번째 술은 제가 도저히 받을 수가 없군요."
노인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상공이 이미 앞의 여섯 잔을 마셨으니, 일곱 잔도 당연히 마셔야 되지
않겠소? 이렇게 노부에게 무례한 짓을 하다니...... 차라리 여섯 잔을
마시지 말았어야 되는 게 아니오?"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마신 여섯 잔은 마실 수 있었지만, 이 일곱잔째는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인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그 말은......."
심랑이 갑자기 번개처럼 몸을 날려 노인의 옷 속을 더듬었다. 노인은
돌연한 심랑의 행동에 깜짝 놀란 듯 실성한 소리로 외쳤다.
"상공!"
노인의 놀람에 찬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심랑의 손에는 비취를 깎아
만든 듯한 조그마한 비취함이 들려 있었다.
이때, 이 주루에 있던 사람들은 화사고, 교오, 웅묘아 세 사람을
제외하고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심랑과 이 노인의 수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심랑이 갑자기 노인의 옷 속을 더듬었을 때 깜짝 놀란 듯한 기색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더 놀란 사람은 그 노인인 듯하였다.
노인은 얼굴 표정이 크게 변하여 차갑게 냉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이 노부는 좋은 뜻으로 상공에게 술을 권한 것인데, 상공은 이 노부에게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할 수가 있소? 돌려 주시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돌려 드려야지요. 그렇지만......."
그는 천천히 비취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새끼 손가락으로 비취함
속에 있는 분홍색의 가루를 묻혀 술잔 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술잔
속에서 녹아 들어가는 분홍색 분말을 보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말했다.
"과연, 천하에서 그 짝을 찾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독약이로군!"
노인은 양손으로 탁자의 가장자리를 꽉 움켜쥔 채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상공! 도대체 무슨 말씀이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노인장께서 방금 이 무서운 독약을 일곱번째 술병 속에 털어 넣지
않았다면, 저는 당연히 일곱번째 잔을 마셨을 겁니다."
노인이 노한 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요, 상공?"
심랑이 웃음을 띠고 노인의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노인장께서 방금 여러 번 저와 내력을 겨루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다만
저의 주의력을 그쪽으로 끌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겠지요? 만약 제가 아무
것도 모르고 노인장이 저와 내력을 겨루다가 못 당하는 척 손을 뗐을 때,
제가 약간 기쁜 생각에 일곱번째 잔을 마시게 됐다면 아마......."
그는 고개를 쳐들고 웃으면서 이어서 말했다.
"아마 그랬다면 저는 영원히 여덟번째 잔은 마시지 못하게 되었겠지요."
노인은 안색이 변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이 노부는 상공과 원수진 일도 없거니와, 심지어 알지도 못하고, 상공
당신도 이 노부의 이름도 알지 못하지 않소? 그런데 내가 왜 상공을
해치려 했겠소?"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생각컨데, 노인장께서는 본인을 이미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본인도
노인장이 어떤 분인지 이미 추측을 하고 있었소."
이 말에 노인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반문했다.
"상공이 나를 안다고요?"
심랑이 천천히 말했다.
"관외지방에서 온 술사자......."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노인이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그에 따라
노인의 모발이 곤두섰다. 심랑과 그 노인의 대화를 웅묘아 등은 한 자도
빠짐없이 전부 들을 수 있었다.
교오가 깜짝 놀란 소리로 말했다.
"저 노인이 쾌락왕의 네 사자들 중 하나인 주사(酒使)일 줄이야......."
화사고가 말했다.
"우리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결국 심 상공께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있었군요."
웅묘아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세상의 어떤 일이 심랑을 속일 수가 있겠소? 아, 심랑! 당신은 정말
이 세상에 못하는 게 없고 모르는 게 없는 그러한 인물이란 말이오?"
이때 쾌락왕 주사의 한쌍의 눈은 비수처럼 날카롭게 심랑을 쏘아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심랑을 쏘아보던 노인의 눈빛이 점점 부드럽게
변해갔다. 그리고 곤두섰던 그의 머리털도 한 가닥 한 가닥 다시 원래대로
내려왔다. 얼핏 보기에 분노가 사그라져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랑이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제 추측이 틀렸습니까?"
노인의 입가에 얇은 웃음이 떠올랐다. 노인이 말했다.
"대단하오. 틀리지 않았소!"
심랑이 말했다.
"그렇다면 노인장의 대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노부는 한령(韓伶)이라고 하오."
심랑이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이름이군요. 옛날 유 령(劉伶)은 주 선(酒仙)이라고 불렸는데, 오늘
한 령은 주 사(酒使)가 되었군요. 제가 오늘 주사를 만나볼 수 있었다니,
정말 매우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한령도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노부는 유령처럼 통쾌하게 술을 마시는 그러한 성격이
못 되서 안타깝소."
두 사람은 또 서로를 마주보고 크게 웃어제꼈다. 그들의 웃음에는 조금의
가식도 없는 듯하여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주위에 가득 찼던
무림계의 호걸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멍청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교오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심 상공은 과연 대단한 아량을 가진 사람이로군. 저 늙은이가 몇 번이나
심 상공을 해치려고 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따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서로가 저렇게 마주보고 웃을 수 있다니 말이오."
웅묘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랑의 일거일동은 보통 사람은 도저히 그 진의를 알아볼 수가 없소.
우리들이 어떻게 지금 심랑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단 말이오?"
교오가 말했다.
"저 늙은이는 비록 허심탄회한 듯 웃고 있지만, 눈빛이 번쩍거리는 걸로
봐서 틀림없이 마음에 악독한 생각을 지금 하고 있을거요. 심 상공께서는
약간 조심하는 게 좋을 듯하오."
웅묘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안심하셔도 괜찮을 거요. 심랑은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오."
화사고가 갑자기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큰일났어요!"
교오가 말했다.
"무슨 일이오?"
"보세요! 저 노인장의 두 다리, 두 다리......."
웅묘아도 깜짝 놀라며 화사고가 가리키는 쪽을 봤다.
"그 노인에게 무슨 다리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웅묘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랑의 장소소리가 들리며 그 앞에
놓여있던 탁자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탁자 밑에서는 푸른색
광망이 번쩍하고 일어났다.
웅묘아는 이미 그 푸른색 광망이 한령의 바짓 가랑이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다리가 무릎 아래서부터 잘려나간 아래쪽에는 두 자루의 날카로운 검이
달려있었던 것이다. 두 자루의 검은 독을 바른 듯 퍼런색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말을 했지만 이미 두 다리를 들어서 탁자 밑에서
소리없이 심랑을 찔러 들어갔던 것이다. 만약 그 검에 묻은 독약이
조금이라도 심랑의 피부에 닿으면 순식간에 독이 발작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 상황이었다. 그러나 심랑은 마치 탁자 아래에도 눈을 달고 있었던
듯 한령의 다리가 움직이는 순간, 앉은 자리에서 평평히 뒷쪽으로 삼 척
가량을 물러났던 것이다.
한령은 다리로 심랑을 찔러 나가던 공격이 실패하자 두 손을 번쩍 쳐들어
탁자를 들고 심랑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 탁자를 쫓아 심랑쪽으로
달려들며 다리에 매단 검을 계속하여 찔러 들어갔다. 평상시 한령은 무릎
아래에 매단, 두 자루의 검으로 다리를 대신하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었다. 이십여 년 간에 걸친 고된 훈련으로 그 두 자루의 독을 바른
검은 사실상 이미 그의 다리나 마찬가지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그가 다리에 매단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한광이 번쩍이며 검기가 사람의
폐부를 찌를 듯 날카롭게 뻗쳐 나왔다. 검을 단 다리를 쓰는 한령의
동작은 이미 천하 각문각파의 다리를 쓰는 법보다도 더 민첩했고, 그
날카로움은 어떠한 발길질보다도 뛰어나 보였다.
주루를 가득 메웠던 무림호걸들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했으며, 놀람에 찬
비명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웅묘아, 교오는 더욱 놀란 듯 일순간 안색이
변했으나 대갈을 터뜨리며 그들쪽으로 달려나갔다. 바로 이순간, 심랑의
몸이 한령이 휘두르는 검광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한령은 연속하여 칠 검을 차 들어갔으나 모두 실패하자
갑자기 손을 뒤로 돌려 창을 부수고 화살처럼 밖으로 뛰쳐 나갔다.
심랑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녀는 승현에게 승영이 어떻게 그 고묘에 들어갔으며 어떻게
사로잡혔고, 또 어떻게 다시 구출해 되었으며, 어떻게 낙양에 이르게
되었고 심랑이 다시 왕 부인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냈으며, 심랑이 다시
그들을 인의장으로 보냈고, 또 그들이 인의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독이
발작하여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얘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원래 말재주가 좋았다. 그런데다가 이 모든 일들은 사실이었다.
말재주가 좋은 사람이 사실을 얘기한다면 당연히 논리정연하고 조목조목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승현은
주칠칠의 말을 들으면서 몸을 계속 가볍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손발은 이미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고 술기운은 이미 멀리 사라져버렸다.
말을 마친 주칠칠이 승현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몇 마디 덧붙였다.
자네는 총명한 사람일세. 내가 한 말이 진정인지 거짓인지 자네는 충분히
알아 들었으리라고 생각하네.
승현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가 그 놈을.......
자네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심랑을 위해서 변명을 하고 싶은건가?
승현은 갑자기 앉았던 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방문을
향해 뛰어나가려 했다. 주칠칠은 재빨리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말했다.
뭘 하려는 건가?
승현이 말했다.
복수를 할 겁니다, 복수를요. 가서 심랑을 찾아서 반드시 복수를.......
주칠칠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심랑을 찾아가서 자네 마저도 죽고 싶다는 건가?
승현이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부모 형제를 죽인 원수하고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제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반드시, 반드시 그 놈을.......
주칠칠이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이보게! 자네의 무공으로는 기껏해야 심랑의 삼 초를 받아 넘기지도
못하고 심랑의 칼날에 자네의 목숨을 버리게 될 걸세. 자네가 그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심랑과 싸운다는 것은 너무 경솔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그렇지만, 제가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주칠칠은 눈을 몇 번 껌벅이고는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자네 집에 전부 애들이 몇 명이나 있는가?
방금 말씀하신 형님하고 저하고 형제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반드시 형님의 원수를.......
주칠칠이 냉소를 하면서 그의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자네의 형님이 이미 심랑 그 녀석의 손에 돌아가셨고 지금 자네마저도
가서 그 녀석의 손에 죽게 된다면 그건 바로 심랑 그 녀석의 뜻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승가보는 이 이후부터 대가 끊겨 누가 자네들의 복수를
해주란 말인가?
주칠칠의 말에 승현은 정신을 차린 듯 털썩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한 모습을 보고 주칠칠이 말했다.
복수를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 아니네. 멍청한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정면으로 복수를 하려고 덤비는 법이지. 자네가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복수를 할 수 있다고 내가 보장을 하겠네.
승현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중얼거렸다.
저는 지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저는 다만...... 다만
삼촌의 말을 들을 뿐입니다.
좋네. 그렇다면 자네는 지금 곧 밖으로 나가서 심랑 그 녀석이 저지른
흉악한 일들을 개방 제자와 그리고 개방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여든 무림의 호걸들에게 알려주도록 하게. 그러면 자연히 다른 사람이
자네 대신 복수를 해줄 걸세.
승현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제가.......
주칠칠이 다시 그의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될 것은 심랑이 모르도록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된다는 점일세. 만약 심랑이 알게 된다면 자네는 자네가 다른
사람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될 걸세.
승현이 침통하게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 점,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서 이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꿇어 앉았던 자리에서 번쩍 일어서더니 방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주칠칠은 뛰쳐나가는 그를 가로막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득의한 기색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주칠칠은 침대 곁으로 가서 왕련화를 뒤집어 씌웠던
이불과 옷가지들을 걷어냈다.
왕련화는 여전히 그 자리에 웅크린 채 꼼짝 않고 있었다. 다만 그의
눈에도 주칠칠의 눈에서 나온 것과 같은 득의한 미소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는 주칠칠보다도 더 득의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듯하였다.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을 들었어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들었소. 아주 잘했소, 아주 잘했소.
흥, 당신은 지금에야 비로소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죠?
알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실도 더 알아냈소.
다른 사실을 더 알아내다니? 도대체 어떤 거죠?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강호에 처음 나온 귀공자는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총명한 듯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모두 어리숙하며 그들을 속이는 것은 강아지를 속이는
것보다 더 쉽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는 탄식을 하고나서 이어서 말했다.
이전에는 나는 당신이 상당히 연약하고 쉽게 남의 꾐에 넘어간다고
생각했소. 그런데 당신보다도 더 연약하고 쉽게 남의 꾀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당신이 쉽게 사람을 속이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어떠한 사람도 더이상 나를 속일 생각은 버려야 될 거예요.
왕련화가 말했다.
당연한 얘기요. 어떤 사람이 감히 당신을 더이상 속일 수가 있겠소?
왕련화의 말을 듣고 주칠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려
했으나, 득의한 기색은 숨길 수가 없었다. 특히 그녀의 눈에서는 득의한
기색이 아무리 어리숙한 사람이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흘러넘치고
있었다. 눈은 사람을 속일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가볍게 잔기침을 하면서 억지로 자기 자신의 기분을 숨기려고
하였다.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알았죠?
왕련화가 말했다.
또 여자가 남장을 했을 경우,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 한두 가지 여자들만이 하는 동작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오.
그러한 동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지불식간에 나온다는 사실이오.
주칠칠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여자들만이 하는 그러한 동작을 했다는 건가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도 가끔 그런 모습을 보였소.
도대체 어떤 점이 그랬는지 말해보세요.
예를 들면 당신은 방금 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쓸어 넘겼는데 그것은
여자들만이 하는 동작이라고 할 수 있소. 그리고 방금 당신이 뛰쳐
나가려는 승현을 붙잡을 때, 당신은 승현의 팔뚝을 잡은 게 아니고 승현의
옷자락을 잡았소. 이것도 여자들만의 동작이라고 할 수 있소.
주칠칠은 그제서야 깨달은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당신의 그 눈알은 예리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다시 어떠한 점을
알게 되었는지 또 말해 보세요.
왕련화가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떠한 여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매우
두려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것은 좋은 일인데 뭐가 두렵다는
거죠?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조상이 덕을 쌓은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그 여자의 사랑이 만약 한으로 변했을 때 그것은 아마 조상이
덕이 없는 때문일 것이오.
주칠칠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련화가 이어서
말했다.
옛말에도 있지 않소?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한도 깊어진다고
말이오. 사랑이 깊어질 때는 두 사람을 갈갈이 가루로 만들어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지 못하는 것을 원망스러워 하는 법이오. 그리고 한이 깊어질
때는 도리어 상대방을 갈갈이 찢어서 죽여 버리지 못해서 한스러워 하게
되는 것이오.
주칠칠이 마침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그 말은 맞았어요. 여자가 만약 어떤 남자를 원망할 때는 무서운
법이지요. 그렇지만 여자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만 하고 한을 갖지
않게 하면 두려울 건 없지 않겠어요?
왕련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은 그렇소만 여자들의 사랑과 한의 차이는 백지 한 장보다도 더
가볍소. 하물며.......
주칠칠이 말했다.
하물며 어떻다는거죠?
왕련화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물며 여자가 한 남자를 원망할 때는 그 남자를 갈갈이 찢어 죽이고 그
고기를 먹지 못해서 안달을 하게 되는 법이오. 그리고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할 때는 또한 그 남자를 가루로 만들어서 자신과 합치지 못해서
안달을 하게되고 상대방한테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서
안달을 하게 되는 법이오. 이 두 가지의 상황은 모두 상당히 남자를
괴롭게 하는 것이오. 여자로 하여금 자신을 원망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게
하는 그러한 남자만이 비로소 총명한 남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주칠칠이 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웃기는 왜 웃어요? 당신은 중상을 입어서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자꾸 웃다가는 아마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예요.
왕련화는 과연 잔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득의양양해 할 건 없어요. 심랑도 비록 괴롭겠지만 당신도
그와 대동소이 할테니까...... 나는 비록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겠지만 도리어 당신을 뼈에 사무치게 원망할 거예요. 당신을 갈갈이
찢어 죽이고 싶도록 원망할 거예요.
그녀는 한편에서는 왕련화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우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발을 들어 무엇인가를 펑하고 걷어찼다. 걷어차인 물건은
웅묘아였다. 웅묘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꼼작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취해 있었던 것이다.
왕련화가 눈을 돌려 웅묘아를 한 번 슬쩍 훑어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당신은 이 고양이 새끼를 어떻게 처치할 예정이오?
주칠칠이 말했다.
이 고양이 새끼는...... 흥!
내일 녀석이 술에서 깨어나면 틀림없이 승현과 더불어 이곳에 왔던 일을
기억해 낼거요. 그리고 승현은 어쩌면 그에게 이미 당신도 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을지도 모르오.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심랑을 해치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주칠칠이 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어떻다는 거죠?
왕련화가 천천히 말했다.
후한을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서 이 기회를 틈타서 영원히 이 고양이
새끼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좋을 거요.
주칠칠이 갑자기 대갈을 터뜨렸다.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도 말아요. 당신은 내 손을 빌어서 당신을
적대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려 하지만 그건...... 당신 혼자만의 꿈에
불과할 거예요.
왕련화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이오.
주칠칠이 말했다.
이 사람은 이 방에 들어올 때 이미 거의 인사불성 상태였어요. 내가 지금
그를 떼메고 나가서 밖에 아무 곳에나 내팽개쳐 버린다고 해도 내일 그가
깨어났을 때 오늘 이 방에서 일어났던 일은 더이상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꼭 그렇게 해야겠다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소?
주칠칠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당연히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되겠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굽혀 웅묘아를 부축해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웅묘아는 다시 흐물흐물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주칠칠이 그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정말 고양이 같은 인간이로군.
입으로는 욕설을 퍼붓고 있었으나 손으로는 도리어 비단 손수건을
꺼내어서 웅묘아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내고 그를 안아올려
문밖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다가 또 몸을 돌려 왕련화를
바라보고 냉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아요. 얌전히 잠이나 자고 있어요.
그리고 손을 뻗어 왕련화의 두 곳의 혈도를 짚었다.
길거리에는 등이 드문드문 보이고 인적이 거의 끊겨 있었다. 그러나
어슴프레한 가로등 아래에는 삼삼오오 취한들이 어깨동무를 하거나 등에
동무를 엎은 채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어떤 취한은 술취한 소리를 하고 있었으며 어떤 취한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칠칠은 웅묘아를 껴안고 객점을 나섰다. 그녀는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취한들과 자기에게 껴안긴 취한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남자들은 정말 이상한 동물들이야. 왜 이렇게 자기 자신을 마치 역질에
걸린 돼지새끼처럼 취하게 술을 마시는 거지? 왜 자기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거지?
그렇지만 남자들은 또 언제나 여자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법이다.
(왜 여자들은 술 속에 있는 진정한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주칠칠은 웅묘아를 껴안고 길거리의 어두운 구석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웅묘아를 아무렇게나 아무 곳에나 내던져 버릴 생각이었으나 또한편
웅묘아가 고생할까봐, 혹시 감기에 걸릴까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이때
갑자기 세 마리의 말이 길 한쪽 끝에서 주칠칠이 서있는 쪽을 향해 빠르게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주칠칠은 별로 그 말들에 주의를 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깊은 밤 저렇게 빨리 말을 모는 것은 틀림없이 범상치
않은 사건 때문에 그러리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그만이었겠지만,
그녀가 그쪽을 바라본 순간 그녀는 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는 말에 앉은 사람은 신체가 발랄하고 몸에 꼭 맞은 옷을
입었으며 입가에 검은 수염을 짧게 깎아 달고 있는 바로 그 아무하고나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주루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달려오고 있는 말에 앉은 사람은 놀랍게도 바로 심랑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주칠칠은 멍하니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 있었다.
세 필의 말은 그녀의 앞을 바람처럼 스쳐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세 필의 말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 있었다. 그 말을 탄 사람들은 모두 아주 급한 일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들의 안색은 모두 신중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급히 말을
모느라 그녀에게 곁눈질 한 번 하는 사람도 없었다.
주칠칠은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서 있더니 비로소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군, 정말 이상해...... 그가 어떻게 심랑과 아는 사이지?
어떻게 심랑과 같이 있는 거지? 아! 그렇군! 틀림없이 그가 주루에 있었던
사람들 입에서 심랑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심랑과
같이 있었던 사실은 이미 강호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그가
심랑에게 내 소식을 물어 보려고 심랑과 가까워졌던 것일거야.
이 일들을 주칠칠은 정확히 추측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는
점이 여전히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도대체 심랑하고 무슨 얘기를 한거지? 두 사람이 이렇게
총총히 달리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밤중에 뛰어 나가는 거지?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주칠칠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발을 구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망할 인간, 왜 심랑을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는 거야? 내일 개방 대회에
심랑이 만약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애써서 생각해낸 그러한
계책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그녀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녀는 더이상 웅묘아가 고생을 할까, 혹은
감기에 들까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어져 버렸다. 그녀는 웅묘아를 처마
밑에 내려놓고 말했다.
웅묘아, 당신께 미안해요. 그렇지만 당신이 너무 필요없는 일에
간섭했잖아요? 그리고 누가 그렇게 당신에게 술을 많이 마시라고
그랬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객점쪽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웅묘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 됐다는 듯 웅묘아에게 다시
다가오더니 몸에 걸쳤던 장삼을 벗어서 웅묘아를 덮어 주었다. 그러한 후
그녀는 총총히 다시 객점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달려갔다.
웅묘아를 내려놓은 주칠칠이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갑자기 네 명의 흑의
대한이 맞은 편 집 처마의 그늘진 곳에서 번개처럼 나타나서 두 사람은
객점을 향해 달려가고 나머지 두 사람은 웅묘아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두 사람의 행동은 매우 민첩하고 표정은 매우
날카로왔다. 그 두 사람은 웅묘아의 앞에까지 다가서더니 웅묘아를 몇 번
이리저리 쳐다보고나서 그 중 한 사람이 웅묘아를 툭하고 발로 찼다.
웅묘아는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집었으나 여전히 꼼짝않은 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 사람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이 고양이 새끼를 하필 우리가 꼭 손을 쓸 필요가 있겠소?
다른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두목이 명령한 것이오. 그것보다도 그 계집년과 같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심 성의껏 보살피라는 분부요. 두목의 명령은 틀림없이 어떤 까닭이
있기 때문일 거요.
그 사람이 말했다.
아예 이 녀석을 호숫가에 갖다 집어던져서 고기밥이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그것도 안 되오. 두목은 살아있는 놈을 잡아 오라고 했소.
그 사람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좋소이다. 이 친구를 떼메고 돌아갑시다.
그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두목이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이 두목은
특히 주칠칠에게 주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떠한 음모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일들을 주칠칠은 도저히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두 명의 대한은 신속하게 웅묘아를 떼메더니 곧 길의 맞은 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침 이순간 그 길의 맞은 편에서
수명의 술취한 대한이 고성방가를 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대한들은
매우 취한 듯 이미 발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으나 그렇게 인사불성일
정도는 아닌 듯하여 보였다. 그 까닭은 그들의 노래를 그런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강호제일 유협은, 강호제일 유협은 바로 우리 큰형님, 큰형님
웅묘아...... 웅묘아.
이때 한 사람이 갑자기 노랫소리를 멈추고 나서 웃으면서 말했다.
저쪽을 좀 보게. 저쪽에 어떤 녀석이 우리보다 더 취한 녀석이 있는 것
같애. 다른 사람이 떼메고 가지 않나?
다른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도 저 친구랑 비슷해. 누가 더 취하고 덜 취했다고가 없어.
그들은 '히히! 하하' 웃으면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그 두 명의
웅묘아를 떼메고 있는 흑의 대한은 귀찮은 일을 피하려는 듯 술취한 그
장한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스쳐가려고 했다.
그래서 한 사람은 길가의 우측 모서리로,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길가의
좌측으로 그들과 스쳐갔다. 그러나 두 쪽의 사람들이 스쳐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취한 중의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쳤다.
아냐 그게 아냐, 그게 아냐!
다른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았다.
뭐가 그게 아니라는 거지?
첫번째 말했던 취한이 말했다.
내가 방금 떼메어져 가는 사람의 얼굴을 흘낏 봤는데 어떻게 우리
큰형님과 그렇게 비슷할 수가 있지?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네 놈의 눈이 어떻게 잘못된 거겠지.
첫번째 말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음, 하긴 그래. 내 눈이 어떻게 잘못된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이 또 말했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도대체 우리 큰형님인지 아닌지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애.
사람들이 술을 마셔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랐을 때는 그중 한 사람이 어떤
제안을 한다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 두 대한이 떼메고
가는 사람이 도대체 그들의 큰형님인지 아닌지 확인해보자는 제안에
취한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거 좋지.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웅묘아를 떼메고 가던 두 명의 대한은 그들이 쫓아오는 모습을 보자 약간
당황한 듯 두 사람이 서로 손짓을 교환하더니 그들도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 두 대한이 뛰기 시작하자 취한들은 더 빠른 속도로 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분히 두 대한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멈춰라! 게 섰거라, 도망가지 말아라!
그들이 소리를 질러대면 질러댈수록 그 두 명의 대한은 더욱 더 빨리
달아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돌덩이 같은 남자 웅묘아를 떼메고 있는 이상,
그렇게 빨리 뛸수는 없는 듯하였다. 그들이 길 모퉁이에 이르기도 전에
취한들은 이미 그들을 바짝 쫓아왔으며 순식간에 그들을 몇 겹으로
에워쌌다. 두 명의 대한은 용기를 내서 노갈을 터뜨렸다.
친구들! 무엇 때문에 길을 막는 건가?
그러나 이때 그 취한들은 이미 웅묘아를 알아본 듯 분분히 소리를
질러댔다.
아, 정말 큰형님이군! 네놈들 우리 큰형님을 떼메고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빨리 우리 형님을 내려놔!
어지러이 소리치는 속에서 일곱, 여덟 개의 주먹이 그 두 명의 대한을
향해 어지럽게 지쳐 들어갔다. 두 명의 대한은 손에는 사람을 들고 있어서
그들의 공격을 맞받아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웅묘아를 내려놨을 때 그들은 이미 취한들에게 수도
없이 얻어맞은 상태였다. 그 취한들은 비록 무공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그 주먹의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기에 또 술기운까지 가세하여져
밥그릇만한 주먹으로 어지러이 두 대한을 내려쳤기 때문에 그 두 대한은
이미 눈두덩이, 입가 할 것 없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있었다. 그 두
대한의 무공도 높지는 않은 듯해 보였다. 취한들에게 어지러이 몇 주먹을
얻어맞자 이미 겁이 난 듯 반격할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고개를 바짝 숙이고 쥐새끼처럼 그들 사이를 비집고 도망을
쳤다. 취한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을 쫓아갔다. 그러나 이때 웅묘아가
갑자기 쓰러졌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꼿꼿이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대한들은 놀랍고 기쁜듯 그를 둥글게 에워싸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큰형님께서는 술이 취한 게 아니셨군요?
웅묘아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들어
퍽퍽 하고 좌우로 내갈겼다.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던 취한들은 모두
따귀를 한 대씩 세차게 얻어맞았다.
영문도 모른 채 따귀를 얻어맞은 대한들은 일순간 움찔 하였으나 곧
얻어맞은 자국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큰, 큰형님...... 저희들이 무슨 잘못을......?
웅묘아가 화난 소리로 말했다.
흥, 따귀 한 대로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건가? 나도 차라리 몇 대 더
두들겨 패야 분이 풀릴 것 같은데.......
취한들은 울상을 짓고 말했다.
저희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웅묘아가 말했다.
네 녀석들은 내가 왜 취한 척 했는지도 몰라?
취한들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웅묘아가 말했다.
내가 술취한 척 한 것은 그 녀석들이 도대체 어떤 녀석들인지, 그
녀석들의 소굴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 그랬던 거란 말이야.
그런데 네 녀석들이 내 일을 다 망쳐놨으니.......
취한들은 웅묘아에게 얻어맞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웅묘아가 말했다.
나한테 얻어맞은 게 억울하냐?
취한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조금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형님께서는 마땅히 몇 대 더
때리셔야 될 것 같은데요?
웅묘아가 말했다.
그래 알았다.
그는 다시 손을 번쩍 쳐들었으나 취한들의 따귀를 내리치지 않고 통
속에서 도리어 은자 몇 조각을 꺼내어 취한들에게 한 조각씩 쥐어주는
것이었다. 취한들이 말했다.
형님, 도대체 이...... 이것은 무, 무슨.......
웅묘아가 말했다.
네 놈들이 비록 몇 대 맞긴 맞아야겠지만, 그렇지만 내가 곤경에 처한
것을 발견하고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해냈으니 내 형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 내가 네놈들에게 술을 한 잔 사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어?
취한들은 박수를 치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은 역시 형님이시군요. 형님 같은 분을 모시고 있는데 따귀 몇 대가
아니라, 아예 모가지를 내놓으라 한다해도 기꺼운 마음으로 내놔야
되겠지요.
왁자지껄 다시 떠들면서 그들은 웅묘아를 에워쌌다. 그러나 웅묘아는
그들의 모습을 한 바퀴 빙 둘러보더니 또 스르르 그 자리에 쓰러져내리는
것이 아닌가! 취한들은 대경실색해서 말했다.
형님, 혹시...... 혹시 부상이라도?
웅묘아가 말했다.
헛소리 좀 작작하게. 누가 나 웅묘아를 부상시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다만, 다만...... 아이쿠...... 내 머리는 멀쩡한데 몸은 도대체 말을
듣지 않으니. 손, 다리가 느슨느슨한 게 꼭 닭 모가지도 비틀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일세.
취한들이 또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큰형님이 비록 아주 강하기는 하지만 그 술이라는 물건은 우리
형님보다 훨씬 더 강한 듯하네.
취한들이 다시 박수를 치면서 목청껏 노래를 불러댔다.
웅묘아, 웅묘아...... 비록 하늘이 겁나지 않지만, 비록 땅이 겁나지
않지만, 겁나는 것은, 겁나는 것은 술통이라네...... 술통이라네.......
웅묘아가 드러누웠던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그만 부르게.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자네들, 혹시 심
상공 보았나?
취한들이 말했다.
심 상공께서는 방금까지도 형님을 찾고 계셨는데요?
그렇다면 지금은......?
취한들이 말했다.
지금은, 아! 아까 얼핏 보건데 심 상공께서는 이미 그 주루의 주인과
말을 몰고 어디론가 달려가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