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였다”
지난 5월, 곤지암 이계진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전직 KBS,mbc,sbs 등 공중파 아나운서 모임) 宅에서 있었던 봄 소풍 자리의 플래카드에 쓰여진 카피(copy)이다. 이세진,전우벽 아나운서의 합작으로 씌여졌다는데 여러 가지 상념이 밀려오는 참 멋진 카피이다. 사진은 이계진 회장의 아이디어로 당일 참석한 아나운서 클럽 회원 모두에게 선사해 준 매우 이색적이고 귀한 선물이다. 이규항 전 아나운서 실장은 기존에 갖고 있던 家寶를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될 귀하고 값진 선물이라고 했다.
나는 당초 아나운서였다. NAVER의 검색란에도 <데뷔 / 아나운서> 라고 적시 돼 있다.
8년을 했으니, 사람의 성장기로 보면 아나운서는 30년 방송생활 중 고향에 해당한다.
방송이 좋아서 휴일날에도 방송국에 나와 일하는 것이 즐거웠고 참 열심히 했던 아나운서 초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뉴스를 잘 해 보려고 강릉에서는 잘 잡히지 않는 서울 동아방송 전영우 아나운서의 뉴스를 방송국 장비를 이용해 녹음해 다시 원고로 만들어 고대로 흉내를 내 해보기도 했고.. 편성과장을 졸라 서울의 <우리는 고교생>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 <강원의 젊은이>를 만들어 방송했고, 야구중계 방송이 하고 싶어 초등학교 야구경기를 하루 6시간씩 중계방송을 했다. 물론 PD가 따로 있지 않고 내가 PD이면서 프로그램 제작자이자 진행자이고 캐스터였다.
강릉 단오제 행사의 일환으로 벌어지는 강릉상고와 강릉농공고의 축구 경기를 중계방송하기 위해 매일 중얼중얼 연습을 하다가 출퇴근 때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들켜(?) “젊은 사람이 신수는 훤하게 생겼는데 실성을 했다면서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아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단다.
당시 강릉방송국에는 90CC 오토바이가 취재용으로 1대 배정 되었으나, 삼척, 묵호, 주문진, 양양, 속초, 고성등 동해안 소식을 취재해 주기 원하는 중앙의 요구에 따라, 콜(call)만 떨어지면 섭외는 물론 취재, 녹음, 편집까지 일사천리로 해내는 내게 전용으로 배정 되었다. 당시 방송용으로 쓰이던 sony 카세트 녹음기를 오토바이에 달아 매고는 동해안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그 바람에 방송국에 취재용으로 단 한 대 배정된 90cc 오토바이는 사실상 김상근 아나운서 개인에게 배정된 운수장비나 마찬가지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PD로 전직하여 새 프로그램 제조기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아나운서 시절, 열정을 바쳐 일해 쌓았던 방송제작 근육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명 소설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해가며 소설 작법 근육을 키운 것처럼 말이다.
나는 3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아나운서가 되었다. 800대 1의 아나운서를 4번 떨어져 5번 만에 합격을 했으니 말이다. 당시 1차 실기시험, 2차 필기시험, 그리고 3차 면접시험으로 전형이 이루어졌는데 나는 꼭 3차에서 떨어졌고, 그것도 수석(;) 낙방을 했다. 3번째 떨어졌을 때 某기관에서 KBS 아나운서에 합격되지 못한 불합격자 중에 제일 성적이 좋은 사람 하나를 채용하려고 하니 날더러 그 기관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장황한 설명 대신 “首席 落榜”이라는 용어를 내 스스로 命名했다. 만약 내가 끝내 아나운서에 합격하지 못했더라면 위의 카피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대신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가 될 뻔 했다”로 수석 낙방을 위안으로 삼았을 것이다.
지금도 아나운서 합격 소식을 당시 KBS 1 라디오를 통해 듣고,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했던 때가 생각난다. 1976년 2월 당시 나는 고등학교 국어교사였다. 수업시작이 됐는데도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사각형 쏘니 라디오에 귀를 기우리고 있었다. 낮 12시 뉴스 끝 무렵 “지금부터 KBS 공개채용 아나운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해 드리겠습니다. 내 앞에 몇 명이 호명 될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 드디어 ”<000 번 김상근>“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김상근이라고 했지? 내가 장기범, 임택근, 이광재씨와 같은 KBS 아나운서가 됐단 말이지?! 내가 나에게 묻고 확인하여 대답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수업에 들어갔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의 일이다.
왜 아나운서가 되려고 했느냐고 누가 묻는다. 이유가 없었다. 무조건 아나운서가 돼야 했다. 너무 멋졋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나운서가 되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멋지게 말을 하고, 늘 단정한 차림의 기품이 있고, 아는 게 많고...당시 아나운서像은 저널리스이었으며 모르는 게 없었으며 모든 언행이 모범적이었으며 그래서 모두가 선망하는 인기인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법대에 넣으시려고 새벽에 일어나 목욕 재개히사고는 내 원서를 쓰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 하고 두 번씩이나 떨어졌고, 또 취직 시험에도 보는 족족 떨어졌다. 그러나 끝내 나는 아나운서에 합격함으로써 그 앞의 모든 낙방의 실패를 한 방에 만회한 값진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아나운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방송 KBS가 공식적으로 뽑은 대한민국의 아나운서가 된 것이다. 그때 합격의 영광과 기쁨은 나의 방송생활 30여년 내내 나의 자부심이었고, 평생 나를 꿋꿋이 지켜 준 자존감의 본체였다. 아무나 할 수 없고, 또 아무나 될 수 없는 아나운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나운서 8년차에 PD로 전직하여 PD로서 차장, 부주간, 주간, 국장까지 오르게 되었고 <체험, 삶의 현장>, <TV는 사랑을 싣고>등 수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 시대를 풍미한 名 PD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PD로서의 영광과 명성을 안고 퇴직을 했다. 그러면서 다시 아나운서 클럽에 나가 “나도 한 때는 아나운서였오!” 하기가 퍽 겸연쩍었다. PD로서 누릴 영광 다 누렸으면서 22년이나 떠나 있던 고향 아나운서 클럽에 불쑥 찾아 와 내 지난날의 자부심을 추가하기 위해 숟가락 하나를 얹는 것 같온 느낌이었다. 마치 나 몰라라 고향을 등지고 떠난 정치인이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고향 팔이 하러 온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고향 아나운서 클럽 사람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한때 같은 아나운서를 했다는 이유 하나로 “한번 아나운서는 영원한 아나운서”라며 아나운서라는 공동체 울타리로 감싸 주었고, 내가 아나운서 적에 누구 보다 열심히 했고 아나운서를 자랑스러워 했던 걸 알고 지켜보던 많은 선배들이 정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김동건, 황인용, 이세진, 최평웅, 김규홍, 김윤한, 정도영, 박용호, 박영웅, 이계진, 이종태, 황 량, 김상준 선배로부터 전우벽, 윤성원, 원종배, 손범수, 김병찬, 왕종근, 이현우, 김성길, 조건진, 김성수 등 선후배 동료들 그리고 박찬숙, 채영신, 황인우, 신은경, 이병혜, 배유선, 성연미, 오유경, 박민정씨등 여자 아나운서에 이르기 까지 오랜만에 겸연쩍은 모습으로 고향을 찾은 나를 고향 사람들은 살갑게 다가와 함께 아나운서였다는 아나운서 동료로서 나를 대해 주었다. 특히 이규항 前 아나운서 실장께서는 내게 古眞이라는 雅號를 지어 주어, 아나운서 후배에게만 내려 주는 깊은 정의(情意)를 보내며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셨다.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였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좋은 말은 또 있을까?
어느 정신과 의사는 말하기를, 사람을 괴롭히는 요체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요약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후회한다고 해서 과거가 고쳐지는 것이 아니니, 그 후회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 온 자신에게 칭찬을 해 줄 일을 찾아 자신을 끊임없이 칭찬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가장 자랑스럽게 여길 자신의 과거 일을 떠올리며 자신을 칭찬해 주는 것이야 말로 지금 겪고 있는 우울과 무기력을 물리칠 수 있는 좋은 자산이라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나를 이렇게 칭찬한다.
“나 김상근은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였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