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길
여행지에서 비가 내리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인솔자가 워밍업으로 가볍게 산행하자며 숙소 앞에 집합시킨다. 겁이 났지만, 일행을 따라나선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점점 세차게 내린다. 산길을 오르다 작은 개울을 만난다. 개울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수 사이로 굵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건너편으로 건너야 한다. 덜컥 겁이 났다. 단순한 예행연습이 이 정도라면 남은 십여 일간의 일정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알프스 자락을 돌아서 앞을 향해 걷는다. 천상의 경관을 보는 것도 잠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지더니 이내 우박으로 바뀐다. 오늘의 목적지는 산 정상에 있는 ‘로카델리 산장’이다. 그곳에서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며 숙박할 예정이다. 그 산장은 일 년 전에 예약하고 단 몇 분 만에 마감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 나선다면 겁나지 않을 것이다. 동행인이 없는 나는 모든 어려움을 혼자 짊어져야 한다.
등에 진 배낭 무게만 해도 이십 킬로그램이 넘고, 세찬 빗속에서 우산을 드는 것조차 어렵다. 겨우 꺼낸 우비로 배낭까지 다 감싸진 못한 채 걷는다. 완전한 장비를 갖춘 이를 부러워하면서. 스틱에 의지한 채 고갯길을 하염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옆을 돌아볼 새도 없이 앞선 이의 발꿈치만 보며 한 걸음씩 내디딘다. 내가 뒤처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영영 낙오될까 싶어서 뒤돌아보지 않으며. 마침내 멀리 산장의 빨간 지붕이 보인다. 맞은편에서 젊은이가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걸어온다. 그는 우리가 출발한 지점까지 몇 시간을 걸어야 한다.
각자의 짐을 등에 짊어진 채 앞으로 향하니, ‘인생길’을 걷는 느낌이다. 돌이 많은 빗길이 유난히 미끄럽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한다. “온 힘을 실어서 의지하는 스틱이 정말 소중해요. 행여 부러질세라 조심히 다뤄요.” 내리막길에선 스틱에 더 의존한다. 그 중에는 산행 경험이 많은 이들이 대부분이고, 나처럼 초보는 없는 듯하다. 어떤 이는 불과 두 달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다녀왔다고 한다. 평소에 허리와 무릎이 부실해서 가까운 산도 외면한 내가 무슨 배짱으로 나섰을까.
이 길에 서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이곳에 진즉 오고 싶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미뤄졌다. 여행이 가능해지자 몇 달 전에 예약했지만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마음이 흔들렸다. 기어코 해내리라, 다짐하다 막상 이튿날이 되면 자신감이 사라졌다. 여행사 직원이 가까운 산에서 미리 연습하라고 일러줬다. 개인전을 앞두고 있어서 작업하느라 바깥출입을 자주 못했다.
평소에 산행을 즐기지 않아서 등산용품에 대해선 문외한이다. 등산복과 신발, 스틱과 배낭을 새로 준비하며 한 가지씩 새롭게 알았다. 등산화는 평소에 신는 신발 크기보다 커야 하고 발에 익숙해지도록 미리 신어야 한다는 것도. 동네에서 가끔 산에 오를 때마다 힘들었지만, 조금씩 용기가 생겼다.
점차 기온이 오르자 숨이 차서 아파트 계단 오르기를 했다. 어느 날, 준비운동을 하지 않고 무리해서 계단을 오르다 갑자기 주저앉았다. 물리치료 받고 회복하는 동안 설상가상으로 심한 감기를 앓았다. 여행을 앞두고 보름 이상 감기가 지속되더니 출발 직전에 회복되었다.
아는 이 없이 혼자 떠나온 여행이다. 남편과 동행하길 원했지만, 그는 장거리 여행을 원치 않는다. “그곳은 평탄한 산책코스가 아니어서 평소에 등산하지 않은 사람에겐 무리야.” 무모한 내게 겁을 주었다. 친구나 가까운 지인도 선뜻 나서지 않고 오히려 말렸다. 그럴수록 ‘혼자라도 다녀와야지,’ 다짐했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이와 룸메이트가 되었다. 평소에 국내외에서 트레킹 여행을 즐겼다는 그녀는 ‘차마고도’에도 다녀왔다니 나와는 다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공항까지 바래다준 남편을 뒤로한 채 여행길에 나섰다는 점이다.
야생화 철에 맞춰서 7월 초에 출발했다. 고도의 알프스 자락에서 종횡무진하며 자연을 즐긴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산, 들에 핀 갖가지 야생화와 눈맞춤하며. 눈길 닿는 곳 모두 천상의 비경이다. 떠나기 전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들꽃을 찾아 사슴처럼 뛰어 다닌다.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세체다’의 능선에서 사진으로 전하며. 어렵게 출발한 나는 가벼운 소풍처럼 길을 나선 현지인들이 한없이 부럽다. 각지에서 몰려온 젊은이, 유모차를 끌고 온 이도 자연을 향유한다.
처음 숙소에 도착했을 때 빗속에서 강행군한 이유를 알았다. 그 정도는 가벼운 산책에 불과했다는 것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비가 멈췄지만, 등산화와 배낭 속 물건까지 다 젖었다. 여장을 풀 새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압도당한다. 이번 여정의 하이라이트, 세 개의 봉우리인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가 우뚝 솟은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고달픈 길은 다 잊고 감사함만 가득하다.
다른 우주에 선 듯 환상적인 정경과 밤하늘의 별을 감상한다. “자연은 착한 안내자이다. 현명하고 공정하며 선량하다”라고 한 ‘몽테뉴’의 말을 실감하며. 이튿날, 맑게 갠 하늘 아래서 비 때문에 못 본 경치를 만끽하며 산장에서 내려온다. 혼자서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희열감이 차오른다.
지나고 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연이 나를 불러주었고, 앞을 향해 걸을 때마다 힘과 용기를 실어주었다.
첫댓글 산행 연습, 홀로서기의 자율 훈련을 거쳐 알프스 자락 정복 여행기-- '세체다' 능선 포함--를 잘 읽었어요. 그곳 풍경을 묘사한 김영신 화가님의 글은 한 폭의 그림이네요^^ 혼자 떠난 여정이 홀로가 아님에 인생 전체를 다시 돌아 보게 하는 글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고행을 선택한 지송 선생님의 용기와 의지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런 좋은 경험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좋은 영양분이지요. 환상적인 전경에 감탄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지송 선생님을 상상해 봅니다.
알프스 등산하는 모습이 훤히 그려집니다. 알프스 등산의 고행도 느껴집니다.
혼자서 그 어려운 등산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일인데.
대단한 홀로서기입니다. 형상화가 좋았습니다. 잘 읽었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