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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5차시 합평작 (3월 6일 용)
1. 모기와 3년 전쟁 /변미순
2015년 10월
1) 날씨는 시원해졌는데 모기 한 마리가 방 안에 날고 있다. 잠자는 사람의 귓가에서 윙윙대니 잘 수가 없었다. 막내 조카가 같이 자겠다고 침대에 파고 들어왔으니 더욱 사생결단을 내야 했다. 법정스님은 모기랑 대화하듯 헌혈한다 하셨지만 모기 물리면 피가 나도록, 상처가 깊도록 긁기때문에 모기의 작은 소리에도 긴장을 하였다.
2) 한시간째 내려 앉는 눈꺼풀과 느려진 손짓으로 힘이 빠져 입조차 삐뚤어졌다는 10월 초 가을 모기에게 농락당하고 있자니 화나는 것보다 서글픔이 더 진했다. 가끔 보이기는 하는데 왜 잡히지는 않는지 매번 허공에 손짓만하였다.
3) 오랜만에 일찍 자려다 모기와의 전쟁으로 틀렸다. 잠을 포기하고 차라리 시집 한권 읽으려 앉은뱅이 상 하나 펼쳐놓고 보니 내일이 일요일이라 다행이었다. 작자미상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억지로 이 글로 위로하며 두손을 모으고 모기를 살리고 한밤의 전쟁을 포기하였다.
4) 다음날 일요일 아침 일어나니 “쳇 ~ 모기에게조차 무시당했다.” 초등 1학년 조카는 손등이 가려워 울상인데 늙은이 피는 맛도 없나벼. 나는 모기에게 한방도 물리지 않았다.
2016년 9월
5) 며칠전 지진 때문에 밤에 잠들 때마다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긴급대피시 들고 나갈 가방을 체크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도 아주 작은 모기 한 마리 때문에 지진이고 뭐고 다 잊고 또 그 모기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방 천장에 앉은 것이 보이는데 내 키가 줄어든 것인지 파리채를 휘둘러도 잡히지 않았다. 왱~소리를 따라 가 보아도 잘 보이지도 않았다. 너 따위에겐 지지 않으리다 각오를 다지고 위쪽만 보고 쫓다가 여름옷 정리하려 펼쳐둔 박스에 걸려 넘어지면서 모서리에 무릎이 긇혔다. 결국 모기 피 보려다 내 피를 보고말았다.
6) 자다가 내가 넘어지는 소리에 딸아이가 와서 보고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고 갔다. 젊어서는 나는 파리도 손으로 잡아 후려쳤었는데 하는 느스레 말도 하지 못했다. 재바르다는 것은 그냥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억스러운 단어일 뿐이다.
2017년 9월
7) 초여름 가뭄때문인지, 한여름 뙤악볕 때문인지 모기의 개체수가 줄어들었다는 뉴스가 종종 나왔다. 그래도 주택에 사는 나는 매년 여름과 가을, 모기를 맞아 전쟁하는 50대 아줌마였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는 입이 삐뚤어져 잘 물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모기 나는 소리에 난 여전히 민감하게 소름돋아 한다. 갱년기 증세로 안면에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당연한 증상이고, 쉽게 잠들지 못하는 약간의 불면증과의 전쟁도 힘들었다. 잠이 쏟아지면 잠자리에 들어간다. 오늘도 역시 왱~하고 모기 한 마리가 약을 올린다.
8) 올해 난 흰 깃발을 흔들며 먼저 항복을 했다. 일어나 잡으려다 날 밤을 새우면 다시 잠들기도 힘들고 내일은 피곤으로 더 힘들어 할 것이므로 오늘밤 저 모기와는 대응하지 않겠다. 일어나 잡으려다 내 피를 보느니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맘대로 해봐라 하고 잠들어 버렸다. 또 넘어져 피를 보면 내 이름은 불쌍한 노인네가 될지도 모른다. 여름내내 모기는 못잡고 빈 박수만 치지 않았던가.
9) 잠버릇이 곱지 않아 분명히 이불을 벗어던지며 잤을 것인데 아침이면 모기에게 물린 것 같지가 않았다. 이제 내 피가 맛이 없어졌을지도 모르고, 물렸으나 피부가 가려움에 둔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매년 한밤 모기와의 전쟁에 몸서리를 쳐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모기도 포기한 피맛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2. 나의 죽음 준비/최해기
사람은 태어나면 죽기마련이다.
나는 어디로 갈것인가 생각을 많이했다.
7대 조모님 이하 조상님들이 모셔져있는 경주백률사동록과 선덕왕릉서록의 문중산이 국립공원으로 묶여 행사를 제대로 할수없게되었다.
자연장으로 잔디에 매장도 생각하다가 자연을 파괴하는것 같아 포기하였다.
어머니와 살아계실 때부터 함께다니던 대구가창댐 남편에 위치한 광덕사에 극락정토원이 운영되고있어 가족과 의논하고 스님게 말씀드려 봉안당을 정하였다.
부부가 함께할 봉안당을 정하고나니 마음이 기쁘다.
평소에도 가끔 들리곤 한다.
3. 내돈내돈 네돈내돈 /이정열
1 누군가의 말대로 코레일에만 무임승차 요금이 보전된다는 사실은 형평성에 어긋나 보일지도 모른다. 서울교통공사가 감당해야 하는 적자가 커 보일 수 있다. 서울특별시 단체장이 중앙정부에 던진 불만이 화두다. 이에 지하철이 있는 몇 안 되는 지자체장들도 덩달아 불을 지폈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적자폭이 커진 각 도시의 교통공사를 넘겨받은 까닭이다. 어느 중앙부처의 장은 무임승차 손실은 지방정부의 몫이라고 한다. 형평성이 무엇인지 반쯤은 아는 누군가가 하나 있었다. 지하철을 운영하지 않는 지자체는 이 논의 자체에서 제외되어 있어 그것부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도 하나만 안다.
2 우리나라가 왜 이 모양인지 깨달았다. 선출직 중에 셈을 제대로 하거나 용기 있는 사람이 없다고 추측하고 있다. 셈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서울시의 특성 때문이다. 코레일은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공기업이다. 한국철도공사는 서울시 지하철 중 1, 3, 4호선을 운영한다. 지하철을 비롯한 KTX와 무궁화호 등은 원가의 65-70%를 가격으로 책정하고 있다. 공적 영역에서 수익을 낼 만한 가격을 매기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1, 3, 4호선을 타는 사람들로부터 발생하는 30-35%의 적자는 국가가 대신 부담해 주고 있다는 뜻이다. 몇 개의 지하철 노선을 국가가 운영해 주는 도시가 있었던가. 나는 기억이 잘 안 난다.
4 원가보다 저렴한 지하철 요금으로 1, 3, 4호선 주위의 활성화된 상권은 또 어떻고. 세 개 노선의 상업용 건물에서 벌어들인 돈은 국가에 더 납세했던가 묻고 싶다. 역세권 부동산 거래자들도 국세를 더 납부했을 리 없다. 보다시피 이미 다각도로 국가 재정을 이용하여 서울시를 배불려왔다. 지하철 장사에서 서울시는 지하철이 없는 지자체뿐만 아니라 지하철이 있는 지자체보다 더 이득을 본다. 코레일의 1, 3, 4호선 무임승차 손실 보전을 근거로 공정 운운하며 재정 지원을 바란다니 옛 속담 하나 틀린 것 없다.
5 이것뿐이랴. 2004년 세법이 개정되었다. 지방 정부에 독소조항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이다. 사기업의 각 지사에서 지방정부에 납부하던 세금을 본사 소재지에서 통합해서 낼 수 있도록 개정했다. 그러니까 대구의 어느 동네에 위치한 안녕전자마트에서 텔레비전을 사면 그 이익에 대한 세금은 본사가 있는 서울로 간다. 대구 사람이 대구에서 돈을 벌고 대구에서 돈을 썼는데 세금은 왜 서울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요지는 서울은 기업 단위의 세수에서도 이미 이십 년 가까이 이득을 봐왔다는 소리다.
6 국가 재정으로 서울 살림에 보태고 있는 현실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다니 황당하다. 이 논쟁에 발언한 적 있는 모든 선출직이 이 사실을 진짜로 알지 못했다면 셈을 할 줄 모르는 상태다. 만약 알고 있는데 언급하지 않는 경우는 둘로 나뉜다. 서울시장은 더 이득을 보기 위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지자체장들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선출직으로 장을 할 정도라면 셈을 못하는 건 아니고 후자지 않을까.
7 서울시는 땡깡을 그만 써라. 맏형으로서 집안 일으킨답시고 동생들 학교 안 보내고 먼저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옷 입었으면 이제는 좀 베풀어라. 무임승차 손실을 요구하기 이전에 서울이 지방이라 딱지 붙인 이들의 납세액, 코레일이 부담해 줬던 서울시민의 교통비 적자분부터 소급해서 뱉어내라. 마지막으로 경의선, 경부선, 경인선 위를 지나는 서울시 철마들은 통행세를 내던가. 그것도 국가자산이다.
4. 체온나눔 /조장래
까톡 까톡! 단톡방의 알림이 아침부터 요란하다. 아내와 함께 활동하는 해외선교와 봉사활동을 하는 협회에서 보낸 메시지다. 지진으로 집을 잃고 혹독한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튀르키예 형제들에게 옷과 이불, 양말 등을 모은다는 공지였다.
아내와 얼굴이 마주친 동시에 우리는 옷장 점검에 들어갔다. 선별기준은 최근 한 해 동안 주인에게 성은을 입지 못한 옷은 모두 대상이 되었다. 옷장이며 방마다 거치된 행거에서 내려진 옷들이 거실에 그득하다. 옷가지 하나하나에 추억이 있고 이 옷은 이래서 못 버리고 저 옷은 저래서 안 되는 이유와 희로애락의 추억이 있는 옷들이다. 나름 아깝기도 하고 또 언젠가 한번쯤은 걸치고 나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간직한 옷들이다. 첫 눈이 올 때 입을 옷과 공치러갈 때 입을 옷, 심지어 울적할 때 생각나는 옷도 있다.
지역에서 모으는 장소도 있었지만 정해진 시간까지 작업이 완료되지 못했다. 택배비를 아끼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튀르키예가 아닌 인천에 소재한 튀르키예 물품지원센터 까지만 보내면 되기에 더욱 다행이다. 옷가지는 옷가지대로 이름표 붙이고, 스카프며 양말도 나름대로 꼼꼼히 분류하여 트렁크에 넣어 우체국으로 갔다. 우체국의 대형 박스에 이리저리 나누어 넣어 세 박스로 겨우 맞추었다. 임박한 마감시간에도 알맞게 맞추어져 안도했다.
종일토록 작업이 힘에 부대껴 옴을 느꼈다. 박스에 옮겨 담는 과정에서 직원의 협조와 알바생의 도움에 고마움을 전했다. 쌓여진 접수물품에는 동일한 곳으로 보내지는 물품들도 더러 있는 듯 했다. 수년 전 동남아 여행에서 입을 만한 헌 옷을 가져 달라는 선교단체의 요청으로 커다란 여행 가방과 박스에 옷가지와 신발, 학용품을 가져가 나누어준 톤네샵지역 일정이 불현 듯 떠오른다.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강진으로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기본적인 생활인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움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굳이 한국전쟁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도 우리 민족의 온정심의 발로가 불을 지폈겠지만 네 번째로 많은 파병으로 우리나라를 지켜 준 우방국이며 형제의 나라이므로 더욱 마음이 간다.
내친김에 튀르키예를 형제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한 근거를 찾아본다. 우리나라 고대사에 의하면 고구려시대의 몽골지역의 유목민 중 돌궐(Turk)족 후예 중의 일부가 튀르키예(Turkiye)라고 한다. 그 나라가 한국동란에 도와준 나라로 형제국이 되었고, 삼국시대 만주와 요동지방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돌궐의 공주와 혼인하므로 민족적인 형제관계가 성립하였고 함께 동맹하여 당나라와 싸우기도 했다. 이 두 기록이 형제국임의 근거를 더욱 공고하게 한다.
이런 형제국의 근거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민족은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평화를 품은 민족혼으로 지펴진 온기가 튀르키예로 여행길에 오른다.
5. 가인(佳人)에 침몰하다 / 김병연
1)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2019년 3월 어느날이었던가. 무료하게 티브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모 방송에서 방영하는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가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2)경연프로그램 참가자가 무려 12,000명이나 되었는데, 제1대 미스트롯 진을 선발하는 대회였던 것이다. 난 무엇에 홀린듯이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은 채 주의깊게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가녀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3)지금도 호사가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는 첫 경연곡, '한많은 대동강'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설로 남아있을 정도로 임팩트 있는 노래로 각인되어 있다. 수백번을 들어도 그때 느꼈던 감동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낄 뿐이다. 이후 연이어 벌어진 마지막 5차 경연을 끝으로 마침내 미스트롯 진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내고 말았으니 어쩌면 당연히 결과인지도 모른다.
4)어느 가요 평론가 한 분은 그녀의 목소리를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송가인의 목소리는 여타 가수에서는 볼 수 없는 차별화되고 특이한 성량을 가지고 있는 독보적인 것입니다." 혹자는 그녀를 가르켜 '신의 딸'이라고도 한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5)드디어 그녀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그건 다름아닌 2019년 12월 25일(친구 딸 결혼식과 겹침에도 불구하고) 대구 엑스코 콘서트에서 개최되는 티켓을 구해서 가게 되었다. 그것도 서울에 사는 큰 딸에게 종용해서 어렵게 구했던 것이다.
6)아!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공연장 입구 광장에서는 난생 처음 보는 진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홍색 응원 단체복을 입은 사람들이 떼지어 모여서 무슨 전쟁터를 방불케할 정도로 형형색색으로 제작한 응원 깃발(그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을 들고 열광적으로 몰려 다녔던 것이다. 나는 한참이나 그 모습을 넋놓고 구경하면서 마치 이국에 온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7)나중에 알고보니 그 응원 단체는 현재 가입 회원 수가 무료 10만이나 되는 '어게인'이라고 부르는 송가인의 팬클럽이었다. 중, 장년층의 아이돌이라 부를 정도로 10대부터 80대까지 남녀노소할 것 없이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드디어 콘서트가 시작되었는데, 처음 보는 가수 공연에 몹시 마음이 들뜨고 설렜다. 참가한 여러 가수들 노래를 시시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마지막 코너에서 그녀의 등장에 일순간 전 공연장 전체가 박수와 환호로 인하여 천둥이 치는 듯한 느낌으로 변해버렸다. 나 역시 한참이나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으니 이윽고 노래를 부르는데 첫 소절부터 강렬한 인상을 날려버려 온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무어라 할까. 가냘픈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량이 폭포수 마냥 시원하면서도 웅잠함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남아 있는 진한 여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8)이쯤에서 간단히 그녀의 프로필을 소개해보기로 한다. 그녀는 전라도 보배섬 진도에서 태어났다. 2남 1녀 중 막내이다. 어머니 송순단여사(중요 국가 무형문화재 싯낌굿 전수조교)의 권유로 중1때부터 판소리를 배워서 광주 예술고를 거쳐 중앙대 국악과에 입학해 판소리를 전공하여 무려 판소리 부분 문체부 장관상을 2번이나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후 또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트롯가수로 전향하여 지금은 명실상부하게 당당히 트롯 가수들 중 최고의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연 한 편 출연료가 무려 3천 5백만원이나 되니 각 공연 기획사에서 그녀를 섭외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 한다.
9)세월은 그렇게 무심히 흘러갔다. 2021년 6월 25일 또 한번 그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콘서트 장소는 대구 엑스코로 결정되었다. 이번에는 같이 사는 작은 딸에게 부탁했고, 딸은 좋은 자리의 콘서트 티켓을 예매해주었다. 역시 그녀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카리스마 넘치게 무대를 휘저으며 관중을 압도하였고 줄곧 20곡이나 되는 노래를 선사하였다. 마침 옆 좌석에 앉아있는 팬 한분은 나에게 실로 기적같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작년 각종 질병과 암으로부터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송가인이라는 가수를 알고부터는 그녀가 하는 공연마다 빠짐없이 다닌 결과 모든 질병이 순식간에 싹 사라져 버렸다는 후일담을 자랑스럽게 널어놓고있었다.그녀의 인성 또한 남 달라서 효행의 표본이 될 정도로 가요계에서는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그 뿐만이 아니라 전국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고하니 참으로 신기하고도 놀랄 일이었다.
10)이제 공연은 클라이막스를 치닫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관중석으로 내려왔다. 마지막 곡인 '칠갑산'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아! 마침내 나는 그녀의 진 모습을 불과 10센티 앞에서 볼 수 있었다. 얼굴은 그야말로 인형처럼 조그맣고 앙증맞게 비쳐졌다. 순간 내 곁을 스쳐지나가길래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서 살짝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게 다 였다. 그녀는 그렇게 홀연히 유유히 저 무대위로 다시 올라가버렸다. 관중들이 내지러는 환호와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나는 그저 넋을 잃고 그녀가 스쳐 지나간 짧디짧은 접촉의 희열을 감지하면서 깊은 상념에 잠겨버렸다.
11)아침 6시에 눈을 뜨자마자 폰을 켜면 어김없이 그녀의 감미로운 노래가 내 귓전을 일깨운다. 적어도 출근 전까지는 대략 10곡 정도는 듣는 셈이다. 물론 잠자리에 들기 전 또 10곡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잠에 빠진다. 이런 패턴이 어언 3여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다. 이런 나를 아내는 "차라리 송가인하고 같이 살아라"라고 핀잔을 주곤 한다. 카멜레온처럼 부르는 노래마다 그 뉘앙스를 달리하고 있으며 가요, 발라드, 락, 민요, 뮤지컬등 가리지 않고 모든 장르를 아우르면서 뛰어난 가창력을 뽐내고 있는 그녀는 영원불멸의 가수로써 가요사의 한 획을 그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녀를 일개의 트롯 가수가 아니라 탑 클래스에 위치해 있는 진정한 아티스트로 평하고 싶다.베토벤이 악성(樂聖)으로 칭송되고 있듯이 그녀 역시 멀지않아 가성(歌聖)으로 추앙될 날이 오리라고 감히 장담해본다.
12)송가인! 노래 부르는 아름다운 사람, 언젠간 기회가 되면 그녀의 생가에 꼭 한번 갈 작정이다.( 하루에도 많게는 방문객이 2,000 명이나 된다고 한다. 전국에서 유명한 하나의 관광 명소로 공식 지정되어 있다.) 오늘도 난 여전히 그녀에 침몰하여 허우적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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