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천사
정혜영 시인
내가 상상하던 천사는 깃털로만 이루어진 존재였다. 인간과는 종이 달라서 상처도 없고 상처 받을 일도 없어서, 상처투성이 인간을 무조건 말없이 돕는 존재가 천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톨스토이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나는 등이 가렵다.// 한 손에는 흰 돌을 / 한 손에는 우산을 / 들고 있다 //~중략//흰 쥐가 내 손을/ 떠나간다.//날면,/나는 날아갈 것 같다 『생물성』 <천사> 신해욱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는 나를 더욱 실망시킨다.
내가 설령 울부짖는다 해도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주랴? 만약 천사가 하나/ 갑자기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면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사라지리라./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겨우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제1 비가』 중에서
신해욱의 천사는 광장 가운데 세워졌으나 잊혀지고 버림받은 존재이다. 한 손은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은 흰 돌을 쥐고 있어서 제 손으로 가려운 등을 긁을 수도 없다. 잠시 손에 앉아 벗이 되어주던 흰쥐(어쩌면 먼 하늘에서 온 전령일지도 모르는)마저 떠나가는 돌로 만든 조각상이다. 날면 날 수 없을 것 같다.
릴케의 천사는 인간의 아픔이나 절규 따위는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인간의 고통이란 모두 인간 각자가 만든 울타리 안의 것이리라. 만일 천사가 인간들에게 적용하는 고통의 기준을 갖고 있다면 인간의 울부짖음 너머 인간의 의식으로는 가 닿을 길이 없는 미지의 세계에 그 기준이 있거나 혹은 그 기준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빔 밴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천사 다미엘은 천사를 포기하고 인간이 된다. 천사 다미엘은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는 마리온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마리온을 잊을 수 없게 된 다미엘은 천사 카시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인간이 된 다미엘은 자신처럼 천사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이 된 사람을 만나면서 인간이 된 천사가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내가 만난 천사는 이태리 피렌체 거리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발밑에 발받침을 만들어 준 이름 없는 누군가였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이 내 눈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말 할 것도 없지만 축 쳐진 맨발이 가끔 마음에 걸렸다. 누구도 그 맨발을 신경써주지 않는 것 같았다.
이태리 아레조의 한 성당에서 본 프란체스코 성인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모습으로 거대한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발에 간신히 입을 맞추고 있었다.(실은 기억이 희미하다. 입을 맞추었는지 두 손으로 예수의 맨발을 받들고 있었는지 아무튼 그 못 자국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모습이 가끔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 발은 그냥 바닥을 향해서 힘없이 떨어져 있었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조그만 손등이 소복하게 부어 있었다. 검버섯이 빼곡했다. 집안은 구석구석 반짝였고 주방은 가지런했다. 하지만 식사 후에 설거지를 할 때 사용되는 세제인 퐁퐁은 노란 바가지에 담겨서 까맣게 반짝였다. 플라스틱 바가지에 퐁퐁을 섞은 물을 넣고 그 바가지 속에 그릇을 넣어서 설거지를 했다. 몇 번의 설거지를 거쳐서 더 이상 세제의 기능이 사라지고 거품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했다. 그 까맣게 변한 주방세제가 들어있는 바가지를 내가 쏟아서 비운 일은 없는 것 같다.
일 년에 몇 번 명절 때나 어머니 집에 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어머니의 손등을 주물러 드리는 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 후에 무릎을 꿇고 안방 걸레질이 끝나면 흠집 있는 사과를 깎으면서 이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또 들었다. 옛날 신혼시절에 아버님은 군대에 가고 어린 새색시가 우물가에서 찬물로 빨래한 이야기를 들으며 두꺼비를 닮은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역시 또 얼마나 물이며 빨래비누를 아끼셨을까. 그때는 짚을 태워서 양잿물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고 하던데...
어머니는 국을 끓이면 한 끼 식사 후에 남은 국을 작은 냄비로 옮겼다. 큰 냄비는 깨끗이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에서 반짝였다. 반찬통 또한 그렇게 작은 것으로 더 작은 것으로 옮겨졌다. 설거지는 쌓여 갔을 것이고 어머니의 손목이며 손가락은 더욱 바지런하게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삼십년 전의 일이니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어머니는 젊으셨다.
내 주변 사람들 중 누구도 그렇게 이른 나이에 검버섯이 피어있는 손등을 본 적이 없다. 집안 일만 잘하셨던 것이 아니다. 밖에서도 일을 하셨고 항상은 아니지만 친척 조카들도 도시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어머니 집에 기거했다. 바지런하고 살림 솜씨가 야무진 어머니는 두꺼비 같은 손등으로 깨진, 깨져가는 쌀독을 막으며 류머티스 환자가 되었다.
옆으로 누운 어머니의 등이 새우처럼 굽어있다. 저 등이 방바닥에 닿으며 반듯하게 누울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편물가게, 맞춤 양장점, 그리고 한복 바느질을 했다. 손님들의 주문 날자에 맞추려면 늘 시간이 모자랐다. 밤을 낮삼았고 방바닥에 옷감을 펼쳐 놓고 재단했다. 숙련된 솜씨가 필요한 모시나 깨끼바느질이 필요하면 사람들은 어머니를 찾았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평생 가난했다. 당신이 힘들게 일하신 대가를 제대로 셈하실 줄 모르셨던 것 같다. 대신 어머니의 등은 굽어갔고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야 한다.
옆에서 오래 앓던 사람이 이 땅을 떠나 천국으로 방을 옮기고 난 후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본다. 그 사람은 어둡고 힘들고 칙칙했었는데 서서히 빛을 발하며 사람꼴이 되어간다. 한 사람이 아프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같이 아프다. 한 사람이 아픈 것은 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저를 너무 많이 사용한 탓일까. 질량보존법칙이 이런 경우에도 해당 되는 것일까. 지구라는 닫힌계에서 인간이 아닌 천사들이 움직여준다면 질량보존법칙의 예외가 생길까. 아니면 ‘질병보존법칙’일까.
어머니는 자신이 가진,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를 내어주었다. 질병은 그 훈장이다. 나처럼 겨우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의 발받침을 생각하면서 생색내거거나 손등을 주무르는 일이 아니고 천사의 날개를 접은 것이다. 나무꾼에게 붙들린 선녀는 자신이 선녀인 것을 잃어버린다. 등이 가렵다. 그래도 날면 날아갈 것 같다.
2017년 9.10월 『파티마샘』
첫댓글 지상은 천사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이 아닐까?
몇 번 재독하겠습니다.
어머니를 바라보고
어머니를 느끼고
어머니를 묘사하는 글을 읽노라니
기억이 존재하지 않아
깜깜 먹지가 되고 만
나의 어머니.
나를 낳았으되 내게 영원한 부재가 된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는군요.
그저 생각뿐...정혜영 샘 글에서 풍기는 애잔함과 온기는 없는.
그리하여 난 결코 어떤 천사도 될 수는 없을거라는.
우리들의 어머니는 거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서, 하늘의 율법을 어기고 내려온 천사라서 고통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나봐요. 이미 사람 살맛을 느낀 천사라서 더욱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는 말이 실감나네요...
어.머.니
이 세글자는 눈물과도 같습니다. 부르기만해도 목울대가 뜨거워집니다........